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가 컴퓨터로 업무를 처리하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초부터였습니다. 김홍 전산부장을 영입해서 사원들의 급여시스템을 시작으로 인사관리, 예산관리, 시청료, 출연료 등의 각 업무를 10여년에 걸쳐 전산화 했습니다.
KBS전산정보 종합시스템이 구축되던 때
KBS가 종합 정보시스템을 구축하기 시작한 것은 우리나라가 정보화 사회에 첫 발을 내딛던 1990년 초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필자는 1994년 1월 전산정보실장으로 부임했습니다. 컴퓨터 기술이라고는 겨우 한글 워드만 칠 수 있는 수준이어서 저도 의외로 받아 들여 졌지만 한편으로는 필자 나름대로 KBS가 현대적인 전산정보 시스템의 틀을 짜야 된다는 꿈도 있었습니다.
1991년 연세대학교 행정대학원 신문방송 고위과정 1년을 수료하면서 나름대로 그 분야의 연구를 했고 수료논문 주제를 「2,000년대를 향한 TV방송 연구」로 삼아 글을 썼습니다. 원고지 100매 정도를 쓰라는 것이었지만 너무 광범위한 주제를 선정해서 쓰다 보니 1,200매 분량의 논문이 되었습니다. 이것을 줄이고 줄여 600매정도로 해서 제출했습 니다. 그 논문을 보신 서기원 사장님이 책으로 발간하라는 주문이 있어 200권의 복사본 책을 만들어 필요한 부서나 필요한 분들에게 돌렸습니다.
도서관에 제출된 세권의 논문집은 뒤에 보니 헌책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그 영향이었는지 얼마 안 있어 본인은 전산정보실장을 맡았습니다. 저는 전산정보실장을 맡으면서 두 가지 큰 꿈이 있었습니다. 방송의 기획, 편성, 제작, 취재로부터 송출에 이르기까지 일관시스템으로 자동화 했으면 하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큰 데이터 메이스를 만들어 KBS의 모든 콘텐츠와 정보를 그 데이터베이스에 축적해서 인터넷과 연결 국내외 모든 분들이 그 데이터베이스를 활용함과 동시에 KBS사원들도 국내외의 모든 정보를 효과적으로 활용 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때까지 전산정보요원들은 각 부서가 필요로 하는 시스템을 구축 하는 것을 주 임무로 했지만 그것은 부 임무로 하고 KBS가 정보화 사회에 상응하는 시스템을 구축하고 각 분야의 시스템을 전체 시스템과의 연계를 가지면서 종합정보 시스템으로 구축해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필자가 부임하고 얼마 안 되어 홍두표사장님이 부임하셨습니다. 두 번째 만나는 날 홍두표사장님이 저에게 물었습니다.
「어떻게 해서 전산정보실장 발령을 받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필자는 마침 대학원에서 쓴 논문을 제시하면서 필자의 꿈을 얘기 했습니다. 홍두표 사장님은 바로 그거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중앙일보에서도 정보시스템을 구축해서 활용 중에 있노라고 했습 니다. (홍두표 사장님은 중앙일보 사장 재직중 kbs사장 부임했음). 필자는 전산 정보실 사원들에게 6개 분야로 나누어 과제를 주었습니다. 저의 생각을 6개로 나누어 연구를 하도록 한 것이었습니다.
종합계획을 수립하면서 우선 시급한 전국방송망을 연결할 수 있는 전산 정보 네트워크를 구성하고 새로운 보도 정보 시스템을 구축하며 문서 관리 시스템을 확립 해 나갔습니다. 57명의 전산정보 요원들로는 벅찬 일이었지만 실천 해 나갔고 전산 정보요원들은 밤. 낮 없이 이 일을 함께 해 나갔습니다. 힘들고 어려웠지만 늘 보조적인 업무만 수행하던 전산정보업무를 주도적으로 해 나갈 수 있게 되었다는 자긍심을 가지고 특히 정보화 사회의 주역이 된다는 긍지를 가지고 어려움을 모르고 실천 해 나갔습니다.
