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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방송 청사 변천으로 본 90년 방송역사

이장춘 2011. 3. 23. 10:43
 
  

 KBS 방송청사 변천으로 본  90년 방송역사

 

2011년 2월 16일은 우리나라 방송이

문을 연지 84년이 되는 날이고 1924년 12월

시험방송을 실시한 날로부터 87년이 되었습니다.

그 기간 중 방송청사도 여러 모습으로 변했습니다.

정동방송 시절, 부산 피난방송시절, 정동 임시청사

방송시절, 남산, 여의도 방송시절로 이어졌습니다.

이 기간 중의 KBS방송청사 모습들을 보며

방송역사를 회상해 보았습니다.

 

 

 
 시험방송 시절의 조선총독부 체신국 모습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정식 방송을 시작한 것은

1927년 2월 16일이었지만 이에 앞서 1924년 11월부터

시험방송을 시작하고 2005년 봄부터는 방송양은 적었지만

정규 방송처럼 시간과 요일을 정해서 정기적으로 시험방송을

실시했습니다. 지금의 통신공사자리였던 옛 총독부

체신국에서 했다고 했습니다.

 

 

 

 

1927년 2월 16일 오후 한 시!
JODK 경성방송국 정규방송의 첫 전파가

발사 되던 곳 정동 1번지! 그 마루턱에 아담하게

자리 잡고 있던 그때 정동 방송국은 숱한 화재를 뿌리면서

방송역사에 첫걸음을 내 딛었던 곳! 이곳이 KBS 전신인 경성방송국

 JODK였습니다. JODK의 D는 일본  방송 중에서  도꾜,  오오사카, 나고야에 이어

네 번째로 설치된 방송국임을 의미 했습니다. 이곳 정동은 방송이 비교적 잘 퍼져

나갈 수 있는 부지 중 에서 구하기 쉬운 부지로 이왕직의 땅 190평을 임대받아 지은

건물이었습니다. 건물은 개국 두 달 전인 1926년 12월 5일 준공한후 이중방송

실시를 위해1933년 증축 했습니다.  송신철탑은 45미터씩입니다. 

경성방송국은 1945년 해방되면서 KBS 중앙방송국으로

 바뀌어 1950년 6.25로 폭파 될 때까지

이곳에 있었습니다.
 

 

 

 

위 사진은 2층에 있던 제1연주실로

공개방송등 주요방송을 하던 스튜디오

이고 아래는 정문에 있던 경성

방송국 간판입니다.

 

 

 


이 정동일대의 옛 지명은 경기도

고양군숭인면  정능리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태조  이성계의 계비 강씨의 묘를 이곳으로

정하고 그 묘 이름을 정릉이라고 한데서

 유래 됐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송신기 등

 기계실과연주실을 옮겨놓은 JODK

 방공호 전면 모습입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방송소, 연희 송신소

전경입니다. 초기 1Kw송신 단일방송시절에는

정동 연주소에서 전파를 송신했지만 1933년 4월 26일부터

10Kw 송신소를 설치하면서 우리말과 일본말의 2중방송을 실시

했습니다. 연희송신소는 일제강점기의 1937년 50Kw로 증강

되었다가 1955년 100Kw로 늘려 1971년 500Kw소래

송신소로 이전될때까지 방송을 송출했습니다.

 

 


연희송신소의 50Kw송신기입니다.
 

 

1950년 뜻하지 않은 6.25전란으로

6월 27일 자정을 지나 방송국에 있던 숙직자들은

 멀리서 들려오는 총소리를 들으면서 정동 방송국을 떠나

 피난길에 오르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대전방송국에

잠시 머무른 후 대구를 거쳐 부산방송국에

 짐을 풀었습니다. 

 

 

1935년에 세운 초기 부산방송국

 

 

건평 115평밖에 안되던 부산방송국에는  

전국의 많은 방송인들이 모여서「전시방송」에 밤을

지새우며애환을 함께 하던 곳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잠시

있었지마는1.4후퇴로 이곳에서 두 번째  짐을 풀었을 때는

 1951년 1월부터 1953년 8월까지 2년 7개월을 부산에서

피난살이를 했습니다.   그때의 피난살이가 어찌 

 했겠습니까? 한 많은 부산 피난살이의

현장이었습니다.

