5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1960년대 아직 10대의 어린 초등학생 김무생은 이광재 아나운서의 중계방송을 듣다가 그로부터 이광재 아나운서를 지표로 일생을 살아오면서 아나운서로 또 교육전문가로 활약했습니다. 그 김무생님이 쓴 생생한 체험기록 이광재 아나운서와 김무생님 자신의 얘기를 쓴 두번째 글입니다. 지난 첫번째 글을 보시려면 아래 영문자 주소를 클릭하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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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무생 아나운서가 쓴 생생한 기록 이광재 아나운서
이어지는 이야기는 故이광재님이 방송에 입문하기 바로 전과 방송 입문 후의 방송 생활, 또 VOA 즉 "미국의 소리 방송"을 위해 미국으로 떠나는 이야기와 그 직후의 현지 생활 등을 그 분이 직접 들려 주신 생생한 이야기를 중심으로 요약 정리해 보기로 한다.
당시 이광재님 부친께서는 법학을 공부하신 분이었는데 이광재님에게 의사가 되라고 권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광재님도 의사가 되기를 원했으며 군대에 가서도 공군본부 의무실에서 근무를 했다고 한다. 그때 처음 시작된 방송 프로그램이 하나 있었는데 그게 바로 "스무고개" 프로그램 이었다고 한다. 의무실 근무 중 오후에 진료를 안 할 때 동료들이 "스무고개"를 하면서 뭘 사먹고 그랬는데 이때 이 "스무고개"의 사회를 이광재님이 보셨다고 한다. 그런데 아나운서처럼 잘 본다고 하면서 자꾸 사회를 보라고 해서 계속 보게 됐다는 얘기다.
그런 저런 일이 있은 이후 제대후 대학 2학년 때 서울 창경원에서 해방 10주년 "산업 박람회"가 열렸는데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친구가 표 살 필요없이 공짜로 구경 시켜준다고 해서 가서 보니 시끌시끌하고 야단법썩을 떠는 시골장터 그 이상으로 시골에서 굉장한 사람들이 와서 구경을 하고 있었고, 큰 스피커를 설치해 민요도 틀어주고 사람도 찾고 퍽 야단스러웠다고 한다. 또 두번째로 친구 덕에 공짜구경을 가게 됐는데 그때는 어찌된 일인지 주변이 조용하길래 왜 그런지 알아보니 기술진하고 방송진하고 의견이 안 맞아서 방송진들이 스트라이크를 일으켜 방송을 안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잃어버린 사람들을 찾으려고 사람들이 야단법석을 떨고 있더라는 것이다.
이광재님:(친구에게)야! 내가 방송 한 번 해 볼게! 친 구:야! 이 녀석아! 네가 뭘 해! 이광재님:아냐, 내가 한 번 해 볼게!(이광재님은 자꾸 우겼다) 친 구:(의아한 듯이)그래? 그럼 한 번 해 봐! 이광재님:(사람을 찾는 방송)" 사람을 찾습니다. 경상북도 칠곡군에서 올라오신 000 할아버지는 곧 산업박람회 사무실로 와 주시기 바랍니다. 친 구:야! 됐다!(친구는 매우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이광재님은 신나게 막 읽었다고 한다.)
이 상황을 지켜본 기술진들과 방송진들이 스트라이크를 풀고 방송실로 들어오더라는 것이다. 이때 이 방송은 군(軍)방송 하는 사람들이 했었는데 군(軍)방송 아나운서를 모집하면 응모하라고 이광재님에게 부탁을 했다고 한다. 이 일이 있은 후 이광재님이 라디오를 켜니까 KBS에서 아나운서를 모집하고 있었다. 그땐 합격하면 공무원이었으며 응모조건이 <음성이 청아하고 대학 4학년 재학 또는 졸업생으로 국가 공무원 자격에 결격사유가 없어야 된다.>였다. 그런데 이광재님은 대학 2학년을 그냥 4학년이라고 일단 쓰고 서류를 접수시켰다. 서류접수 결과 3명 모집에 300명이 응모해 100:1 의 경쟁률을 보였다고 한다.
시험원고를 보니까 [워싱턴에서 AP-아이젠하워 대통령은~~~~]이렇게 죽 나가는데 옆 응모자들을 보니까 다 잘 하더란다. 거기에는 지방방송 아나운서들이 서울 중앙방송 아나운서가 되려고 많이들 몰려와 시험을 보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광재님은 기가 죽었고, 더군다나 이광재님이 방송한 경험은 "사람 찾는 방송" 밖에 한 것이 없어서 시험은 봤지만 그냥 포기하고 갔는데, 이광재님이 1등으로 합격을 했다고 한다.(그분은 아쉽게도 안 계시지만 난 이글을 쓰면서 우렁찬 박수를 보낸다.) 역시 이광재님도 부친께서 의사를 원하셨지만 결국은 부친께서 원하셨던 일은 안하고 방송을 택하셨는데, 나도 내 부친께서는 육사를 가서 직업 군인인 장교가 되는 걸 원하셨지만 그 원하셨던 일은 안 하고 다른 대학을 가서 방송을 택한 것을 보면서, 이광재님을 닮아가려고 노력하다 보니까 결국은 이런 점까지도 비슷한 모습이 된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하며 이 글을 쓰는 이 순간 혼자 씽긋 웃고 있다.
