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윤심덕과 방송인 이서구선생님 이서구 선생님이 경성방송국에서 연예프로그램을 담당하던 시절 1938년 11월 삼천리지 제10권 11호에 남긴 회고수기라는 제목의 글에서 윤심덕에 관한 글을 뽑아 윤심덕의 노래 사의 찬미와 사진을 함께 실었습니다. 윤심덕, 이서구 두 선생님은 비슷한 시기에 테어나 연예활동을 하신분들로 두분은 극히 자연스러운 친분을 유지하셨고 이서구선생님은 윤심덕의 세상 떠나심을 안타까워 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이서구 선생님이 그 시절에 쓴 윤심덕에 관한 글이어서 그때를 이해 하시는데 도움이 되실 줄 압니다. 한많은 윤심덕 이서구 (원글제목-多恨한 尹心悳 李瑞求)
나무잎을 날이니 옛 사람 생각이 소사 오롬니다. 이 글에도 당신을 언니라고 불느랴고 합니다. 「언니」를 물느지 않고 그대로 세상을 떠나갔으니 이의는 없으실 줄 압니다. 남자가 여자보고 「언니」라는 말이 몹시, 동에 닷지 않고 더욱히 나가 어린 당신 나 많은 내가 「언니」라 부르는 게 당치도 않은 소리 같었으나 어쨋든 당신과 나 사히에는.
지내왔으니 무엇이 「언니」안일 바가 있겠읍니까. 신문 기자로써 언니와 자조 맛났고 언니가 土月會에 출연할 때는 土月會 동인의 한 사람으로 또한 자조 맛났으며 언니가 마즈막 「日東」 레코 - 드에 취입을 갈 때는 문예부의 한 사람으로 같이 일을 봣는지라, 언니의 쩔분 반 생 중에 가장 파란 맡은 京城 생활에는 거의 다 내가 거림같이 따라 다녔든 것입니다!
정할 때 언니는 꿈에도 「死의 讚美」를 취입하자는 말슴은 하신 일이 없었지요. 시침을 딱 떼고 大阪까지 건너가서 急作히 조선말을 모르는 본사 문예 부원을 속이고 슬그머니 「死의 讚美」를 취입하섰지요. 언니가 세상을 떠나시고 얼마 있다가 언니가 취입하신 레코 - 드의 試聽盤이 나왔을 때 비로소 우리는 「死의 讚美」를 듯고 다시 한 번 우렀었읍니다. <87> 아니었읍니다. 李基世씨도 울고 그 부인도 우시고 나도 울고 우리의 크릅의 한 사람이든 張英涥씨도 우렀읍니다.
授恩町 奧田 사진관 3층 일실에 金우鎭군과 공허한 세상사리를 꾸미고 지내며 가끔 남창을 열고 두 분이 나란히 앉어 길거리를 내다보든 형용이 지금도 눈앞에 선합니다. 아마 지금은 천국의 창을 열고 두 분이 나란히 苦海를 나려다 보고 게실지도 모르지요.
주인공 노릇하든 생각을 하십니가. 가짜 결혼을 하고 아버지가 모른다는 죄악의 씨를 밴 주인공 그는 마츰내 세상에서 쫏긴 몸이 되야 流氷이 목슴을 깨저가는 大河도 뛰어나아가든 「안나」의 비운을 언니는 자기의 그것이나 다름없이 무대에서 우지 않으었읍니가. 세상은 언니의 행동에 흥미는 가지고 보왔을망정 귀엽게 보든 않었읍니다. 뿐만 아니라. 「밋치괭이」 「난봉패」 라는 악평을 던젔스며 여성을 존경할 줄 모르는 자, 돈만 가지면 무슨 일이든지 뜻대로 할 줄 아는 자에게 맛츰내 순정은 짓발피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학교 선생이 된 언니, 그 언니를 노리는 검은 그림자.
갓치 하랴는 애인 金우鎭군이 동경에 있거니 무엇이 부족해서 또, 제 2의 애인을 구하랴, 하섰겠읍니가. 언니는 「꿈」을 가젔섰읍니다. 음악 학원을 세우고 많은 才操軍을 모화 음악 조선의 기세를 올너 보자는 큰 포부! 언니는 검은 칠판 그늘에 제복의 처녀들을 대하야 도레미파... 를 가르킬 녹녹한 여자는 아니었읍니다. 요컨대 사무적 정적 인물이 아니라 정치적, 동적 인물이었읍니다. 그럼으로 언제든지 압날에 큰 목표를<88> 세고 「빛나는 꿈」을 품고 있든 것입니다.
