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경성방송국 두 여자 아나운서 호기수와 고가 도애

이장춘 2009. 8. 24. 06:15

 

 

 

 

경성방송국 두 여자 아나운서 호기수와 고가 도에

 

 

 해방 될 때 경성방송국에는 두 사람의

여자 아나운서가 있었다.  한국말 아나운서 한국인

호기수 (扈琪秀)와 일본말 아나운서 일본인 고가 도에

(賀 登惠)는 해방되던 날 방송부 한 사무실에서

 서로 다른 의미의 눈물을 흘렸다.

 

 

 

 

호기수 아나운서는 해방되고도

계속해서 KBS 중앙방송국에서 일했지만

도에 아나운서는 해방되던 다음날 일본에 건너가려고

 부산에 까지 갔다가 다시 서울에 돌아와 잠시

머무르다가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제 강점기 경성방송국

여자 아나운서라면 최초의 아나운서

이옥경과  최초의 공채 아나운서이고 경성

방송국의 개국아나운서 마현경, 우리말 전담방송을

 위해 공개모집한 김문경, 최아지 아나운서가 있었고

  일제 강점기 말부터 6.25무렵까지 그 아름다운

 목소리의 주인공 호기수 아나운서가 있었다.

 

 

일제가 전쟁으로 치달으면서

가냘픈 여자 아나운서보다는 박력 있고

호소력 있는  남자 아나운서를  선호해서

여자 아나운서는 발붙이기가 어려웠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두 여자 아나운서는

 그 자리를 지켰다.

 

해방된 방송국에서 호기수 아나운서는

인기를 독차지했다. 이승만대통령의 성대모사로

 이름을 떨친 성우 구 민 씨는 최초의 어린이 드라마

똘똘이 모험에 어린이 역으로 출연했다.

 

그때 성우가 된 동기를

호기수 아나운서에게서 찾는다.

방송국을 드나들며 호기수 아나운서를 보고

 어린 구민의 머리에 호기수 아나운서가

바로 천사같이 보였다고 했다.

 

기다랗게 삼단같이 늘어뜨린

머리카락에 그 아름다운 목소리는

구 민 씨를 영원한 성우로 삶을

 이어가게 했다고 얘기했다.

 

1950년대부터 70년대까지

명성을 날리던 대표적인 여자 아나운서

강영숙님에게 “선배 여자 아나운서 중에서 머리에

 금방 떠오르는 분이 누구십니까“ 하고 묻자 바로 이옥경,

호기수 선배를 떠 올렸다. 다른 분이 필자에게 똑 같은  

질문을 했다면 여기에 강영숙 아나운서를

 추가 했을 것이다.

 

해방되면서 방송국에 들어오신

노정팔님은 그때의 어린이 방송을 예기 하면서

 꾀꼬리 홍일점 호기수 아나운서가 아주 밝고 낭낭하게

방송을 해 주어 어린이 방송이 더욱 정다운

감을  주었다고 했다.

 

호기수 아나운서는 뒷날

VOA에서도 방송을 했다고 한다.

이렇듯 호기수 아나운서에 관해서 얘기는

 많지만 막상 사진을 구해 보려고 하니

 구할 수가 없었다.

 

럴듯한 사진을 구해서

선배님들에게 보여 드리면 아니라는 것이다.

때 호기수 아나운서와 같이 계셨던 문제안 선생님을

 찾았을 때의 일이다. 빛바랜 사진 한 장을 내 놓으시며 이 사진이

 해방 후 처음으로 맞은 삼일절에 덕수궁 중화전 앞에서

여학교 합창대회 실황을 중계 방송한

 사진이라고 하셨다.

 

 

 

사진 뒷면을 보니 이 중계방송에

여한 호기수 아나운서의 이름이 나온다.

그래서 호기수 아나운서의 사진을 찾았고 사진이

너무 오래 된데다 다소 볼 품 없는 스냅사진이기는 해도

호기수 아나운서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기쁨으로 여기에

올리기로 했다. 이 사진을 주신 문제안 선생님께

고마운 말씀 드리며 앞으로도 사진을

 더 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제 블로그 방명록에 반가운 손님이

오셨습니다. 호기수 아나운서의 어머니 신경애 여사가

할머니가 되시고 어린시절에 호기수 아나운서를 보셨다는

Morning Calm님으로 호기수님이 아직 워싱턴 부근에 사실거라는

얘기와함께 앞으로 사진등의 자료를 구해서 파일로 보내 주시겠다는

글을 써 놓으셔서 호기수님에 관한 글을 제대로 쓸 수 있겠구나

하는 기대를 갖게 해 주셨습니다 참고로 써 놓으신

글을 여기에 옮깁니다.

