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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때의 이동방송에서 이동방송국까지

이장춘 2010. 4. 6. 02:41
 
 
 
 6.25때의 이동방송에서 이동방송국까지 
 
이동방송은 6.25전쟁으로  
피난을 떠나던 목포방송국에서 해군함정에
송신기를 싫고 방송하기 시작한 이래 자주 시행 되었습니다.  
6.25전쟁으로 교통과 , 통신이 두절되고  사람들의 왕래가 자유롭지
못한 속에서 세상 돌아가는  소식에 목말라하던 국민들에게  조금이라도
궁금증을 풀어주고  위안을 주기위해 방송이 미치지 못한 해안,
육지할것 없이  곳곳에서 시행 되었습니다.
 
 
추럭에 소규모 송신기등의 방송장비를
싫고 다니면서 필요 할때 임시로 방송을 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방송응 차를 외국에 주문제작해서 도입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방송용 이동방송차가 처음 들어온것은 1952년으로
 이 방송차는 전진하는 유엔군과 국군을 따라 옮겨 다니며 방송을
했고 국군의 전방 사령부가 원주에 마련 되면서 원주에서
방송을 하다가 뒷날 속초에 고정되었습니다.
 
 
     1953년 휴전협정이 조인되고 전쟁이 
끝났어도 방송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지역이
많아서 장기적으로는 방송시설 확장계획 추진과  
농.어촌의 라디오, 스피카 보내기 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하면서  라디오를  싼 값으로 보급 할 수 있는
제반 시책을 강구해 나가면서 난청지역
이동방송을 위해 새로 이동방송차를
들여 오기도 했습니다.
 
 
포항과 여수에 고정 배정되었고 뒷날 KBS-TV방송국을
 시작할때 중계방송차로 개조되어 활용되었습니다.
 
 
 1957년 6월 26일,  두 대의 이동 방송차(위 사진)
 들어와  7월 10일부터는 전국적인 규모의 이동방송을
실시했습니다. 이동방송은 이동방송 대상지역에 방송기간동안
라디오를 빌려주고 그 라디오 곁에 여러 사람이 모여 방송을 듣기도
하고 확성기로  방송을 중계하기도 하고   사람들이 많이 모인 자리에서
노래자랑도 하고 또 일반인들이 방송에 출연할 기회도 주어서
 방송이 이런 것이구나를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한차에 5-6명씩 두개 방송대로
편성된 이동방송 차는 1차로 7월 10일부터
 30일까지 강익수, 이용훈님이 각각 국장이 되어
안양, 온양,대천, 원주, 충주, 영주등지에서
활동을 했습니다.

2차로는 8월 한달간 실시했는데
임택근, 황우겸님이 이동방송국장이 되어
정읍, 순천, 여수, 안동, 울산, 경주등지에서
 활동을 전개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3차는 노정팔, 강찬선님이
국장이 되어 진주, 밀양, 포항, 영일, 울진
등지에서
활동을 전개 했습니다. 이동방송차가 가는 곳에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때로는 15,000여명의 군중이 모이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런 일을 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그 성과는 있었습니다.
 
 

이때 이동방송을 끝내면서 57년 10월

1일을 기새서 이동방송차를 어업 기상통보 등

방송 필요성이 절실하면서도 방송 사각지였던 포항과

여수에 각각 고정 배정해서 이미 배정된 속초를 포함 세곳의

이동방송국이 탄생하고 5.16이 일어 나던해 1961년 6월

22일을 기해서 각각 방송국으로 승격 되었습니다.

이로서 KBS 지역방송국은 15곳이 되었고 그 후

1964년, 원주방송국 개국으로 공사 전 까지

 16곳에 지역방송국이 되었습니다.

 
이동방송국에서 출발한 포항방송국은
지금도 방송을 하고 있으며 속초방송국과
여수방송국은  그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고 변화된
시대의 흐름에 맞추워 2005년 7월 1일을 기해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났습니다.  이 세 방송국의  얘기를
따로 정리해서 올리도록 하겟습니다.
 
 
 이동방송에 직접 참여 하셨던

최계환님이 쓰신  이동방송차의 추억 글

한편을 옮깁니다.

 

송신기 녹음기를 비롯한

방송기재가 빽빽히 구비되어 있는

차이기에 차안에는 앉을 자리도 변변히 없었다.

운전대 옆이나 스피어 다이어 위에 앉고 서서 달리는

여행이었으나 기차 여행보다 지루하지 않은 것이었다.

앞으로 1개월간 같이 지낼 방송국이 바로 이 방송차였다.

