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병은님! 1943년 방송국에 들어와
춘천방송국 개국요원이 되고 대전방송국
방송과장을 하다가 6.25를 만나 방송국장 직무를
대행하면서 1950년 6월 27일 서울이 함락되던 그때
대전방송국에서 중앙방송국을 통해 방송된 이승만
대통령의 특별방송의 현장책임자이기도 했고,
부산 피난시절 전쟁중에 건설된 남원방송국
건설 책임을 맡기도 했습니다.
남 달리 방송 사적 가치가 있는
자료를 발굴하고 정리해서 오늘날 남아있는
방송자료의 근간을 쌓았고, 지금 추진되고 있는
KBS박물관은 님의 자료를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실증적인 자료를 바탕으로 방송역사를 정리하고
일제강점기 지하 독립운동 단파방송 해내외
연락운동을 집대성 했습니다.
경기도 광주 태생인 유병은선생님이
처음 방송국에 발을 들여 놓으신 것은 1943년
일본에 있는동경고등 무선학교를 졸업하던 해였습니다.
조선방송협회 기술부에서 근무하던 유병은님에게
춘천방송국을 새로 짓는 일을 맡도록 된 것은
1944년 7월의 일이었습니다.
춘천방송국은 1944년 7월 21일
처음 공사가 시작되어 그해 12월 20일
준공되었지만 님은 계속해서 이곳에 남아 일을
하셨습니다. 그 때는 기술과와 업무과가 있을때라.
기술과에서 방송까지도 다 했고 엔지니어가
방송도 하던 때, 젊은 유병은님이
그 책임을 맡았습니다,
해방되고 얼마 안 있어 1945년
12월초 춘천방송국이 화재를 당했습니다.
미군정에 접수된 방송국인지라 미군이 경비를
맡았는데 그 미군의 잘 못으로 화재가 나서 님의
신상에는 문제가 없었지만 방송국 복구에
어려움을 겪었습니다.(자세한 얘기는
춘청방송 총국편애 있습니다.)
선생님은 1948년 대전방송국
방송과장 겸 기술과장을 하시게 됩니다.
그러던 중 6.25가 일어나고 발령받으신지 이틀밖에
안된 이범구 국장님이 서울에 가서 미쳐 돌아오지 않은사이,
서울이 함락 위기에 몰리고 27일 아침에는 수도를 수원으로
철수 한다고 하는 방송을 했다가 몇 시간 만에 취소하는 등
갈팡질팡 하는 사이에 27일 오후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서울에 있는줄로만 알았던
이승만 대통령이 대전에 왔습니다.
( 6.25와 방송편에 더 자세한 글이 있습니다.)
6.25전쟁중 지리산 일대가 공비들의
집결지가 되어 방송의 필요성이 절실해지면서
부산 피난중이던 KBS는 남원에 서둘러 방송국을
새우기로 했고 그 책임자로 춘천방송국 개국 경험이 있는
선생님님이 선발되었습니다. 1952년 중반부터 방송국
설립이 추진되어 1952년 10월 25일 기해 착공
4개월만에 문을 였었습니다.
선생님이 남원방송국을 떠나실 때에는
수도가 다시 서울로 오고 방송관련 직제가 개편되어
방송을 총괄하는 방송관리국이 공보처 안에 설치됨과 동시에
서울을 비롯한 모든 방송국을 지방방송국으로 하는 직제가
시행되어 방송관리국에 전국 방송시설을 총괄하는
시설과가 발족할때로 시설계장을 하셨습니다.
1954년 5월 1일 필리핀 마닐라에서
제2회 아세아 경기대회가 열렸습니다. 윤길구님,
최승주님과 함께 방송단으로 편성되어 파견되었습니다.
엔지니어로서는 처음 파견된 해외 중계방송단이었습니다.
48년 런던 올림픽이나 52년 헬싱키 올림픽에 방송단을
파견 했지만 이 때는 아나운서 한 사람씩만 갔고
이 때부터 엔지니어가 동반 했습니다.
1956년 남산 라디오청사 건설이
착수되면서 여기에 힘을 기울이셨고 이 일이
마무리 될 무렵 RCA원조계획에 의해서 1957년
10월 미국에 건너가 6개월간 기술발전에 관한
연수를 마치고 돌아 오셨습니다.
국내방송이 어려웠던 시기라 미국등지에서
연수를 받고 온다는 국내 방송에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이었고 또 자신의 발전에도 큰 도움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실재로 외국에서 연수를 받고 온 인사들은
선진방송을 접목 시키는데 기여했습니다.
1960년 7월 1일 국제방송국이 발족 되면서
기술과장으로 승진 하셨다가 얼마 후 중앙방송국
기술과장을 겸직하셨습니다. 이후 오랜기간 중앙방송국
조정과장을 하셨습니다. 이 기간중 ABU총회 참가나
유치에 공헌하시기도 하셨습니다.
