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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홍준(최홍목)님의 생생한 체험기록 방송작가 반세기 50년

이장춘 2012. 8. 31. 18:16
 
 
 
 1960년대부터 지금까지도 쉼 없이 글을 쓰시며 활동하는
최홍준(본명 최홍목)님을 올 5월 2일 장기범 선생님 24주기 참배길
에서 만나 장시간에 걸쳐 여러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1973년 공사 창립과
함께 해어져 잠시 잠시 지나는 길에 만나기는 했어도 긴 시간에걸쳐 얘기 하기는
 실로 오랫만이었습니다. 방송국에서 드라마나 다큐멘타리 등의 글을 쓰고 프로듀서로서
프로그램을  제작하면서 또 25년이라는 긴 세월 대한뉴스 원고를 집필해 오셨습니다. 최근
에는 천주교 전국 평신도 협의회 회장직을 맡아 바쁘게 활동해 오신 얘기가 감동적이었습니다.
오래전에 방송작가 협회지에서 보았던 글이 생각나 그 글을 들추어 보았습니다.  애기를
 들은 뒤에 글을 보니 실감이 나고 더 감동적이었습니다.  누가 읽어도 재미있고
 유익한  글이라고 생각되어 이곳에 옮겼습니다. 이  글은 방송작가
 협회지 2010년 3, 4, 5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영문자 주소를
 클릭하시면 두번쩨 글을 보실 수 있습니다.
 
 
 
최훙준 관련글 더 보기
 
 
천주교 평신도사도직협의회 회장 최홍준(최홍목) 방송작가 반세기 (2) 
 
http://blog.daum.net/jc21th/17781433

 방송작가, 해방공간으로부터 70년 변천사
http://blog.daum.net/jc21th/17781163

 
방송작가 역할과 활동 1970년대 인명록
http://blog.daum.net/jc21th/17781155
 
일제 강점기 방송극 (드라마) / 제 2 방송시절
http://blog.daum.net/jc21th/17780888


춘하추동방송 이장춘


최홍준(최홍목)님의 생생한 체험기록  방송작가 반세기
  
 
라디오 ‘소리의 고향’과 스포트 방송 시대


남들이 방송작가로서 어느 분야에
 속하느냐고 물어올 때면 나는 잠시 망설이지
않을 수가 없다. 드라마면 드라마, 구성작가면 구성작가,
 라디오, 혹은 TV 다큐멘터리 부문이라고 대답할 수 있다면 좋으련만,
방송 전 부문에서 ‘주문생산’에 응한 모양이 돼버렸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예능 프로그램에까지 손을 대어 1970년대에는 연극 연출가와 국악 전문가가
 연출을 맡은 TV 창극을 쓰고, 대형 드라마 연출가가 메인 PD를 맡은 ‘광복절 특집
 종합구성 8월의 노래’ 대본까지 연거푸 썼는가하면, ‘대통령 영부인 고 육영수 여사
추모 특집’이라든가, 1980년대 초 여의도 광장을 울며 찾는 사람들의 물결로
수놓게 한 이산가족 찾기 보도특집까지 일정 기간 고정 집필
했으니, 정신없이 살아온 세월이다.

얼마 전 선배 원로 분들과 함께 대화를
나눈 자리에서 “디지털 시대에 사는 아날로그 세대”라는
자조 섞인 푸념을 들었다. 어떻게 보면 아득한 옛날인가 싶기도 하다.
분업화가 잘 이루어진 요즘 방송 실상과는 대조적인,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대의 이야기를 한 자루 하게 됐으니, 독자 제위의 양해를 먼저 청해야 할까보다.
 프로그램의 장르를 뛰어 넘어서 글을 썼을 뿐만 아니라, 나는 신원면에서도 프로듀서와
 작가를 겸하면서 방송인 생활을 시작했다. 한국방송협회가 시상해온 대한민국 방송상 두 번째인
 1974년 최우수작품상(대통령상)에 KBS 라디오의 ‘소리의 고향’이 뽑혔는데, 이 작품을 기획, 취재,
구성, 연출, 편집까지 두루 내가 혼자서 담당했다.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면의 인간문화재 문여사를
 찾아가서 한산 세모시에 관한 모든 것을 당시 ‘아이스케이크 통’이라 불리던 녹음기에 담아 왔고,
 베틀소리와 베짜는 노래, 자연의 소리 등을 곁들이면서 성우들을 출연시켜
드라마타이즈 30분짜리로 제작, 방송한 내용물이었다.
 
