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인물

민재호 아나운서, 그리고 미망인 민귀영(나귀영) 여사 6.25 회고록

이장춘 2012. 4. 4. 18:46

  

 

 

민재호 아나운서!

 

 

해방되던 날! 그 목소리를 통해서 해방의 소식을

전했고 조선총독부 항복 조인식 실황을 중계방송 했으며

 방송과장시절 3원 중계방송을 통해서 김구선생님 장례식실황을

생생히 알렸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해외 중계방송을 하면서 「고국에

계신 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말을 시작으로 1948년 영국 런던 올림픽을

중계 방송한 아나운서! 축구, 배구, 야구, 농구, 정구, 럭비, 육상 등 거의

 전 종목에 걸친 스포츠중계방송을 할 수 있는 아나운서였습니다. 6.25가

 나던 날 방송과장으로 방송 책임을 지고 있던 님은 그날의

 방송을 위해 피 말리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6.25로 공산군이 서울에 진입하면서

피란길에 오른 님은 그 길로 긴급히 일본에 건너가

비상수단으로 마련된 유엔군 총사령부 방송 마이크 앞에서

전쟁으로 어려움을 겪는 대한민국 국민에게 위로와 격려를 보내면서

 전쟁소식을 전했습니다.최초의 UN군 총사령부의 아나운서이자 방송국장이

 되었고 서울이 수복되면서 10월 3일부터 300W 비상송신기를 통해서 서울에서

 UN군 총사령부 방송 (VUNC)을 시작으로 이동방송을 실시했습니다. VUNC에

 홍양보 아나운서 등 방송진이 갖추어지면서 미 국무성에서 운영하던 미국의 소리

 VOA로 옮겨 방송을 했습니다. 방송사에 길이 남을 인물이고 생활인의 화술런던

 올림픽 기행장편 ‘비둘기’ 외 중 단편 소설 수편희곡 ‘청춘격양’ 방송극을

남겼습니다.  더 자세한 사항은 미망인 민구영여사의 회고록과

다음 명문자 주소를 클릭 하셔서 보실 수 있습니다.

 

 

민재호,『고국에 계신 동포여러분』을  최초로 방송한 아나운서

http://blog.daum.net/jc21th/17781092

 

최초의 올림픽 출전과 중계방송 민재호 아나운서 

http://blog.daum.net/jc21th/17780280

 

해방을 맞던날 방송국에선, 그때 아나운서들의 회고담

http://blog.daum.net/jc21th/17780902

 

한국전쟁과 유엔군 총사령부방송 VUNC의 탄생

http://blog.daum.net/jc21th/17780102

 

 

 

 

민재호 아나운서 약력

 

1916년 5월 5일 황해도 평산 출생

1940년 연희전문학교 문과 졸업(현 연세대학교)

1940년 경성방송국 아나운서

1945년 서울중앙방송국 방송계장

1946년 서울중앙방송국 연출과장

1948년 서울중앙방송국 방송과장

1950년 유엔군총사령부 방송(VUNC) 방송국장

1951년 미국의 소리(VOA) 아나운서(70년대까지)

1960년대-1970년대

미국 예일대학 한국어 강시

미국 국방 외국어 대학 한국어 강사

주한 미국대사관 정치담당관

1987년 8월 24일 별세

 

 

 

 

 

민재호 아나운서 미망인 민(나)귀영 여사의 6.25 회고록

 

 

6. 25전쟁을 맞았을 때 그때의 민재호 아나운서의

 얘기를 쓴 미망인 민귀영 선생님 감격적인회고록이 2009년

 6월 15일자 재미방송인협회에서 발행한 미주방송에 실려 여기에

옮깁니다. 미주방송이 아래 글을 실으면서 망백(望百-91세) 민 여사는

‘미주방송’에 늘 깊은 애정과 격려를 보내주고 있으며 샌프란시스코에서

 맑고 맑은여생을 보내고 있다. “민귀영 선생님 활력 넘치는 옥고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부디 건강 하시옵고 오래도록

 우리와 함께 해 주시옵소서” 라는

말을 함께 실었습니다.