이광재님은 1등 합격 후 서무과에서 구비서류를 준비하라는 소리를 듣고 서무과로 찾아가 "저는 현재 실제로는 대학 2학년생입니다." 했더니 서무과에서 공무원 규정상 서무과에서 마음대로 할 수 없다며 퍽 안타까워했지만 이게 "걸림돌" 이 돼 그냥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위에서 말한대로 응모조건이 대학 4학년 재학이거나 졸업자이어야 했기에) 그 일이 있은 후 2달쯤 지나서 학교에서 집에 오니까 어머니께서 KBS에서 자꾸 전화가 오니 전화를 해보라고 해서 전화를 했다고 한다. 그 전화 내용은 <"이광재씨는 비록 대학 2학년생이지마는 성적이 우수해서 "촉탁" 아나운서로 임명할테니 바로 아나운서 일을 하되, 졸업해서 졸업장을 가져오면 그땐 정식 아나운서로 다시 임명하겠고, 그동안 일하는 것은 정식 아나운서와 똑같이 인정해 주겠다.">는 통보였다. 그래서 이광재님은 이런 우여곡절 끝에 대학 2학년생인 56년 대망의 KBS의 아나운서로서 마이크를 잡게 된 것이다.
이점도 우연의 일치처럼 나와 공통점이 또 발견된다. 난 언론통폐합 등 여러 사회 기류와 또 내 개인의 사정 등으로 인해 아나운서로서의 시험 기회를 잃고 울면서 세월을 보내고 있던 차 가뭄의 단비보다도 무척이나, 아니 천지개벽이 일어나는 반가운 94년 한 방송사 아나운서 공채 시험에서 다른 조건은 다 구비가 됐지마는 단 한 가지 나이가(소위 나이제한) 이게 "걸림돌"이 됐었다. 그래 사정사정해서 시험을 봤고 부족한 나는 故이광재님처럼 신의 도움으로 (그렇지만 난 이광재님과는 다르게 운 좋게) 1등으로 합격해 늦깍이 아나운서로 방송에 데뷔했었다. 여하튼 이것은 이광재님을 지켜주시는 하나님이 이광재님을 통해서 날 도운 거라고 지금도 확신하고 있다.
(故이광재님은 나를 위해 수 없이 기도를 많이 해 주셨기 때문이다.>이글을 읽고 계시는 여러분!! 이처럼 인연은 무서우리만치 끈질긴 것이며 우리의 삶을 통해서 만들어 지는 그 좋은 인연은 목숨을 걸고 엮어가라고 감히 부탁드리고 싶다. 난 앞에서 밝혔듯이 초등학교 5학년부터 우리 "KBS" 라는 콜사인을 외치고 다녔다. 지금도 내가 제일 좋아하는 한 마디는 멋있게 말하는 "KBS" 이다. 그 KBS의 故이광재님과 쇠줄같은 인연이 맺어졌었으며, 그분을 생각하며 이 글을 쓰는 2013년 1월은 어느때보다도 아주 행복한 계절이 되고 있다. 또 내가 95년 방송에 늦깎이로 데뷔했을 때 시청자 여러분께 "이 김무생이가방송을 시작 했으니 귀엽게 봐 주시라"고 <이것이 인생이다>를 통해 세상에 알려준 것도 KBS이다. KBS를 사랑한 한 사람으로서 고맙다는 인사를 드린다. 또, 여기서 하나 덧붙여서 이 글을 연재할 수 있도록 정성을 다 해 도와주시고 계시는 이장춘 대선배님께도 고맙다는 말씀을 꼭 드리고 싶다. 또 다른 좋은 인연을 꿈꾸면서 말이다.!---
故이광재님이 아나운서 생활을 시작했을 즈음에는 아나운서들의 선후배는 군대 이상으로 엄격했다고 한다. "담배 사와!" 하면 후다닥 사다 대령해야 했고 "물 떠와!" 하면 즉각 받쳐야 했다고 한다. 초년병 시절 계속 이런 식으로 선배들을 대하면서 시간 나는대로 뉴스 낭독 등을 막 하다가 잠시 쉴라치면 "왜 안 읽어! 또 읽어!"하고 재촉이 떨어지는 바람에 정신없이 아나운서 초년병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그러면서 언제쯤 방송 시키나 하고 눈치를 살살 보며 기다리고 있었는데 넉달 후에 기회가 왔다고 한다. 큰 기대를 하고 목청을 가다듬으며 긴장하고 대기하고 있었는데 사람들이 잘 안 듣는 새벽이나 밤 늦게 마이크 앞에 앉아서 "KBS" 딱 이 한마디 하고 말았다고 한다. 넉달 동안 기다렸다가 한다는 방송이 "KBS" 딱 한 마디였다는 것이다.