 

 

3층 목조건물로 된 정동의 임시방송 연주실

 

 

 1953년 부산 피난살이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왔지만 원래의 방송시설은 폭파되어

그 모습을 감추었음에  1937년에 건립한 지금의 조선일보사

부근에 새웠던 조선방송협회 사무동을 방송실로 개조해서 임시

방송연주실로 사용했습니다. 연주실이 좁아 공개방송은 동화백화점이나

대한공론사 3층에 240석에 이르는 연주실을 만들어 (1957년 7월 개관) 활용

했습니다.빠른 시일 안에 새로운 방송국을 새우려고 했지만 잘 안되다가 

1956년 오재경 장관이 부임하면서 그해 12월 15일 남산에 터를 잡고

연주소 건물을 세워 1957년 12월 10일 제1방송을 옮겼습니다.

1281평의 대지에 연건평 815평의 연주소가 당시로서는

현대식 방송시설로 남산의 새 명소가 되었습니다.  

 

 

 

 

정동에 남아 있던 제2방송과는 5.16후에

국제방송국으로 새로 태어 나면서 남산방송국 옆에

있던 원자력원 건물을 인수해서 기존의 남산 연주실과  연결해서 

사용하고 또 그 무렵 TV방송을 새로 시작하면서 모름지기 방송의 남산시대를

 열었습니다. 위의 사진은 1957년 12월 남산방송국 신청사 준공 테잎을 끊는 이승만

대통령의 모습이고아래는 국제방송국까지 남산으로 옮겼을때의 남산 라디오 연주소

전경입니다. 남산 연주소의 원래의 터는 웨성대라고 해서 일본 통감부가 있었고

한, 일합방후에는 총독부로 쓰다가 1926년 총독부를 광화문으로

옮긴후에는 과학관 등으로 쓰던 건물이 있었습니다.  

 

남산 연주소는 우리 손으로 설계해서 우리 힘으로

 완성시킨최초의 라디오 스튜디오 이며 1950년대 후반 그리고

1960년대라디오방송을 꽃 피우게 한 산실이 되었습니다. 남산 연주소를

설계하고 건물을 세우는 등 시작부터 끝까지 노력을 아끼지 않으셨던

한기선님의 글이 방송인물 한기선님 편에 있습니다.

 

 

 


 5.16이 나고 TV방송실시를 서둘면서 남산의
라디오 연조소 길 하나 건너에 TV방송연주소를 건립하고

1961년 12월 31일 TV방송을 시작 했습니다.

 

 



KBS-TV의 남산청사 모습입니다.

남산 청사는 라디오나 TV나 오재경 공보처 장관의
결단의 산물이었습니다. 아래사진은 남산 TV 제1스튜디오 모습

 입니다.남산 TV방송국의 원래 터는 일본인이 세운 동대원사 절터로

해방후에는 민청등이 쓰던 건물이었으며 6.25후에 한양교회가

있던 건물을 헐고 여기에 TV방송국을 세웠습니다.   

 

 

 

 

 

 

 

현재의 KBS 여의도 청사는 1973년

KBS가 공사로 발족하던 그해에 시작되어 1976년

10월부터 이곳에서 방송을 했고 1976년 12월 1일을 기해서

준공식을 가졌습니다. 위 사진은 준공식 때의 모습입니다.

준공식때의 동영상 한편을 보시겠습니다. 
 

 

KBS 여의도사옥 준공식때의 동영상 / 1976년 12월 1일
 

 

 

 

 

 

이 여의도 청사는 처음 위 사진의

  본관만 있었으나 아세안 게임과 88올림픽을

계기로 아래 국제방송센터를 새로 지어  KBS 신관이라고

부릅니다.  여의도 시대에는 칼라방송이 처음 실시되었고 지역

방송국에서TV방송이 실시되었으며 난시청 해소 등을 위한

 시설들이 전국각지에 새워졌습니다.