  

 

첫번째 쓰신 글

 

선생님의 블로그를 통해서 호기수 아나운서의

사진을 찾을수 있어서 감사를 드립니다. 호기수 아나운서의

어머니 신경애(당시 바이올리니스트)는 저의 친 외할머니가 되십니다.

신여성으로서 (연희전문 영문과교수 백남석이 미국유학중에) 시어머니로부터

이혼을 강요당한 후에 재가하여 낳은 딸이 호기수 아나운서 이며 남편은 호명환

 (당시 조선일보 편집국장)인데 납북되었고, 호기수의 어머니 신경애는 호기수

아나운서의 미국의 소리방 송 아나운서로서 대북 방송 내용을 이유로

 광화문 에서 북측 으로부터 총살에 처해졌다는 옛이야기들을 들었

습니다. 혹시 호기수 아나운서와 그의 부모 이야기를

아시면 올려주시기를 부탁 드립니다.

 

 

두번째 쓰신 글

 

여기에 올려져 있는 호기수 아나운서의 사진은

제가 어릴때 보았던 사진과 같은 얼굴 모습입니다. 지난주에

 백영희 큰이모님을 방문 하여 호기수 부친 이름을 물었드니 생각이

안나신다며, 어제 전화를 주셨는데 부친 이름은 호명환 이라며,

호기수와 통화 하신듯 합니다.(아직 워싱턴근처에 사시는듯 ..

남편은 목사님 ) 호기수 아나운서와 부모의 사진을

요청하여 받으면 file 로 보내드리겠습니다.

 

Morning Calm님께 방우회와

이곳을 찾으시는 분들을 대신해서

진심으로 고마운 마음을 전하면서

호기수 아나운서가 들어있는 원래의

사진 원본을 앞에 올렸습니다.

 

 

호기수 아나운서의 글은 따로 썼습니다.

 

다음 영문자 주소를 클릭 하시면 보실 수 있습니다. 

 

 

해방 전,후 홍일점  인기 아나운서 호기수 (扈琪秀)님

http://blog.daum.net/jc21th/17780810

 

 

 

해방되던 때 일본인 홍일점 아나운서 고가 도에 (高賀 登惠)

 

 

1940년 22살의 나이로 경성방송국

아나운서를 시작해서 전쟁중 활동한 고가 도에는

최후로 남은 일본인 홍일점 여성 아나운서로 울음으로

일본 패망을 맞이하면서 몇일 후 우리나라를 떠나야 했습니다. 

전쟁 중에 약혼남이 시배리아에 끌려가 소식이 없어 일생동안

홀로 살아왔습니다. 2차대전 후 일본에 새로 생긴 방송국등

 언론기관에서 오랫동안 활동했고 서울 서대문 국민학교를

나온 고가님은 지금도 도꾜에서 어릴때의 국민학교

동창생들을 만난다고 합니다. 동창회 날애는  

100여명이나 모인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 국민학교를 나오고 

 아나운서생활을 통해서 첫 직장의 인연을 밎은

고가 아나운서는 늘 우리나라를 잊지 않고 있다고

니다. 1977년 조방회 회원들과 함께 32년만에 우리나라에

 와서 옛 겅성방송국 터와 옛날 살던집 터를 돌아보며 감회에

젖었고 다음해 1978년에도 우리나라를 찾았습니다.

 

1987년 방송 60주년을 맞아

사단법인 방우회가 새운 첫 방송터 유허비

준공식에도 시노하라 아들 시노하라 요이지

부부와 함께 참여해서 옛 동지들을 만났고

여러곳을 돌아 보았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근무하던 일본인

방송인들이 1972년부터 모임을 가졌던 조방회에도

적극 참여했고 (2007년 해산)  지금도 우리 방송인을 만나면

옛정을 되새기며 친절을 배풀기도 합니다.  2009년으로 90을 넘기면서

기력이 많이 쇄진하고 시력이 감퇴되어 활동이 어렵다고 합니다.

한국을 한번이라도 더 다녀가고 싶은 생각이  간절

하다면서도 여의치를 않은가 봅니다. 

 

우리 방송인과 교류가 잦아  비교적

자료가 많습니다.  특히 방우회 정항구 이사님과는 

내왕이 자주 있었고 2008년 12월에도 고가가 살고있는

 미야자키에서 만나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고 합니다. 2008년

12월 15일자 일본 아사히신문 석간에  실린 다음 글은 

방우회 정항구이사님이 구해서 보내 주셨습니다.

 

 

 

정항구 이사님은 2010년에도 세차레나

방문해서 여러 얘기를 나누셨다고 합니다. 고가

(高賀)님이 방우회 정항구 이사님께 사진과 함께 편지도

보내 오셨습니다. 연세 많으셔도 필체는 예나 다름 없으시나

봅니다. 우리나라에서 학교를 나오신 고가님의 동창생들이

도꾜에서 동창회를 연다는 소식이 적혀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