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방송

KBS 춘천방송총국의 어제와 오늘 ( 1 )

이장춘 2011. 7. 17. 11:08

 

 

 

 

 

 

 

 

 

 
 KBS 춘천방송총국의 어제와 오늘 ( 1 )
 
 
 
 춘천방송국이 50W출력으로 전파를 발사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4년 12월 20일의 
일이었습니다. 호출부호 JBMK 주파수 600Kc로 황소를 잡아
큰 잔치를 여는 가운데 신기하기만 했던 방송전파는
 사방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제2차대전이 한참 진행되던 때라 
일본의 전쟁목적 수행을 위해서 방송국
개국을 서둘러 방송을 했지만 일본어 방송채널
제1방송만 방송 되었을뿐  우리말 전담방송인
 제2방송은 발사되지 못했습니다.
 
처음 방송국이 자리잡은 곳은 춘천읍
단양정 106번지에 있는 붉은 벅돌로 된 양옥
2층건물로 3,000여평의 대지에 약 85평의 건물이었습니다. 
44계단을 올라가는 고지대여서 춘천시내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곳에 1940년,  추방된 선교사의 사택이 놀고
있어 건믈을  활용, 방송을 실시했습니다.
 
산이 둘러싸인 춘천은 초기에 실시한
50W출력의 방송으로는 춘천인근 지역에서만
 청취가 가능 했습니다. 방송링크 역시 성능이 시원치
은 단파나 전화선을 이용한 관계로 청취상태가 좋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때 강원도 내에 보급되어 있던
라디오는 기껏 만대도 안 되었고 일본어 방송만
했어도 방송이라면 신기 하기만 하던 때라
호응도는 높았습니다.
 
 
춘천이 고향인 이종훈님이
방송국 설립 책임을 맡으셨고, 또
유병은님이 오셔서 힘을 기울이셨습니다. 
이종훈님은 핵심 기술요원으로 6.25때 서울
수복 방송 선발대장으로 서울에 왔고 남북을
넘나들며 방송에 힘을 기울이다가 
연희송신소장등을 역임
하셨습니다.
 
유병은님은 방송국 설립후에도
계속해서 이곳에 근무하다가 6.25때는
대전방송국 방송과장을 맡았으며 남원방송국을
설립하기도 했습니다. 중앙방송국 기술과장,
대전 방송국장등을  역임하셨고  방송
역사학자로 널리 활약하셨습니다.
 
 
 
2차대전중 설치된 춘천방송국은
일본어 방송만 하다가 해방된후 우리말
방송을 하면서 방송국이 자리를 잡아가는듯 했을때
1945년 12월초 뜻하지 않은 화재가 발생해서 방송이 중단되면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전쟁때 추방된 선교사들이 돌아와 건물 양도를
 요구하던 중이라 방송국은 다른곳에 새로 짛는다 해도 방송국을 짛기까지
방송이 중단되면 마치 북한방송을 춘천에서 중계방송 하는것처럼 들릴때라
여러가지로 상황이 어려웠기에 긴급히 서둘러 춘천시 조양동 106번지에 있는
 적산가옥을 강원도로부터 대여 받아  대전에서 쓰던  50W송신기를 긴
급수송해서 설치하고 인근의 종전에 쓰던 방송국 공중선을
접합시켜 런대로 방송을 시작한 것은 화재발생후
 47일만인 1946년 2월 7일이었습니다.
 
비록 스튜디오 하나에
방송요원도 거의 없는 상황에서
 하루에 한두 번의 지방 공지사항을 방송하고
 한 달에 한번 정도강원도 당국자들이 나와서  방송을
했지만 새로운 소식에 목말라 하던 때 방송에 귀를 기울이는  
시민은 많았고 라디오를 가지고 있지 않던 시민들도 옆집에
라디오를  듣는 등 세상 돌아가는 소식은 신속히
 접할 수가 있어서 그 영향력은 컸습니다. 
그러던중 또 얼마 안있어
그러나 뜻밖의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3.8선에 접하고  있었던 춘천방송국은 6월 25일
아침 직원들이 전원 출근했고 춘천에 근무하던 6사단
정훈장교  전 두열 대위의 자료 제공으로 잠시 방송은
할 수 있었지만 정오 무렵부터는 뚜렷한 지침도 없어
제각기 피난길에 올라 방송은 중단 되었습니다.
 
