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인물

조선 방송협회 최후의 중앙방송국장 홍양명님

이장춘 2011. 1. 5. 22:29

 

 

조선 방송협회 최후의 중앙방송국장 홍양명님

 
 홍양명(洪陽明) 선생님은
1947년 10월부터 1948년 10월 7일
방송이 완전히 국영화 될 때까지 약 1년간  
중앙방송국장을 하셨고 방송협회로서는
마지막 방송국장이 되셨습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되면서
 이혜구 선생님은  일제하에서 방송하던
사람이 해방조국에서까지 방송하는 것이 옳지
않음으로 방송국을 물러날 뜻을 표명하기도 했지만
받아 드려지지 않아 기회를 보던 중 1947년 8월

15일을 기해서 방송국을 떠나셨습니다. 그리고

홍양명 선생님이 그 뒤를 이었습니다.

  

1896년(고종 33) 제주도 제주시(濟州市)

삼도동(三徒洞)에서 태어나 독립운동에 뜻을 두고

 블라디보스톡과 모스크바에 일시 망명하기도 했고, 일본의

 와세다대학 영문과에서 공부한 후, 조선일보 편집국에서 편집 기자를

 하시다가  외보부장을 거쳐 논설위원을 지내셨습니다. 1937년 8월에

 조선일보를 떠나신 님은 만주로 건너가 만선일보 편집국장을  하셨습

 니다. 그때 만선(滿鮮)일보는 신경에 있던 우리말 신문으로 1933년에

이신문사가 문을 열 때는 만몽(滿蒙) 일보라고 부르던 것을 1937년

소설가로 이름 높은 염상섭(廉尙燮)선생님이 편집국장으로 

 취임하시면서 만선일보가 되었습니다.

 
홍양명님선생님은 염상섭선생님의
 편집국장 자리를 이어받은 것이었습니다. (신경은
 지금의 장춘입니다). 만선일보에서 5년여를 근무 하시던 중
42년 8월 만선일보가 개편되면서 그 자리를 물러나셨습니다.
님은 곧이어 매일신보 신경 지사장을 하셨습니다.
만주에서  활동하신 흔적들이 있습니다.
 
 해방되고 얼마 안 되어 국내에 들어와
영어교사를 하시면서 영어와 관련되는 활동을 하시다가
 1947년 8월 이혜구님의 중앙방송국장 자리를 이어받았습니다.
워낙 영어를 잘 하셨던 분이라 방송국과 별 인연이 없으셨던
홍양명님이   방송국에  들어오신 것은  영어와   관련되는
 활동을 통해 미군정청과  가까워진 인연 때문이었다고
 예기하시는 분도 있으셨습니다.
 
원만한 성격으로 방송국 일에 적응이

잘되셨습니다. 그때 고위직이나 사회적인 위치에

 계시던 분들은 검은 양복에 조끼까지 받쳐 입고 근엄함을

보이는 것이 상례였지만 선생님은체크무늬 양복저고리에

검정바지나 쥐색바지를 받쳐 입고빨간 넥타리을 즐기는 등

서양 사람들과 같은모습을 보여주는 경우가

 많으셨다고 합니다.

 
젊은 여직원들에게도 예의를 갖추고
문 앞에 서 있다가 뒤에 온 젊은 사람들에게도
문을 열어주면서 앞세우는 등 당시로서는 접해 보지 못한  
직원들이 어리둥절하기도 했습니다.     갈쿠리 모양의 이상한
손가락 하나를 내 보이면서 만주에서 고문을 받다가 그랬다는
 이야기도 하시고 중국의 장총통의 이름이  장중정이어서
ㅇ자 세 개가 들어가 대성 했다면서 홍양명도 ㅇ 자
새개가 들어가 있으니 대성할 것이라고 같이
근무 할 때 잘 해 달라는 우스갯소리도
잘 하셨다고 합니다.
 
홍양명님을 처음 조선일보에 있게 하신
 당시의 조선일보 편집국장 주요한 선생님은 홍양명님을
 가르켜 “영어를 잘하고 아주 재치 있고 싹싹하고 위 사람말을
잘 듣는 그때 말로는 모던보이라고 할 수 있는 멋쟁이
좋은 청년 이었다” 고 하셨습니다.
 
중앙방송국장을 1년쯤 하셨을 때 군정이 끝났습니다.
조선방송협회에서는 협회를 계속 이어갈 생각으로 1948년
8월 6일을 기해서 협회 명칭을 대한 방송협회로 고치는 등
 새로운 정부가 발족한 후의 일에 대비해 나갔습니다.
 
국유화 반대를 위해 만난 방송인들 1948년 9월 25일 전국방송국장 소장회의를 마치고 
 
그러나 정부의 생각은 달라서 관련 법률을
제정하면서 방송국을 국영화하려는 움직임이 있자
 방송인들은 이에 반대운동을 벌렸지만 그 힘으로는
흘러가는 급물살을 막을 수 없어 1948년 8월 7일을 기해
 정부조직법은 KBS를 국기기관으로 편입시키고
그해 10월 7일을 기해서 새로운 법률에 따라
 새로운 인원이 구성되었습니다.
 
 이때부터 KBS는 1973년 3월 2일 공사
 될 때까지 25년간 국영방송국이었고 선생님은
공무원들에게 중앙방송국장 자리를 물려주고 떠나신 후
 소식을 잘  알 수 없는지라 사람들은 선생님이 6.25를 맞아
납북되셨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정부수립 후 새로 짜여진 인원구성입니다.
사진 앞줄 왼쪽 두번째가 방송국장 이관희님입니다.
왼쪽끝은  서무과장 권태웅님, 이관희 국장 오른쪽으로  한덕봉님,
편성과장 정효근, 박노연,  뒷줄 왼쪽부터  방송과장 민재호, 신경석,
기술과장 이규일,   권한섭,   연출과장 송영호,   하기영,   김도현, 
조정과장 민병설님이 차례로  앉으셨습니다.  이 사진은
우리정부가 처음으로 국제기구인  ITU에 대표를
파견 할때  대표로 가시게 된 한덕봉님
환송기념 사진입니다.

 

방우회 이사 이장춘 

 

 

나하나의 사랑 송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