1976년은 당시로서는 ‘노총각’으로 내가
결혼하던 해였는데, 그해 5월 청와대 경호실 기록영화
대본 집필 관계로 신혼여행 중에 잠시 서울에 올라와서 작업을
마무리해주고 다시 내려간 일도 있다. 다음 달 6월에는 특집 ‘우리는
 증언한다-6․25 실록’ 5부작을 KBS-TV가 방송했는데, 각 1시간짜리인
이 대형 기록물의 제4부까지는 내가 쓰고 나머지 제5부는 담당 프로듀서였던
강대영 전 KBS 부사장이 대본을 썼다. 이 프로그램이 제4회 한국방송대상
(4회부터 바뀐 명칭) 최우수 작품상(대통령상)을 받았다.
 
이 밖에도 필름 프로그램인 ‘인간승리’
여러 작품이 아시아방송연맹(ABU) 대상을 수상하기도
 했으며, 약 10년간 이 프로그램을 거의 혼자이다시피 내가 썼다.
방송의 여의도 시대가 열리기 전 서울 남산 중턱에 KBS 라디오 건물과
TV 청사가, 지금은 소월길이라 불리는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었는데,
부지런히 양쪽을 오가며 작업하던 시절이 엊그제 같건만, 2009년에
 36회(1978년 건너 뜀) 방송대상을 시상한 것이고 보면
아득한 옛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서울 중구 예장동 8번지 KBS 라디오 건물에
서울중앙방송국과 서울국제방송국이 함께 살았고, 그 건너편에
서울텔레비전방송국이 개국하게 되면서 남산에 방송촌이 이뤄진 것이
1961년 말이었다. 서울중앙방송국에서는 HLKA를 호출부호로 쓰는 제1방송과
 HLSA 제2방송을 실시하고 있었다. 당시의 방송체제는 국영으로, 이사관인
국장 밑에 연희송신소가 있었고, 서기관이 과장으로 있는 서무과, 편성과,
방송과, 기술과 이렇게 4개 과가 있었으며, 편성과에는 편성계,
음악계, 문예계, 연출계가 있었고, 방송과에는
보도계와 방송계가 있었다.




보도계는 이름 그대로 보도방송을
주 임무로 하고 있었으며, 방송계는 지금의
 아나운서실의 다른 이름이었다. 그리고 편성과의
 편성계에서는 편성 실무 외에 교양방송을 제작 방송하고
 있었으며, 문예계에서는 드라마와 문예물을 담당하면서
 작가들의 출입처가 됐고, 음악계에서는 음악 프로그램을,
연출계는 주로 드라마 연출과 전속성우 관리,
프리랜서 성우와 연출자들의 쉼터로서
그 몫을 다하고 있었다.
 
 


1층 연출계에 가면 음향효과로 방송일을
시작했던 베테랑 연출가, 부리부리한 눈이 인상적이었던
이상만 계장과 아담한 모습의 원로 성우 이혜경씨 커플이 날마다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1950년대 HLKY 기독교방송(CBS)과 부산문화
방송에 이어 1960년대 초반 HLKV 문화방송(MBC)과 HLKJ 동아방송(DBS), 
HLKC 라디오 서울(후에 TBC 동양 라디오)이 차례로 개국하면서 자체 PD들의
드라마 연출이 시작됐으나 KBS 라디오에서는 한 발 늦게 PD 시스템이 정착됐다.
2층 문예계 직원들이 이를테면 드라마 PD였고, 나중에 연출까지 겸하게 됐다.
방송대본을 몇 차례 써서 심사를 받고 1967년 내가 2층 문예계에 출근할 때는
 김호영 계장 후임으로 이명석 계장이 당시 공무원으로 이미 고인이 된
 이은성 작가와 정유일 PD, 그리고 전속인 윤혁민 작가와
 함께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원용철, 연용모, 전홍 씨 등이 거쳐 간
자리에서 나는 스포트 방송 원고를 주로 쓰면서
 음악 프로그램 ‘고요한 밤에’와 세미다큐멘터리 ‘양지를
찾아서’를 취재, 구성했다. 역경을 딛고 인간승리의 보람을
안게 된 주인공을 찾아 세상의 거울로 제시코자 한 ‘양지를
찾아서’는 동아방송의 ‘이 사람을!’과 함께 청취자
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게 했다.
 