 

 

 

 

6.25와 맥아더사령부방송

 

-마루 밑에 숨어 몰래듣던 남편목소리-

 

 

6.25-이날이 오면, 언제나, 저 처참했던

동란으로 가족끼리 생이별 또는 사별한 수많은

동포들의 아픔을 생각하게 된다. 그들에게 항상

신의 가호가 있기를 비는 마음으로 내 수난과

재회의 체험담을 적는다.

 

서울에서 살았던 나는 피난을 나가지 못하고

공산군 수중에 들어간 서울에서 모진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다.

나는 그때 임신 6개월에 접어들었고 건강도 시원치 않아 험난하고

정처 없는 피난길을 떠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남편은 함께 떠나자고

눈물로 설득하고 강요했으며 죽더라도 정든 내 집 안방에서 죽고 싶었다.

그 보다 더 한 것은 잘 걷지도 못하는 몸 무거운 아내와 만 세 살도 안 된

어린 딸을 데리고 남편은 단 5리를 갈 수 있겠는가. 이것은 너무나

 무거운 짐이다.“혼자 떠나셔야 해요. 함께 가다간 다 죽어요.”

나는 그의 등을 밀며 “어서 떠나세요. 하고 애걸했다.

나중에는 모질게 그의 등을 떠밀었다.

 

이것이 마지막 작별이라는 것을 서로

잘 알면서 슬프다기 보다는 처절한 작별을 했다.

며칠 안으로 세상은 싹 바뀌었다. 공산군이 서울을 메우고

 이웃끼리도 서로 믿지 못해 터놓고 대화하지 못했다. 언제 말 한마디에

 반동이라는 낙인이 찍혀 끌려갈는지 전전 할 뿐이었다. 나의남편 민재호는

해방 전부터 중앙방송국에서 10여 년간 반공방송을 했으니 이북에서도 많이

 알려졌었나 보다. 수삼일이 못되어 공산군이 들이닥쳐 집안을 삿삿이 뒤지고

 그의 행방을 대라고 을러댔다. 나는 모른다는 단 마디 대답을 되풀이했다. 사실

 나 자신이 미아리 쪽에서 은은히 대포소리가 들려오는 속에서 멀어져가는

 그의 뒷모습을 본 것이 마지막으로 전혀 그의 생사를 알지 못하니

“모른다. 는 한마디 외에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며칠 있더니 밤중에 장총을 맨 공산군 둘이 와서

 내무서인가 하는 곳으로 나를 끌고 갔다, 마루도 놓지 않은

흙봉당에 몇 사람이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나도 그 새에 끼어 앉아

흙동방을 자유로이 기어가는 개미들을 부러운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뱃속의 아이는 쭈그려 앉은 불편한 자세에 불만이었는지 계속 뱃속에서

 발길질을 했다. 그들의 심문은 한결같이 네 남편 어디에 숨어있느냐는

그것이었다. 가혹한 고문을 가하고 싶었겠지만 배가 커다한 임산부라

잘못 다쳤다 무슨 일이 터질까봐 함경도 사투리로 소리만

 꿱꿱 질렀다. 나는 모른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사실 최신식으로 거짓말 탐지기를 갖다 대어도

모른다는 말 외에는 아무것도 나올 리가 만무했다. 사실 나는

 그의 생사조차 모르고 있었다. 그 후로도 몇 번 잡혀가 모른다는 대답해

미움을 지독히 샀지만 고문을 당해 병신이 되거나 유산을 하지 않은 것은

오로지 뱃속에 든 태아의 덕분이었다. 뱃속의 아이가 어미를 살린 샘이다.

