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PD 김연진님을 통해본 TV방송 드라마 연출

이장춘 2011. 10. 17. 01:23

 

 

 

TV화면을 통해서 보는 드라마는

탤런트들의 연기로 나타나지만 그 이면에는

프로듀서, 연출가, 작가, 엔지니어, 조명, 음악, 소품,

디자이너, 무대를 설치하는 사람들을 비롯해서 수많은

 사람들의 힘을 모아 안방에 들어옵니다. 프로듀서는

기획, 연출, 작가의 선정 등을 통해서 프로그램의

 책임을 지고 제작에 임하고 같은 PD라도

 PD를 돕는 AD가 있습니다.

 

 

PD 김연진님을 통해본 TV방송 드라마 연출

 

 

TV방송 초기에는 프리랜서 연출자가

연출을 맡는 경우도 있었지만 요즈음은 프로듀서가

연출을 맡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드라마 PD는 드라마 연출가로

 통합니다. 프로듀서가 작품을 쓰는 경우도 있었지만 작품은 일반적으로

 전문작가가 씁니다. PD라고도 하는 프로듀서는 연출까지 맡으면서 프로그램의

 책임을 지고 있는 막중한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1965년부터 1998년까지

대부분의 방송생활을 드라마 연출을 한 김연진 PD의 경우를 통해서

 TV드라마의 변천과정과 연출에 관한 얘기를 해 보겠습니다.

 

 

 

 

김연진님이 방송국에 들어올때는

 KBS가 TV방송을 시작하던 초기로 외화이외의

 모든 방송이 생방송으로 나가던 시절,  일일연속극은 

생각지도 못했고 드라마라고는 주간으로 방송된 실화극장,

금요무대, 일요연속극, 어린이 극장의 네 편 밖에는 없었을

 때였습니다. 1964년 12월 8일 TBC동양방송 문을 연지

 얼마 안 되던 때여서 TBC에서도 어려움은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때 KBS에는 1961년 개국 때 들어온

이남섭, 임학송, 이평재, 고성원 네 분의 연출을

 할 수 있는 PD가 있었고 영화감독 정소영, 김상봉님이

프리랜서로 연출을 맡고 있었습니다. 처음 들어와 AD를

맡았을 때 같은 AD로는 김창수(가수 이미자님 부군),

유훈근 (가수 김상희님 부군), 박재민님이 있었

습니다. 모든 프로그램을 생방송으로 하던

시절이라 늘 긴장의 연속이었습니다.

 

 

 

 

방송시간에 맞추어 무대를 비롯한

모든 준비가 완료 되어야 하고 부득이한 사정으로

출연자가 방송시간을 맞추지 못한다던지 또 진행 중에도 출연자의

대사 하나라도 잘 못 나가면 바로잡을 수 없는 방송사고로 이어지며 마이크나

카메라 위치에 따라서 방송 화면이 달라지는 등 신경 쓰이는 일이 수없이

많았습니다. 밤늦은 시간에 편성된 프로그램은 방송이 나간 뒤

 뒷마무리를 하다보면 통행금지 시간이 되어 퇴근도

 어려운 상황이 되곤 합니다. 

 

이런 생방송 시절은 TV방송 7. 8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차츰 녹화방송으로 바뀌었고

그 무렵 1969년 봄 프로개편 때 처음으로 KBS TV에서

일일연속극이 탄생했습니다. 그 전에 TBC에서 일일연속극을

시도한 적이 있었지만 잘되지 않아서 일일연속극을 하는 것은

 늘 모험이었지만 언제까지나 그럴 수는 없어서 정규 프로그램에

 일일연속극을 편성하고 첫 프로그램으로 신부 1년생이 기획되었

니다. 임희재 작 이남섭 연출로 전파를 탄 이 작품이 큰 성과는 

못 거두었다 할지라도 우리나라 TV일일연속극 효시라고

 할 수 있는 역사적 의미가 부여 되었습니다.

