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5월 21일부터 6월 2일까지 (2013년) 서울 예술의 전당 창립 25주년 기념으로 희곡 혈백 (血脈)이 예술의 전당 자유극장 무대에 오른다. 해방된 조국에서 그때의 사회상을 희곡으로 엮어낸 혈맥은 1948년 6월 문교부(군정청)에서 주최한 전국 연극 경연대회 에서 작품상과 연출 상을 수상한 작품이고 그 이래 여러차례 무대공연이 있었으며 영화로도 제작되어 상영되었다. 첫 공연으로부터 65년이 되는 올해 예술의 전당 25주년 무대에 올려 진다.
박진(朴珍)님, 방송극과 연극계 전설적 인물 박승진(朴勝進)
길고 긴 생명력을 가지고 국민들의 마음속에 들어있는 이 작품의 상을 받은 주인공은 일생 동안 방송드라마와 연극대본을 쓰고 연출한 김영수님, 박진님이다. 김영수님은 작품상을 박진님이 연출 상을 수상한 것이다. 이 두 분은 일제강점기부터 70년대 초, 중반까지 이 나라 방송드라마와 연극계, 영화계에 큰 발자취를 남기신 분이다. 김영수 선생님에 대해서는 여러 차례 글을 썼으므로 박진선생님의 얘기를 해 보기로 한다.
박진님은 1905년 서울에서 태어나 양정고보를 졸업하고 일본 동경에 있는 니혼대학 (日本大學) 예술과에서 수학하던 중 돌아와 연극 활동을 시작했다. 그 무렵은 우리나라에서 방송국을 새우기 위해 시험방송을 하던 때이고 연극단체인 토월회가 새로 구성되던 때이다. (이하 존칭생략) 토월회는 조선말기 박정양대감의 아들 박승희가 힘을 기울인 연극 단체로 박진은 연극단체 간부가 되었지만 토월회 운영이 원만치 못 할 때여서 어려움이 있었다.
이 무렵 시험방송을 시작한 방송국은 연극을 방송극으로 시험무대에 올렸다. 연극은 바로 방송극이 된 것이고 연극을 하는 것은 방송극을 하는 것과 일맥상통했다. 연극과 방송극은 서로 주고받으면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1931년 12월에 박승희 주도로 구성된 경성방송극 협회에서 박진은 김을한, 윤성민, 이소연, 김영팔, 강대일, 강석제, 강석연등과 함께 고문으로 참여했다.
원래는 일본어 방송과 일본어 방송을 한 채널에서 했지만 1933년 4월부터 우리말 방송채널이 독립되었다. 이 무렵 방송드라마가 연극의 틀을 벗어나 고유의 영역을 개척하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연극을 하던 분들이 방송극의 주축이 되었다. 연극인 들이 연극만으로는 어려움이 있었을 때라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1933년에 촬영한 사진은 그 모습을 잘 말해주고 있다. 그때를 잘 아는 박종화, 이서구 선생님도 그런 애길 했다.
박진은 방송극과 연극의 주 구성원이 되었다. 1933년 토월회 소속이었던 연출가 박진을 비롯해서 극작가 김희창과 배우 윤성무 등이 참여해서 구성한 "라디오 프레이 미팅" 은 1933년 8월 29일 김희창 작 "노차부"를 새롭게 선보임으로서 현대 라디오 드라마의 틀을 확립했다. 이때부터 방송극이 번역극의 틀을 벗어던지고 창작극으로 발돋움하는 계기가 되었고 극작가나, 연출가 배우들의 관심이 높아졌다. 노차부가 방송된데 이어 9월 26일에는 박진 작, 지휘(연출)로 “양귀비의 죽음”이 방송되었고 12월에는 “철로상의 두 사람”이 방송되었으며 1934년에는 빅톨 유고작 레미제라블이 박진 지휘 윤성민 주연 으로 연 3회에 걸쳐 방송되었다.
