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재 아나운서의 KBS시절 방송 회고록
이광재 아나운서는 1956년, KBS에 들어와 1964년, 당시의 KBS 아나운서실장이던 임택근 아나운서가 MBC로 옮기면서 그 자리를 물려받아 1970년 VOA로 파견 될 때까지 KBS아나운서 실장으로 계셨습니다. 오늘 글은 "특별 기획" "나와 KBS"라는 제목으로 2000년 1월 KBS저널에 실린 내용입니다. 이 광제 아나운서의 글은 그해 KBS저널에 집중 연재되었습니다. 2월호에는 1960년 로마 올림픽의 추억에 관한 글로 다음 영문자 주소를 클릭하시면 보실 수 있습니다.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http://blog.daum.net/jc21th/17780285
전국의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KBS 저널’은 2천년을 맞아 미국 LA 기독교 방송국장인 이광재 씨(전 KBS 아나운서실장)의 특별기고 ‘나와 KBS’를 한해 동안 집중 연재합니다. 한국 방송사의 산 증인인 이씨의 방송40년 회고담을 통해 KBS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을 집중 조명하게 될 본고(本槁)에 ‘KBS저널’ 독자들의 큰 관심과 기대를 바랍니다.
<편집자 주>
비교적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던 나는 일본유학 출신의 부모님께서 “너는 장차 의사가 되라”고 말씀하셨고 나도 내 성격에 맞는 것 같아 어릴 때부터 청진기를 갖고 의사 놀이를 했다. 6.25사변으로 군대에 가는 바람에 의과대학을 포기하고 법과를 공부하고 있을 때인 1956년 3월. 라디오에서 KBS 아나운서를 공개 모집한다는 소식을 듣고 응시원서를 냈다.
시험날 정동에 있던 KBS 청사 마당에는 3명을 뽑는다는 공고에 무려 300명이 응시해 100:1의 경쟁률을 기록했다. 응시자들은 낭독할 뉴스 원고를 받아 “워싱톤에서 아이젠하워 미국대통령은 미국 국회 상하원 합동회의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라고 유창히들 읽으며 연습들을 하고 있었다.
원고를 받아 든 나는 옆사람에게 현직 아나운서 못지않게 어쩌면 그렇게 잘 읽느냐 물어보았는데 알고보니 거의가 지방방송국 아나운서들로 KBS 서울 중앙방송국 아나운서가 되고자 왔다는 것이다.
나는 시험을 보나마나 낙방될 것같아 포기할까 생각하다가 ‘에라 내친김에 시험이나 보자’하고 순서에 따라 스튜디오에 들어가 마이크 앞에서 낭독했다. 지방에서 올라온 아나운서들의 편의를 봐주기 위해 3시간 후에 합격자 발표를 한다고 해 나는 일단 학교에 돌아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합격자 세 사람 이름 가운데 내가 일등으로 뽑힌 것이다. 너무나 감격적인 순간이었다.
합격 후 방송국 서무계장을 만나니 대학 4년 재학생 증명이나 대학졸업증명서, 공무원 채용 관련 서류양식을 내주었다. 그때 나는 자격 결격사항을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실은 대학 4학년 재학중이라는 것은 거짓이고, 2학년 막 올라왔습니다”했더니 그것은 안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공무원 채용규정을 자기 마음대로 변경 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집에 돌아와 모든 것을 포기하기로 했다. 그런데, 일주일 후 학교에서 집에 돌아오니 어머니께서 “KBS에서 전화가 여러 번 왔는데 빨리 오라”는 내용이라고 전해주셨다.
무슨 일인가 싶어 급히 달려가 보니 이광재 씨는 성적이 너무 좋아 촉탁 아나운서로 임명하 기로 했으니, 대학을 졸업하면 졸업장을 제출하라고 했다. 그때부터 나의 방송생활이 시작되었다. 약 두 달간 강습을 받은 우리는 매일 아나운서실에 앉아 신문만 읽었다.
지루한 기분이 들어 쉴라치면 아나운서 실장이 무엇들을 하느냐며 야단을 치곤했다. 선후배 서열이 군대 이상이었다. 앉는 위치도 아나운서 실장 책상에서 제일 먼 말단 구석에서 앉아, 담배를 사오라고 하면 담배를 사오는 개인 심부름도 마다않고 해야 했고, 20여 명의 남, 여 선배들의 눈치를 살펴야 했다.
김포공항에서 박정희 대통령 외국 외국순방 실활을 중계방송하는 이광재 아나운서입니다. 엔지니어 고흥복이 함께 했습니다. (사진제공 : 고흥복)
4개월간 신문만 읽다가 마침내 첫 방송의 명령이 내려졌다. 심장 맥박이 두근반, 세근반. 스튜디오에 on Air 불이 들어왔다. “KBS” 한마디 콜싸인을 넣는 것이 전부다. 그래도 내 목소리가 라디오로 전국에 방송 되었다는 긍지를 갖고 기뻐했다.
