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최초의 방송국 경성방송국으로 부터 KBS로 이어진 방송국, 연주소가 6.25때 폭파되고 임시연주소를 만들어 사용하다가 남산으로 옮겨지기 전까지 유일하게 우리나라 방송을 보내드리던 곳 정동방송국은 190평의 좁은 대지에 주로 송신시설이 있던 지하 63평과 지상 2층으로 부속건물 36평을 포함해서 모두 287평이었고 1층과 2층이 각각 94평으로 정원의 공간이 비좁았습니다. 뜰 안에서 방송국 전경을 촬영하기가 어려워 인근의 높은 지역에서 촬영을 해야 전경이 다 나왔습니다. 방송을 할 수 있는 스튜디오는 2층에 24평의 제 1연주실과 열 평짜리 제2연주실이 있었고 그 중간에 지휘실이 있었습니다. 지휘실은 지금의 주조정실과 비슷한 역할을 했습니다. 1933년 제2방송을 하면서 건물을 증축해서 5평짜리 스튜디오 하나가 늘었고 또 1939년 조선방송협회 건물을 새로 지어 회장실이나 일부사무실이 옮겨가면서 1941년부터 두개의 스튜디오를 증설해서 5개의 스튜디오가 되었습니다.
사진으로 본 정동방송국의 스튜디오와 그때의 방송모습
위의 사진은 뉴스를 하는 스튜디오 안의 모습으로 (사진은 윤길구 하나운서-손주 윤병주님 제공) 아나운서 탁자 옆에는 레코드를 걸고 방송을 할 수 있는 턴테이블이 있었고 탁자 앞에는 마이크와 함께 조정판이 있어서 아나운서가 이 조정판을 조작하면서 방송을 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또 탁자 위에 노여있는 차임벨을 두들기며 시보를 알려 주기도 했습니다. 조정판 키를 VOY에 놓으면 음성이나 차임벨 소리가 마이크를 통해서 나가는 것이고 레코드를 내 보낼 때는 마이크를 끄고 레코드를 내 보내며 레코드와 말을 동시에 내 보내려면 믹서쪽으로 키를 젖히고 방송을 하게 되어있습니다. 아나운서 로서는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때로는 기계를 잘 못 만지다가 방송이 잘 못 나가는 경우도 종종 있었습니다. 1945년에 방송국에 들어온 조봉순 아나운서 (유명한 드라마 작가 조흔파)가 1956년 월간 방송지"실패한 방송"이라는 제목으로 재미 있는글 한편을 올린 적이 있습니다.
-1956年* 月刊 "放送" 지에서-
女子아나운서中에 이영옥(가명)이라는 美人이 있었다. 그는 나하고 사랑하는 사이였기 때문에 내가 "뉴스"를 마치면 곧 放送室로 들어와 레코드를 걸어 주곤 하였다. "스위치"를 "레코드"라는 쪽으로 돌려놓으면 "마이크"와의 接續線은 絶斷되고 "레코드"만이 나가는 것이었고 "믹스"편으로 돌려놓으면 "레코드"와 "마이크" 가 같이 나가게 마련인데 어느 날 "뉴스"를 끝낸 나는 영옥양이 들어와 주는 게 感激하여 "레코드"로 돌려놓을 "스위치"를 그만 "믹스"쪽으로 돌려 놓고 말았다. "레코드"소리가 나는 것을 들은 영옥양은 安心하고 내게다 말을 건네는 것이었다.
「참, 수고하셨어요. 점심은 제가 한턱 낼 테니 같이 나가세요. 네?」
나는 "스위치"에 無關心한체 흐뭇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오늘은 내가 내죠.」
「돈 갖은것 있으세요?」
「없습니다.」
「없으면서 뭘 그러세요.」
「돈은 없지만 외상으로…….」
「호호호. 우스워 죽겠네. 오늘도 제가 내겠어요.」 「그게 상식적입니다.」 「호호호」 「하하하」
나는 늘 그에게서 점심을 얻어먹었다. 요즈음 젊은 여성들처럼 남자만 보면 돈을 꾸어 달라는 그러한 영옥이가 아니었다.
「점심 먹고 德壽宮에 散步라도 갑시다.」
「좋아요.」
이때 방송과장이 조급히 방송실로 뛰어 들어오더니 "스위치"를 "레코드"쪽으로 돌려놓고 나서 눈을 흘긴다. 우리는 효과음악까지 넣으면서 연애극 한 막을 방송한 셈이 되었다.
