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유인경이 만난 사람 디자이너 노라노 선생

이장춘 2010. 4. 28. 04:13

 

 

 

 

 

 1957년, 반도호텔 옥상에서

있었던 두번째 노라노 패션쇼 장면을

 동영상으로 보시겠습니다.

 

 

 

노라노에 관한 자세한 얘기는

아래 영문자를 클릭하셔서 보실 수 있습니다.

 

노라노(NORA NOH) 패션 70년

http://blog.daum.net/jc21th/17782066

 

 

 

유인경이 만난 사람  디자이너 노라노 선생

 

 

 

 

2007년 노라노 자서전이 출판되었습니다.

자서전이 발간되기전 중앙일보는 노라노님이 집필하신

 글을 연재했습니다. 그 무렵 중앙일보는 2007년 1월 30일! 

50년대, 60년대 은막을 장식한 배우들의 특별한 만남이 있었습니다.

 1950년대부터 처음으로 우리나라 패션계를 주도 해 오던  노라노여사의

 그 시대 예술과 패션의 추억을 더듬어 보고자 마련한 자리였습니다. 

 그 만남을 중앙일보가 취재해서 2007년  1월 31일자에 보도

했습니다. 그 옛날의 정겹던 그 얼굴도 다시한번

볼겸 그때의 얘기를  올립니다.

 

 

 

 

그때의 배우들은 노라노 의상을 애용했습니다

여기올린 사진의 의상은 모두 노라노님의 작품입니다.

 

 

 

 

  

 

 

 

 더 자세한 얘기는 2007년

 

자서전이 출간될 무렵 중앙일보에 게재된  

 

제목의 글을 옮겼습니다.   

 
 
 
 
쉬지 않고 꾸준히 일해야 시대감각 잃지 않아요”
 
 
그의 삶이 곧 한국 패션사인 ‘패션계 대모’
 
 
30세 전에 취직하면 가문의 영광, 40대에도
 직장에 다니면 조상의 음덕, 50대에도 일을 하면
 21세기 한강의 기적이라는 요즘.  팔순을 앞둔 나이에도 일,
그것도 60여 년 전에 시작한 직업을 그대로 유지한다면 `
‘로또에 연속 당첨된 것’보다 더 커다란 행운이다.
 
1948년에 패션계에 입문,  50년 전인
1956년 10월, 대한민국 최초로패션쇼를 열었던
 디자이너 노라노 선생은 지난 11월에도 정기 패션쇼를 가졌다.
국내에서는 해마다  2번씩, 미국 등 해외에서 활동할 때는  매년 4회씩
패션쇼를 열었다니 120회 정도의 무대를 만든 셈이다.
 
서울 반도호텔(현 롯데호텔) 다이너스티룸에서
 열렸던 첫 패션쇼에는 시인 이봉래, 언론인 이진섭씨가
 각각  1, 2부 사회를 보았고  작곡가 박춘석 선생의 피아노 연주에
맞춰 조미령씨 등 당대 최고의 여배우와 미녀들이
`‘드레스’를 입고  등장해 갈채를 받았다.
 
 50년후인 올 11월에 열린 패션쇼에는 음악가,
교수 등 명사들이 모델로 등장했고 정희경 전 방송대 총장,
이인호 전 러시아대사 등 노라노 선생과 함께 수십 년의 추억을
 공유한 단골들이 참석해 `나이 들어서도 여전히 멋지게
 입을 수 있는 옷을 보며 행복해 했다.
 
"50년 전 첫 패션쇼 이후 단 한 번도
정기패션쇼를  거른 적이 없어요. 또 눈치볼 상사도
 없지만 단 하루도 아프다는 핑계로 결근하지 않았어요.
공부건 일이건 중요한 것은  쉬지 않고 꾸준히 하는 거예요.
그래야 정신없이 돌아가는 시대에  감각을 잃지 않고
트렌드도  파악할 수 있죠. 한 번 쉬면 그걸
복구하는 데 3배의 시간이 걸리거든요.
 
”쉬고 싶어 쉬는 게 아니라 억지로 쉬게 되는
 이들 투성이인 요즘,  노라노 선생의 `‘쉬지 않고 계속 일 할
수 있는’ 열정마저 축복처럼 여겨진다.  반듯한 옷을 오래 입는 게
사치 KBS 초대 방송국장인 노창성씨와 최초의 여자 아나운서였던
이옥경씨의 9남매 중  차녀로 태어난 노라노 선생은
경기여고 졸업 후  1948년 미국유학을 떠났다.
 
프랭크웨곤 테크니컬칼리지에서 의상을
 전공했다. 여성도 확실한 직업을 가져야 자유로워지며,
 성공도 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낮엔 공부하고 밤엔 의류공장에서
 실무를 익혔다. 1950년 귀국, ‘노라노의 집’이란 양장점을 열어
1950년대 서울 명동에서‘송옥’‘아리사’ 등과 함께
고급의상실 붐을 일으켰다.
 