난 이 소리를 듣고 배꼽을 잡고 웃을 수 밖에 없었다. 지금의 방송환경과 비교해 어떤 <운영의 묘>라 할까 하는 것의 격차를 느끼면서 어찌 먼 나라 얘기로만 들릴 뿐이다. 그 다음 또 얼마가 지나서는 방송량이 좀 길어졌는데 이것 역시 사람들이 잘 안 듣는 시간에 "KBS, 여기는 서울 중앙 방송국입니다. HLKA" 이 정도였다고 한다. 그 다음 시간이 흘러 좀 길어진 방송은 역시 사람들이 잘 안 듣는 시간에 "서울 지방 날씨 남서풍이 불고 갰다 흐렸다 하겠습니다." 이런 정도의 이런식의 방송을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1년 반 후 2년이 다 돼서야 밤 11시 뉴스나 새벽 5시 뉴스를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지금 계속 이어지는 얘기는 故이광재님이 직접 들려 주신 생생한 자료를 중심으로 요약 정리 되고 있습니다.>♣
당시에 스포츠 중계 방송은 중견 아나운서가 돼야만 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래 故이광재님은 소위 졸병 아나운서 축에 들어서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는데 어느날 아나운서실장께서 불렀다고 한다.아나실장님: 이광재씨는 음색이 금속성이고 음폭이 크고 박력이 있으니스포츠 중계를 해 볼 용의가 없는가?이 광 재 님:(신이 나서) 하겠습니다.
[여기서 이광재님이 밝힌 중요한 우리 한국의 당시의 스포츠 중계 방송의 한 역사 자료라할까 하는 것은 -<축구,농구,야구,권투> 이렇게 네 종목만중계방송을 할 수가 있었다고 한다.(그 이유는 용어 개발이 안 돼서) 그런데 이걸 우리 故이광재님이 16가지를 직접 개발해서 스포츠 역사상 기네스북에 오를 정도의 특별난 경우로 스포츠종목 16가지를 중계한 아나운서는 故이광재님이었다고 한다.(물론 지금은 전문화가 돼서 한 사람이 여러 종목을 중계 안 하지만--)]
이 광 재 님:(실장에게)그럼, 뭘 할까요? 아나실장님:(가만히 생각하더니)권투 중계 하는 게 어떤가? 이 광 재 님:예, 알겠습니다.(그 땐 임택근님 혼자서 권투 중계를 하고 있었다.)그래서 이광재님은 신이 나서 당시에 <한국체육관>이라는데 가서 링 옆에 앉아 "라이트,레프트 훅, 아니다! 저건 스윙이다!이게 훅이지!----" 이런 식으로 동작과 용어 공부를 열심히 했다고 한다.
아나실장님:(이광재님을 불러서)요새 공부하고 있는가? 이 광 재 님:예! 매일 하고 있습 니다.아나실장님:이번 일요일날 권투 중계를 잡아 놨으니 준비 하게!<그런데 금요일날 실장께서 또 불렀다>아나실장님: 이번 일요일날 권투 중계는 임택근님이 사정이 생겨 못 나가니 이광재님이 혼자 할려면 중계방송 그대로 하고 못하겠다면 취소하겠다.!이 광 재 님:그대로 혼자 하겠습니다. (원래 선배가 옆에 있어야 됨)
그래서 이광재님은 혼자서 "라이트 스트레이트! 레프트 강타!" 이렇게 1시간 반 동안 혼자서 신나게 하고 돌아왔다. 끝나고 방송국에 들어서니까 각 층에서 사람들이 밖을 자주 내다 보길래"어떤 배우가 왔나보다!" 하고 주변을 봐도 아무도 안 보였다고 한다. 그런데 수위가 급히 오더니 "방송국장님이 부르십니다. 빨리 가보세요!" 하길래 영문도 모르고 가 보았더니 국장님과 과장급 이상 간부들이 죽 앉아 있더라는 것이다.그러더니 모두들 이광재님 등을 두드리면서 "수고했네! 앞으로 스포츠 중계를 전적으로 완전히 맡 아서 하게!!"이때부터 당시의 최고 스포츠 스타 중계 아나운서의 여명이 서서히 밝아오기 시작했던 것이다.
여기서 잠깐 우리는 故이광재님이 스포츠 종목 16가지를 개발해서 방송한 창조성, 앞서 얘기한 춘천에서 오후 4시에 농구중계를 끝내고바로 그날 저녁 7시에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레슬링 중계를 하기 위해-- 당시로선 도저히 불가능한 상황을-- 군(軍) 부대의 도움으로 군(軍)헬기를 타고와무사히 방송을 끝낸-- 일에 대한 열정과 적극성과 부지런함, 이런 것들은 우리들이 본받아야 할 훌륭한 점이 아닌가 감히 생각해 본다.
★지금 여러분께서는 <이광재 아나운서, 김무생 아나운서의 생생한 체험 기록> <첫 번째 글>에 이어 계속되는 <두 번째>글 중에서 최고의 간판 스타 아나운서 이광재님이 왜 VOA(미국의 소리 방송>을 떠나게 됐는지 그 이유와 그 이후의 삶에 대해서 보실 차례입니다. <참고로 항간에 이광재님이 VOA(미국의 소리 방송)을 하기 위해 미국으로 떠난 이유에 대해 다른 어떤 추측과 판단에 따른 얘기도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기록되는 얘기는 故이광재님이 생전에 직접 진솔하고 허심탄회하게 들려주신 생생한 자료에 의해 기록되고 있음을 밝힙니다.>
(70년 어느 날) *<최고의 간판 스타 아나운서 이광재님 VOA(미국의 소리 방송) 방송을 위해 태평양을 건너다!>*
이광재님:(바로 직전 야간 근무 아나운서들을 불러 놓고) 문공부 장관께서 장관실로 나를 부르는데 야간 근무 중 혹시 실수한 것 없는가? 야간근무 아나운서들:없습니다. (이광재님 문공부 장관실로 들어 섰다.) 문공부장관:(인상을 쓰면서)이광재씨! VOA(미국의 소리 방송 )간다고 운동하고 다녔소? 이광재님:(무슨 일인지 몰라서)그런 일 없습니다. 문공부장관:정말이오? 이광재님:정말입니다. 문공부장관:방송관리국장 들어오라고 해요!
