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박경희 (여성) 아나운서 정년퇴직의 방송사적 의미

이장춘 2012. 12. 29. 19:03

 

 

 



 


최초 정년퇴직 여성 아나운서

최초 KBS 여성 아나운서 실장

최장수 여성 아나운서

축하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씁니다.

 

 

 

 

 

KBS 박경희 아나운서가

2012년 12월 말일자로 정년이 되어

퇴직했다. KBS 1TV 아침 9시 반 뉴스를

비롯해서 무려 35년이 넘는세월 TV와 라디오에서

그의 얼굴을 보아왔고 음성을 들어왔으며 또

때는 KBS 아나운서실장을 지냈다. 방송사상

전례가 없는 일이고 새로운 전통을

만들어 낸 주인공이 되었다.

 

 

박경희 (여성) 아나운서 정년퇴직의 방송사적 의미

 

 

 

 

이 나라 방송역사는 여자아나운서

목소리로 들려온 방송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1926년 7월 시험방송 때부터 이옥경

(李玉京)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실리기 시작했고 1927년

2월 16일 첫 개시방송에서 우리말 아나운서로서는 첫 전파가

발사되었기 때문이다. 그우리나라 말을 하는 아나운서는 이옥경과

마현경 두 사람만 있었다. 방송을 통해서 신비한 목소리를 듣는 사람들의

마음에는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그렇게 해서 시작된 여성 아나운서의

 방송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시. 청취자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지금도 “춘하추동방송”에서는 “여성아나운서”를

 검색하는 조회 수가 많음을 본다.

 

 

 

 

그토록 사랑 받아오던 여성 아나운서지만

오랜 기간 방송수명은 짧았다. 여성 아나운서가

결혼을 하거나 나이가 들면 퇴직해야 하는 불문율이

있어왔기 때문이다. 1950년대까지 여성아나운서의 방송

수명은 길어도 10년을 넘기지 못했다. 그때 이름 있던 강영숙,

윤영중 아나운서도 10년을 채우지 못하고  그 목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되었다. 강영숙 아나운서는 당시 방송의 최고 책임자였던

오재경 공보실장이 같은 방송국의 한영섭기자와의 결혼을

 주선하면서까지 방송국에 오래 있어 줄 것을 바랬지만

 강영숙 아나운서도 둘째 아이가 생기면서 부터는

스스로 방송국에 더 근무하기가 민망

해서 자리를 물러났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때 최초의

상업민영방송 MBC가 새로 문을 열 때라

그 MBC에서 강영숙을 불렀다. 강영숙은 숙명으로

받아드리면서 MBC에서 다시 방송을 이어갔고 MBC TV가

 문을 열기 전이라 KBS TV에도 출연한 적이 있다. 1970년대 MBC

에서 아나운서실장을 지냈고 국장급 위원을 지냈다. 그런 가운데

우리나라 예절교육의 본산인 예지원을 설립하고 그 대표직을 맡아

 그로부터 35년에 이른다. 한 방송사의 아나운서 실장도 하고

국장 급 위원도 지냈지만 정년퇴직은 아니었다.

 

박경희 아나운서는 이 불문율을 깬 첫

아나운서다. 박경희 아나운서가 결혼 후에도

방송을 계속 할 수 있었던 것은 1980년 방송 통폐합과

무관하지 않다. 그때 TBC 아나운서를 받아 들여야 했던

KBS는 이미 결혼한 TBC 아나운서를 받아드리면서

 KBS가 오랜 세월 지켜오던 불문율을 더 이상

고집하기 어렵게 되어서이다.

 

1977년 KBS 공사 4기로 입사한

박경희 아나운서는 그로부터 주위 시선에

 구애되지 않고 방송에 전념 할 수가 있었다. 박경희

아나운서에 관한 자세한 사항은 한국 아나운서클럽에서

 2012년 12월에 발행한 박경희 아나운서의 정년퇴직과

관련해서 쓴 유혜진 객원기자의 글 한편을

인용하는 것으로 가름한다.

 

 

 

김동건 아나운서 방송인생 50년 축하연에서 남승자기자와 얘기를 나누는 박경희 아나운서입니다. 

 

 유애리(우), 이규원(좌) 아나운서와 함께 한 박경희 아나운서(중)

 

 

 

 장기범 아나운서 24주기에서 만난 방송인들과 박경희아나운서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신 아리랑 신영옥.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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