남산에 3개 방송국이 들어서서
하나의 방송촌을 이루면서부터 방송국 운영의
 일원화 문제가 대두됐고, 그 일차적인 해결을 1968년
7월 25일 보게 됐다. 이날자로 공보 행정의 주무 관청인
공보부가 문교부의 문화행정 업무의 일부를 이관 받아
문화공보부로 새로이 발족하면서 서울중앙방송국과
서울국제방송국, 서울텔레비전방송국의 3국이
통합돼 ‘중앙방송국’으로 새롭게 출발
하게 됐던 것이다.
 
이때 기구도 다소 변화를 보게 됐는데,
중앙방송국장 아래에 기획조사실을 두고, 이사관인
국장과 서기관 과장 사이에 부이사관급 ‘부장’을 두는 체제였다.
즉 라디오부와 텔레비전부, 보도부, 기술부를 둔 것인데, 라디오부에
 제작1과와 제작2과, 대공과(對共課)를 두고, TV부에 제작1과와 제작2과,
업무과를, 그리고 보도부에 보도과, 방송과, 국제과를, 기술부에 기술과,
제1조정과와 제2조정과, 중계과, 4개의 송신소를 두는 모양새를
갖추었다.기구 개편과 더불어 문예계에 속해있던
 작가들의 신분도 달라졌다.
 
드라마 PD 이은성씨는 이미 프리랜서가 되어
 시나리오 쪽에 열심히 나섰고, 전속격이었던 윤혁민 작가는
 역시 프리랜서를 선언하고 KBS 라디오와 TV에서 ‘대한민국 20년’과
‘꽃피는 팔도강산’ 등 드라마를 본격적으로 집필하기 시작했으며, 나는
‘스포트방송요원’ 사령장을 받고 본관(라디오 건물) 4층 작가실에 상주
하는 것으로 결정이 났다. 스포트 문안 작성이 주 임무였지만
연속낭독 ‘이순신’과 ‘양지를 찾아서’ ‘마음의 샘터’ 등
라디오 프로그램을 계속 집필했다.
 
당시 작가실에는 원로 프리랜서 작가
최요안 선생이 연신 담배에 불을 붙이시면서
노익장을 과시하고 계셨고, 보도부 해설위원 두 분이 같은
방에서 함께 지냈다. 스포트는 공공을 위한 기초질서 계몽과 정부 시책
홍보 등에 중점을 두고 스트레이트 어나운스먼트(Straight Announcement)와
스포트 드라마, 이렇게 두 가지로 써서 스트레이트는 생방송 아나운서 부스에
 비치하고, 스포트 드라마는 제작2과로 내려 보내 성우가 출연해 녹음한 다음
녹음테이프를 주조정실 테이프 진열장에 놓아두고 활용토록 했다.
 
3선 개헌을 둘러싸고 논란이 심했던
1971년 대통령 선거가 한창이던 때, 당시 강력한
야당 후보가 선거 연설을 막 끝낸 다음, 스테이션 브레이크에
 “말이 많으면 쓸 말이 적다”는 식의 스트레이트 멘트가 송출된 적이 있다.
그 무렵 스포트 요원으로 공보부 사무관 출신인 박춘섭씨가 임명되면서 TV 건물에
 사무실을 마련해 나도 함께 그곳으로 옮겨가 스포트 방송의 자막 처리와 스크롤 문안을
 곁들여 작성했다. 3선 개헌 국민투표일 하루 전날 방송사 간부로부터 우리 두 사람은
 저녁 식사를 잘 대접 받고 한 가지 질문을 받았다. “가위표냐, 엑스표냐?”하는
물음이었는데, 한 잔 술기운을 빌려서이기도 했겠지만, “방송은 그렇게
하지만, 투표는 아닙니다!”라고 대답했던 기억이 난다.

 
 
공사 출범과 ‘여의도 시대’의 개막 
 최무룡 진행 ‘노래의 성좌’ 기타


KBS의 삼국통합(三局統合)이 이뤄진
1968년 7월 25일부터 한국방송공사가 발족한
 1973년 3월 3일까지 4년 반 남짓 존속한 ‘중앙방송국’ 시대에
 나는 라디오부 제작2과에 소속돼 있었고, 본관 4층의 작가실 외에
 2층 제작과 사무실에도 책상이 있었다. 사무실 몇 개를 터서 제작1과와
 제작2과 직원들이 함께 근무하면서 양과 과장들이 맨 윗자리에 앉고, 모든
책상이 과장석을 향해 놓인 적이 있었다. 제작1과장은 아나운서 출신으로
종전에 방송과장을 맡았던 장기범 대선배였고, 제작2과장은 국제방송국
대공(對共)과장을 지낸 김순경씨를 비롯해서 4~5명의
공무원들이 지나간 것으로 기억한다.
 