문공부장관:(방송 관리 국장에게) 이광재님이 VOA(미국의 소리 방송) 간다는 말 안 했는데 어떻게 되는건지 남의 나라 공무원을 미국이 어떻게 이래라 저래라 인사이동까지 할 권리가 없다고 당장 항의 제출해!! (이때 VOA 방송에 대해 이광재님은)
그때 VOA하고 KBS하고 계약이 돼 있었는데 2년동안 KBS 아나운서 한 사람이 워싱턴 DC에 있는 VOA를 통해 소련 북한 중공을 향해서 한국말로 방송을 할 때였다. 그런데 거기 갔다온 아나운서들 얘기 들어 보니까 월급도 신통치 않고, 재미도 없고 그냥 그렇게 갔다 오더란다. 그런데 내가(이광재님) 간다고 하더라도 KBS간판 스타이기 때문에 보내지도 않고 또 거기를 2년 동안 갔다 오며는 공백기간도 생기기 때문에 가기도 싫었고 그런데 어떻게 그런 말이 나왔는지 모르겠다고 밝혔다.
그런데 20일 후쯤 다시 장관이 이광재님을 장관실로 오라고 해 갔더니 문공부장관님:이번에는 가야 되겠소! 이광재님:가기 싫습니다. 문공부장관님:아니 이번에는 가야 되겠소!
문공부장관님:"저쪽(미국)에서 주문이 오기를 KBS 아나운서실장 이광재님을 안 보낼 때는 KBS와의 계약을 취소하고 민간 방송 아나운서실장을 데리고 가겠다."는 회답이 왔어요.! 그 당시엔 우리가 많은 원조를 받을 때였다. 구식 기계라든가 우리는 여기서 조금만 건드리면 쓸 수 있는 많은 기계들을 가져 올 때였다. 그러니 할 수 없이 가야 된다고 해서 타의에 의해 VOA(미국의 소리 방송) 아나운서로 가게 됐다는 것이다.
그래서 가서 2년 반 근무를 했는데 어느날 KBS 서무과장의 전화가 왔다. 서무과장님: 아! 언제 돌아 오십니까? 이광재님: 20일 더 근무하면 돌아갑니다. 왜 전화 거셨습니까? 서무과장님: 아나실장님 방에 페인트도 칠하고 책상도 새 걸로 사 놓으려고 그럽니다. 이광재님: 감사합니다.
이런 일이 있은 후 이틀후에 뉴옥의 총영사가 비행기표까지 보내면서 워싱턴에서 뉴옥으로 빨리 올라 오라는 것이었다.
총영사:며칠 남았습니까? 이광재님: 2주일 밖에 안 남았습니다. 총영사: 여기에 그대로 남으셔야 됩니다. 이광재님: (깜짝놀라며) 내가 안 가면 박정희 대통령께서도 야단하시지마는 문공부나 우리 방송국에서도 용서 안 할테니 꼭 가야 됩니다. 총영사: 다 얘기가 돼 있으니까 여기에 있어야 됩니다. 이광재님: 아! 내가 왜 여기에 있어야 됩니까?
총영사: 뉴옥에 북한 대표부가 왔는데 그들이 일본의 조총련 양성하듯이 여기 교포를 상대로 적색분자들을 많이 만들 것입니다. 언제 유인물로 선전할 수 없어 방송을 해야되기 때문에 남아야 되겠습니다. 그래서 또 타의에 의해 제2의 미국 방송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그때 뉴옥, 필라델피아, 워싱턴 DC 세 군데에 방송국을 처음 만들어 애국가, 민요, 연속 방송극 등을 틀어 주니 인기가 참 좋았고 교포 사회가 좋아했다고 한다. 이때 가발 사업을 하는 교포들이 100$, 200$, 300$ 턱 턱 내놓으면서 도와줘서 경제적으로 별 어려움 없이 방송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VOA 미국의 소리와 KBS와의 계약에 따라 1959년부터 장기범 아나운서가 파견된 이래 1972년 말 KBS에서 미국의 소리 중계방송을 중단 할때까지 이광재 아나운서를 마지막으로 그간의 강익수, 강찬선, 송한규, 김영호아나운서를 포함, 모두 6분의 아나운서가 파견되었고 송한규, 김영호, 이광재 아나운서는 KBS에 돌아오지 않은채 미국에 머물렀습니다.