1930년 중반 이후 박진은 방송국 직원이었던 이서구를 비롯해서 김건, 유치진, 조일제, 함세덕, 이백수, 이익, 김영춘. 김성진(복혜숙 남편, 의사)등과 더불어 방송극을 위해서 활약했다. 이 무렵 「라디오 드라마」를 위한 클럽들은 연출에 박진, 홍사용 (홍노작露雀), 등장배우로 진장섭, 그의 아내 백월, 안석주, 복혜숙, 박재행, 이백수, 이소연, 이정호 모두다 일류들이었다. 진지하고 정열이 있고 고답 헌신적인 까닭에 요사이 방송극 보다는 훨씬 수준이 높았다.(박종화 방송의 금석-今昔)
1935년 동양극장이 개관되면서부터는 문예부의 책임자가 되어 왕성한 작품 활동을 벌였지만 방송극과는 늘 가까이 있었다. 그러나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 전쟁이 점차 심화되고 2차 대전으로 이어지면서 방송극도 위축되고 극단도 어려움을 겪었다. 해방되어 활동은 재개 되어 김영수는 방송국 직원이 되었고 박진도 방송국 일과 인연을 맺으면서 둘은 협력 해 나갔다. 이때 방송된 박진의 작품 가운데 모란등기(牡丹燈記)라는 드라마가 있었다. 여름에 더운때가 되면 납양특집으로 이 프로그램이 방송되었다. 중국 고대 기괴소설로 등골이 오싹하다고해서 납양특집으로 인기가 있었다. (노정팔 저 방송과 50년 P.93) 박진은 해방공간에서 김영수, 이익(신 카나리아 남편, 김화랑), 김성민(성우 남해연 남편-영화-) 유호, 최요안, 이보라 등 그 시대를 대표하는 작가들이나 연출가들과 깊은 인연을 맺고 활동했다. 혈맥에서 김영수가 작품상을, 박진이 연출 상을 받은 것도 이 무렵이다.
박진은 1960년대 말까지 왕성한 활동을 했다. 1950년 한국무대예술원 부원장, 1959년 국립극단 단장, 1960년 예술원 회원, 1962년 한국연극협회 이사장 등을 지냈고, 1962년 예술원상, 1963년 문예상, 1966년 5월 문예상 등을 수상한 박진은 1974년 향년 70세로 세상을 뜨셨다.
김영수가 쓰고 연출한 “똘똘이 모험”에 박진의 어린 딸 박진서(朴珍緖)가 그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인기를 모았다. 박진서는 성우로 또 아나운서로 활동했는가 하면 일본어에도 능해서 국제방송국 일본어 방송 한국의 문화 집필이나 모니터를 하기도 했다. 1957년 문화연구실의 성우 서계영이 있던 자리에 서계영이 퇴직하면서 방송연구실 직원이 되어 주부, 어린이 등 프로그램의 분석, 평가등 업무와 잡지 편집, 등 그밖의 여러 업무를 수행하면서 없어서는 안될 인물로 부각되었다. 그 박진서, 지금은 80대가 되었지만 건강한 모습으로 활동하신다.
박진서님과 그 시절 같이 활동했던 이혜경, 구민, 윤영중, 오승룡님은 지금도 박진서님을 기억하며 얘기한다. 그때 젊은 박진서님은 80이 되셨지만 건강한 모습으로 블로그를 운영하며 글도 쓰시고 화초도 기르시며 여행도 즐기시는가 보다. 미국에 있는 손녀들과 함께 한 사진 한장을 옮긴다.
방우회 단체 카톡 방에서 나눈 박진 선생님 이야기 2019년 5월 11일
박진서 선배님, 선친 박진 선생님은 일제 강점기부터 연출가, 작가로 크게 이름을 떨치시던 분입니다. 해방공간에서 많은 글을 써 주셨습니다. 박진서 선배님이 자주 글을 올리셨는데 요즈음 조용하십니다.
[박진서] 에구~멋 적습니다. 늙고 병들면 아무짝에도 쓸 데 없어서 그저 조용히 살아야 할 것 을.....^^ 그저 좋은 정보가 이곳에 많아서 자주 들락거립니다.^^
[이장춘] [오후 5:30] 박진선생님이 드라마에서 미국 사령관인 하지중장과 군정장관인 러치를 일컬어 '멸치'라고 비꼬아 벌어진 사건이 있었다고 한다. 이른바 박진 씨와 '멸치사건'이다. "도대체 글러먹었단 말이야. 하치인지 (하지를 하치로 꼬집은 것이다.) 러치 인지 멸치인지는 몰라도 남의 나라에 들어와서……." 전 방우회장 고 문시형 선생님 글 중에서.
[박진서] [오후 5:43] ㅎᆢ직설로 힘든 고비를 넘기시기 여러 차례ᆢ 일제시 남대문 대로에서 방요하다 일경에 걸리자 *네놈 들 남의 나라에 와서 왜 이래라 저래라 하느냐. 며 순경의 모자를 벗겨 멀리 던지고 그 사이 동대문 쪽으로 도망가셨다고 합니다. 그날 밤에 친구 분들 약속이나 한 듯이 종로 술집에서 만났 답니다. 젊은 날의 이야기.
[이장춘] [오후 5:46] 동양극장에서 연극에 출연한 김승호와 싸우다가 마침네. 연극이 중단되고 그러자 극장 주인과 싸우게 되어 큰 소동이 일어났답니다. 어찌 되었던 대단하신 분이어요.
[박진서] [오후 5:47] 글쎄 말입니다. ^^
영화 혈맥의 장면 사진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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