과거 문예계, 연출계, 음악계가
연예계란 이름으로 제작2과를 이루고 있었는데,
내 옆자리에 앉은 짝이 음악계 출신 신경림씨였는데, 그는
내가 대본을 쓰고 자기가 작곡을 해서 대형 오페라를 만들어보자고
제의해 이를 시도한 적이 있다. 음악 PD들과 함께 하면서 제1라디오
저녁 황금시간대에 가수로 노래한 적이 있는 인기배우 최무룡을 고정 MC로
 기용하고 매일 연예인들을 불러 진행하는 디스크자키 형식의 40분짜리 프로그램
‘노래의 성좌’를 집필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한국방송 60년사’에 보면 이 프로그램의
 MC를 최희준씨로 적어놓았는데, 이는 최무룡씨가 맞다. 박창학씨가 연출을 맡고
나는 대본을 썼는데, 윤정희, 고은아, 현미, 또 누구누구 인기 연예인
대부분이 한 번씩 출연하는 가운데 청취율도 꽤 높았다.
 
다른 프로그램에 비해 출연료가 후했던
 ‘노래의 성좌’는 한 시즌만 내보내고는 문을 닫아야 했다.
이는 필시 정부의 정책적인 편성이었고, 출혈이 너무 커서 오래
 계속할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1969년인가, 70년이던가, 삼남지방에
홍수가 나서 마산방면으로 취재 간 일이 있었고, 엔지니어 한 사람과 제주도
취재길에 나섰을 때는 다른 PD들이 자기네 프로그램에 쓸 수 있도록 현지 취재를
부탁하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당시 열악한 재정으로 출장가기가 쉽지 않았던
 까닭에 남의 프로그램까지 취재하는 그런 일이 벌어진 것이고, 나는 ‘양지를 찾아서’와
‘내고장 삼천리’ 등 기본 프로그램 외에 당시 제주지사 구자춘씨를 인터뷰도
 해왔는데, 서울로 돌아온 후 방송이 빨리 나가지 않는다고 도청
직원으로부터 독촉성 문의 전화를 받기까지 했다.
 
이 무렵 라디오 건물 1층에는 국방부
‘국군의 방송’ 제작실이 있었는데, 제1라디오를
통해서 초저녁 시간대에 매일 한 시간 가량 송출하고 있었다.
나는 ‘진중일기’라는 프로그램 원고를 쓰면서 공군 사병으로 입대한
내 아우가, 역시 공군 정훈장교로 군복무중인 둘째 형에게 보낸 편지에
 “형님의 다이어몬드 두 개는 한없이 높아 보입니다”라고 써보내왔던 기억이
 난다. 나중에 우리 형제들이 ‘구남매’라는 가족신문을 내고 ‘서로 사랑하여라’
 가정문집을 출판해 일반 매스컴의 관심을 모았을 때 진중일기 방송 원고를
소개하기도 했다. 또 라디오 건물 바로 옆에는 당시 문교부에 속한 ‘학교
방송’도 있었는데, 제2라디오를 통해 국민학교(오늘의 ‘초등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이 방송에도 원고를 썼다. 오늘날
 우리 방송작가협회 회원인 이영준 선생을
여기서 처음 만났다.
 
 

공영방송의 탄생과 KBS 작가실


1971년 8월 12일로 기억하는데,
당시

최두선 대한적십자사 총재가 남북 적십자회담을
 제의해서 판문점에서 회담이 열리고, 이듬해 7월 4일에는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저 평양에 다녀왔습니다.…”로 시작한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고, 이런 굵직한 사건이 라디오와 텔레비전을 통해
 생중계가 됐음은 물론, 방송작가들도 무척 바빠졌다. 그해 10월 17일 밤
 ‘대통령특별선언’이 나왔다. 이른바 ‘시월유신’의 선포였다. 국회를
 해산하고,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면서 대학엔 휴교령이
 내려지고 신문, 통신의 사전 검열이 실시됐다.
 






나는 이날 저녁 작가실 친구들과
청계천 포장마차에서 목을 축이고 있었는데,
비상계엄 소리를 듣고 곧장 남산 방송국으로 올라가서
밤을 새워 스포트를 비롯한 방송문안 작성에 여념이 없었다.
1973년 3월 3일 KBS가 공영방송을 표방하고 ‘한국방송공사’로
새롭게 출발하면서 나는 라디오국 소속으로 발령이 나고 작가실에서
일을 했다. 금년 2010년 1월 30일 내가 천주교 서울대교구 평신도 사도직
협의회 회장에 이어 2월 27일 한국천주교 평신도 사도직협의회 회장에
선임되면서 연합뉴스를 비롯해 몇몇 신문에 보도된 나의 이력 중에
 ‘KBS PD 겸 작가’라는 대목이 있었는데, 이 신분은
 1978년까지 유지됐다.
 
