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될 때까지 서울에 경성중앙방송국이
있었고 전국에 17개개의 지방방송국이 있었습니다.
이 가운데 이북에는 평양을 비롯해서 청진, 원산, 함흥,
해주, 성진, 시의주등 7개의 방송국이 있어서 경성중앙
방송국과 방송망이 연결되어 있었고 해방후에도
잠시 동안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해방당시의 전국 방송국의 모습을
모아 보려고 했지만 북한의 방송국은 사진이
3개 방송국밖에 없어 그것을 올렸는데 청진방송국은
1945년 8월 13일 폭파되어 산산조각이 되었으므로
해방 될때는 이미 그 모습은 사라졌습니다.
평양방송국
일찍부터 상업이 발전하고 교육수준이 높았던 평양은
중국에서 오는 강령한 전파의 영향을 받은 지역이어서 이에대한
대비책으로 일찍부터 방송국 설립을 서들러 1936년 4월 10일 호출부호 JBBK,
주파수 820Khz, 출력 50Kw로 시험방송을 실시했히면서 평안남도 대동군
오야리에 평양방송국을 지어 500Kw방송을 실시하게 되었습니다.
시외에 있던 방송국은 뒤에 평양시내로 옮겼습니다.
청진방송국
동북 북단 소련과 가까운 거리에 있었던 관계로
이곳에는 처음부터 10Kw방송국에 세워져 1937년 6월 5일
개국과 동시에 호출부호 JBCK, 주파수 82Khz로 방송되었습니다.
해방직전 8월 13일 소련군이 들어 오면서 폭파되어
해방 당시에는 그 모습을 감추었습니다.
함흥방송국
북부 동해 연안의 흥남을 앞에 두고
급격히 발전하는 도시였지만 서울과 청진사이의
전파취약 지역이어서 비교적 일찍이 방송국이 설치외었습니다.
1943년 8월 호출부호 JBDK, 주파수 1050Khz, 출력 250Kw로 방송되었고
초대방송국장에 사업부장으로 있던 노창성님이 부임하게 되어 최초의
조선인 방송국장이 되었습니다. 이때 기술과장으로는
한덕봉님이 부임했습니다.
원산방송국
1943년 7월 15일, 호출부호 JBJK,
주파수 660Khz, 출력 50Kw로 방송되었습니다.
뒤에 세워진 강능출장소는 뒷날 남한의
강능방송국이 되었습니다.
해주방송국
서울과 평양사이의 전파 취약지역이어서
비교적 일찌기 방송국 문을 열었습니다. 호출부호
1943년 8월 호출부호 JBKK, 주파수 800Khz,
출력 50Kw로 방송되었습니다.
신의주 방송국
신의주 시내의 넒은 가옥 한채를 접수해서
그 마루에 방송장비를 설치하고 1943년 8월부터
방송을 실시했습니다.호출부호 JBLK, 주파수
600Khz, 출력 50Kw로 방송되었습니다..
성진방송국
청진방송국이 잘 들리던 지역이었지만
전파관제를 실시하면서 난시청지역이 되어
1943년 11월에 방송국이 설치되어호출부호
JBPK, 주파수 600Khz, 출력 50Kw로
북한에 소련군이 들어오면서 남북간의
방송회선은 절단디어 남북이 갈라졌습니다. 소련군
원산 상륙은 8월 20일이고 평양에 도착 한 것은 8월 22일
이었습니다. 8월 26일부터 북한방송의 송. 수신이 끊어졌습니다.
남과 북에 편의상 미군과 소련 군대가 나누어 들어온다고 해도 처음에는
남과 북이 갈라질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않았고 방송이 끊어질것이라고는
생각지도 않을 때여서 8월 26일부터 남. 북간에 연결된 유선선로가
끊어지고 북한에서 서울방송이 중계되지 않았을 때
회선 중단 상태가 지속 되면서 북한방송을
모니터도 하고 검토도 해 보았으나 몇일이 지나도
북한방송에서는 여전히 서울방송이 중계되지 않았고
소련군의 진주소식과 환영방송을 되풀이 하는 등 몇 일간
그런 상태가 지속되면서 북한에서 서울방송을 일부러
받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때는 남한에
이런 상태로 시일이 지나다가 9월 말부터
북한에 임시정부가 선다는 방송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북한의 추이를 평양방송을 통해서 알게 되는 그야말로 민족비극
남. 북 분단의 싹이 트고 있음을 알았고 그로부터소련은 계획된 시나리오를
실천 해 가고 있었으며 방송은이미 정통성이 사라져 버리고 스타린과
그 앞잡이 김일성을 우상화 시키는 도구로 전락되어 마침내
6. 25민족 비극으로 이어지고 오랫동안 남. 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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