62년 말레니지아 수도 쿠아라룸풀에서 열린
제4차 ABU총회는 우리나라에서 처음 참석했는데
이때 제5차 대회를 우리나라에서 열 수 있도록 하는데 기여
하셨습니다. ABU총회는 1957년 일본의 NHK가 주축이 되어
아세아 지역 상호 협조와 역내 방송발전을 위한 사업을
실시하기 위해 설립한 방송기구 였습니다.
우리나라는 일본과의 국교도 없고 해서
3회때 까지는 이 회의에 참여하지 안했으나
아세아 방송기구로 발전되어갈 기마를 보이면서
참여키로 해서 4회 때부터 참여 했고 5회는
우리나라에서 개최하게 되된것입니다.
1962년에는 12월 서울시 문화상에
방송부문이 신설되어 방송부문 첫 수상자가
되었고 1966년에는 제 9회 대한민국
방송문화상을 받기도 하셨습니다.
1967년 수원송신소장을 거쳐 68년 3국이
통합되면서 라디오 조정과장을 하셨고 1971년부터
남산 TV송신소장을 하시다가 1973년 3월 공사가
되면서 초대 대전방송국장으로 가셔서 재직중
1974년 2월말로 정년퇴임 하셨습니다.
선생님이 해방 전부터 방송계에서
하신 일들이 많지만 방송사적 가치가 있는
자료를 모아 놓으신 일이야 말로 길이 길이 남게 될
업적이십니다. 마이크 하나, 녹음기 하나, 인사발령장
한 장이라도 헛되이 하지 않고 모아 놓으신 자료는
먼 후세에 까지 우리방송이 걸어온 길을
밝혀주는데 등불이 될 것입니다.
초기방송인명부, 임명장 원부, 청취장 원부
그때야 별 볼일 없는 문서였을 지도 모릅니다. 지금은
얼마나 소중한 자료입니까? 선생님은 저로보면 방송국입사
꼭 20년 선배이십니다. 그 원로 선배님이 제가 근무할 때 저를
종종 찾으셨습니다. 자료 때문이었습니다. 제주도 까지도
오셨습니다. 관재국에도 오셨습니다.
무조건 못 쓸 것 있으면 내 놓으라고
조르십니다. 조르심에 못이겨 전혀 가치가
없을법한 잡지 몇 권, 폐품기계 몇점을 드렸습니다.
가져가시지 않을 줄 알고 드린 것인데 고맙다면서
가져 가셨습니다. 그런데 제가 이 글을 쓰면서 보니
그런 자료라도 세월이 지나면서다 필요 한
것이었구나 하고 생각 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님은 자료의 중요성을 일직부터
아셨기에그 토록 심혈을 기울이시면서
이곳, 저곳에서 자료를 모으셨습니다. 님이
모은 자료는 KBS에 모두 넘기셨지만 아호 명을 딴
청원방송박물관 관장이라는 직책은 세상을 뜨실때까지
보존 하셨고 요양원에 계시는동안 방송인 명예의 전당에
헌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일생 일대의 기쁨이라면서
3월 27일 헌정식 현장에까지 나오셔서 마지막
인사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마지막
공식성상 자리였습니다.
經 歷
日本 동경 고등무선 專門학교 卒業 後,
1943년부터 平生을 放送에 從事.
1944年 춘천방송국 개국요원 개국후 기술과장
1950年 大田放送局 放送課長
1952年 남원방송국 개국책임 1953년 개국
1957年 공보처 在職中 6개월 美國硏修
1961年 서울中央放送局 技術課長
1962年 서울市 文化賞
1962年 1963年, 亞細亞放送會議 韓國代表로 參席
1965年 梨花女大 視聽覺 敎育科 講師
1966年 서라벌 藝術大學 放送科 講師
1966年 제9회 방송문화상 수상
1969年 放送局 勤務中 漢陽大 經營學 碩士 學位取得
1973年 大田放送局長
1974년 2월 停年退職 後에도 繼續 大學 出講
1974年 韓國放送史 編纂 事務局長, 淸垣博物館長
1979年 高麗大學 新聞放送科 韓國放送史 特講
1987年 放送 特別賞
1988年 “短波放送 連絡運動” 冊子 發刊 및 同 主題發表,,,
“放送野話” 冊子 著述 및 放送歷史 關聯 放送出演 多數.
2009년 8월 24일 타계
좌 우 명
“오늘 최선을 다하면 내일은 오늘보다
행복하다” 는 것입니다. 항상 최선을 다 하셨으므로
하늘나라에서도 늘 행복하실 줄 압니다.
▶ 단파방송 연락운동(1991)
▶ 방송야사(1998
선생님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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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6월 15일자 경향신문 기사와
(아래)1990년 방송의 날 9월 3일자 경향신문에
실린 글(아래)을 옮겼습니다..
방우회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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