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인물

방송인 최종채님 초대 한국 민속박물관장, 전통문화 앞에서

이장춘 2013. 5. 18. 21:10

 

 

필자가 국제방송국에 첫 발을 들여

놓았을 때 중앙방송국 편성계장을 하신 것으로

 기억되는 최종채님이다. 필자가 춘천방송국에 근무할 때는

공보부 방송관리국 지도계장으로 전국의 방송행정을 맡아 보셨다. 

(방송관리국과 서울 중앙방송국의 직제와 관련된 얘기는 끝부분에 있음)

공보부 재직 중 10여년간 방송을 하셨던 분이 1968년 공보부와 문교부의

문화부문이 통합되어 문화공보부가 발족될 때 문화재 쪽으로 발길을

 옮겨 문화행정을 보다가 1970년대 초 우리나라 직제에 있는

 최초의 민속박물관을 창설하고 관장이 되셨다. 

 

 

 

 

위 사진은 서울 중앙방송국이 정동에서 남산으로 옮긴후

현관에서 촬영한 사진으로 최총채님과 노정팔 방송과장님을 비롯해서

방흥안, 조한긍, 정남조, 남학현님이  함께 했고 아래는 1965년 부산에서

실시한 지방방송국 합평회에 참여 했을 때의 최종채님입니다.

 

 

 

 

 

최종채님 초대 한국 민속박물관장, 전통문화 앞에서

 

 

공무원 신분이다. 보니 여러 업무를

맡다가 문화재에 발을 들여놓은 것이다. 님이 쓴

“전통문화 앞에서” 의 책 서문에서 “정치와 학문과 문학

사이에 갈등이 있었습니다. 좁은 길을 가다가 큰길로 가기도

하고 두 갈래의 길로 들어서다가 헤매기도 하였습니다.

지금에 와서 느끼는 것은 한 목표, 한 길로 갔어야

할 것을 자성하기도 합니다.” 최종채님이

오늘에 와서 하신 말씀이다.

 

부산 피난시절 연세 대학교

정외과에 입학했지만 시를 비롯한 문학이나

다른 학문에도 폭넓은 관심과 열정을 쏟았다. 일세를

풍미한 임택근 아나운서와는 같은 과 동기동창 이다. 정외과를

나와 정치를 할까. 학자가 될까. 문학을 할까. 헤매다가 공무원이

 되고 또 그러다 보니 여러 업무를 체험하게 된 것이다. 어찌 되었던

 님은 문화재 전문가로 통하지만 필자와의 인연은 방송인 최종채님

과의 인연이다. 그때의 인연으로 님은 필자에게 늘 친근하게

주신다. 생의 중요부문을 공무원으로 보냈던 님의 

발자취는 2011년에 펴낸 “석주 시문집(石洲 詩文集)

전통문화 앞에서” 에 기록되어 있다.

 

인생의 재출발이라고 할 수 있는 결혼식

 주례를 보아주신 박종화 선생님을 비롯해서 민족사관을

정립한 홍이섭, 시를 중흥시킨 미당 서정주, 이 시대의 마지막

 선비라고 불린 조지훈, 여행을 즐기는 조병화, 그리고 김재복, 이겸로,

김원용(김원룡龍), 최순우, 임창순, 김구용, 김명회, 안병욱선생님등 젊은시절

가르침을 받았던 님은 그 시절 연하장등을 통해서 받은 친필을 책 부록에

 “은사의 필적”으로 올려서 그 시대를 대표하는 최고의 학자 예술가의

모습과 필적을 감명 깊게 볼 수가 있다. 좀 더 많은 분들이

보실 수 있도록  끝 부분에 모두 올렸다. 

 

님은 남다르게 책을 모으고 사랑한다.