그 당시는 이승만 대통령 시절이고 갈홍기 공보처장 밑에 방송국이 존재해 있을 때였다. 또한 그 당시는 방송시간이 오전 5시부터 9시에 끝났다. 낮 방송은 11시 30분부터 시작해 오후 1시에 방송이 끝나고, 저녁방송은 오후 5시에 시작해서 자정까지 할때이다.
중간 중간에 방송만 끝나면 자기가 좋아하는 다방에 가서 친교시간을 보내곤 했다. 그 후 방송국 청사가 남산으로 신축해 이사를 갔고, 아침 5시부터 새벽 1시까지 방송을 연장했다.
아나운서 경력 2년, 골든아워가 아닌 시간대에 뉴스를 할 때다. 어느 날 아나운서 실장이 나를 불렀다. 이광재 아나운서는 음양이 크고, 목소리도 청아하고 또 금속성을 띄었으니 스포츠 중계 방송을 할 용의가 없느냐는 것이었다.
스포츠 아나운서가 되려면 5년 이상의 경력이 있어야 하고, 선배의 허락이 없으면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전통으로 묶여 있던 때라 적이 당혹스러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기뻐 ‘무엇을 할까요’ 물어보니 임택근 아나운서 혼자서 하고 있는 권투중계 한번 해보라는 것이었다.
최고의 기쁜 소식이었다. 그날부터 당장 권투도장을 찾아가 열심히 연습했다. 아나운서 실장이 또 부르더니 권투중계 연습 열심히 하느냐고 물었다. “쉬지않고 연습하고 있습니다” 했더니 이번 일요일 서울 운동장에서 아마추어 권투의 각체급 결승전이 있으니, 임택근 아나운서와 둘이서 나가라는 것이었다. 정말 신나는 일이었다.
그런데 금요일 나를 또 불렀다. 임택근 아나운서가 사정에 의해 권투 중계방송을 못하게 됐으니 자네 혼자 나가서 하라는 것이다. 이쪽에서 계속 듣고 있다가 이 아나운서가 힘에 겨워 횡설수설하면 “현장의 방송상태가 고르지 못해서 중계방송을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할터이니 마음놓고 하란다.
그날 난생 처음 중계석에 앉았다. 2시 시보소리가 울렸다. 삑삑삑-- “지금부터 예고해 드린 바와 같이 마이크를 서울운동장으로 옮겨 복싱 경기실황을 중계 방송해 드리겠습니다.” “현장 나와 주십시오” 엔지니어의 손이 “큐”를 준다. “전국의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여기는 서울운동장 입니다.”를 시작으로 김선수 레프트 스트레이트, 이선수 타이트 엎어캇트, 레프트 라이트 스트레이트 강타하고 숨가쁘게 중계방송을 했다. 중간에 끊지않고 1시간 30분을 해냈다.
옆자리에 있던 엔지니어에게 잘 했느냐 물으니 엄지 손가락을 내 보인다. 안도의 숨을 쉬고, 중계차를 타고 남산방송국에 돌아왔다. 중계차에서 내리니 2층, 3층에서 직원들이 밑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방송국엔 정부고관부터 영화배우 등 많은 분들이 출입하므로 유명한 사람이 왔나보구나 하고 주위를 돌아 보았으나 아무도 없었다.
수위장이 뛰어 나오더니 방송국장님이 부르신다고 빨리 올라오라는 것이었다. 어떤 기합을 받나 깜짝 놀라 국장실에 들어가니 각 과장들이 다 앉아 있었다. 더욱더 놀라는 가슴을 안고 들어가니 방송국장이 나에게 악수를 해주고는 등을 두드리면서 정말 잘했다고 칭찬해주며, 각 과장들이 번갈아 칭찬하며 어깨를 두드렸다.
방송국장이 이제는 모든 스포츠 중계방송을 허락하니 열심히 노력하라는 특별 당부였다. 나는 그때부터 선배허락을 받지않고 각종 중계를 하는 행운을 누릴 수 있었다. 지금까지 중계방송을 못했던 미개척 분야를 우리말로 만들어 중계방송을 했으니 종목이 16가지에 달았다.
대한 체육회, 각 산하단체에서는 이광재 아나운서만 잡으면 중계방송이 가능하고 운동보급도 빨리 될 것이니 나를 만나자는 요청이 대단했다. 세계에서 16가지 종목을 중계방송 하는 아나운서는 아마 나 혼자가 아닌가 생각했다.
1960년 로마 올림픽이 열렸다. KBS 중계방송은 임택근, 이광재 두 아나운서로 결정이 되었다. 당시는 제트 여객기가 없었기 때문에 36시간을 프로펠라 비행기를 타고 갔다.(계속)
글·이광재(미국 LA 기독교 방송국장· 前 KBS아나운서 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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