당시 이곳에서 근무하다가
중앙방송국 대구 피난방송 시절에 합류해서
부산 피난방송시 서울 탈환에 동참하라는 지시를 받고
 9.28수복과 함께 서울방송 선발대로 나서서 활동한 전 성병
아나운서와, 6.25가 나면서 중앙방송국의 대전방송국 피난 시절에
합류 후 VUNC에 가셔서 활약한 김유선  아나운서 얘기는
 전시방송에서 남을 만한 얘기로  6.25와 방송편에
좀 더 자세한 얘기가 있습니다.
 
 어쨌든 6.25는 춘천방송을
1953년 9월까지 중단하게 만들었습니다.
 춘천방송국에 단신으로 돌아온 문돈식 국장은
 춘천여고 뒤의 타다 남은 경찰국장 관사 
한쪽에서 방송을 시작했습니다.
 
방송요원은 국장님 외에
김성열 기술과장님,고세혁님 (지금은
부산에 거주)등이 방송국을 지키시는 정도였고 
방송은 250W앰프와 확성기 3대를가지고
  지엽적인 유선방송을 했을 뿐 정상적인
방송은 아니었습니다.
 
그 뒤에도 시내 곳곳을 연결하는
유선방송을 통해서 방송을 들어야 했고
 RC12호짜리 송신기를 때로는 리어카에 또
미군차라도 빌릴 수 있을 때는 그 차에 싫고
다니면서  방송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 송신기는 제가 이곳에
근무하던 60년대 중반까지 예비용
송신기로 사용 되었습니다. 춘천방송국이
 정상적인 방송을 시작한 것은   1955년
 9월 300W송신기를 판잣집 가건물에
설치하면서 부터였습니다.
 
 
 
 
그리고 1958년 춘천시 옥천동에
새로운 청사를 마련하고 1Kw방송을 하면서
어느정도 본 괴도에 올랐다고 볼 수 있습니다.  
1957년부터 이곳 기술과장으로 근무하신  이승균님의 
말에 따르면 1958년 육군의 대민사업으로 옥천동 116번지에 
530평의 부지를 마련하고 81.7평의 건물을 지어 1958년 9월
26일에 
문을 열고 1Kw방송을 시작 하면서  비로소 방송을
안정적으로
 실시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다음 사진은 새로운
청사가
준공된 뒤 얼마 안있어 1959년에 촬영한 사진으로
그때 춘천방송국 아나운서로 근무하셨던
김영길님이 제공 해 주셨습니다.
 

 

 

새로 마련한 청사 앞에서 춘천방송국 직원들과

서울방송국 최계환, 이호로님이 함께 한 사진입니다. 앞줄

 왼쪽 두번째부터 이호로(음악계장), 최계환, 김득성(춘천방송국장),

이승균(기술과장), 뒷줄 남광명, 민서운, 송경원, 김영옥, 김태호.

김영길, 고세혁, 조찬길,이기선, 고재록님입니다.   저는 이 청사에서
 3년 반을 근무했습니다. 이전의 청사모습은 알 길이 없습니다.
제가
1964년 이곳 춘천에 갔을때는 원래의 건물 옆에  
자그마한
 발전실과 콘셑 건물 한 채가 있었습니다.
 
 초기 춘천방송국이 여러 수난을
당했던 관계로 사진이나 문서는 구하기가
 어렵지만  초기  방송국 건립을 위해  애 쓰시던
 유병은 선생님이 그 때의 얘기들을 기록 해 놓으셨고
또 제가 60년대 중반에 이곳에 근무했던 관계로 그 때
하던 일이나 사진 자료가 다소 있어서 다음 회에서는  
이것을 바탕으로  그때의 얘기를 쓰려고 합니다. 
 
 

 

춘천방송국은 방송국 설립때부터
선교사 사택, 적산가옥 사용, 6.25폐허에서의
가건물등으로방송을 실시하다가  1958년 옥천동
116번지에 마련된 방송국 건물을 지어 최초로
자체 방송국시설을 갖게 되었다.

 

 

1965년 12월 3공화국 수립 공로표창을 받을때의 기념사진입니다.

그때 공보부장관의 감사패를  전달받은 조대진 춘천문화원장과 인근 군부대장이

 함께 했습니다.  왼쪽부터 필자 이장춘, 편성계장 김영우, 최학수 방송과장, 조대진 문화원장

이은경 아나운서, 두사람 건너 한승은 춘천방송국장. 이용실 기술과장. 이범진 기자입니다.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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