당시 규정에는 공사 직원이 방송 원고를
 쓰거나 번역을 하면 책정 원고료의 50%만 받도록
돼 있었다. 나는 라디오에서 기본적인 업무를 수행하면서도
텔레비전 다큐멘터리 등 여러 프로그램에 계속 참여하고 있었으므로
 불편한 점이 많았고, 자막에 이름을 올리지 못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결국 작가와 공사 직원,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때가 왔고, 나는 프리랜서
작가를 선언하고 말았다. 겸업 작가로서 이중고(二重苦)를 치르던 그 당시
 특별히 기억에 남는 작품은 1976년 봄부터 가을까지 한 시즌에
내보낸 ‘개항백년’ 시리즈였다.





 정수웅 PD가 연출을 맡은 이 프로그램은
16㎜ 필름으로 제작한 다큐멘터리로서, 강화도를
 아름답게 소개하면서 시작해 조선왕조 말기의 아픈 역사를
 바탕으로 시대의 흐름을 담담하게 그려냈고, 대본도 마음에 들어서
 제1회분 육필 원고를 내가 대출해 가지고 있다가 흐지부지하게 된 것이
 아닌지, 챙겨봐야 할 일이다. 백호빈, 이상엽, (김동학, 김종래) 등 극영화
감독 출신 PD들과 일하면서, 이제는 고인이 된 작가 이희복 선생도
 ‘한국의 미’ 시리즈를 맡으면서 즐겨 함께 어울리던 시절이었다.
 
그 당시 작가실에는 최요안, 이희복,
홍윤기 선생이 매일 출근하다시피 했는데,
저녁에 2차, 3차를 하고, 댁에까지 쳐들어가서 민폐를
끼치는 일도 다반사였다. 언젠가는 내가 1주일에 한 번씩 나가서
일하고 있던 중앙청 구내 국립영화제작소까지 최요안 선생이 찾아오셨다.
대학생 따님의 등록금 마감날인데 원고료가 나오지 않아서 급히 꾸어주면
 좋겠다고 하시는 것이었다. 어떻게 변통을 해드린 기억이 난다. 그만큼
열심히 쓰셨는데도 가정경제가 넉넉지 않았던 작가생활의
한 단면을 보는 것 같아 안타까웠다.
 
그 무렵, 60년대 말 라디오 연속극
공모 당선작가 김항명 형과 부산방송국에서
올라온 작가 김도영 선생과 무던히도 어울리며 통음했던
나날이었고, 그분들의 신세를 많이 졌다. 이기명, 오재호, 박신호, 곽현,
임영웅 선생들과 어울리며 포커놀이도 자주 했고, 작가실의 총무를 내가
 맡으면서 여학생을 직원으로 두고 전화 받는 일을 맡겼다. 1976년에
남산에서 여의도로 방송청사를 옮겨갔는데, 새 청사를 지을 때
 방송사의 요청으로 설계도를 보면서 최요안 선생과 함께
5층 작가실이 들어설 위치를 확인하러
 간 일이 아련히 떠오른다.
 

뉴스영화 ‘대한뉴스’ 25년간 집필

텔레비전 수상기 보급이 그리 많지 않던
 시대에 ‘대한뉴스’가 극장, 영화관에서 본 프로그램
상영 전에 10분 정도 나갔는데, 이는 정부가 수립되던 1948년
부터의 일이고, 내가 대한뉴스의 기사를 쓰기 시작한 것은 1970년
봄부터였다. 그 전에는 뉴스를 취재해온 감독들이 직접 기사를 써서
녹음했는데, KBS 국장을 지낸 분이 국립영화제작소장으로 전보돼
가면서 뉴스 문장의 통일성과 정확성을 기하기 위해 방송작가를
기용했는데, 처음 몇 주 동안 이 일을 하던 윤혁민 선배가
드라마 집필로 도무지 시간을 낼 수가 없어
나를 추천했기 때문이다.
 