난 이광재님이 VOA방송을 위해 태평양을 건너는 생이별을 감행할 때인 70년은 중 3으로서 교내 체육대회 스포츠 중계 소년 아나운서로서 활약을 할 때 였다. 틈나는대로 가지고 다니는 신문으로 뉴스를 낭독도 하면서--. (구체적인 체험 얘기는 <첫번째 글>을 참조 바람)
다음해인 고1 때부터는 <첫번째 글>에서 밝힌대로 더 폭넓은 체험인 각 시군대항 체육대회 현장 소년 스포츠 중계 아나운서로서 맹활약을 했다 (역시 <첫번째 글>을 참조 바람)
난 초지일관 내 뇌리와 가슴 속에 이광재님이라는 소위 자기최면을 걸면서 활동했다. 여기서 <첫번째 글>에서 빠진 내 기억속에 지워지지 않는 체험, 태평양을 건너 가 계신 이광재님을 생각하며 했던 체험 3가지만 요약 소개하고 초중고시절의 청소년 방송 체험 얘기는 이것으로 마무리 한 다음 이어지는 얘기를 하려한다.
*(하나):고1 때(71년):음악콩쿠르 MC:MC 중에 난 콩쿠르를 개최한 선생님을 향해 (이광재님 톤과 억양으로: "백만인의 퀴즈" 사회처럼)"자!, 선생님을 모셔서 콩쿠르를 개최한 그 취지에 대해 알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박수로 선생님을 모시겠습니다. 여러분 힘찬 박수 부탁해요!" 했더니 학생들의 야! 하는 소리와 함께 웃음이 터지면서 엄지 손가락을 들어 보여 줬다. 히죽히죽 웃으시며 무대에 나타나신 선생님은 "야! 너 김무생이냐? 서울 중앙방송 아나운서냐?" 하시며 히죽 웃으시더니 취지에 대해 조목조목 말씀해 주셨다.
또 좀 떨어진 곳에서 보고 계셨던 교감 선생님--"야! 너는 보따리 싸가지고 이광재님 같은 분 쫒아 다니면서 -그것이나 해라! 하고 격려를 해 주셨다.
*(둘)고2 때(72년):시,군,읍, 면 대항 노래자랑 MC:본 대회가 시작 되기 전 난 트럭을 타고 지역을 돌며 이른바 "가두 선전반"역할도 했다.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시는 시군민 여러분 오늘 저녁 00시(時)에 00초등학교 특별무대에서 노래 자랑이 열리게 됩니다. 집 지키는 강아지만 남겨 놓고 모두 참가해 더운 여름밤을 얼음장 스케이트장으로 만들어 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본 무대 노래자랑 때 난 소위 지금 말하는 코디를 내 스스로 하고 출연했다.
제법 멋있는 MC 담당 복장을 하기 위해 흰색 바지에 연녹색 티셔츠 왼쪽 주머니 위에 빨간 장미꽃을 달았다.당시 내 느낌은 백만인의 퀴즈 이광재님처럼 느껴졌다.(자기최면 때문에) 이때 난 좀 야한 질문을 한 게 두고두고 기억에 남아 있다. <그땐 더운 날 밤(여름 방학 때였다.)땀을 흘리며 덥다고 하던 여자 (아가씨) 출연자에게> -->"아이고 아가씨! 땀을 너무 많이 흘려 속살이 그냥 다 보이네요.! 해 버렸다. 그랬더니 그 아가씨는 수줍어서 몸을 비틀며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는데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짖궂은 관중들 중에 누군가가 "어이! MC 양반 그러지 말고 그 아가씨하고 여기서 그냥 결혼해 버려요.!" 하는 바람에 그 여자 (아가씨) 출연자가 무대 아래로 뛰쳐 나가는 사태가 발생해 버렸다.
난 순간 오기 같은 것과 더불어서 재미있게 해야겠다는 순발력으로 "그럼 제가 결혼하라면 못 할 줄 알아요!" 하면서 그 아가씨를 막 쫒아가니 그 아가씨는 손살같이 도망치고 사라져 버렸다. 그래 난 무대로 올라 오면서 "아이구 결혼하기가 이렇게 힘든 줄 이제야 터득했습니다."하니까 관중들이 "우하하하하!!! 하며 폭소를 터트린 그 초등하교 교정의 여울소리가 지금도 들린다. 이런 배짱은 <첫번 째 글>에서 밝혔던 다른 체험 얘기처럼 <이광재님처럼 한다는 '자기최면'의 효과였다.>
*(셋)고3 봄:프로 레슬링 중계:봄날 일요일날 전국을 순회하며 레슬링 경기를 하는 "전국 순회 레슬링 선수단이" 초등학교 교정에 특설링을 설치했다. 이 정보를 알고 있는 내가 놓칠 리가 없다. 그날 바로 현장에 출동해 마이크를 들고 관중에게 안내 방송하는 사람에게 "저는 고등학교 학생 김무생입니다." 레슬링 중계를 해 보겠 습니다.했더니 선수단장에게 갔다오더니 허락이 떨어져 신나게 레슬링 중계를 했다.
(이광재님의 톤과 억양으로)
[당수로 가격 두 번째 세 번째 가격! 꺼덕 없는 000! 코너로 몰린 000! 다시 로프 반동으로 튀어 나오는 000! 넘어지는 000선숩니다. 넘어져 있는 000! 원 투 빠져 나오는 000! ~~~~] (그런데 관중들은 왜 나를 더 많이 보고 있는 건가? --선수들을 봐야지!!내가 동물원 원숭이도 아닐텐데, 지금도 나를 뚫어지라 바라봤던 관중들의 얼굴이 아주 선명하다.)