그래서 언니는 세상에 익숙지 못한 발길노 「파토돈」을 찾어 다니든 것이었소. 꽃피는 절문 음악가 더욱 즐겨서 화려한 몸치장을 하고 다니는 언니를 대하는 세상의 자본가들은 언니의 품은 이상보다도 그 이상을 품고있는 언니의 홋홋한 가슴을 더 慾求했섰든 것이었소. 학교를 뛰어나온 언니의 인생은 둑 터진 보물 같기도 했었소. 黃金町에 살님을 차렸으나 마음에 없는 새 살님이 언니를 만족케 하였겠소. 털 외투도 떨드려 보왔으나... 그것이 과연 언니의 상처받은 가슴을 달냈겠으릿가. 견듸다 못하야 언니는 할빈으로 뛰어가섰지요. 「칵렡」과 「짜쓰」로 세월을 보내는 「할빈」의 등불 밑에서 얼마나 부지를 할 수 있섰겠소. 마시어도 마시어도 술은 취하지 않고 우서도 우서도 안 슲은 인생은 깃불 길이 없으니 언니는 이 때에 반다시 「死」를 직면했섰을 것이요. 그럼으로 언니가 玄海의 德壽丸에서 愛* 金우鎭군과 情死를 한 것은 두 번째 기회라고 볼 수가 있었소. 죽으랴 했으나 金우鎭군을 맛나보지 못하고는 차마 죽으랴야 죽을 수도 없었든 것이 아니었을가요.
요사히 같으면 다홍 양장을 하든, 단발을 하든, 정갱이를 내 놓고 다니든 만성이 된 세상은 거들떠보지는 않으렸만 그 때만 해도 한 옛날이라. 뒤축 높은 구쓰만 신고 다녀도 말성 거리가 되였지요. 그럴 판에 울굿 불긋이 채리고 왈가닥 달가닥 도라다녔으니 언니의 소문이 어떻게 좋게 났으릿가. 여기에 언니는 세상에 마음 없는 무리들 사히에 한 구경거리가 되고 만 것이 안일가요.
불행한 시기에 태어났음을 몹시 원통히 생각합니다. 속은 부였어도 천근의 무게가 있는 체 뒤구녁으로는 별별 주책없는 짓을 할지라도 겉으로는 많은 도사리고 다녀야 할 숙녀의 틈에서 언니만 흔자 보긴 그대로 뛰고 노랐으니 위장을 일삼는 사회에서 어찌 용납이 될 수가 있었으리까. 마음먹은 바와 세상의 일과 너모나 사히가 먼 줄을 께다랐을 대 만사는 다 - 그릇된 뒤이니 얼마나<89> 아까운 일이며 얼마나 원통하섰으릿가.
말을 나종 드렀읍니다. 세상에 슲은 노래를 취입한 가수는 하고 만켓으나 장차 죽기를 작정하고 「死의 讚美」 것입니다. 죽기를 작정하고 부른 노래 「나 죽으면 고만이라」 고 부른 구절 같은 데는 울며 부른 느낌이 듯는 이의 가슴을 울니는 이 레코 - 드를 나는 지금도 가지고 있읍니다. 오늘밤에도 이 원고를 쓰기 위해서 일부러 한 곡을 걸고서 둥클한 가슴을 주여 짜듯아 집필을 하는 것입니다. 나는 역두에서 나 「선물은 넥타이가 소원이요」 일단이 암시되였섰구료. 그나 그 뿐입니까. 말슴대로 넥타이는 사서 붙이고 세상을 떠나시었지요. 했다는 비보를 드른 지 2, 3일 후에 비로소 언니가 大阪서 사서 붙인 넥타이가 도착해서 日東 조선 문예원 일동은 두 번 거듭 눈물을 지었읍니다. 명랑하고 다감하든 언니 언니가 세상을 떠가신 지 벌서 10년이 너멋것만 언니의 이약이는 아즉도 세상에 끈이지를 않읍니다. 부대 천국에서나 몸조심해서 두 번 실수가 없이 해 주소서. 13, 10, 12.<90>
관련글 보기 영문자 클릭 윤심덕 사의 찬미 http://blog.daum.net/jc21th/17782866 한국 현대음악의 발원과 경성방송국
이서구님을 비롯해서 1960년대 이전부터 활동하던 작가분들입니다. 1, 박영만, 2.이보라, 3. 박정자? 5. 김의경?, 6. 이진섭, 7. 장수철, 8. 이서구, 11. 한석연, 12. 임희재, 13. 박화목, 15. 이호원, 16. 주태익, 17. 정순일, 18. 이경재, 20. 최요안님입니다.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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