1950년대의 패션리더들은 미군부대의
 연예인들. 노라노 선생은 패션디자이너였지만 유창한
 영어실력으로 쇼의 사회를 보기도 하고 가수들 옷차림을
조언해주는 등 코디네이터나 매니저 구실도 했다.
 
1950년대 장세정, 이난영, 유정희, 홍청자,
서봉희 등이 모인 ‘저고리 시스터즈’부터 1970년대를 풍미한
펄시스터즈에 이르기까지 가수들의 의상과 무대매너도 지도했다.
또 극단 신협의 연극의상, 영화의상, 심지어 미스코리아의
샤프론으로 세계미인대회까지 참여하며 명성을 쌓았다.
 
국내 최초로 드라마 의상 협찬을 한 이도
 노라노 선생이다. 기성복 붐이 일자 홈웨어를 만들기도 했고,
 1971년부터 파리 프레타포르테에 참여했는데 미국 삭스백화점
바이어로부터 주문을 받아 수출도 시작했다.
 
1978년에 미국법인을 설립하고 뉴욕에 진출,
‘`7번가의 여왕’이란 찬사를 받으며 전성기를 누렸다.
칸딘스키, 미로 등 세계적 미술가의 작품을 실크프린팅한 그의
옷들은 `미국의 중산층 옷장에는 한 벌씩 있는 ‘필수품’이란
말을 들을 만큼 폭발적 인기를 모았다.
 
세계 패션계가 피크였던 1980년대의
영화를 실컷 누린 선생은 1990년대엔 다시 무대를 옮겼다.
"뉴욕이나 파리나 고급부티크들이 하나 둘 문을 닫더군요. 사람들의
의식과 생활패턴이 달라져 음악회도 블루진을 입고 가는 시대니
값 비싸고 근사한 롱드레스를 입고 갈 곳은 백악관 취임식이나
 아카데미 시상식밖에 없어졌으니까요.
 
 베네통, 갭 등 값싸고 편안한 기성복이 마구
등장하기도 했고… 그래서 미국 회사를 접고 일본에서
일하다 다시 중국으로 갔죠.” 서울올림픽 이후 임금상승과
노조결성으로 한국에서 만든 옷으로는 해외시장에서
가격 승부가 되지 않는다고 판단한 노라노 선생은
 원단과 패턴을 들고 1989년 중국으로 가서
합작공장을 세웠다.
 
중국측에서 ‘`1년에 50만 벌도 만들 수 있다’고
 큰소리쳐도 안 믿었는데 정말 한 해엔 실크블라우스
 50만 벌을 만들어 1000만 달러를 수출했다. 또 IMF 무렵에는
 이마트 등 할인매장에 한 벌에 2만~3만 원 하는 저가옷을 만들어 팔았다.
그후 노하우를 전수받곤 태도가 달라진 중국과 작별하고 요즘은
논현동 노라노 본점에서 오랜 단골손님들을 위한
맞춤복과 기성복을 만든다.
 
 "패션디자이너는 디자인만
 잘한다고  성공하는 게 아니에요. 트렌드를
 파악하고 시장의 변화를 제대로 읽을 줄 알아야 해요.
자기 주장만 고집하다 보면 시대에 뒤떨어지게 마련이거든.
또 옷은 어디까지나 입는 사람이주체가 되어야  해요.
예술성도 필요하지만 의상은 순수예술은 아니죠.
 
그런데 우리나라는 물론 세계적인 디자이너들도
 제대로 입기 어려운  난해한 옷을 만드니까 패션이
죽어가는 거죠. `‘반듯하고 좋은  옷을 오래오래 입는 것이
 진정한 사치’란 디자이너  샤넬의말에 공감해요.” 노라노 선생은
 디자이너만이 아니라 옷 입는 이들에게도 불만이 많다.
 
왜 앵커들도 방송에만 나오면 밤무대복 같은,
야한 드레스를 입고 나오는지, 평범한 주부들이 왜 연예인처럼
 화려한 옷을 입고 다니는지 모르겠단다. 전문직 여성의 경우엔 자신의
 개성과 고급스러운 취향이 옷에서 풍겨야 하고‘옷이 날개’가
아니라 `‘옷이 무기’인 시대인데 왜 상스러워 보이는
옷으로 품위를 낮추는지 한숨이 나온단다.
 

완벽주의자이자 절제의 여왕
노라노 선생은 스스로를 `‘행운아’라고 부른다.
 훌륭한 부모 밑에서 성장한 것, 당시로선 드물게 미국
유학을 한 것,40대까지 순조롭게 기성복을 만들었고
 50대엔 수출역군이었으며 60대 이후엔 취미로
옷을 만들면서 여유로운 노후를
보내고 있기 때문이다.
 
