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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초기 이면사 -방송사 연구가 유병은님 글 -

이장춘 2011. 3. 16. 10:19


 
 
 
방송초기 이면사 -방송사 연구가 유병은님 글 -
   

 

 

 

 

 처음 방송국을 새울 때  노창성과 한덕봉

 

 

 '한국의 마르코니 환국(還國)하다' 이 말은

 한덕봉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한국방송의 모체인 '사단법인
경성방송국'을 건설하고자 할 때, 한덕봉은 해외를 항해하고 있던
중이었다.  그는 세계일주 항해를 여러 차례 한 바 있는 1급 무선통신사로,
단독으로 송 · 수신기를 책임지고 다룰 수 있는 능력이 있었으며,
또 외국어에도 능통하여 한국방송 건설에 한덕봉을
영입(迎入)하기로 된 것이었다.
 

 

 

그가 제물포항(祭物浦港·현 인천)에 입항하고
 서울에 입성(入城)할 때에는 큰 환영을 받았다. 경성방송국이
 정식으로 개국하기 2년여 전부터 실험방송을 했는데, 이때는
방송의 주무관청에 현직관리로 있었던 노창성이 50w 소 출력인
 간이 방송시설을 설치하는 공사를 전담한 것이었다.
  
노창성은 일본 구라마에(藏前)공과대학교
전기과를 졸업한 사람으로, 라디오에 관한 한 뛰어난
능력의 소유자였다. 노창성은 건장한 체구와 부지런한 성격으로,
주야불철하고 불고가사하면서 방송시설의 설치공사를 직접
주도한 사람이기도 했다. 한덕봉과 노창성 두 사람은
우리나라 방송기술의 대명사와도 같았다.
 
비록 1kw 밖에 안 되는 미약한 방송출력이었으나,
 그 위력은 실로 경탄할 만했다는 것이다.  정규방송이 나가고
한국민요 등이 전파를 타고 방송되자, 가정에서는 너무 신기하여
 마법상자에서 소리가 들린다고 환호성을 올렸다고 한다.
 

 

 

여러가지 어려운 고비를 넘기며 정규방송을
 시작했으나, 라디오 수신기의 등록대수는 극소수이고
라디오의 가격이 매우 비싸, 부유한 사람이 아니고는 구입할
 능력이 없었다. 당시는 청취료가 유일한 방송운영의 재원이어서,
재정난에 허덕이게 되자 노창성과 한덕봉은 우선 진공관 없이도
 방송을 청취할 수 있는 싼 값의 광석식 라디오를 만드는 법을
 가르쳐주는 '라디오 무료 강습회'를 개최하였다.
 
강습료가 무료인데다가 광석식 라디오를
만드는 재료만 구입하면 손쉽게 방송을 청취할 수 있는
 터이어서 이 모임은 대인기였다. 신청자가 쇄도하여 국민학교 교실을
 빌어 사용할 정도로 대성황을 이루었다. 이 에 힘입어 라디오
등록대수도 점차 늘어나서 눈에 띄게 증가되었던 것이다.

 

 
애프터 서비스 제도 만든 노창성

 

또 노창성은 일찍부터 라디오 청취자에 대한
 서비스 제도를 창안해낸 뛰어난 아이디어의 소유자였다.
그는 요즘과 같은 애프터 서비스제도로 순회진료 제도를 만들어
고장난 라디오를 고쳐주었다. 또 라디오병원이 흔치 않던 시대에
 라디오상담소를 설치하는 등 청취자에 대한 봉사로
 청취자수를 늘려나가는 기발한 착상들을
 창출해내기도 하였다.
 
 

 최초의 방송인 노창성님과 아나운서
이옥경님은 부부였습니다.

 
기술자인 노창성은 개국공신(開局功臣)으로서,
또 기발한 아이디어 창출의 공을 인정받아 함흥방송국 국장직에
발탁되었으며, 그 후 조선방송협회 사업부장의 요직에 승진되면서
참사(參事)의 서열에 오른바 있었고,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에도 
공보처 방송국장에 보직된 후 초대 방송관리국장으로
재직 중 지병으로 사망하였다. 기술자로는 최고로
출세를 했던 인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
 
한편 한덕봉은 자그마한 체구에 인자하고
 빈틈없는 성실한 성격으로 만인으로부터 존경의 대상이
 되었던 덕인(德人)이었으나, 굳이 흠을 꼬집어내자면
 박력과 추진력이 부족하다는 점이었다.
 
그는 늘 정장으로 차려입지 않고,
앞단추가 네개 달린 멋쟁이 콤비차림을 하고,
머리는 상고머리형으로 깔끔하게 하고 다니는
특이한 마도로스 풍의 사람이었다.
 