국내는 물론 일본이나 중국 등 어디든지 가면

 책을 구하러 다닌다. 그렇게 구해진 책은 집안 곳곳에

 쌓여있다. “부부간에 싸울 일이 없지만 책 때문에 싸운다.” 고

 하셨다. 공무원 박봉에 생활 쪼들리며 책을 사니 그것도 불만이려니와 

집안 곳곳에 책으로 가득 차 있으니 그것도 불만이어서 집안싸움을 하신다고 

하셨다. 모은 책을 읽고 정리하면서 지식을 쌓아 학문적인 조예가 깊으

시다. 님이 쓰신 전통문화 앞에서 책을 읽다가 이 부분

 2면을 스캔해서 뒤에 따로 올렸다.

 

 

 

 

 

오늘날 경복궁 경내에 가면 훌륭한

한국 민속박물관이 있다. 이 한국 민속박물관을

 세우고 초대 민속박물관 관장을 지내신분이 최종채님이다.

님은 “국립 민속박물관 설립시절(1973-75)하면 지금도 마음이 설래

이고. 민속박물관은 나의 어머니요. 동물의 귀소 본능과 같은 그리움을

 느끼곤 한다,” 고 하신다. 방송을 사랑하고, 문화재를 사랑하며

책을 모으고 읽는 님은 그림감상을 즐기고 문학에

심취하며 시를 쓰신다. 학생시절 1949년

8월에 쓴 시 한편을 옮긴다.

 

 

석죽화(石竹花)

 

 

이렇게 나즉히 부르는 것은

안타까운 빗갈 때문일까.

 

담홍색 (淡紅色)...,

 

 

저 작은 얼굴에

부끄럼 없는 순정(純情)이여

 

 

<<千字文>> 싫증 날 땐

뒷동산에 올라 굽어보던 때문일까.

오오 石竹花여

 

산촌 뒤 안길에 다듬이 소리 들으며

혼자 울고 있는 꽃

 

이제 너를 내세워

너의 화단(花壇)을 가꾸련다.

  

 

<1949.8>

 

 

 

남은 얘기는 약력으로 대신한다.

 

 

 

약     력

 

본관 慶州, 아호 石洲

 

충남 보령 출생

 

1951년 공주중학교 (6년제) 졸업

 

1955년 연세대학교 정외과 졸업

          (역사학 연구와 문학*시작에 취미),

          한양대 강사

         

1957년 공보실 (문화공보부전신) 공채

          사무관, 과장, 국장 등 25년 근무

          중앙방송국 편성계장, 방송관리국 지도계장,

          문화공보부 문화재과장, 국립 민속 박물관장

          (문화재 행정에 학술적인 접목에 노력)

 

1982년 영화진흥공사 감사

         독립기념관 감사

         한국 종이접기 협회 감사

   논     문 

 

석남 송석하 연구

한국 민속 박물관 설립사

해방전후 박물관 설립사 소사 등 다수

취미 : 서예, 고미술 감상

 

 

 

 은사의 필적

 

 

"전통문화 앞에서" 책 뒷 부분에

"은사의 필적" 이라고 해서 따로 올린

부록이 있다. 최종채님이 젊은시절 은사님으로

부터 받은 연하장이나, 이밖에 서신 등 친필로 써서

보낸 필적과 사진을 함께 올렸다. 옛날에는 연하장 등을

손수 써서 보낸 경우가 있었고 봉투는 의레히 본인이

손수 써서 보냈다. 그 필적을 모아 올리신 것인데

요즈음은 그분들 필적을 보기가 어렵다.

여기서 만나보도록 책에 실린

순서대로 모두 올렸다.

 

 

월탄 박종화 선생님 (대한민국 예술원 회장)은 최종채님의 주례를 서주셨다.

 

 

사울사대 교수 윤태림선생님은 1932년 경성방송국에서 부터 사회

첫발을 내 딛었다. 생활의 단순화를 강조하신 분이다.

 

 

시를 중흥시킨 미당 서정주선생님

 

 

 

 

이 시대의 마지막 선비로 불린 조지훈 선생님이다.

