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우회·독립운동

방송역사의 현장 첫 방송터와 유허비

이장춘 2011. 4. 11. 20:49
 

 

 

 

19세기 조선이 개방되면서 미국, 영국, 러시아,

불란서 등의 공관이 들어서고 배제학당과 이화학당, 제일고녀,

덕수 소학교 등 학교가 세워졌으며 정동교회, 영국 성공회, 구세군 등

종교시설이 자리잡으면서 새로운 모습으로 변해가던 서울의 중심지 정동에

이 땅에서 처음으로 방송국이 세워져 1927년 2월 16일! 첫 전파를 내 보냈습니다.

 이날 오후 1시 서울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 정동 1번지! 조선을 창건한 태조

 이성계가 그토록 사랑하던 강비가 세상을 뜸에 왕궁 경복궁에서 바라다

보이는 곳에 능을 마련하고 정릉이라 했던 곳, 유서 깊은 정동

 1번지에서 이왕직의 땅 190평을 빌려 경성방송국을 짓고

첫 정규방송이 시작되었습니다

 

 

 

 방송역사의 현장 첫 방송터와 유허비 
 
 

 

 

 

1950년의 6.25전쟁으로 방송국을 잿더미가 되어

흔적을 찾아 볼 수게 되었고 그 터는 인근의 조선일보사와

덕수 초등학교에 흡수되었습니다. 역사적인 첫 방송국은 그 흔적을

찾을길이 없게되어 누구도 돌보는 이가 없었을때 원로방송인들의 

모임인 방우회 (한국방송인 동우회)는 그 자리에 유허비를

세워 그 역사적 의미를 기리기로 했습니다.

 

 

 

 

방송인들이 성금을 모으고 지금은 덕수 초등하교

교정이 된 비탈진 옛 방송터의 언저리에 유허비를 세우기로 해서

원로방송인들이 한자리에 모여 뜻 깊은 첫 삽을 뜬 것은 1987년 5월의

일로 이때는 첫 방송을 내 보낸지 60년이 되던 해였습니다.

 

 

 

 

방우회 회원님들을 비롯한 방송인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1,200만원의 성금이 모아지고

1950년대 KBS 아나운서를 지낸 당시의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장

 최만린 선생님의 설계로 세워진 유허비는 1987년 9월 3일 제막식을

가졌습니다. 제막식에는 경성방송국 시절부터 방송을 해 오셨던 원로방송인

들을 비롯해서 많은 전, 현직 방송인들이 참여 해 주셨고 경성방송국 시절 일본인

여자 아나운서 고가님과 방송설립으로부터 해방 될때까지 경성방송국에 재직

하면서 마지막 경성 중앙방송국장을 지낸 시노하라님의 아들 부부가 

일본에서 참여했습니다.  시노하라님은 제막식

바로 전에 세상을 뜨셨습니다.     

 

 

 

 

 유허비 후면의 동판에 세겨진 비문에는

기념비 건립의 취지문과 함께 기념비 건립때 마음을

 모으신 분들의 성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작고하신 분

가운데 최초로 방송국 건립에 임한 노창성님과 일본인

시노하라님의 성함도 새겨져 있습니다.

 

 

 

 

이 자리에서 한국의 방송전파가

처음으로 퍼져 나갔다. 비록 우리말을 끝내

지키겠다는 굳은 다짐을 가슴 깊이 감춘 채였으나, 여기서

비롯된 우리 방송 전파는 우리 손으로 우리 배달겨레를 위해서

힘차게 자라, 앞으로 한가람 푸른 물과 마뫼 높은 바위가 마르고 닳도록

겨레의 마음을 실어 하늘 높이 그리고 멀리 쏘아 올려야 한다. 그 뿌리를

 잊지 않고 더욱 더 빛내주기 바라는 마음에서 여기 첫 방송 터에

비를 세워 오래 오래 기리고자 한다.

 

1987년 9월 3일 방우회장 문시형

 

비문에 세겨져 있는 글입니다.

당시의 방우회장 문시형님은 이때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습니다.

 

비문에 남긴 깊은 뜻을 되새겨 볼 필요도 없겠으나

겨레의 마음을 싣는다는 큰 뜻을 우리는 깊이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고 보매 오늘의 방송인 특히, PD의 좌우명이 되지 않을 수 없다고 본다.
'첫 방송터' 기념비 이야기를 꺼낸 김에 한가지만 더 강조해 보고자 한다.
너비 5m 30Cm, 가로3m가 넘는 기념비 건립은 그야말로 문자 그대로

 퇴역방송인의 자발적인 성의로써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출연금에 대한 상한선도 없고 하한선도 없었다.
단 한가지 조흥은행 계좌번호 344-1-008009 방우회란

저금통장 하나가 방우회 회원들에게 알려졌다. 단돈 5,000원에서

 백만원에 이르는, 형편에 따라 '첫 방송터' 기념비 건립 기금이 모아져

그 금액이 무려 1,200만원에 이르렀다. 연인원 122명의 퇴역방송인이

뜻을 모은 것이다. 방우회장이라기 보다 한 PD의 아이디어가

퇴역방송인의 공감을 불러 일으키고 참여의식을

고취시킨 결과이다.

 

 

 

 

1999년 유허비를 찾아 첫 방송터를 돌아본

방우회 회원님들의 모습입니다. 우리나라 방송기자 1호이신

 문제안선생님을 비롯해서 지금은 세상을 뜨셨거나 건강상 나오시기

어려운 몇분의 회원님 모습도 보입니다. 2010년 첫 방송터를 찾던 그날은

 KBS에서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영해 부사장님을 비롯한 사원들이 나와

주셨고 당일의 KBS뉴스와 KBS저녈 6월호에 특별 보도를 해 주셨습니다.

그때 힘을 기울여 주신 김명성부장님과 박제헌님, 남궁돈님에게 고마운

말씀 올립니다. 아울러 다음 명문자 주소를  클릭하시면 2010년

6월호 저널의 첫 방송터 내용을 보실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 첫 방송국 터를 가다 / 시청자 속으로

 http://blog.daum.net/jc21th/17780735

 

 

올해의 행사는 4월 23일 오전 11시부터

첫 방송터 유허비가 있는 덕수 초등학교 교정에서

있을 예정입니다. 광화문 전철역 6번 출구로 나오시면

현장에 가시기가 편리합니다. 도보로 약 7-8분정도의

거리입니다. 방우회 회원이 아니셔도 뜻 있으신

분의 많은 참여를 바라고 있습니다.

 

 

경성방송국 관련 사진을 올립니다.

 

 


 

 

덕수궁 석조전 동관 넘어로 우리나라 최초의 방송국인
경성 방송국과  안테나가 보이는 사진입니다.  방송국 옆에 영국공사관이

보이고 석조전 서관 넘어로는 러시아 공사관이  보입니다. 석조전 서관, 분수대,

옮겨진 광명전으로 보아서 일제강점기 말에 찍은 사진으로 보입니다.

한, 독 수교 125주년 사진 전시회에서 공개된 사진입니다.

 

 

 

 

 대전 김점석님이 보유한 사진으로 KBS사보에서

공개했습니다.1950년 9월에 촬영된 사진으로 지금까지

 발견된 정동방송국 마지막 모습이라고 했습니다.

 

 

 

 

위, 아래 사진은 일제강점기에 엽서로 발행된

사진입니다. 앞 건물은 구세군 건물인데 엽서를 보신분들이

 이 건물을 방송국이라고오인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오른쪽은 영국 공사관 왼쪽은 덕수학교입니다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애국가 (구).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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