이광재님은 미국에서 VOA(미국의 소리 방송)을 하시는 동안 난 한국에서 이렇게 중계와 MC, 뉴스를 통해서 그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안간심을 쓰면서 교교 시절이 잉태돼 가고 있었다. 어떤 날을 미국쪽을 향해 이광재님 들으시라고 우렁찬 소리로 외치면서!!
★지금 여러분께서는 *<이광재 아나운서 김무생 아나운서의 생생한 체험 기록>* <첫 번째 글>에 이어 계속되고 있는 <두 번째 글> 중에서 故이광재님이 미국 생활 중 이른바 믿음 생활 <예수님을 영접하게 된 계기>가 된 사건을 중심으로 한 그 당시의 삶의 모습을 역시 생존 당시 직접 들려주신 생생한 이야기를 중심으로 요약 정리한 것을 보시겠습니다.
그런데 가발(假髮 : wig)사업을 하던 사람들이 전부 사업이 안 되자 이광재님의 방송 운영도 어렵게 됐다고 한다. KBS에는 이미 사표가 제출됐었고 연금도 다 받고 그래서 어떻게 할 수 없어 청와대로 가서 "이만저만 해서 어려운 지경에 있는데 도와 주십쇼!" 했더니 "뭘 하겠냐?" 고 하길래 "TV 하고 라디오 방송 계속 했으면 좋겠습니다." 하니까 "그렇게 하시오!" 했다고 한다.
그래서 1년 동안 워싱톤 DC에서 TV와 라디오 방송을 했는데 그때 박동선 사건 (76년 코리아게이트:Koreagate)이 터졌다. -->우리 한국통 국회의원들을 데리고 조정하는 역할을 하는건데, "한국에서 미군철수를 해야겠다" "한국의 경제원조를 삭감해야겠다" 이런 안건만 올라오면 -->우리 한국통 미국 국회의원들이 들고 일어나서 "지금 호시탐탐 남침을 꾀하는 북한 군사력이 얼마나 강한데 지금 어디다 대고 그런 말을 하느냐!" -->이런 걸 뒤에서 조정하는 사람이 사업가였던 박동선 씨였다. 그래서 박동선씨의 비행 같은 것을 미국 신문들이 대서특필 했는데 워싱턴 DC에 반정부 하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이 사람들이 갑자기 막 투서를 하는데 이광재님의 투서도 들어가서 미국 국회 청문회에 나가게 됐다는 것이다.
청문회에서 이름, 생년월일, 부모님 이름, 등을 죽 묻다가 43번째 가서-- 청문회 국회의원:당신이 지금 여기서 방송을 하는데 우리가 세무조사를 했더니 돈 버는 것은 하나도 없어!! 그런데 미국 방송국의 그 비싼 전파료는 계속 꼬박꼬박 냈어!! 당신 그 돈 어디서 생긴 거요? 이광재님: 우리 집이 좀 유복해서 아버지 유산도 있고 또 내가 내 재산을 팔아서 했소.!
청문회국회의원:그런데 당신은 돈 벌이가 안 되는데 왜 돈을 자꾸 투자하는 거요? 이광재님:난 평생 방송 밖에 한 게 없기 때문에 지금은 투자해도 나중에는 다시 그걸 회복할 수 있소!그래 계속하는 거요! 청문회 국회의원:조사해서 두 번째 다시 부르겠소! 그래서 이제 뭐라고 변명해야 할지 몰라서 식음을 전폐하고 있다가 일단 기운을 차려야겠다는 생각으로 어느날 식당에서 혼자 밥을 먹는데 어떤 사람이 "이 선생님!" 하고 옆에 앉더란다. 봤더니 목사님이었다고 한다.
목사님:교회 나가십니까? 이광재님:아직 안 나갑니다. 목사님:그거 다 세상의 인기라는 것은 아침에 잠깐 있었다가 안개가 없어지는 것과 같은 것이오! 그러니 천국 방송을 하시오.! 이광재님:어떻게 하면 됩니까? 목사님:성경책 사 가지고 교회에 나오시오.! 그래서 이광재님은 교회를 세 번을 나갔는데 은혜 받고 찬송가를 부르면서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얼마 후 2차 청문회에 나오라고 해서 목사님과 상담을 했다고 한다. 목사님은 기도를 열심히 해 주시고 '이사야 43장' 을 펴 보라고 하더란다.
이 구절을 이광재님은 방송하실 때처럼 금속성의 박력있는 음성으로 줄줄 암송해 주셨다.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이렇게 아주 평화로운 표정으로 소개해 주셨다. 목사님이 이걸 자꾸 읽으라고 해서 자꾸 읽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청문회 나갈 때 성경책 끼고 가라고 해서 그대로 순종했다고 한다.
