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공간의 방송

해방공간 1945년 9월의 방송가와 KBS 콜사인, 방송의 날

이장춘 2011. 9. 2. 04:07

 

 

해방공간 1945년 9월의 방송가와 KBS 콜사인

 

편집자 註 : 1945년 8월 15일 해방은

되었지만 해방정국의 어수선함으로 우리 방송은

 9월이 되어서야 자리와 모습을 갖추어 가기 시작한다.

당시의 기록 등을 중심으로 이장춘 회우(전 사우회 부회장)

 1945년 9월의 우리나라 방송가 상황을 정리했다.

 

 

 

 

이글은 2011년 9월 KBS 사우회보에 기고한 내용입니다.

위 편집자주는 사우회보 펀집자가 쓴 글입니다..

 

춘하추동방송 지장춘.

 

 

 

 

9월 3일은 48번째로 맞는「방송의 날」이다.

국제무선통신회의인 ITU가 대한민국 호출부호를 HL로

정한 것을 기념한 날이다. 그러나 이「방송의 날」이 10월 2일에서

바뀌는 한차례 우여곡절이 있었다. 우리나라 방송이 호출부호 HL을 사용

하기 시작한 첫 날은 1947년 10월 1일이다. 그런데 1964년 방송의 날을 10월

1일로 정하는데 는 현실적 어려움이 있었다.  바로 국군의 날과 겹쳤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하루를 늦춘 10월 2일로 정했지만 실제로

호출부호를 사용한 날도 아니고 또 국군의 날과 개천절

 (10월 3일) 사이이다 보니 주목 받기도 어려웠다.

 

1964년부터 공보부가 실시 해 오던

 방송의 날 행사를 한국방송협회가 인수하면서

이런 사정을 고려해서 10월 2일보다는 호출부호 HL을

배정받은 9월 3일로 하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의견에 따라

1978년부터는 지금의 9월 3일로 바뀌어 시행되고 있다. 그러면

 한국방송공사라는 법인명보다 훨씬 더 널리 알려진 영어 약칭 KBS는

 언제 어떤 경위로 사용되게 되었는가? 우리나라가 처음 방송을 내 보내던

1927년 2월 16일부터 호출부호는 "JODK", 방송국 명칭은 사단법인

경성방송국이었다. 당시에 영어약칭은 없었다.  JO는 일본의

호출부호이고 DK는 일본에서 네 번째 세워진

 방송국을 의미 하는 것이었다.

 

 일본은 JO가 일본 본토에서만 사용되는

호출부호라며 조선에서는 사용 할 수 없다고 했지만

우여곡절 끝에 JO를 썼다. 1933년 4월 26일 이중방송의 실시와

 지방방송국 확장계획을 수립하면서 사단법인 경성방송국은 사단법인

조선방송협회로 확장 개편되었다. 1935년부터 방송을 시작한

지방방송국 명칭은 소재지 지역명에 방송국을 붙이면

 되었지만 호출부호는 논란 끝에 JO가 아닌 JB가

 설립 순에 따라 A. B. C... 로 부여되었다.

 

해방될 때까지 지속되었던 이 호출부호는

 해방 다음날부터 달라진다. 8월 15일은 그대로 넘겼지만

16일 출근하면서부터 우리말 방송을 이어왔던 직원들은 방송국

명칭부터 새로 정해서 현판을 걸자는데 의견을 모았다. 그때 정해진

이름이「서울 라디오 스테이션」이다. 「경성 중앙방송국」간판은

그대로 두고 우선 문제안 아나운서가 스스로 먹을 갈아 합판에 영어로

SEOUL RADIO STAITION」 이라고 써서 현관에  걸었다. 그런데

워낙 급하게 써 걸다 보니 STATION이라고 써야 할 것을 I자가

더 들어가는 바람에 다시 썼다는 뒷이야기도 있다.

 

간판을 건 그 자리에서 방송국 간부와

 직원이 지켜보는 가운데 문제안 아나운서는 이혜구

 제2보도과장으로부터 "오늘부터 기사 취재에 임하라"는

 구두 발령을 받는다. 이것이 대한민국 방송기자 1호의 탄생

이었지만 그때는 그것이 무슨 의미를 지닌 것인지도 잘

 모르고 열심히 취재만 하러 다녔다는 회고담을

들려준다. (문제안 92세 생존)

 

어수선한 해방공간에서 8월 16일

건국준비위원회가 방송국 접수를 요구해 오면서

 한 차례의 실랑이가 있은 후 17일에는 일본군이 방송국을

점령한다. 그 후 일본군은 9월 8일 밤 미군 선발대가 방송국에

들어올 때까지 방송국직원을 마치 포로 대하듯 했다 고 한다. 9월 8일

인천을 통해 들어 온 미군은 9월 9일 오후 4시 중앙청에서 이배 총독으로부터

 항복서명을 받고 일장기가 내려진다. 그날 오후 5시부터 경성방송국 제1

방송에서 우리말 방송이 시작되고 이때 KBS 콜사인이 채택

되었다. 그때 그 상황을 이끌었던 문제안 기자와

이덕근 아나운서의 기록을 인용한다.

 

 

문제안 선생님 말씀 중에서

 

 

 

 

"실로 감격적인 순간이었습니다.

‘땡’ 하고 도쿄에서 오는 오후 5시 시보가 들어오기

 시작해요. ‘꺼버려!’ 하고 제가 외쳤습니다. 누군가 달려들어

 스위치를 끊고, 윤용로(尹用老) 아나운서가 스튜디오에 들어가

 ‘한국말 방송은 이제부터 제1방송으로 방송 합니다’ 하고

 마이크에 대고 알렸습니다.”