 

 

 

아래 건물은 KBS별관이라고 부르는 건물로 1980년 방송통폐합으로 KBS건물이 되었습니다.

 

 

 

송신소의 변천과정을 보시겠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던 최초의 연희방송소의

모습입니다.부산 피난시절에는 아래 사진에서 보시는

 동래송신소가 있었지만소출력으로 청취권역이 좁아 전시중에

대구와 대전에 10Kw출력의송신소를 세웠습니다.

 

 

부산 피난길에서 돌아온

중앙방송국은 연희송신소를 보수해서

10Kw, 50Kw로 방송하다가 1955년

100Kw로 증강되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송신소 연희는 1971년

500Kw 대출력의 소래송신소에서 전파를 발사하면서

그 임무수행을 완료했고 쓸 수있는 시설은 다름곳으로 옮겨

활용되었습니다.  위, 아래 사진은 소래송신소 모습으로

 송재극님이 제공 해 주셨습니다.  

 

서울의 직할 송신소만 해도

1962년에 준공된 남양의 500Kw 대출력을

비롯해서 수원(폐소), 당진, 김제, 화성, 김포, 제주

등지에 대출력 송, 중계소가 있고 또 전국 각지에 지역방송국의

송, 중계소가 있지만 이런 시설들은 다른 곳에서 얘기

했으므로 여기서는 생략하겠습니다.    

 

 

 

 

 

 

TV방송의 주된 송신소는 처음부터

남산에  새우고 영상 2Kw,  음향 1Kw

방송 하다가 10Kw (실재로는 12.5kw)로 늘렸고

지금은  50kw로 방송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옆의

작은 안테나를 이용 했지만 1971년에 남산 타워가

 새로 새워지면서 송.수신의 주된 

안테나를  옮겼습니다.

 

 오늘날의 서울 명물이 된 남산타워는

해방전 조선방송협회 시절부터 부산방송국에

근무하다가 1959년의 부산MBC를 비롯해서 서울 MBC,

TBC등을 세우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면서 방송경영의

귀재로 불리웠던 정환옥님이 1968년 한국전파 탑 주식회사를 

설립, 남산 타워를 건설해서  방송사들의  송신시설을 이곳에 모으고

오늘날의 관광명소를 탄생시켰습니다.   이 시설은 여러가지 사정으로  

1975년 체신부로 이관 되었습니다. TV송신소 역시 관악산이나 용문산

등지에 서울 직할 송, 중계소가 있고 전국 지역방송국에도

수많은 송, 중계소가 있으며 위성방송등으로

TV방송을 송울하고 있습니다.

 

 

 

 


방송시설의 변천사가 우리나라 방송사를

비롯해서 우리나라 현대사의 축소판 같은 느낌을 줍니다.

1945년 일제하에서 벗어났지만 곧 이어 좌우대립 이라는 이념분쟁에

 휩싸이고 마침내 북한의 남침으로 빚어진 6.25전란은 나라를  잿더미로

만들면서 방송시설은 폭파 되었습니다. 그 위에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고

지난 40-50년 동안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를 지나 정보화 사회에

접어들면서 세상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또는 내면적으로나

외면적으로나 엄청난 변화를 가져 왔습니다.

시대는 바뀌면서 
국민의 가치관은 

 변해 버렸습니다.방송도 새로운 시대에 맞게

변신하려는 노력을기울이고 있습니다. 시대에

걸맞는 방송. 국민에게 사랑받는 방송으로

커가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1980년대 초 여의도 청사앞에 선 KBS간부 사원일동 앞줄 오르른쪽부터

손영호, 정순일, 이덕주, 이원홍, 김수득,차종호, 윤혁기, 김광식, 그리고 순서관계없이

송재극, 조찬길, 이동린, 채유석, 신윤생, 박미정, 김은구, 최장훈, 정종표, 변형하,배학철.

박진우, 김현국,장한성, 양휘부, 서정원, 조창화, 박중길, 장영국, 원철재,

김학영님 등의 모습이 보입니다.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