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인물

아나운서 전성시대 방송의 얼굴 아나운서 실장 최승주, 강익수

이장춘 2012. 2. 20. 03:04

 

 

1949년과 1950년에 각각 KBS

아나운서로 들어와 6.25 전쟁기간 중

선배 아나운서들이 납북당하거나 VOA, VUNC등으로

파견되어 부산피난시절 아나운서가 몇 명 안 되던 때여서

 최승주, 강익수 아나운서는 전쟁 중에도 바쁜 나날을 보냈습니다.

최승주 아나운서는 서울이 수복되면서 서울에서의 방송실시를 위한

 선발대원으로 활약 하기도 했습니다. 1950년대 중반 오랜 기간

방송과장을 맡았던 송영호님이 공보실로 들어가면서

아나운서 실장이던 윤길구님이 방송과장으로

승진하고 최승주님이 아나운서실장

자리를 이어받았습니다.

 

 

1 조한긍, 2 통역관, 3 이종희 원고 번역관, 4 Straus중위

(미 극동사령부-GHQ- 심리전국 서울 파견대장),  5 변천수, 6 이종훈,

 7 경찰 8 운전수, 9 양중석, 10 최 ?  , 11 최승주아나운서, 12 김석봉, 13 이영기,

14 박광서, 15 김익모, 16 진백림 17 정유언 18 김성배

 

 

 

 

최승주 아나운서는 스포츠 중계방송이라면

종목 불문하고 중계방송을 해 보려는 의욕을 가졌고

 특히 야구와 축구 중계방송을 잘 했습니다. 1954년 5월 1일

부터 마닐라에서 열린 제2회 아시안 게임에 윤길구 아나운서와

함께 현지 중계방송을 했습니다. 이때의 중계방송은 1948년,1952년의 

올림픽 중계방송 등에에 이어서 네 번째로 실시한 해외 중계방송이었고 

엔지니어가 함께 한 두번째의 해외 중계방송이었습니다. 그러나 최승주님은 

얼마 안있어 급작스런 병환으로 세상을 뜨셨고 그 뒤를 이은 분이 장기범

아나운서였습니다. 끝부분에 전영우 아나운서의묘비문이 있습니다.

 

 

아나운서 전성시대 방송의 얼굴 아나운서 실장 최승주, 강익수

 

 

 

 

 

장기범 아나운서는최승주 아나운서의

선배로 아나운서 실장에서 밀리면서 잠시 방송국

 생활에서 물러나 있었던 적이 있지만 최승주 아나운서가

세상을 뜨면서 아나운서실장으로 복직했습니다. 장기범 아나운서가

1959년 VOA 미국의 소리에 파견되면서 선임이던 강익수 아나운서가

아나운서실장 자리를 이어받았습니다. 장기범아나운서 VOA파견, 4. 19와

그 직후의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방한, 5.16 등으로 이어지는 격변기에

강익수 아나운서의 역할을 중요했고 늘 긴장된 속에서 바쁜

일정을 보내면서 그 역할을 훌륭히 해 냈습니다.

 

 

 

 

장기범 아나운서가 2년간의 파견생활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그 뒤를 이어 강익수님이 VOA에

파견되었고 아나운서실장은 그 유명한 임택근 아나운서가 이어

받았습니다. VOA에 파견된 강익수 아나운서가 1963년 말에 돌아오면서

그 뒤를 이어 강찬선 아나운서가 VOA에 파견되었고 임택근 아나운서가

아나운실장을 맡고 있는 상황에서 강익수 아나운서는 형식상

과장이라고 불리는 국제방송국 소속 강찬선

아나운서의 자리를 지켰습니다.

 

 1958년 100여명으로 구성된 대규모 친선예술단을 구성 일본, 필리핀,

홍콩, 태국, 월남 등을 순회하며 공연 길에 올랐습니다. 오른쪽 네번째 분이

강익수 아나운서입니다. LST 해군함정 선상에서 촬영한 사진입니다. 

 

 동남아 순방 예술단이 홍콩에서 공연을 마치고

홍콩 주최측 대표와 공연관람소감을 묻는 회견장면,

오른쪽 두번째 박상진, 맨 오른쪽분이 강익수

아나운서, 왼쪽분은 김백봉님입니다.

 

 

 

 

 

이때 KBS아나운서 실장은

임택근님이었고 강찬선, 강익수님은

자리는 중앙방송국 아나운서실에 있으면서

명목상 과장으로 불리는 국제방송국 소속으로 있던

 시절이었습니다. 강익수 아나운서도 마국에서 돌아온지

얼마 안 되어 병마에 시달리다가 결국 세상을 뜨셨습니다.