그의 방송기술은 대전력 송신기술면에서는
 특별히 두드러지지 않았으나, 폭넓은 박식형의 방송
기술자였으며, 특히 방송현업 기술간부로서는 한마디로 빈틈없고
확인 또 확인을 되풀이하는 완벽주의자였다. 필자는 1943년부터
 1944년까지 녹음중계반에서 같이 일해본 적이 있는데, 너무
꼼꼼한 성격과 완전무사고로 방송을 운영하라는 엄격한
지시에는 진땀을 흘린 경우가 많았다.
 
한번은 서울운동장에 경성 대 평양 축구시합
중계를 나갔다가 돌아와 보니 리시버 한 개가 없었다.
경기가 승부가 나지 아니하여 연장전까지 했기 때문에
날이 저물었던 탓으로 리시버를 분실한 듯 했다.
 
그의 불호령이 떨어져, 나는 리시버를 찾기 위해
무려 3일 간이나 서울운동장 주변을 헤매야 했다. 결국 시말서를
 써서 제출하고 용서를 빌었다. 나는 지금도 한덕봉의 그 꼼꼼하고 정확한
 업무수행 태도가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 있는 터이며, 그때 그로부터 배운
 방송현업에 대한 철학이 아직도 내 몸에 남아 있는 듯하다.
 
한덕봉은 성실성과 꼼꼼함을 인정받아,
평양과 함흥 두 방송국의 기술과장직에 발탁된 바 있었으며,
그 후 8·15 해방까지 중앙방송국 기술과의 부과장으로 재직하다가,
해방 후 일본인들로부터 전국방송기술을 인수받은 한국인 네명 중의
 유일한 기술자였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에는 기술국장으로,
혼란기의 방송기술 총책임자로 재직하다가, 6·25 사변 때
납북되어 생사조차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얼음으로 스튜디오 냉방  

 
무더운 삼복 중에는 스튜디오 안이 마치 찜통과 같다.
그래서 한덕봉과 이남용 등 원로 기술자들은 고심 끝에 얼음 덩어리를
 방송실 안에 놓아두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생각해냈다. 당시는 에어콘이니
 하는 말은 생각지도 못했던 때이고 제빙공장도 눈에 띄지 않던 시절이라,
겨울철에 한강에서 톱으로 채빙(採永)하여 지하창고에다 보관했다가
 여름철에 사용하던 때였다. 당시 스튜디오는 밀폐형으로
전혀 통풍이 안되는 완전 방음형이었다.
 
여름철에 민요방송을 하기 위하여 기생(妓生)들이
목청을 돋우어 창을 부르는데, 모시 저고리가 마치 냉수를
뒤집어쓴 물제비와 같이 흠뻑 젖어 남자아나운서들의
 눈요기가 되기도 했다.
 
운영난에 허덕이던 당시로서는 값비싼
큰 얼음덩이를 매일같이 여러 스튜디오에 놓아두는
 비용도 수월치는 않았다. 실험방송 시대부터 연희송신소가
 생기기 전까지는 아주 소수의 직원으로 방송현업이 운용되었다.
한 건물 안에 지하실에는 송신기, 발전기, 축전지 및 배전 설비가 있었으며,
 2층에는 지휘실 (조정실)과  방송실이 있고,   송신공중선과 '카운터 포이스'
 접지시설까지 모두 동일 건물 내에 시설되어 있어 현업기술과에 근무하던
 몇 사람 안 되는 직원으로 꾸려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무렵의 선배 기술진은 한덕봉,
노창성을 비롯하여 이주호, 이남용, 장문원, 양길승,
염준모 등올 들 수 있으며, 연희송신소가 따로 생겨나면서부터는
 기술진이 증원되었고, 부산을 비롯한 평양, 청진, 이리 및 함흥방송국이
개국한 1938년 말까지는 전국에 많은 한국인 방송기술자가 근무하였고
조선방송협회 사업부 산하에도 직원이 대폭 증원되어 나갔다.
 
이 무렵에 방송현업에서 두각을 나타내면서
일본인들을 앞지르는 탁월한 기술을 발휘했던 사람들이
많았는데 1940년 이후 해방까지 근무했던 방송기술인의 수는
 백여명에 달한다. 지방에서는 아나운서 노릇도 사실 일제시대의
방송인은 너무 많은 고생을 감수해야만 되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기술자들이 로컬방송도
 담당하는 간이 아나운서의 발령까지 받고 마이크 앞에
 서야하는 적도 있었다. 이때 지방방송국에 근무하는 한국인
기술자들에게는 '방송을 취급하는 사람으로 임명한다'는
발령사항이 하달되어 당연히 한국말 아나운서
 노릇을 해야만 되었다.
 