 

 

 

이 무렵 김연진 PD는 여고 동창생이라는

처음으로 드라마 연출을 맡았고 그로부터 AD가 아닌

 PD 연출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곧이어 30회로 예정된

일일 연속극  이성재작 “행복이란 것은”이 김연진님에게 주어진

연출이었니다. 신인 PD에게 초창기의 일일연속극 연출을

 맡도록 한 것은 일종의 모험이었지만 김연진 PD는

이 프로그램을 성공리에 마쳤습니다.

 

정혜선, 김난영, 박주아, 백성희. 최불암,

이치우 등 기라성 같은 탤런트가 총동원된 이 프로그램을

 성공리에 마치자 계속 이어지는 일일 연숙극이 배당되었습니다.

“다녀왔습니다.", “사랑과 미움의 계절”, “사랑 합니다”. 등의 프로그램이

성공을 거두면서 1970년 들어 처음으로 장편 일일연속극 아버지와 아들이

 기획되고 김연진님이 이 프로그램 연출을 맡았습니다. 그때까지 30회로

끝나는 일일 연속극이었지만 150회로 예정된 장편연속극이었습니다.

 이 프로그램 역시 시청자에게 좋은 반응을 보이며 출발했습니다.

 

 

신윤생님

 

그때의 드라마 책임자였던 신윤생님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첫 작품 (일일연속극의)이 성공해야 하므로

강팀으로 구성 임희재 작 이남섭 연출로 신부 1년생을

1969년 5월 21일 첫 방송을 시작해 30회 방송했으나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다음 후속작품으로 이성재 작 이웃 사촌을 기획했지만 그것도 빛을

보재 못했다. 시기장조라는 폐지론이 대두하여 곤욕을 치루게 되어 계속 하느냐.

폐지 하느냐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작가와 연출자 선정에 여러가지 우여곡절을

겪다가 이성재 작 김연진 연출의 "행복이라는 것은" 이었다. 한회 한회

살얼음 밟는 기분으로 진행했으나 10회 넘도록 반응이 없다가

20회에 가서부터 박수를 받기시작해 드디어 성공했다.

 

 

이렇게해서 이성재 작 김연진 연출의 "행복이라는것은"

프로그램이 우리나라에서 성공한 최초의 TV일일 드라마이고 

김연진님은 성공한 일일드라마 연출의 효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프로그램이 방송되고 있을 때

 TBC의 아씨가 방송되면서 돌풍을 일으키자 김연진 PD는

 바짝 긴장했습니다. 70년 3월부터 71년 1월까지 253회에 걸쳐 방송된

 아씨의 돌풍 속에서도 한운사 작 아버지와 아들은 계속 그 인기를 유지했습니다.

아씨가 10대에서 70대에 이르기까지 한 여성의 기구한 운명을 그리면서 여성들의

 눈물을 자아낸 프로그램이었다면 아버지와 아들은 다소 남성적인 프로그램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원래 기획되었던 150회 방송을 200회로 늘려

방송되면서 KBS 장편 일일연속극 시대를 열었고 김연진님은

 이 작품으로 연출 상을 받았습니다.

 

 

 

 

 

이 프로그램이 성공을 거두면서 다른

방송국에 옮겨 오라는 제의도 있었지만 한 우물을

파라는 어며니의 교훈을 떠 올리며 KBS에서 계속해서

 일을 하고 있을 때 이남섭 작, 연출 여로가 대 히트를 하면서

 전무후무한 인기를 모았고 그 후속으로 기획된 작품 곽일로 작

 “파도”의 연출을 맡은 김연진님은 어깨가 무거웠습니다.

여로의 인기를 이어가야 하는 부담감이 있었고

그러자면 좋은 작품에 주인공 선정을 

잘해야 했습니다.