그 시절 방송과정이던 장기범 아나운서가 강익수 아나운서

영전에 올리는 글입니다. 1964년 9월 1일 발행

방송지에 올라있는 글입니다.

 

 

 

 

1958년 봄 남산 중앙방송국 스카이라운지에서 촬영한

 사진입니다. 민병연 아나운서와 장기범 아나운서실장을 비롯한

아나운서들, 그리고 이승만대통령의 아들 이강석이 함께 한 사진이다.

1.최두헌,  2.유창경, 3.최세훈, 4.한경희,  5.민병연, 6.문복순, 7.황우겸,

 8.장기범, 9..이강석, 10.강익수, 이강석은 틈이나면 남산에 있는 방송국을

들렸다. 이강석과 남산의 방송인들과 촬영한 사진이 많다.

 

 

 

 

 

 1958년 장기범 아나운서가 제1회 방송문화상을

 받고 촬영한 사진입니다. 번호따라 1.최계환, 2.강익수,

3.김인숙,5.윤길구 방송과장, 6.장기범, 7.문복순, 8.민병연,

9.강찬선, 12.황우견아나운서입니다. 장기범 아나운서를 중심으로

그 전임 최승주님과 후임 강익수님은 짧은 삶을 살다가 가셨습니다. 

문학박사 전영우 아나운서가 쓴 최승주 아나운서 묘비 글을

소개 해 드리면서 오늘 글을 마칩니다.

 

 

 

 

방송에서 한 시대를 풍미하고

난세를 고고히 살다 간 최승주 아나운서

 

공중에도 길이 있어 희로애락의

메세지를 전파에 날리던

금속성 중후한 음성 마이크의

주인공 최승주 아나운서

 

환한 미소에 서민의 체취가

물씬하던 다정다감한 인간미

경신학당에서 축구로 다진 몸매

 일본 도시샤대 유학 후

서울대에서 거둔 학문의 성취

대한축구협회 이사를 지낸 명 축구 캐스터

 

50년대 KBS 아나운서 실장

일주 최승주선생의 생애 비록 짧았으나

그가 남긴 발자취는 길이 빛날 것이다.

 

-한국아나운서 클럽 회장

문학박사 전영우 지음-

 

 

 

 

1950년대 양대석(5), 최승주(6), 강찬선(7)

아나운서의 중계방송 모습으로 이운용 중앙방송국장

님을(3)을 비롯해서 송영호 방송과장(4), 한기선 기술과장(2)

서무과장(1)등 방송국 간부들이 모두 참여 한것을 보면

큰 행사였거나 아니면 방송국 행사 중계방송

인것처럼 보입니다.  

 

1956년 일본 동경에서 있은 16회 올름픽 한, 일 축구 예선전을 중계방송 하는 모습입니다.

 

부산 피난시절의 사진으로  2 이상송, 3 송영호, 5 강찬선,

 6 노천명, 7 김창구, 8 방필주, 9 김용환, 10 이상만, 11 안병원,

13 조백봉,14 강정수, 15 문시형, 17 배준호, 19 최요안, 21 강익수,

그리고 공승규, 조규택님 등이 함께 한 사진인데 오래된

사진이라 몇분은 얼굴을 확실히 기억 할 수 없어

 확인되는데로 올리겠습니다.

 

 

 

1.4후퇴로 부산에 온 방송인들이 함께 촬영힌 사진입니다.

송영호 방송과장 한영섭, 조한긍, 이근정, 조용하, 이용태기자와

조남사 연출계장, 배준호 PD, 윤길구, 홍양보 (VUNC에서 다니러 왔다가),

강익수, 양대석, 김경자 아나운서가 함께한 사진입니다.

 

 

1958년 민의원선거 개표상황을 전화취재하는 자리에 오재경 공보실장 한영섭기자,

이규일, 민유동, 송석두님과 함께 한 강익수 아나운입니다.

 

 

 

1958년 말의 아나운서들 모습입니다. 앞줄 오른쪽부터 최세훈,

박종세,임택근, 장기범, 강익수, 송영필, 이규영, 강영숙, 전영우, 황우겸,

유석춘, 강찬선, 김동만, 최계환, 유창경, 장금자, 문목순, 최두헌, 이본, 조영중,

윤영중, 이현숙, 최만린, 김준철, 한경희 이광재 아나운서입니다

 

 

강남달 기악.wma

 

강남달 기악.wma
1.58M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