한국말 방송 전용송신기 출력이
 50kw 대전력으로 된 것은, NHK가 아직 10kw이었을
때였는데, 송신소의 황태영, 장문원, 정일모 등은 일본인들을
능가하는 우수한 기술진으로, 그들의 연구논문은
 당시 높이 평가된 바 있는 터이다.
 
그 중 황태영은 우리나라 통신기기 제작 면에서도
 선구자적인 존재로 1956년 종로에서 한국 최초로 TV국을 만들어
 이 나라 방송기술에 뚜렷한 흔적을 남긴 사람이며, 정일모는 예비역
육군대령으로 우리나라 군통신의 선구자적인 존재이자
최초로 FM 방송국을 만든 인물이다.
 
 방송기술인들은 여러 방면에서
이 나라 방송통신을 크게 발전시킨 초석이 되었다.
우리나라 경찰 통신을 창설한 이남용, 김두식, 이인화, 최동곤,
이상훈, 조선기, 군 통신을 창설한 심궁구, 심상웅, 이천기, 외무부 통신을
 발전시킨 한진동, 주석환 등은 그 대표적 인물들이다.
 
 UV-171D라고 하는 50kw용 출력관은 길이가
1백75cm, 직경이 26cm나 되는 대형 3극 진공관이었다.
따라서 키가 작고 몸이 약한 기술자는 진공관을 취급하기 어려웠다.
또 운반하고 교체할 때도 항상 든든한 두 사람이 필요했다. 이 진공관에서
발생하는 고열은 물로 냉각해 주어야만 했다. 따라서 지하수를 파고
옥내 물탱크를 만들어 펌프로 물을 끌어올리는
 거대한 시설이 필요한 실정이었다.
 
찬물로 진공관의 열을 식히지 못하면 방송은
 자동적으로 끊어져 버리는 것이었다. 1시간에 소요되는
찬물의 양은 6천 6백L 이상이나 되었다. 이때 전력실과 펌프실을
 담당했던 이종훈 선배는 겨울철이면 냉각수 시설이 동파되지 않도록
온갖 신경을 다써야 되었다. 한편 무더운 삼복더위는 진공관의 열을 식힌
 물을 송풍기로 식혀서 다시 지하우물에다 집어넣는 작업에도 늘
세심한 관심을 기울여야 했다.
 
 
감전으로 순직한 방송사의 초석들
 
 



6 ·25로 정부가 부산으로 피난가 있을 때
송신기 조정작업 중 불의의 감전사고로 현장에서
순직한 이성실기사는 일편단심 방송기술만을 위해 살다가
 꽃도 다 피우지 못한 채 유명을 달리한 사람이다.
 
이성실은 괴뢰군이 정동방송국을 점령한 후에도
 연희송신소에서 최후의 순간까지 방송을 이끌어간 바 있는
 방송사에 남을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가 감전사고로 순직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아무런 추서나 추훈은 전혀 없는 터이다. 방송역사를 연구하는
필자의 머리에는   수원 송신소에서도  송신기  보수작업 중  감전으로 순직한
 박재위기사가 있는데, 그의 성실하고 근면한 모습이 아직도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 있는 터이며, 연희송신소에서 감전사고로 치명상을 입었던
 박수한 동지와 대전에서 송신기 보수작업 중 감전사고로
구사일생을 겪은 전해종 동지의 몸서리나는 흉터는
내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이렇게 수많은 선배 방송기술인들의 희생이
 오늘의 세계적인 방송을 만든 초석이 되었다. 일제시대에
 방송국에 입사하여 많은 격동기를 겪으면서 일생을 방송기술에
 몸바쳐 일하다가 KBS에서 정년으로 물러난 사람은 이종훈, 이종만,
유병은, 김원용, 한기선, 강대현, 김규학, 한영희 등으로 방송을
천직으로 알고 살아온 사람들이다.
 

 

 

 

유병은님은 1943년에 방송국에 들어 오셔서
1974년 2월까지 근무 하셨고 일생동안 모은 귀중한 
 방송 자료는 KBS 방송박물관을 건설하는데 초석이 될 것입니다.
방송사 연구에 힘을 기울이셨고  단파방송 해내외 연락운동,한국 방송

 야사등의 저서가 있습니다. 유병은님은 사설 방송박물관을 설치하고

 제 1 회 청원 박물관 전시회를 열었습니다.(1977년 8월 21일) 

방송원로 이혜구님(앞줄 왼쪽), 신경석님,

최창봉님 등이 보입니다.

 

 

 

 방우회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