1970년대의 대한뉴스는 그야말로
 정부 홍보매체로서 유신체제 홍보와 새마을운동
홍보 등으로 정신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기관장에 따라서는
“박정희 대통령은…”이라고 써놓은 원고를 “박정희 대통령 각하께서는…”
이라고 고쳐 놓기도 했으며, 국내 뉴스뿐만 아니라 정책 홍보영화, 해외 동포들을
대상으로 하는 ‘고국소식’과 외부 발주 목적영화도 많이 제작하고 있어서 나도 바쁘게
 뛰면서 수백, 수천편의 영화대본을 썼다. 1995년 4월 케이블 TV시대가 열리면서
K-TV가 개국함으로써 대한뉴스가 막을 내리게 됐고, 이때까지
혼자서 집필한 공로(?)로 표창도 몇 차례 받았다.
 
25년, 참으로 오랜 세월 그곳을 출입하며
기사를 써내려갔고, 더러는 필진을 바꾸기 위해
다른 이가 투입되기도 했으나 길어야 몇 달 가다가는 내가
다시 불려가고는 했다. 또한 KTV 개국과 함께 전문위원으로 계약직
공무원이 된 나는 2000년말까지 6년 동안 매일아침 회의에 참석하고,
후배 작가들이 써오는 대본을 감수해주고, 더러는 윤문도 해주면서
아나운서와 프로듀서, 작가들을 대상으로 한 ‘방송언어’ 교육도
맡아서 했다. 이는 KBS에서도 공채로 들어온 프로듀서를
중심으로 실시한 프로그램이기도 하다.
 
이렇듯 방송말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담아
올바른 원고작성법을 후배들에게 일러주는 한편,
주간 프로그램 ‘통일로 가는 길’과 매일 프로그램 ‘서울말
 평양말’을 직접 쓰기도 했다. 북한문제에 천착해 극동문제연구소가
 있는 서울 삼청동 경남대학교 행정대학원 북한학과(현 북한대학원)에
입학해 다섯 학기를 주말마다 출석하며 착실히 공부해 “북한과 중국의
 종교정책 비교연구”라는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금강산에서
열린 여러 차례의 공식 행사와 평양에서 열린 행사에도 참석
하면서 중국과 북한 땅, 양쪽으로 백두산 정상에 
올라본 것은 지워지지 않는 추억이다.
 

동아일보 창간 90주년 ‘파랑새의 꿈’과 ‘토픽하이라이트’
 
금년(주 : 2010년) 4월 6일자로 동아일보사
김재호 사장이 보내온 감사 편지는 이렇게 시작된다.
 “지난 4월 1일 저녁에 열린 동아일보 창간 90주년 기념 축하행사에
격려와 박수를 보내주신 모든 분들에게 깊이 감사드립니다. …앞으로
동아일보는 90년 전통의 ‘동아 저널리즘’을 지켜가면서 신문, 인터넷은 물론
 방송, 모바일 등 모든 플레트폼으로 독자가 원하는 고품질의 콘텐츠를
만들어 전하는 종합 미디어그룹으로 도약하겠습니다.”

시대가 바뀌면서 이 신문에 대해 여러
 말들이 오고가고는 있지만, 4월 1일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 행사장에서 보여준 동영상 ‘파랑새의 꿈’과 ‘희망의
날개짓’은 지난 90년의 발자취와 앞으로의 설계도를 펼쳐 보여
저간의 씩씩했던 ‘동아’의 추억을 되새김질하게 하는 데에 아무런
장애를 일으키지 않았다. 영상 속 파랑새는 동아일보와 동아방송이
 1963년 들여놓은 취재용 경비행기 이름이기도 한데, 지난날의
 흔적을 하나씩 포개어놓는 과정에서 ‘동아일보 백지
광고사태’에서 눈이 번쩍 뜨였다.
  
1972년 10월 17일 전격 선포된
유신체제 아래에서, 그리고 그해 12월 17일
국민투표로 확정된 ‘유신헌법’이 발효되면서 언론이
크게 위축되고 있던 가운데 1974년 12월 하순부터 이 신문은
 ‘광고탄압’이라는 한국 신문사상 전무후무한 사태에 직면했던 것이다.
광고주들에 대한 탄압이 가중되자 그들이 광고 동판을 회수해 감으로써
 ‘백지광고’ 사태가 빚어진 것이고, 이때 뜻있는 각계각층 국민들이 동아일보에
 성금을 보내주어 그야말로 ‘백지’(白紙) 광고란을 장식했고, 소규모이지만
재정적인 지원과 용기를 불어넣어주었다. 당시 ‘방송작가 9인회’
이름으로도 성금을 기탁해 이름이 실린 적이 있다.
 
