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 남산시절

자유의 메아리와 대북방송의 추억

이장춘 2009. 9. 7. 04:19

 

 

 

 

자유의 메아리와 대북방송의 추억 

 

 

철조망이 가로막혀 남, 북간에 혹은

동, 서 간에 왕래가 불가능 했던 그 시절에도

KBS전파만은 한반도 저 북녘 끝 압록강, 두만강까지,

강 건너 북간도까지, 사할린까지, 바다건너 오대양 육대주

어디에도 메아리 쳤다.  지금 들려오는 소리는 1960년대,  자유의

 메아리 시그널로 필자가 40년 넘게 간직해 오다가 KBS가 2008년에

한민족방송 탄생 60주년 특집방송을 한다고 했을 때 KBS에 기증한

녹음물이다. 맨트를 넣은 주인공은 유영옥 아나운서로 기억한다. 

필자는 지금까지 그때 사용하던 대북방송 시그널을 모두 간직

하고 있다. 음질이 다소 저하되기는 했어도 역사적인

가치가 있는 시그날이다. 이 시그널을 들으면서

그때의 자유의 메아리를 회상해 본다.

 

 

 

오랜 기간 담당 프로듀서는 이순자님이었다.

 올해 75세(2009년 현재)지만 홀로 살아왔다. 이 글을

오랫동안 집필 해 주신 분은 최 호 선생님이었다. 선생님은

 한때 공산당 거두 박헌영의 비서이기도  했던 대공방송의 선두주자

방필주 선생님과 함께 대북방송을 오랫동안 집필 해 주셨다.  음악과

함께 공산권 내부의 실상을 파 해치고 자유세계의 소식을 북한

동포들에게 전하던 “자유의 메아리”는 20분 또는 30분으로

제작되어 대북방송 전용 채널은 물론 제1방송 제2

방송을 통해서 하루에도 여러 번 방송되었다.

 

 

국내에서 방송전파가 쉬고 있던

심야에도 대북방송은 그치질 않았다. 밤 12시가

넘으면 KBS 지방방송, 민영방송을 포함한 대한민국의

모든 방송은 대북방송 일색이었다. 대북방송은 국내방송보다

그 방송 량이 더 많았지만 일반국민은 이것을 잘 몰랐다. 누가

알아주는 이 없어도 대북방송요원들은 사명감으로  일을 해냈다. 

심야에 민영방송 채널에서 대북방송이 송출되면 KBS에 항의 전화를

 하는 시민도 있었다. “민영방송에서도 대북방송을 하는데 왜?

 KBS는 그런 방송을 하지 않느냐”고 야단을 치는 것이다.

국내에서 방송되는 대부분의 대공방송이 KBS

대공과에서 제작되는 프로그램이라는 것을

알아주는 국민은 별로 없었다.

 

 갈메기 울음소리에 실려 울려 퍼지는

 시그널 맨트 “압록강 두만강 까지 멀리 멀리  울려

퍼지는 자유의 메아리......” 정감 있는 대중가요와 함께

공산권의 모든 실상을 파헤치고 자유세계의 소식을 전하던

대표적인 장수 프로그램 자유의 메아리를 다시 생각해본다. 그리고

그때 그 어렵던 일을 어렵다 하지 않고 사명감으로 묵묵히 수행하던

 동지들의 모습을 머리에 떠 올려 본다, 기회 될 때마다 그때 그 생각을

 더듬어 그 얘기를 쓸 것이다. 2009년 올해도 KBS한민족방송에서

 전화가 왔다. 그때 그 얘기를 좀 해 달라고............. 시대가

바뀌어 방송출연은 어려워도 생각나는 그때의

얘기는 해 줄 수 있어서 다행이다.

 

1970년을 전, 후해서 대북방송을 하던 사람들이다.

앞줄 왼쪽부터 이내수, 채선경, 김기찬, 장영오, 지용수, 송현식,

장민구, 김기흥, 가운데 줄 왼쪽부터 박휘서, 임대길, 우길명, 윤진영,

전옥배, 이창훈, 손종만, 강정수, 곽영자, 이공진,  뒷줄 왼쪽부터

최광일, 방필주, 이장춘, 김용석이 함께 한 사진이다.

 

 

다음글은 리진혁님이 댓글로 올린 글인데

40년전 얘기를 생생하게 기억하셔서 저는 그 얘길

잘 모르지만 계속해서 알아 보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본문에 글을 옮겼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제가 병원에서 입원중일때

 조선족 출신 나이 많으신 아주머님께 40년전 메아리 방송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야기중에 궁금한 한분을 알고싶어 댓글

남깁니다. 너무 오래전 이야기라 알수 없으실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적어볼게요.

 
정확하진 않지만 중국 조선족분들에게는

메아리방송에서 길림성 출신의 민족의 영웅이라고

 불렸던 분이라고 하시며 이름은 맞을거라 하시는데 성은 모르신답니다.

 존함이 '문길'이라고 하셨는데요. 그 분은 매일 신체 단련을 하셨고 중국에서

당시 일명'땡갈모자'를 쓰는 사람들(중국 경찰 또는 군인들이 쓰는 모자)을 보면

 죽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중국에서 그 분을 잡으려고 사람들을 그분이 사는

여러곳에 배치를 했는데요. 그 분이 얼마나 신출귀몰한지 단층짜리

 건물들을 훌쩍 뛰어넘는다고 방송에서 말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피해다니면서도 나쁜 부자들의 돈을 뺏어

 못사는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의적 활동을 많이 하시며

중국 군경사람들을 죽였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피하시다가

 나중에는 다리에 총을 맞고 도망치시다가 높은 담벼락에 막혔는데

 그걸 뛰어 넘어 피했는데 총에 맞은 다리를 치료하지못해 다리가

썩어가서 그 분의 누나가 신고를 해서 잡혔다고 합니다.

 

중국에서는 그 분을 죽이려고 했는데

중국의 유명한 대학교에서 죽이지말라고 했답니다.

그런데 죽이지 않아도 썩어가는 부위와 합병증으로 죽게된다고

하며 사살하는게 낫다고 해서 사살했다는 이야기인데요. 그분은

 매우 높은 굴뚝에 올라가서 거기에 매달려서 엄폐하며 경계를

피하셨다는 유명한 이야기도 있다고 합니다. 저는 그 분의

존함과 살아가신 배경을 알고 싶습니다.

 

 

방우회의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자유의 메아리 씨그날.mp3

 

 

 

자유의 메아리 씨그날.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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