서울로 부터 아득히 떠나와 순천, 광양, 하동을 지나

섬진강의 가경을 뒤로 흘리면서 진주 근교에

도착했을 때는 해가 넘어간

저녁 무렵이었다.

 

약 300여리의 먼지속을 달려오니

일행 5명은 모두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먼지 투성이가 되었고 몸은 피곤 할대로 피곤했다.

진주 사범학교 앞길을 지나 저녁 노을 속에 잠겨있는

진양고을의 모습을 보니 훈훈한 역사의 향기같은것을

느끼기도 했다. 반만년 억사의 아롱진 문화의 소산들이

고이 잠들고 있는 고장이었다. 서장대, 복장대, 촉석루

논개사당등 갖가지 역사와 전설이 얽힌 유적들은

이루 해아릴 수 없이 많았다. 말하자면 역사를

거슬러 온 기분이라고나 할까.

 

함께 끌고온 발전기를 돌려

행진곡을 흘리면서 간단히 이동방송차의

취지와 인사말을 방송하면서 우선 시내를 일주했다.

남녀노소가 다같이 길가에 나와 신기한 표정으로 우리들을

맞아 주었다. 다음날 아침 우리는 진주시장을 방문했다.

이동방송에 관한 여러가지 이야기를 하고 즉시 시청

마당에 방송차를 고정시키고 안테나를 세우고는

 당일에 초청된 기관장 회의에 나가  방송

프로그램 편성에 대해 논의했다.

 

그로부터 14일간 진주시내

각 기관장과 시민 여러분의 돈독한

협조아래 서울방송의 중계는 물론 " 내 고장의

이모저모" "학원의 모습" "마이크 인터부" "노래와

경음악" "문학의 밤" "노래자랑" 등을 가지고 진주시민

여러분이 바라는 지방방송을 할 수 있었다.

 

첫날부터 우리방송을 듣기위해

남녀시민이 시청앞에 모여 들었으며  심지어는

"학교시간에 왜? 우리 학교는 학교순서의 뒷쪽애

넣었느냐?"고 항의해 오는 국민학교 선생님도 있었다.

 우리 벙송이 끝나니까방송치에 매달려서 아쉬운 듯

매달리는 사람도  부지기 수였다.

 

방송차를 견학 온 학생들만도

2천여명에 달했으며 길거리에 나가면

인사받기가 바쁠 지경이었다. 이동방송차에는

항상 걷잡을 수 없는 낭만이

서려 있는것 같다.

 

최계환님의 글을 인용했습니다.  

 
 

 초기 속초방송국사진에  이동방송차의 모습이 보입니다.
원안의 신경석님은 6.25가 일어나던 때 해상 이동방송으로부터
오랬동안 이동방송을 하시다가 속초방송국장이 되셨습니다.
 

 
포항방송국이 이동방송국이라는 이름으로 이동 방송 차에서
방송하던 시절의 사진입니다. 사진속의  KBS 사우회 김수웅 회장님은
 잘 아시는 분으로 1959년 포항방송국 이동방송국시절 기자와 프로듀서를
하셨습니다. 이건영님은 뒷날 MBC야구단 사장, 실버TV회장님을 지내셨습니다.
김남호님은 그때 해병중위로 포항방송국 "해병의 밤"  프로그램 제작을 위해
자주 방송국에 들리셨던 분인데 뒷날 동아방송의 아나운서가 되셨습니다.
최영신님은 KBS회원님들이 잘 아시는 분 이구요.
 

포항방송국이 이동방송국일 때
이규일 방송관리국장이 격려차  방문 해서
직원들과 함께 찍은 사진입니다

 

이동방송국때의 여수방송국입니다. 여러개의 사진속에는
이곳에 근무하시던 조남두, 이종만, 안현태, 김병기,  윤미자님등이
 보입니다.  조남두님은 일제강점기 광주방송국 개국때부터 계시던분으로
여러곳의 지역방송국장을 지내셨습니다.      안현태님은 광주에서
근무하시다가  중앙방송국을 거쳐 순천방송국장을 하셨습니다. 
 

우제탁님은 1952년 남원방송국 개국요원으로
여러방송국에서 간부사원으로 일 하셨습니다.  이종만님은
일제 강점기 이리방송국에 계셨고, 여러곳의 지역방송국장을
지내셨습니다. 김봉완님은 남원방송국장을 하셨습니다.
 

 

VUNC 이동방송차 모습입니다.

1952년 7월 31일 차음으로 부산에 도착한

이동방송차 앞에서 기념촬영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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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이연실 희망가.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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