윤혁민 선생을 비롯한 작가들의 면면을
일일이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나도 여기에 함께
했음을 고백한다. 이 탄압은 1975년 7월에야 풀렸고,
1980년 11월 동아일보의 자매 방송국인 동아방송(DBS)이
한국방송공사(KBS)에 흡수, 통합됨에 따라 문을 닫아야 했다.
그해 11월 30일 자정, 폐방(廢放)의 아픔을 전파에 실어 보낸
고별방송 남녀 아나운서(송지헌, 이숙영)가 30년의 세월을
딛고 4월 1일 창간 90주년 행사의 전체 진행을
맡아 장내를 숙연케 했다.
 
행사에 참석한 이는 1500여명으로
 집계됐는데, 동아방송 제작 책임자였고, 나중에
 KBS 부사장과 MBC 사장을 지낸 최창봉 대선배와 임영웅 PD,
우제근 아나운서를 만나 반갑게 인사했으며, 조동화 당시 제작과장도
 먼발치에서 뵐 수 있었다. 우제근 아나운서는 KBS 아나운서실을 거쳐
 1994년부터는 나와 함께 K-TV에서 전문위원으로 활동했다.
 
나는 1966년 8월 동아방송 프로그램 개편 때
「토픽 하이라이트」를 맡아 방송대본을 쓰기 시작했고,
「이런 일 저런 일」이라고 타이틀을 바꾸고서도 썼다. 지난해
2009년에 세상을 떠난 드라마 작가 김진욱 선생을 동아방송에서
 자주 만나 기획조사실 책임자 윤병일 선생과 함께 저녁 시간을 보낸 적이
 잦았고, 주로 MBC에 글을 쓰던 이문근 선생과 「전설따라 삼천리」작가
민병훈 선생을 이때부터 자주 만나 대폿잔을 기울이고는 했다. 연출가
백민 선생, 「오발탄」의 작가 윤청광 선생도 ‘청계옥’과
 ‘대머리집’에서 이따금씩 만날 수 있었다.
 
대학 선배이기도 한 MBC 당시 PD
김진희 작가도 이때 만났으며, 훗날 그가 연출한
 MBC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한두 번 썼다. 「토픽하이라이트」는
 콩트 디스크자키 형식이었다고나 할까, 오승룡․정명희 두 성우가 빠른
속도로 대화를 나누면서 세계 구석구석에서 일어나고 있는 재미있는 일들을
소개하는 내용으로, 소재를 찾기 위해 매일 조선호텔에 가서 미국 성조지(星條紙;
The Stars and Stripes)를 사다가 기사를 훑었고, 당시로서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102층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보다 더 높은 110층짜리 쌍둥이 건물로 세계무역
센터를 세우게 될 것이라는 소식을 이야기꺼리로 소개한 적이 있다.
실제로 이 건물은 1968년에 착공돼 1973년에 완공됐고,
2001년 9.11 테러사건으로 무너졌다.



정보기관의 자료제공 받아


남산 KBS에 정착하면서 나는 중앙정보부
 직원들이 가져다주는 자료를 가지고 방송극본을 쓰기도
 했다. 당시 KBS 1라디오 전파를 통해 「김삿갓 북한방랑기」가
하루 두 차례(저녁 8:55-9:00, 낮 12:55-1:00재방) 송출됐는데, 이철주
선생과 최풍 선생, 그리고 김광섭 선생이 이 프로그램을 고정 집필했고, 긴급히
 내보내야 할 때가 생기면 나도 한 몫을 했다. 자료는 ‘시사통신’ 등으로, 한두 줄에
 지나지 않은 북한 사정을 원고지 열 장 분량으로 극화하는 작업이었다. 이철주
선생은 북한에서 남파됐다가 전향한 작가로서, 내 친구의 외삼촌이어서
 친근한 마음이 들었고, 최풍 선생은 경주 최부자 댁 자손으로
나를 보면 “종씨, 종씨!”하면서 잘 보살펴주었다.
 




국회의원 선거에도 나섰다가 낙선의 고배를
드는 등 동분서주했고, 작가실 바둑판과 포커판에도
곧잘 참여했던 그분이 49세로 요절했을 때, 을지로6가 국립의료원
장례식장에서 천주교 식으로 미사를 봉헌해 드렸다. 희곡작가 김광섭
 선생은 경찰 전문가로서, 방송작가협회 사무국장과 이사장까지 지낸 분으로,
방송국에 출입하실 때면 언제나 ‘완전범죄는 없다’는 등의 화제를 넉넉히
안고 오셨고, 이즈음엔 건강이 예전 같지는 않지만 협회
 행사 때 뵐 수가 있어서 고마운 분이시다.
 