전통은 창조의 원천이 된다고 하셨다.  남산에 오르면

 조지훈 시비가 있고앞면에 시 파초우(芭蕉雨) 시가 있다.

2013년 11월 대학수능에서 교과서에도 EBS교재에도

없는 유일한 문제가 출제되었다고 해서 화제가

되었다. 그 사진을 촬영해서 올렸다.

 

 

 

 

 

 

여행을 즐기시는 시인 조병화 선생님이다.

 

 

최종채님의 고교시절 은사 시조작가 이재복선생님

 

 

인사동 터줏대감 통문관 주인 이겸로선생님은 최종채님의 장서를 만들어 주었다고 했다.

 

 

문학과 서화를 즐기시는 고고학자 김원용(김원룡)박사님이다.

 

 

언제나 검은머리를 올백으로 넘기는 미술 사학자 국립 중앙박물관장 최순우 서생님이다.

 

 

전통적인 한학자 출신인 金石학자 임창순 선생님이다.

 

 

시인 김구용선생님의 필적과 다산 정약용선생님 묘를 김구용선생님과 함께 찾았을때의 사진

 

 

연세대 교수 김명회 선생님은 동서학문에 밝은 국제 정치학자이시다.

 

 

철학자, 문명비평가인 숭실대 교수 안병욱선생님은 서예가이기도 하다.

 

 

 

민족사관을 정립한 홍이섭 선생님이다.

연세대학교 교정에 홍이섭선생님의 흉상이 있다.

홍이섭선생님과 최종채님과는 인연이 깊고 전통문화 앞에서

자서전에는 홍이섭 선생님을 추모하는 글이 있다.

 

 

   

 

 

방우회에서 촬영한 사진이다.

위는 1986년  TV방송 30주년을 맞은

 출판기념회에서 촬영한 사진으로 문시형

바우회 회장, 김기호님과 함께 한 사진이고

아래는  방우회 송년 모임때의 사진으로

왼쪽부터 김상헌, 최종채, 이인관,

김영효님이 함께 한 사진이다.

 

 

 

아래 사진은 우리나라 방송 실시 60년이

되던 해 1987년 9월 3일 첫 방송터에 세운 유허비

제막식때 촬영한 사진이다.

 

 

2011년 문공회 송년회와 서화전이 함께 열린 덕수궁 강당이다.

 

 

 

최종채님의 독서와 책모임에 관한 대체적인 상황을 알 수 있는 책 지면을 스켄해서 올렸다.

 

 

 

국영방송시절 서울 중앙방송국과

방송 관리국의 관계에 대해 궁금하게 생각

하시는 분들이 계셔서 간략히 적는다.

 

 

KBS가 국영방송시절에는 서울 중앙방송국과

전국 지역방송 간에 링크가 구성되어 하나의 방송 시스템으로

운영되었지만 행정상으로는 공보부장관의 보좌기관인 방송관리국에서

공보부장관의 지휘를 받아 관장하고 있었다. 방송시설에 관한 업무 역시

방송관리국에서 공보부장관의 지휘아래 직접 시행했다. 같은 공보부장관

휘하에 있었어도 서울 중앙방송국은 독립된 외국이고 방송관리국은 공보부에

속한 장관 보좌기구였다. 행정학적으로 보면 중앙방송국은 독립된 행정관청

이고 방송관리국은 행정관청 공보부장관의 보좌기관으로 공보부장관 명의로

행정행위가 이루어졌다. 1953년 방송관리국이 생기기 전에는 중앙

방송국장 공보실장 보좌기관 역할을 하던 때도 있었다.

 

2011년 산수를 맞아 방우회 한영섭 회장으로부터 기념품을 받는 최종채님

 

 

최종채님의 거주지 목동에 있는 파리공원에서 가족들이 함께 한 사진이다.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2011 국악대상 가창상 강권순-1.wma

 

 

2011 국악대상 가창상 강권순-1.w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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