또 자신이 지치지 않고 60년 외길 인생을
 걸어온 비결을 `‘건달정신’으로 살아온 덕분이라고
 한다."건달과 보스가 다른 것은 보스는 명분있는 일만 하지만
 건달은 재미있는 일부터 하니까 안 지친다는 거예요.
 
또 보스는 항상 1등을 하고 각광을 받아야 하지만
건달은 조역으로 살아도 스트레스를 받지 않아서 각 분야에서
 장수해요. 결과만 바라보고 아둥바둥 사는 게 아니라 과정을
즐기며 사는 게 중요하죠.

또 난 야망(ambition)이 아니라 도전(challenge)을
즐겼어요. 야망은 목적이 중요해서 목적을 이루면 허망하지만
도전정신은 끝이 없고 도전 자체가 기쁨이니까요. 만약 돈이나 명성만
좇아서 옷을 만들었다면  난 벌써 사라졌을 거예요.”

자칭 `‘건달’인 노라노 선생에 대한 주변의
평가는 전혀 다르다. 지인들은 노라노 선생을 완벽주의자이자
 절제의 여왕이라고 부른다. 미국에서 패션공부를 할 때도 디자인만이
아니라 재단, 바느질까지 다 배웠고 연극의상을 만들 때는 어머니의
 벨벳 치맛감을 가져다  김동원씨가 입을 햄릿의 의상을 만들어
우리 연극사에도 기여했다. 또 항상 신문, 잡지, 신간 등을
 읽어 트렌드를 정확히 파악하고 어떤 연령이나
 직업을 가진 이와도 대화를 나눌 수 있다.

지금도 젊은 여성들을 압도하는 커다란 키에
화려한 외모, 국제적으로 활약하는 패션디자이너란 직업으로
그는 항상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절대 `튀는 언행은커녕 매스컴에
 등장하는 것조차 자제했다. 미국에서 각광을 받을 때도
국내에 홍보도 하지 않았고 요즘도 눈에 띄는
 행사장에는 잘 가지 않는다.
 
또 젊을 때는 스캔들이 싫어 업무상
남성을 만날 때면 어머니나 다른 가족을 동반했고
 정치인 등 권력자들과도 친분이 깊지만 `‘옷 로비’ 사건에도
 얽히지 않았다. 그리고 항상 체조나 요가 등으로 몸을 가꿔
날렵하고 꼿꼿한 허리와 가는 팔을 유지한다.

"언젠가 이탈리아 사람에게 `‘너희는
 교황이 있는 나라에서 어떻게 마피아가 맹활약하냐’고
물었더니 `‘둘 다 있어서 예술가가 많다’면서 평화로운 스위스에
뛰어난 예술가가 있냐고 되묻더군요. 고통이나 분노도 좋은 재산이
된다고 생각해요. 우리도 남북 분단의 아픔 등을 겪었기에 노래와
드라마 등이 풍성해져 오늘의 한류열풍이 만들어졌고  저도 여고를
졸업하자마자 결혼, 1년 만에 이혼한 아픔과 분노가 노명자란
 소녀를 노라노(노라는 입센의 희곡  `‘인형의 집’의
 주인공)란 디자이너로 성장시켰죠.”

고통도 달게 받아들이고 분노를 승화시킨
노라노 선생은 `‘패션계의 대모’로 그의 삶이 곧 한국
 패션사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제는 그저 감사한 마음뿐이란다.
자신의 옷을 사줘서 계속 옷을 만들게 해준 고객들에게 감사하고,
 60여 년을 하루도 빠짐없이 일할 수 있는 건강을 주신 부모님께
 새삼 고마움을 느낀다. 그런 감사함을 전달하기 위해
 60주년 기념 패션쇼와 자서전도 준비중이다.
 
시대별 의상들을 전시하거나 직업별 모델들이
등장하는 패션쇼를 구상하느라 매일 아이디어를 짜낸다.
또 21세기에 패션의 생존방법, 블루오션은 무엇인지 궁리하고 있다.
 어떤 옷을 만들어야 세계시장에서 승부할 수 있는지 답을 찾는 중이다.
"예전엔 옷만 잘 입으면 멋쟁이였지만 이젠 운동으로 몸도
가꿔야 하고 피부관리나 성형수술도 필요하고
명품 가방도 들어줘야 하잖아요.
 
그러니 패션브랜드들이 옷이 아니라 가방이나
 화장품으로 승부하죠. 하지만 분명히 싸구려 옷에 식상한
 대중들이 근사한 옷을 찾을 때가 되었거든요.”

팔순을 앞둔 나이, 취미로 옷을 만든다면서도
노라노 선생은 치열하게 미래를 구상하고 있다. 호기심과
열정으로 빛나는 눈동자는 그가 100살이 되어서도
소녀처럼 여겨지게 만들 것 같다.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