1961년 5.16 직후 발족한 중앙정보부는
1980년 12월 신군부에 의해 ‘국가안전기획부’로
개편됐다가 김대중 정부에 의해 1991년 1월 ‘국가정보원’으로
개칭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러니 1960년대와 70년대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는 이 당시에는 ‘중앙정보부’가 맞다. 1970년대 초반 한때 북한에서는 6.25
동란을 남측에서 북침(北侵)했다고 집요하게 대외 홍보 선전공세를 취했다.
미국과 일본의 일부 정치학자들이 그렇게 주장하기도 했던 것인데, 이때
우리 측에서는 방송과 국립영화제작소 홍보영화 등을 통해 북한의
남침 사실을 밝혀내는 프로그램을 많이 제작했다. 나는
이 내용을 토대로 TBC 라디오에서 다큐멘터리
드라마 3부작을 집필했다.
 
 
양파 껍질과도 같은 북한과 대북방송의 종언


세월이 흘러 흘러 올해가 바야흐로
6.25전란이 발발한 지 60주년이 되고, 4.19가
일어난 지 50주년에 이른다. 그해 1960년에 대학생이 된
나는 사실 그때만 해도 남북통일은 요원한 것으로 알아들었고,
북한은 멀고도 먼 나라였다. 그랬는데, 1968년 1월 21일 김신조 등
‘무장공비 청와대 습격기도’가 있었고, 그해 가을에는 울진 삼척으로
 무장공비가 대거 침투해온 일이 있었다. 그런 후 1972년에 7.4 남북
공동성명이 발표돼 통일이 임박한 것처럼 여겨지다가, 같은 해
가을과 겨울, 남에서는 ‘유신체제’로, 북에서는 ‘헌법개정’
등으로 1인체제 강화라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고 나서도 남북 간에는 얼마나 많은
사건들이 있었던가. 2000년의 남북정상회담과
6.15선언이 있었는가하면, 올봄에는 ‘천안함’ 사태가
 발생했다. 북한을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양파처럼 벗겨도
벗겨도 껍질이 다 벗겨지지 않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남북한 간의
긴장관계에 따라 방송도 그 모습을 달리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1972년은 KBS의 대북방송이 일대 전환기를 맞은 해였다.
국제정세의 변화와 남북관계가 급변함에 따라
 이 해에 무려 여섯 차례나 대북방송
프로그램 개편이 있었다.
 
11월 4일 평양에서 열린 제2차
남북조절위원회 공동위원장 회의에서는
 11월 11일을 기해 남북한 쌍방이 상대편을 비방하는
 방송을 하지 않기로 했다. 이로써 KBS의 대북방송은 물론
다른 민간방송까지도 11월 11일을 기해 대북방송을 중지했으며,
 KBS 1라디오의 「김삿갓 북한방랑기」도 ‘북한’을 빼고 「김삿갓방랑기」
라고만 타이틀을 붙이고 주인공이 남한을 돌며 발전상을 소개하는 내용으로
 바뀌었다.“북한 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여러분의 친숙한 벗이었던
대한민국 중앙방송국 제3방송은 11일 0시를 기해 중지됩니다. 지난
11월 4일에 발표된 남북조절위원회 공동위원장 제2차 회의에서의
 합의에 따라 11월 11일 0시를 기해 제3방송은 중지되고
 사회교육방송으로 개편됩니다.”
 



대북 고별방송은 원로 아나운서 강찬선 선생이
 맡았는데, 그는 평양방송 근무 중 1.4후퇴 때 자유를 찾아
남하한 이후 서울 KBS에서 아나운서실장과 한국방송공사 이사를
 지내면서도 대북방송에 종사했고, 나와는 제1라디오의 「고요한 밤에」,
「마음의 샘터」담당자와 진행자의 관계를 오래 유지하면서 지난 시절을
 들려주고는 했다. “나로서는 마지막 고별방송을 할 때의 이런
 마음은 평생을 두고 잊을 수가 없을 것 같애.”


박창학 선생님 글

최홍목님은 kbs 남산시절.
제가 영화배우 최무룡과노래의 성좌.
프로그램을 만들 때 .작가로 함께 일했습니다.
음악프로듀서 박창학의 이거아세요, 란 책에 최무룡
에피소드 일부에!.... 최홍목씨를 이 카톡 방에서
만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모두가
이장춘이사님 덕입니다.   그리고
최홍목 형 반갑습니다.
 
카톡을 통해 소식 듣게 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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