KBS 전산정보 계획은 6개월 만에 완성되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필자의 구상을 담고 전산정보 요원들에게는 최신의 컴퓨터와 필요로 하는 소프트웨어를 제공하고 3년 내에 1,000대의 PC를 공급하며 5년 내에 2,000대의 PC를 공급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전 사원수가 6,000명이었지만 교대근무도 있고 또 현실적으로 PC 활용이 어려웁거나 필요치 않은 업무도 있어서 2.000대라면 필요로 하는 모든 데스크에 PC가 갖추어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전산정보 요원은 매년 최소한 10명 이상 확보해서 우수한 전산정보요원을 확보함과 동시에 각 부서에 전산정보요원을 배치 모든 사원들에게 PC에 관한 마인드를 확산시켜 나간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때까지 모든 것이 미비하고 전 지역 국 까지 해도 200대도 안 되던 때라 모든 것이 허황된 꿈 이라고 생각하는 사원들이 많았습니다.)
홍두표 사장님에게 그 계획서를 들고 갔습니다. 200면(페이지)이나 되는 그 방대한 계획서를 속독으로 넘기곤 몇 마디 얘기를 나누시더니 돈이 얼마가 드느냐? 고 했습니다. 83억 원이 든다고 했지요. 830억 원이 아니고 83억 원이 드느냐? 는 것이었습니다. 「기초를 확고히 다지고 그 바탕위에 시스템을 구축 해 나가면 된다.」고 했습니다. 홍 사징님은「이 계획은 꼭 실현 시켜야 하는데 이 방대한 일을 사장인 나와 전산정보실장 힘만으로는 안 되고 전사적으로 해야 되기 때문에 지금 이 자리에서 전 본부장 회의를 소집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계획서를 책으로 만들어 배포해야 되고 또 다른 준비도 해야 되기 때문에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2주일이 지나 이 계획의 브리핑을 위한 본부장회의가 소집되었습니다. 사장님 임석 하에 진행되던 브리핑이 거의 끝날 무렵 사장님이 퇴장하시면서 필자에게 브리핑이 끝나고 사장실로 들어오라는 것이었습니다. 브리핑이 끝나고 사장실로 들어갔을 때 뜻밖의 얘기를 들었습니다.
「이 실장이 관재국장을 맡아 주어야 되겠네.」
팔자는 그때 현대적인 KBS 전산정보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 꿈이었고 관재국장이란 너무 광범위한 일이어서 극구 사양했습니다. 그때 KBS관재국장은 경리, 회계, 재산관리, 구매, 계약, 물품관리 등등 너무도 광범위하고 저로서는 생소한 일이라 난감했습니다. 홍두표 사장님의 인사스타일을 잘 아는 필자는 사양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잘 알았지만 마지막으로 부탁말씀 올린다고 했습니다.
「KBS 전산 정보의 꿈을 실현 시밀 수 있는 기회를 주십시오. 」「오늘 있었던 얘기는 둘이만 알고 있는 거야.」한 가닥의 기대를 걸었고 관재국장 희망자은 많았지만 결국 발령사항에는 관재국장 이장춘이라는 이름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 계획을 제가 떠났어도 실천에 옮겨 질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정보화 사회에서 필요 불가결한 것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많은 분야가 실천에 옮겨져 활용되고 있지만 그때 예산 편성 과정에서 KBS 본부장 출신 이사 한분이 종합계획의 주요 분야에 제동을 걸어서 실천이 어려웠다는 얘기를 들으며 씁쓸한 마음을 갖기도 했습니다. 저는 그로부터 KBS 관재국장을 지나며 KBS 사상 전무후무한 1,000억원이라는 현금 부채를 안았던 적이 있고 모든 수입을 담당한 업무국장을 지내면서 역시 KBS사상 2012년 오늘에 이르기가지 그 유례가 없는 1,100억원의 흑자를 보았던 적이 있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경영의 귀재라고 불리던 홍두표 선생님의 탁월했던 능력과 추진력을 늘 기억하면서 존경하고 있습니다.
1993년 사내 배구대회 경영팀 대표선수들이다. 전산정보실에 젊은 사원들이 많아 여러사람이 참여했고 전산정보실장이었던 필자가 감독을 맡았다. 앞줄 왼쪽부터 권영욱, 이원재, 왠일일가. 이름이 잘 생각이 뚝 멈추네 여자선수 박석심, 뒷줄 왼쪽부터 필자 이장춘, 김성균, 정용수,권오철 다섯번째 박규상, 000, 기억 안나는분 추후에 기재키로 함
1993년 12월 31일 각 실국별로 연 간단한 송년회, 왼쪽부터 이장춘 이성억, 김진권, 피태로, 이재학
2006년 4월 여의도 벚꽃길에서 전산정보실 사원들과 만나 앞줄 왼쪽부터 유신열, 조성명, 피태호, 뒷줄 왼쪽부터 서강원, 다른분은 생각나는대로 쓰겠습니다.
춘하추동방송 이장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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