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우회·독립운동

대한민국 첫 방송국 터를 가다 / 시청자 속으로

이장춘 2011. 3. 7. 20:11

 

 

 

 대한민국 첫 방송국 터를 가다 / 시청자 속으로

 

 

오늘 글은 2010년 5월 8일에 있었던

첫 방송 터 기념행사를 계기로 KBS 홍보실

김명성부장의 현장취재와 남궁돈기자의 촬영사진으로

작성되어 2010년 6월호 KBS저널에 올린 글입니다.

저는 한국방송인 동우회 (방우회) 이사자격으로

이 취재에 도움을 주었습니다.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덕수궁 길을 따라 정동교회,

구세군 사관학교, 대한성공회, 영국대사관,

영국문화원, 이화여고가 다닥다닥 붙어 있는 곳.

그래서 어느 곳보다도 우리 근현대사가 살아 숨쉬는 곳.

바로 그곳에 대한민국 방송의 첫 울림 터, 경성방송국이

자리하고 있다.   그러나 흔적이라곤  초등학교 운동장

귀퉁이에 작은 탑이 유일하다. 주변에 사는 주민들도

 첫 방송 터라는 사실조차 잘 알지 못한다.

 

글. 김명성 + 사진. 남궁돈

 

 

 

 

굴절된 역사의 현장인 첫 방송 터

 

경성방송국은 일본인 자녀들이 다니던

정동덕수초등학교 위쪽 언덕에 위용을 드러냈다.

1926년 기공식을 시작으로 그해 12월에 완공됐다. 고층

건물이 없던 당시, 전파의 송수신이 용이한 언덕에 지어져

그 일대에서 가장 돋보이는 건물이었다. 경성방송국 신입

사원들은 웅장한 방송국 건물 앞에서 압도되기도 했고

또 그만큼의 강한 긍지를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나라 방송의 역사는

 굴절된 근현대사를 고스란히 안고 있다. 1927년

 식민지였던 이 땅에도 총독부 주도로 경성방송국에서

첫 전파가 발사됐다. 호출부호 JODK. 그러나 총독부는

한국인에 의한 설립을 불허한 채 조선총독부 체신국

산하 ‘사단법인 경성방송국’을 설립했다.

 

우리말 외면, 경성방송국 경영난

첫 단추가 이렇게 끼워진 경성방송국은 우리말과

일본어의 비율을 1대3으로 편성했다. 일본어 해독인구는

 백 명 중 여섯 명꼴이었기 때문에 라디오 방송의 호감도는

 높을 수가 없었다. 비싼 라디오 가격도 방송 외면에 한몫했다.

라디오 구매비용은 6원에서 15원, 확성기를 통해 듣는

진공관식은 40원에서 100원, 여기에 한 달  청취료는

 2원에다 전지 값도 월 2원에 달했다.

 

 쌀 10㎏이 3원 20전이던 점을 감안한다면

 우리나라 청취자들이 크게 늘어날 리가 없었다. 따라서

 경성방송국은 청취료 수입이 빈약해 경영난에 빠져들게 됐다.

당시의 신문기사는 경영난의 일단을 이렇게 표현했다.

 

‘...경비부족으로 말미암아 난관이 첩출하고...

조선인 청취자는 현재 600명이 있기는 있으나 매일

프로그램이 거의 일본말로 하는 것이므로 날마다 줄어드는

 현상이라더라’(동아일보, 1927.5.21)

 

일제탄압에 맞선 방송인들의 저항

경성방송국이 경영난의 늪에서 벗어난 계기는

우리말 방송과 일본말 방송을 따로 내보내는 ‘이중방송’을

개시한 뒤부터였다. 1934년 우리말 방송이 본격 시작되자

가입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이때부터 우리말 강좌와 민요, 국악,

동요가 전국에 퍼져나가면서 경성방송국이

우리말과 얼의 지킴이로 자리매김하게 됐다. 하지만

일제는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을 거치면서 우리말 방송을

 심하게 통제했다. 경성방송국에 근무하는 한국인들은

민족의식으로 이에 맞섰다.

 

대표적인 사건이 1942년 단파방송 밀청사건.

한국인들은 ‘외국 단파방송 청취금지령’에도 불구하고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내보내는 ‘미국의 소리’의 한국어 방송을

 몰래 듣다가 방송인 150여 명을 포함해 300여 명이 체포됐다. 일제가

 엄격하게 금지한 외국 단파방송은 당시 긴박하게 돌아가는

국제정세와 임시정부 소식, 일본이 일으킨 전쟁 상황 등

 고급정보를 알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다.

 

많은 방송인들이 숱한 고문을 당한 뒤

징역형을 받게 된다. 탄압과 통제는 1945년 8월 15일

 경성방송국을 통해 일왕의 항복을 알린 ‘중대방송’으로 마침내

종말을 고한다.  한국전쟁 때 파괴, 역사의 뒤안길로 해방과 함께

수도의 명칭이 경성에서 서울로 바뀌면서 경성방송국도

서울중앙방송국으로 변경됐다.

 

일제의 군가로 우렁찼던 방송은

 아리랑 가락으로 바뀌었다. 직제와 기구가 개편

되고 1948년 정부수립을 계기로 우리나라 방송은

 완전히 독립된 모습으로 비로소 역사의

전면에 나서게 된다.

 

그러나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방송국은

완전히 파괴된다. 전시방송은 경성방송국 터 바로

옆에 있는 방송협회 건물에서 다급하게나마 재개됐지만

 목조건물이어서 밤마다 방송국 근처의 개 짖는 소리가

뉴스에 타고 들어가는 어려운 형편이 계속됐다.

 

동족상잔의 비극 속에 폐허가 된

서울중앙방송국 터는 전후 복구가 활기를

띠는 가운데 1957년 남산에, 1976년 여의도에 자리를

내주면서 서서히 자취를 감추게 된다.

 

 

방송 터 복원은 방송 사랑의 시작

한국전쟁 60년이 지난 오늘 경성방송국 터는

어떤 모습일까. 어딘가에 있었을 법한 진입로

방송국 표지판은 찾아볼 수 없다. 문이 잠긴 음식점

안쪽에는 상하수도 요금 체납고지서만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방송국 터 바로 아래 덕수초등학교

 운동장에도 교실과 체육관이 잇달아 증축됐다.

방송인들이 지난 1987년 뒤늦게 세운 탑이 방송 터를 알리는

 유일한 증표다. 그러나 그 탑마저 운동장 위쪽 귀퉁이에

덩그러니 세워져 오르기조차 위험스럽다.

 

원로 방송인 이장춘(李長椿)

한국방송인 동우회 이사는 탑 비문에 담긴

방송 사랑의 염원을 후배 방송인들이 마음에

새길 것을 강조한다.‘....

 

 

여기서 비롯된 우리 방송전파는

 우리 손으로 우리 배달겨레를 위해서 힘차게

자라나 앞으로 한가람(한강) 푸른물과 마뫼(남산) 높은

바위가 마르고 닳도록 겨레의 마음을 실어 하늘 높이

그리고 멀리 쏘아올려야 한다. 그 뿌리를 잊지 않고 더욱더

 빛내주기 바라는 마음에서 여기 첫 방송 터에

비를 세워 오래오래 기리고자 한다’

 

원로는 역사의 뒤안길에 있는

방송 터의 복원이 선배 방송인들의

 초심을 잇고 내일의 방송을 끌어가는

힘이라고 힘주어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