그런데 하느님이 기적을 내리셨다. 한증막 같은 여름밤, 방공호 속에 숨어

이불로 겹겹이 라디오를 싸 두르고 일과처럼 비밀리에 다이얼을 행여나

하고 다이얼을 조심조심 돌리다가 어느 날 밤 아, 남편의 방송을

들은 것이다. 강한전류에 전신이 감전된 것 같고

심장은 터질듯이 쾅쾅 방망이질을 했다.

 

그때 공산치하 서울에서는 방송을 듣는 자는

 즉석에서 총살이었다. 나는 총살을 백번 당하더라도

 춤을 추며 하늘나라로 행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이는 무사하다.”

“그이는 살아있다.”

 

나만 죽지 않는다면 다시 만날 수 있다.

남편의 방송은 동경에 있는 맥아더 사령부 UN군 방송에서

보내온 것이었다. 후에 안 일이지만 그는 무사히 남하하여 임시정부와

방송국에 초기에 자리 잡고 있던 대전에서 잠시 근무하다가 일본 동경주둔

맥아더 사령부에 전속되어 공산치하에 있는 서울에 대고 격려와 전황을 알리는

 방송을 하게 된 것이었다. 방송에서는 공산군 수중에 있는 남한의 우리를

격려 위로하고 국군과 연합군이 서울을 탈환하기위해 전투중이니

희망을 갖고 기다리면 꼭 여러분을 구해내겠다고 했다.

 

내 남편의 목소리가 아니더라도 이 방송은

내 귀에 하늘에서 내려오는 구세주처럼 들렸을 것이다.

 동란이 끝난 다음에 수많은 사람에게서 같은 감회의 말을 들었다.

이 방송은 연합군이 서울을 탈환하는 그날까지 계속 들려왔고 그 후에도

 UN군 방송은 오래 계속됐다. 공습소리가 벼락 치듯 하고 밤은 등화관재로

칠흑 같은데 하루하루를 죽음의 위협 속에서 떨며 굶주림에까지 시달려

 헛것이 눈앞에 어른거리는, 그런 가혹한 세월이 하루하루 지나갔다.

나는 순교자 같은 자세로 언제나 민재호 아내라는 이유로 이 방송

때문에 총살당한다면 기꺼이 죽을 각오로 있었다. 그런데

천행으로 초기에 그렇게 족치던 그들도 그가 확실히

 없는 것을 알았는지 나를 더 괴롭히지 않았다.

 

그러나 이 방송만 그들의 귀에 들어간다면

문제는 어마 어마하게 달라진다. 그런데 묘한 것은 소위

인민 내무서인가 하는 곳에서 설치는 공산당원들 거기에 배치된 사병과

졸병들은 해외방송을 절대로 듣지 못하도록 되어 있는 것 같았다. 평양의 간부들은

 그 방송을 알았겠지만 전쟁에서 패주하기에 바쁜 처지에 죄 없는 여자 잡아다가 죽이라고

 명령할 여가가 어디 있겠는가? 나는 눈이 움푹 꺼지고 귀신처럼 야위었으나 그래도 목숨을

 부지하고 UN군 인천상륙의 날을 맞았다. 서울은 드디어 수복된 것이다.  남편은

 개선장군처럼 돌아왔다. 재회의 감격과 그 순간의 기쁨, 어찌 형언하랴.

그이가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없었다.

 

 

 

 

그때로부터 59년이 지난 오늘 남편 민재호는

세상을 떠났고 그때 뱃속에서 불만스러운 듯 배를 차던

 태아는 지금 중년을 지난 단정한 여성으로 나에게 지극한 효성을

아끼지 않는다. 그 비참했던 6.25 동란도 나에겐 그래도 ‘해피엔딩’으로

 끝났지만 그때 작별하고 영영 다시 만나지 못한 숱한 사람들의 아픈 사연을

 이 눈으로 보고 온 나는 정말로, 정말로, 다시는 이런 전화가 내 땅을

휩쓰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절규하고 싶다.

 

 

 

 

  

 

 

 

 

 

민재호-1.w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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