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5년 JODK 경성방송국을 통해 일본 본토와 만주, 대만까지 연결된 방송망을 통해서 이난영의 노래가 울려 퍼졌다. 1934년 왕수복에 이어 두 번째로 이루어진 전 일본을 향한 방송이었다. 그 시절 그 방송은 별 중의 별, 스타 중의 스타만이 할 수 있는 방송이었다. 이난영은 스타 중의 스타가 된 것이다. 1935년 민족잡지 삼천리지 에서 가수 인기투표를 한 적이 있다. 이난영은 왕수복, 선우일선과 더불어 3대 가수로 인정을 받았다. 이난영이 그 시대를 대표 하는 만능 연예인 김해송과 결혼 한것은 한참 왕성한 가수 활동을 하던 1937년의 일이다.
이난영, 목포의 눈물, 목포는 항구다, 목포 시립교향악단
목포가 낳은 이난영은 대한민국 역대 가수 중에서 최고의 반열에 올라 있었던 가수이고 그의 남편 김해송은 만능 연에인, 쇼맨이이었다. 그의 오빠 이봉룡은 작사도 하고 작곡도 했으며 노래도 불렀다. 딸들은 1950년대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걸 그룹으로 이름을 날렸고 1959년 미국으로 건너가 대단한 인기를 모은 초기 한류스타 김 시스터즈다. 김시스터즈는 영자, 숙자, 애자 이난영의 세딸로 구성 될 때도 있었고 사정에 따라 영자 대신 오빠의 딸 민자가 함께 할 때도 있었다. 초기에는 국내에서 노래를 불렀지만 1959년 미국으로 건너가 라스베가스를 본거지로 활동한 후부터는 미국 유럽 등 해외에 본격적으로 알려졌다. 아들들은 김 보이스라는 이름으로 노래를 불렀다. 이난영의 가족은 모두 음악과 함께 살았다.
이난영이 부른 노래 “목포의 눈물”은 목포를 노래하지만 대한민국 사람이면 모두 사랑하는 노래이고 민족의 노래이다. 이난영은 목포에서 태어나 목포를 노래하면서 세상에 알려졌지만 모든 국민의 사람을 받는 가수다. 가정사정으로 어머니 따라 제주도에 가서 살던 중 태양극단 단원이 되어 돌아다니며 노래를 불렀고 일본에 가서도 노래를 불렀다. 여기서 오케 레코드사 이철 사장의 만남으로 더 줗은 노래를 부를 수 있었고 레코드도 취입할 수 있게 되었다.
1934년 조선일보가 공모한 문일석이 쓴 “목포의 눈물” 향토가사에 당대의 이름 있던 작곡가 손목인이 곡을 붙혀 노래를 부른다. 이 목포의 눈물이 대 히트했고 그로부터 이난영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면서 레코드사의 영입경쟁대상이 되기도 했다. 목포의 눈물은 민족의 한을 안은 민족의 노래였다. 이 노래가 히트하면서 일본 경찰이 가사를 문제삼았다. ‘삼백년 원한 품은 노적봉 밑에…’ 이 구절이 문제였다. 가사로 보면 일본으로서는 크게 문제를 삼을만한 내용이었다. 노래 작곡을 한 손목인은 가사가 ‘원한’이 아니라 남녀사랑을 상징하는 ‘원앙’이라고 둘러붙혀 어려운 고비를 넘겼다는 일화가 있다.
한참 왕성한 가수활동을 하던 1937년 만능 연예인 김해송과 결혼하면서
연예활동에 김해송의 도움을 받을 수는 있었지만 어린 아이가 생기기 시작하면서 가수활동에 많은 제약을 받기도 했다. 결혼으로부터 6.25로 김해송이 납북 될 때까지 13년간 7남매를 낳았으니 어려움은 많았다. 그러는 중에도 가수활동은 이어졌고 해방되면서 김해송이 KPK쇼단을 구성해서 활동 할때 함께 힘을 기울였다. 6.25는 이난영에게 큰 고통을 안겨주었다. 7남매가 자라고 있는데 남편은 납북당하고 집과 재산은 불타버렸다. 피난길에서 묵숨을 이어가기도 어려웠다. 피난길에서 어린 아이들은 살기위해 노래를 불렀다. 이렇게 자란 아이들이 어느정도 자라면서 제각기 자기 몫을 했고 수도가 서울로 돌아올 무렵에는 제법 활동을 했다.
1950년대 중반에 이르면서 그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고 방송 전파도 자주 탔다. KBS가 대한 공론사에 스튜디오를 만들어 1957년 7월 23일 기념 공개방송을 했을 때 대단한 환호를 받았다. 그때 이미 이름 있는 가수가 되어 있었다.
1959년 미국으로 건너가 라스베가스를 본거지로 본격적인 활동을 벌려 대 스타가 되었다. KBS는 김해송 탄생 100주년과 이난영 66주기를 맞아 2011년 4월 11일 한 시간에 걸친 특집 가요무대를 방송한 적이 있다. 김해송이나 이난영은 갔어도 그의 발자욱은 남아있고 그 노래는 오늘도 사랑을 받는다.
이난영이 1965년 4월 11일, 세상을 뜬 이래 오랫동안 경기도 파주에 머물던 혼을 2006년 3월 원래 태어났던 목포로 옮겨왔다. 이곳에는 이난영 공원이 조성되었고 또 이난영의 노래가 울려 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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