그런데 청문회에서 조사관이 "이광재님이 1차 심문 때 얘기한 게 그대로 드러났다!"면서 "문제가 없으니 돌아가라!"고 했다고 한다. 이렇게 그 당시 상황을 설명해 주시면서 다시 평화롭고 기쁜 표정으로 "예수님을 영접했더니 주님이 조사관의 눈을 가려 주시고 입을 막아 주시고 귀를 막아 주셨다.!" 고 간증해 주셨다. 이렇게해서 로스엔젤레스 기독교 방송국장과, 선교사 활동, 2000년 목사 안수와 함께 목회활동의 그 불씨가 서서히 타 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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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제가 중계방송 한 승마 중계방송 동영상자료 (2분51초) 일부분을 올렸습니다. 스포츠 중계방송은 이것저것 해봤습니다만 이 승마중계방송은 처음 해보았습니다. <제 7회 농림 수산 식품부장관 배 전국 승마 대회>인 이 경기는 작년(2012) 9월 12일 3시간 동안 전국에 생중계 됐고 그 이후 네 차례 정도 전국에 재방송된 프로그램입니다. "경상북도 상주 국제 승마장" 에서 열린 이 경기는 우리나라 최고의 정상급 베테랑 선수들이 출전하고 장애물 높이가 가장 높은 "장애물 비월 경기 S-2 CLASS 경기"입니다. 영국 올림픽 스타디움을 그대로 본뜬 상주 승마장은 우리나라 최고의 승마장이기도 합니다.
지금 여러분께서는 <이광재 아나운서 김무생 아나운서의 생생한 체험 기록><첫 번째 글>에 이어 <두 번째 글>의 마지막 부분을 보고 계십니다. 아직<첫 번째 글>을 읽지 않으신 분들은 이왕에 보시는 거 꼭 <첫 번째 글>도 읽어 주시길 부탁합니다. 그래야 생생한 “체험 이야기”의 내용이 연결됩니다. 아래 영문자를 클릭하시면 첫 번째글을 보실 수 있습니다.
http://blog.daum.net/jc21th/17781589
이광재님은 로스엔젤레스 기독교 방송국장으로 계시면서 선교 방송과 선교활동을 활발히 하셨다. 소속된 교회의 목사님과 함께 해충이 덤벼들고 기후와 위생상태가 엉망인 미개척지 같은 곳도 마다하지 않으시고 선교에 동참하셨다. 특히 소련 (지금의 러시아)의 감동적인 선교는 난 보내주신 자료를 보면서 계속 울었다. (구체적인 선교 활동 내용은 여기서는 중략함- 혹 <세 번째 글 >을 쓸 기회가 오면 쓰기로 함) 그리고 한국의 한 전방 사단과 자매결연을 맺어 많게는 1년에 한 번 또는 2-3년에 한 번 정도는 고국을 다녀 가셨다.
그중에서 97년 이광재님과의 만남의 얘기를 약술하기로 한다. 당시에 여동생이 살고 있다던 수서역 근처에서 이광재님과 만남을 가졌다. 된장찌개를 시켜 먹기 직전 기도를 해 주시는데 무려 6분 가까이가 흘러갔다. 우리의 상식적인 식사 전 기도는 짧은 사람은 몇 초 내지 1분을 거의 안 넘긴다. 난 무의식적으로 기도 시작 전에 시계를 봤고 기도가 끝나기에 또 시계를 보게 됐다. 6분이 다 지나고 있었다.
<우리 김무생 아나운서 방송 잘하고 훌륭한 아나운서가 될 수 있도록 하나님 눈동자처럼 24시간 365일 함께 해 주십시오!> 이렇게 지극정성으로 기도를 해 주셨다. 난 그때의 그 기도 소리가 아직도 내 귓전을 떠나지 않는다. 소위 말하는 금속성의 카랑카랑하면서도 박력 있는 그 목소리가 그대로 여울지고 있다.
고국을 떠나서도 물론 된장찌개를 드셨겠지마는 “고국에서 후배와 같이 먹는 된장찌개가 퍽 맛있다!”고 하시면서 마지막 국물까지 쭈우욱 다 드셨던 모습이 내 앞을 스치면서 내 눈가에 물기가 이 글을 쓰는 순간 맺혀온다. 지금은 안 계시기에----이광재님은 특히 나에게 강조하신 말씀이 --
“부지런함”(근면성)을 강조하셨다.
자신은 게으르게 방송하는 사람을 보면 퍽 안타까웠다고 말씀하셨다. 지난 이야기지만 어떤 아나운서는 방송 능력은 참 좋은데 게을러서 방송 진행상에 문제가 꽤 많이 발생했다면서 부단한 노력과 집념과 열정으로 방송을 부지런히 해야 하는 것이라고 힘주어 강조하셨다. 이건 방송뿐만 아니라 자기가 지금 수행 중인 어떤 일이라도 그래야 된다고 생각한다. 내가 방송 시작을 프리랜서로 시작을 했고 데뷔 초창기에내가 하고 싶었던 스포츠 중계는 기회가 안 와 못하고스포츠 중계를 제외한 뉴스, MC, 기타 방송을 하고 있을 때 이광재님이 이를 아시고 특별히 매일 새벽 5시 30분에 스포츠 중계 할 수 있도록 기도 하신다는 편지가 날아 왔다. 하루 이틀이 아니고 매일 그러신다는 것이다.
