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평양방송국 JBBK가 최초로 건설 되던 때 1936년 11월 15일

이장춘 2012. 11. 3. 03:17

 

 

이 글을 쓴 유병은 선생님은 세상을 뜨시기 전 

5개월 전 방송 명예의 전당에 헌정되셨씁니다. 일생동안 

빙송을 위한 업적도 중요했지만 방송사료를 모으고 정리했으며

방송사 연구에 힘을 기울인 공로가 크게 인정되었습니다. 어제에 이어

지방방송국 두번째로 건설된 평양방송국에 관해서 쓴 유병은선생님 

입니다. 두번째로 건설된 지방방송국 평양은 한국어 방송채널이 별도로

 마련되었고 시내에 연주소가 따로 마련되었습니다. 또 이 방송국을

세우면서 곧이어 전국 라디오 보급대수가 10만대가 되는 등

여러모로 의미있는 방송국이었습니다. 평양방송국에

관한 글을 함께 링크했습니다.

 

 

아나운서 강찬선의 평양방송 재직시절 회고담

http://blog.daum.net/jc21th/17780931

 

 6.25전쟁기간 북한에서의 방송

http://blog.daum.net/jc21th/17780113

 

북한땅에 있었던 방송국과 해방후, 방송회선 절단

http://blog.daum.net/jc21th/17780756

 

2차대전 마지막 격전장 청진방송국의 비극

http://blog.daum.net/jc21th/17780757

 

최초의 지방방송국 부산 JBAK가 건설 되던 때 1935년 9월 21일 (HLKB)

http://blog.daum.net/jc21th/17781478

 

 

 

 

평양방송국 JBBK가 최초로 건설 되던 때 1936년 11월 15일

 

 

부산방송국 개국 후 라디오 등록대수가

급증하는 추세를 보이자 조선방송협회는 창설부

(創設部) 라는 새로운 부서를 만들어 새로 만드는 방송국에

 관한 신설업무를 전단케 했다. 1936년 3월 23일자로 평양방송국에

관한 설치허가를 체신부로부터 받았다. 평양방송국은 부산과 달리 설계

때부터 규모가 커 총공사비가 무려 26만 엔이나 소요됐다. (동아일보 1936년

3월 10일)허가직후 평양방송국 건설사무소를 개설했다. 평양방송국의 위치는 

대동강(大同江)을 건너서 선교리 방향으로 시내에서 약 8Km 떨어진

평안남도 평양부 오야리(梧野里) 130번지였다. 평지에다

방송국을 세운 것은 평양이 처음이었다.

  

 

 

 

대지 총면적은 5635평이며 총건평은

부산방송국보다 더 큰 160평에 달했고 직원 사택과

합숙소가 124평이나 됐다. 평양방송국 설치공사는 주야로

 강행 되었다. 약 8개월간의 공기로 1936년 11월 15일 오전 11시

30분에 성대한 개국식을 거행했으며 그날 정오부터 정규방송을

시작했다. 평양방송국에도 별도로 수신소를 만들었는데 방송국

에서 약 3.9Km 떨어진 평안남도 대동군 남곤 면 유사리에

위치했다. 전용수신소의 이름은 그곳 고적지의 이름을

 “날랑(樂浪)수신소”라고 명명했다.

 

 

 

 

평양은 부산과 달리 시내에서 멀리 떨어진

 대중교통수단이 없는 곳이라 방송객의 내왕이 불편한

곳이었다. 방송운영의 합리화를 위해 평양부 산수정 34번지

 서기산(瑞氣山) 공원 부근에 별도로 “서기산 연주소” 설치해야 됐으며

이곳 서기산 연주소에는 국장실을 비롯한 청취자를 대상으로 한 라디오

수리를 전담하는 “라디오 상담소”를 두었다. 청취료 수금 및 신규등록 업무

이외에 방송 프로그램(평양 로칼방송)을 주관하는 방송과 직원과 아나운서도

 이곳에 배치한 소규모 방송국으로 한국 초유의 별도 스튜디오를 시내에 만든

역사적인 기구였다. 평앙방송국과 낙랑수신소, 서기산 연주소간의 원만한

 업무진행을 위해 방송선, 업무연락 및 비상시 대비한 예비선로가

 갖추어져 있었다. 평양방송국은 부산( 한. 일 양국어 방송을

교대로 실시하는 단일채널 )과 달리 개국 당시부터

2중방송의 규격을 완비한 500W송신기 두 대

 시설을 갖추었으며 스튜디오도 3개였다.