1947년 5월에 아나운서 직을 떠난 조흔파님이 그 직을 떠난 지 10년 가까이 지나 쓴 글이지만 방송을 하는 아나운서들이 방송실에서 기계를 조작 하면서 생긴 재미있는 한 토막의 글이었습니다.
지금과는 방송실 구조가 전혀 달랐습니다. 방송 초기에는 방송국 스튜디오도 좁고 방송국 뜰도 비좁아서 큰 공개방송이나 행사는 소공동에 있던 경성공회당에서 했고 1934년 부민관이 문을 열면서 부민관 등 외부 시설을 활용했습 니다. 에어컨 등 냉방시설이 있는것도 아니어서 스튜디오 에서 방송을 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때 방송국에 근무하셨던 이혜구선생님의 기록을 봅니다.
남쪽 층계로 2층에 올라와서 오른쪽 초록색 휄트를 두둑하게 댄 두 겹 문을 열고 거기가 바로 제1방송실이다. 커다란 텅 빈 방 한구석에 있는 그랜드 피아노는 그 방에서 양악이 방송되는 것을 가르쳤고 맞은편에 있는 오르간 한 대는 주인을 잃고 외따로 남은 듯 하였고 또 한구석에 노여 있는 바람효과 내는 틀은 거기서 방송극이 방송된다는 것을 일러주었다. 그리고 시계 밑에 있는 축음기는 단 한 개의 턴테이블 밖에 없는 것이었고 그것은 주로 라디오 체조방송과 영화 해설방송에 사용되었다.
그때 해설자는 소용되는 레코드를 대 여섯 장 책보에 싸가지고 축음기 트는 조수에게 들려 왕임 하였다. 이 텅 방안에서 기생 아가씨가 혼자 방석위에 앉아서 소리 할 때도 있었다. 한번은 여기서 이런 일도 있었다. 고 한다. 중년신사로 요릿집 출입도 잦았던 방 씨는 방송국원으로 있었지만 몸 보하는 살모사니 점박이니 여러 가지 독사를 그의 출근 처 까지 찾아와서 사라는 단골 땅 군을 가졌던 만큼 여유가 있는 인사 이었단 가 보다.
그 분이 아나운서 테이블 위에 놓인 스위치 보오드의 스위치를 “ON'에다가 돌려 놓은 채로 방송개시의 신호불만 우두거니 기다리다가 그 침묵이 어색하기에 자기 맞은편에 장고를 앞에 앉고 소리하라는 눈짓만 고대하고 있는 기생에게 무심코 "요릿집에서는 신중헤월이라고 부르다가 여기서는 신중해월씨하고 씨자를 붙여주다니 참 내신세도 딱하게 되었구나. 라는 말을 사사로 던지고나 서보니까 지금 자기 신세타령이 어느 틈에 벌써 방송으로 나가서 만천하에 퍼져버리고 말았다는 이야기였다..........중략..........
다다미방으로 꾸며진 제2방송실에는 방석이 한구석에 올려 싸였고 거문고, 가야금, 양금, 장고, 북이 혹은 섰고 혹은 누워있었다. 삼복중에 옆문을 닫친 이방세서 소리하는 기생은 보기에 참 딱하였다. 곱게 분바르고 때때옷을 입은 기생이 요릿집에 불려가서 놀다가 한번 이 한증막 같은 방에 들어와서 30분 소리하고 나면 땀으로 그 얼굴과 옷을 버리고 만다. 특히 힘줄이 솟아나온 목을 길게 빼고 흔들며 심청전을 내 지르는 남도기생은 여름에는 한층 더 더워보였다. 적삼을 벗어놓고 소리하는 기생도 한번 보았다. …….그야 물론 속적삼은 입었지…….이혜구님이 그때의 스튜디오에서 방송하는 모습을 실례를 들어 실감 있게 써 놓으셨습니다.
위 사진은 제1스튜디오에서 합창하는 모습입니다. 그 좁은 스튜디오에서 20여명의 합창단원들이 노래 부르는 장면이 인상적입니다. 서울 상업은행 합창단이 1949년 9월, 정동 방송국에 출연해서 촬영한 사진이으로 야구선수였던 전세진님과 최명순, 정봉래님등이 출연했습니다. 스튜디오 안에서 방송하는 모습을 촬영한 것도 인상적이지만 맨 위의 사진에서 보는 합창단원들과 은행직원 30여명이 비좁은 방송국 앞뜰에서 촬영한 사진은 보기 드문 사진입니다.
정동방송국 옥상에서 촬영한 사진 그 주변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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