나는 이 편지를 읽고 감사해서 두 눈에 이슬이 맺혀 버린 기억이 있다. 그 정성을 다하는 기도가 있은 후 난 응답으로 스포츠 중계를 시작하게 됐지마는-----. 또한 이광재님은 2002년 6월 14일 32년만에 우리나이로 71세에 고국에 돌아와 월드컵 16강 진출을 향한 한국과 포르투갈과의 예선 마지막 경기를 중계방송 하셨다. 난 사정으로 그 중계방송은 듣지 못했다. 아마도 금속성의 구성지고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18번 멘트 중의 하나인 (전국에 계신 청취자 여러분! 으로 시작해서~~~~~~ 젖 먹던 힘까지 발휘해 승리를 조국에 바칠 것을 부탁한다!“) 고 하셨을 것이다.
이때가 6월인데 공교롭게도 난 같은 해 (2002년)6월 달이 라디오 방송(MC)를 시작한 달이다. 이광재님은 (2002년 6월)32년 만에 오셔서 라디오 월드컵 중계를 하셨고 난 난생 처음 당시에 월드컵 내용이 주 방송 멘트가 됐던 라디오 생방송 MC를(같은 해 같은 달: 2002년 6월) 시작한 것이다. 이것도 우연의 일치일까?
마지막 크리스마스 카드
이광재님은 20년 가까이 해마다 내가 살고 있는 부천으로 진실한 사연과 함께 한 번도 빠지지 않고 크리스마스카드를 보내 주셨다. 그러니까 재작년 (2011년 11월 17일 미국 로스엔젤레스 우체국 소인 찍힌 날)이 마지막 카드가 돼 버렸다 .(작년 2012년 8월 30일 천국으로 떠나셨기에) 그래 난 작년(2012년) 크리스마스 때부터 이광재님의 사연과 함께 정성이 가득 담긴 그 카드를 받아 볼 수가 없다. 그러나 난 이제 안타까워하지 않고 대신에 그 분이 계신 그 곳에 해마다 카드를 보내드리고 또 받을 것이다. 그 분이 보내주신 정성어린 사연을 펼쳐 보고 가르침을 들으면서--- 그분은 또 날 지극히 아껴 주셨기에 자신이 60년대
직접 방송했던 방송자료와 기타 자료들을 방송에 참고하라고 유독 나에게 내가 사는 부천으로 꼬박꼬박 보내주셨다. 난 이게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난 또 그 분이 2009년 사연과 함께 크리스마스에 동봉해서 보내 주신 가장 최근의 사진 한 장을 간직하며 그 분의 가르침을 듣고 있다. (한국 정부에서 수여한 근정훈장을 가슴에 단 모습)- 내가 간직하고 있는 이 모습이 아마 사진으로선그 분이 천국으로 떠나시기 전 가장 최근의 모습일 것이다.
난 이 순간 아니 영원히!
"새 천년(2000년)에 목사님이 되셔서 하늘나라에 가실때까지 미국 로스엔젤레스에서 목사님으로 목회활동을 하셨던" 대선배님이신 이광재님께 혹 못 다 하신 방송과 설교가 있다면 이 못난 김무생이가 끝까지 기도할테니 부디 천국에서 영원히 방송과 설교를 해 주실 것을 부탁드리고 있다.
♣<김무생 아나운서 이광재 아나운서의 생생한 체험 기록><첫 번째 글>과 <두 번째 글>을 마치면서!!!---먼저 하나님께 감사 드리면서부족한 이 글을 읽어 주시는 여러분께 대단히 고맙다는 말씀을 올립니다. 그리고 이 글을 연재할 수 있도록 정성으로 도와주신 방우회 이사이시기도하시고 대선배님이시기도 하신 이장춘님께 고맙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이어서 언제나 저를 신뢰해 주시면서 아껴주시는 아나운서 대선배님이신 김동건님, 박용호님, 故 최규락님, 아나운서 교육 때 열정어린 격려 주신 김상준 선배님과 여러 선배님들, 그리고 최춘식님, 임병용님 등과 여러 선배님들
(아주 많은데 일일이 여기에 쓰지 못해 죄송합니다.)
또 동료 후배 여러분! 제작간부이신 홍순영님, 최규옥 회장님, 제작 간부 이신김상근님, 강성철님, 함형진님, 박정옥님 등(마찬가지로 일일이 여기에 쓰지 못해 죄송합니다.) 여러분 고맙습니다.
또, 한 가지는 방송이 있는 날은 내 교육현장의 일을 잡아 놓지 않지마는 (95년부터 방송과 교육전문가 일을 겸직함) 사정상 그렇지 못한 날 방송 녹화 중에 제작진 여러분이 사정으로 녹화가 지연될 때는 (제 교육현장의 강의 시간을 걱정해 주시면서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나머지는 내일 합시다.” 빨리 교육현장으로 가십시오!)
이렇게까지 베풀어 주신 그 뜨거운 배려 정말 감동으로 고마웠습 니다. 여러 제작진 여러분께도 고맙다는 인사를 다시 드리고 싶습니다.
당시에 우리의 최고의 간판스타 아나운서이셨던 이광재님을 통해서 저는 일의 대한 집념과 열정을 배웠습니다.이 소중한 재산을 고이 간직하며 실천하며 살겠습니다.
생생한 방송 체험 얘기 또는 이에 따른 삶의 얘기는 앞으로 긴 얘기가 아니더라도 기회가 생기면 언제든지 여러분을 찾아 뵐 생각입니다. 여러분 언제나 건강하시고 늘 행운이 함께하시길 김무생이가 365일 기도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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