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공간 방송인 생활고와 방송기술인들의 파업
8월 15일 해방으로 일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는 했지만 사람들은 당장 먹고 살기가
어려웠습니다. 방송국에서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1945년 11월에 입사한 노정팔님이 첫 봉급으로 100원을 받았는데 그때 한달 하숙비가 100원이라고 했고 그 뒤로도 물가는 엄청나게 치솟았으니그 생활을 집직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어렵기는 모든 직원들이 마찬가지였지만 1946년 3월 29일 방송국 제도가 개편되어 방송기능은 군정청에 속하게 되고 기술이나 업무분야는 조선방송협회에 남게되니군정청 소속 직원들은 다소의 식량 배급도 나오고 다른 먹을거리도 나와 기본적인 생활은 유지 되었지만 조선방송협회에 남은 기술인이나 업무요원은 생활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해방공간의 무정부상태에서 청취료도 제대로 들어온것이 아니다 보니 극한상황에 이르렀습니다. 이렇게 되자 방송기술자들은 생활이 되지않은 속에서 방송을 더 이상 할 수 없다고 1946년 4월들어 일손을 놓았습니다. 연희송신소에서 부터 일이 벌어져 연희송신소는 20명의 직원이 하던일을 소장과 계장만 남아서 방송을 지속하기에 역부족이었습니다. 기본적인 생활이 유지될 수 있는 봉급을 책정 해주거나 하루에 쌀 두 홉씩만이라도 배급해 달라는
것이 이들의 요구였습니다. 이때 조선 방송협회에 속해있던
방송국직원들의 생활은 비참했지만 이를 들어 주려는 사람은
없어 사태가 점점 확대 되면서 1946년 8월에는 연주소의
조정과 직원들까지 파업에 나서게 되었습니다.
여기저기서 기술자들을 긴급히 차출해
방송은 내 보냈지만 어려운 상황은 계속 되었고
방송인들의 생활개선은 어려워 정과장 이남용님을 비롯,많은 기술인들이 방송국을 떠나 때마침 새로 창설된 국립 경찰과 국군을 창설 할 때 통신 분야의 초석이 되었습니다. 이 무렵에 방송국 기술을 떠난 이남용, 김두식,
이인화, 이상훈, 조준기님등은 경찰통신 분야로 자리를옮겨 이남용님은 경무관으로 경찰통신 총책이 되셨고 검찰통신과
정보통신 분야에도 혁혁한 공을 새웠습니다. 이남용님은 뒷날 서울시민회관 관장으로자리를 옮겨 재직 중 1972년 시민회관 화재 시에순직하셨습 니다. 김두식님도 경무관이 되어 통신과장과 지방경찰국장 등 요직에 올랐으며 경찰 창설 때 경찰 통신의 초석이 되신 분들은 모두 총경이상으로 이인화, 최동권, 이종록, 이상훈, 조선기님등이 계셨습니다. 심긍구님을 비롯해서 심상웅, 이천기, 정일모,신상운님등은 군을 창설 할 때 통신장교로 부임했고, 심상웅님은 육군 장성으로 육군 통신감을 지냈습니다
방우회 이사 춘하추동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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