 

 

 

 

평양방송국 개국 1년 후에는 전국 청취자가

 10만을 돌파하는 경사가 있었다. 1937년 11월 1일자로

청취료 25%를 대폭인하 (월 1엔을 75전으로) 하는 과감한 조치가

있었다. 또 이때부터 수신기 보급가격도 20% 인하하는 조치가 있어

라디오 붐을 일으켰다. 평양방송국에서는 개국기념으로 개국식에 참석한

귀빈에게 “JBBK 평양방송국 개국”이라고 선명한 글씨가 새겨진 벼루를

 선물했다. 위현산(지명) 검은색 돌로 만든 벼루는 먹물이 잘

안 마른다는 전국에서 유명한 희귀품이었다.

 

 

 

 

또 방송국을 견학하러 오는 사람에게는 종이에

 기념 스탬프를 찍어주었는데 종이를 안가지고 온 사람

에게는 손바닥에 청색 기념 스탬프를 찍어 주었다. 수일간

 지워지지 않는 스탬프를 보며 방송국 견학을 회상 했다는 것이다.

이 제도는 경성 중앙방송국과 간은 방식이었다. 사실 그 당시는 아무나

방송국을 자유롭게 출입 할 수가 없어 “방송국 견학단”등을 만드는 사례

 있었다. 평양방송국에는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한덕봉 (경성방송국을 건설한

사람)이 방송과장에 보직된 일이 있었다. 한덕봉의 말을 들어보면 1936년

7월 31일자로 총독부에서 최초로 1만 9천 엔의 보조금을 방송협회에

보내 왔는데 사용목적은 “산간벽지나 농어촌에 방송을 무료로

 들리게 하는 일에 쓰라” 고 단서를 붙였다는 말이었다.

 

평양방송국은 평안남도 진남포부 부삼화정

 25번지에 직할 출장소를 개설하고 청취자를 위한

 대민 봉사활동에 앞장섰다. 또 평양방송국은 철탑으로 공중선을

건립치 않고 나무전주 5개를 이어 55미터 높이의 송신 공중선을 가설한

 첫 방송국이다. 최초의 라지알 매몰식 어스시설을제대로 시설한 첫 방송국으로

 기록된다. 왜 철탑대신 나무 전주를 이어 사용했느냐에 대해서는 한덕봉의 고증으로

역시 물자의 부족을 거론했다. 평양방송국에서 근무한 사람으로 방송계의 요직을 두루

거친 사람들이 많았다. 기억에 떠오르는 사람의 이름을 적어본다. 한덕봉(기술국장 역임

6.25사변 때 납북) 김도현 (연희방송소장) 심긍구(대구 방송과장 예비역 대령)

김득풍 (체신부 전파 감시국장) 한기선 (공보처 기감 역임) 송영호 (방송

관리국장 역임) 김석모(동아방송 기술국장 역임) 안용금 등

다수가 평양방송국에 근무한 사람들이다.

 

1935년 9월호 “라디오 일본”에 나와 있는

 기사를 보면 평양방송국 설치 기성회가 조직되었다.

그 지방에서방송국 유치운동을 적극적으로 펼쳤다는 기사를

 볼 수 있듯이 한덕봉의 고증을 들어보면 부산보다 더 적극적인

현지의 협조로 평양방송국 본 청사, 낙랑수신소, 서기산엱소의

용지 등은 모두 현지 행정당국의 협조로 많은 지원이 있었으나

총공사비가 26만 엔이나 소요 됐다고 한다. 평양방송국은

일본 도쿄 전기회사제 500W방송시설로 출력관은

 SN-205C 3개를 사용했다.

 

 

 

손인호 대동강아 잘 있느냐-1.w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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