 

 

이덕근 선생님 기록 중에서

 

 

 

 

이날(1945년 9월 9일)이 방송국으로서는

가장 뜻 깊은 날이 되었다. 하오 4시에 한국인 직원들이

 일본인 직원들에게 제1방송과 제2방송의 지휘를 바꾸자고

 요구한 것이다. 그런데 ”일본인 직원들은 그런 명령은 미군만이

할 수 있다고 고집을 부려 약간의 말성이 있었다. 높은 언성이

 오갔는데 여기에 화가 난 내가 "기미라 이쓰마에 간바루

쓰모리까" (“자네들 언제까지 버틸 것이냐?") 고

한마디 하자 그때서야 고개를 푹 숙였다.

 

이때가 5시로 뉴스시간이었다.

제1방송은 동경에서 오는 시보와 뉴스를 받고

있었는데 일본인 직원들이 아무 말 못하는 사이에 한국인

직원이 제1방송실로 뛰어 올라가 시보가 울리는 것과 동시에

뉴스를 끊고 우리말 방송을 해냈다. 때를 놓치지 않고 이혜구씨가

 제1방송과 제2방송을 바꾸는 절차를 서식으로 확인하자고 요구하여

 즉석에서 미농지에 대고 문안을 만들고 일본인 직원이 서무과에서

 도장함(函)을 갖고 와서 찍었다. 이혜구 과장이 먼저 부른 사람이

 문제안씨였다. 이 서류를 체신국에 제출하고 오라는 것이었다.

이렇게 하여 1927년 2월 16일 일본말로 시작되었던

경성방송국이 우리방송으로 되어 방송된 것이다. 

 

 

 

 

 

9월 9일에 지금까지 쓰던

 

 "JODK" 콜사인은 물론 "서울 라디오

 

 스테이션"의 명칭도 없애고 새로

 

 "KBS" 콜사인을 채택했다.

 

방송국이 한국인의 손에 넘어오자

경성 중앙방송국장 겸 조선방송협회 기술부장이던

 일본인 시노하라는 전국 각 지방방송국을 향해 "여러분

이제 한국은 독립했습니다. 여러분은 이 시설을 하나도 

상하지 않게 한국 사람에게 넘겨주어야 합니다."고

 과학자다운 말을 했다.

 

방송국을 인수받은 이혜구씨는

 "우리는 일제를 위해 방송을 했다. 단죄를

 받아야 한다." , "정말 주인이 나타날 때까지 이 시설을

잘 보호해야 한다." 면서 직원들을 격려하여 좌익에서 기도한

방송국 접수 책동을 여러 번 막아냈다. 8.15직후 귀국한다고 부산으로

갔던 일부 일본인이 다시 서울로 와 아직 많은 일본 사람이 있으니

 방송으로 편의를 봐 달라고 하여 한국어 방송 뒤에

일본말 방송을 끼워주기도 했다.

  

JODK라는 (일본이 정한) 국제 호출부호가

 없어져 버린 상황에서 "KBS"라는 콜사인을 채택했어도

이것은 약자로 썼을 때의 얘기고 약자의 원어는 어떠했는가.

1945년 9월 9일부터 1947년 9월 말까지 임시로 사용된 국제간의

 콜사인은 "This is the Key Station of the Korea Broadcasting

 System. Seoul. Korea"라고, 긴 영문이었다. 여기에서

 KBS 라고 하는 영어 약칭이 시작된다.

 

이때는 15분마다 이 콜사인을 넣었다.

 방송 프로그램이 30분짜리이면 15분이 지난 후

프로그램을 잠시 끊고 중간에 이 콜사인을 넣었다.

(지금 생각하면 무선통신규칙에 충실한 나머지 청취자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던 셈이다.) 지금은 한국방송공사

정관에 "KBS"는 Korea Broadcasting System“

약자임이 명시되어 있다.

 

경성 중앙방송국 호칭은 언제까지 썼던 것일까?

 

정확한 기록이나 얘기를 들려줄 분은 없다.

군정청이 1945년 9월 14일을 기해서 경성 표기를

서울로 바꾸도록 일괄조치 했으므로 이때부터 서울중앙방송국

호칭을 썼을 것으로 본다. 1953년 8월부터 약 4년간 서울 지방방송국

이라고 부른 적이 있다. 지역방송국은 해당 지역 명에 "방송국"을

 붙이면 되는 것이어서 따로 생각 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1945년 9월 9일부터 제 1방송이나

 제2방송 모두 우리 방송이 된 것이지만 50Kw

대 출력은 2차 대전 중 전파관제로 사용하지 않다가

 해방되어 방송하려고 했을 때 사용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4개월여에 걸친 보수공사 끝에 그해 12월 25일부터

 방송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 글을 보신 벽산 우제탁님이

다음과 같은 메일을 보내 오셨기에 옮겼습니다.

 

 

사우회보에 실린 글, 이제 완전히 방송 사학자, 매우 뜻있고 유익한 글이군요.

사실 그간 몇 년, 우연히 방송역사 관련문제에 남다른 관심 탐구, 연구 기록정리 발표,

그 정성, 시간, 얼마? 연로 한 문 제안씨 등을 그간 그토록 예우? 가깝게 대 하면서 자료 수집 등 ,

그럼으로써 후배 안니 모든 사람들이 연로한 방송선배를 예우. 인정할 수 있는 계기, 이유도 되고,

그간 수고도 많았고, 앞으로 영원토록, 특히 방송인들에겐 공히 인정받은 사학자 ,공로자,

이제 모두가 인정하는,"역사를 무시 하면 내일도 없다 " 이 말을 무시하는 사람 없을 것

우리들 모두가 그 성의 대견히 생각하고 있어요. 앞으로 계속 유감없는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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