 

 

 

 

16살에 시집와서 난봉꾼인 남편과

살아가며 고난을 당하는 여자의 일생을 그린

여자 주인공은 TBC 아씨에서 인기를 모은 김희준을 생각하고

아씨가 끝나면서 행방을 찾기가 어려웠던 김희준을 찾았지만 그는

 이미 한 가정의 주부가 되어 방송출연을 완강히 사양했습니다. 가정의

 소중함을 역설하며 끝까지 응하지 않아 우여곡절 끝에 선발된 주인공이

 이효춘이었습니다. 자신이 없다던 신인 이 효춘은 예상외로 그 역을

소화했고 장민호, 천선녀, 오현경, 이치우 남능미, 민지환 님등이

열성적으로 임해서 이 프로그램은 대성하고 이효춘은  

스타가 되어 1980년대까지 그 인기를 누렸습니다.

 

파도가 히트하자 신문사상 처음으로

조선일보는 「파도의 세계 」란 타이틀 아래

 상업성이 난무하는 TV극계에 던진 신선마를 몰고온

문제의 작품으로서 시청을 권유하는 사설까지 등장했고

그해 KBS 연예대상에서 작품대상을 받은 세종대왕을

제외하고여우 주연상을 비롯해서 7개 부문을

 석권한 영광을 기도 했습니다. 

 

 

 

 

 

1970년대까지 훌륭한 작품을 내 놓은

 김연진님은 1980년대가 되면서 예능부장, 예능국장등

 간부가 되어 연출현업과 멀어졌지만 간부보다도 직접 연출에 임 해

보겠다는 김연진의 뜻은 1990년 10월부터 방송된 대 히트작 서울뚝배기를

내 놓았습니다. 그해 10월부터 방송된 김운경 극본 김연진 연출 “서울 뚝배기”를

아직도 기억하시는 분이 많으실 줄 압니다. 3대째 가업으로 설렁탕집을 경영하는

 집안에서 일어나는 얘기를 엮은 드라마  서울 뚝배기는 오지명을 주인공으로

 주현, 서승현, 도지원, 길용우, 최수종, 김애경 등 이름있던 탤런트들이 출연

했고 건달 역을 맡은 주현씨의 ”....걸랑요. 와 마담역 김애경씨의

 “실례 합니다아.....," 하는 코 맹맹이 소리가 장안의

 유행어가 되었던 서울 뚝배기였습니다.

 

 

 

 

“그여자”, “몽실언니” 전원일기“,

 ”한 지붕 세 가족“ ”충청 가왓 골“ 등 MBC 드라마가

 안방을 점령하고 있을 때 서울 뚝배기는 시청률 40%를 오르

내리면서 늘 MBC에 뒤져있던 KBS 9시뉴스의 시청률을 획기적으로

 높여 주었고 그로부터 9시 뉴스가 방송되기 전의 드라마 중요성이

 인식되면서 KBS는 8시 반 드라마에 총력을 기울여

위상을 확립 해 나갔습니다.

 

 

유경환(유카리나) 여사님 글

 

제가 처음으로 기억하는 T.V. 드라마는

 '파란 눈의 머느리'라는 오현경씨와 김순철씨가

 주연으로 나오던 드라마였습니다. 그후 10년 가까운

 세월은 그시절 고국의 매체는 지금과 달라, 두절된 채로

 살았지요. 그러다가 귀국하여 살면서 '서울 뚝배기'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지요. 지금도 그렇지만 그저 주연급 탈렌트

이름이나 겨우 기억하는 정도이지만, 김애경씨의

 "죄송합니다......ㅇ하는 것은 아직도

기억에 남는군요.

 

 

   

  

 

 

 

 

 

 

 

 

위는 김연진 첫 연출 프로그램 1969년 "행복이란" 을

마치고 촬영한 사진으로  김연진 PD를 비롯해서 정애란,

김난영,  정혜선,  백성희, 김성재, 김무영,  박주아,  이치우, 

최길호,  최불암, 김채무 등 낮익은 얼굴이 보인다. 아래는 1986년

예능국장 시절송년파티장에서 촬영한 사진으로 왼쪽부터 김수동,

김홍중이해욱(이진욱), 김연진, 이유황, 김재형, 임형두,

하강일로 일명 왕 PD로 통했다.

 

 

 

빙우회 이사 춘하추동방송 이장춘

 

 

금사향의 홍콩 아가씨.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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