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로(女路)만큼 선풍적인 인기를 끌며 화제를
모았던 드라마는 그 전에도 그 후에도 없었습니다.
TV의 전국 방송망구축과 국산 TV생산으로 수상기가 급격히
늘어나던 이때 1971년, TBC의 아씨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TV연속극에 관한 관심이 고조되고 뒤이어 1972년
4월 3일부터 방영된 여로는 전 국민을 TV화면
앞으로 끌어 들였습니다.
한국방송사상 최고의 인기 드라마 일일 연속극 여로
위사진은 오승룡 선생님 등 여러분이 보내 주셨습니다.
위에 올린 사진은 그때 중앙방송국장이었던 최창봉 선생님 소장
사진입니다. 번호순 따라 2 유신박, 4 이남섭(근본,연출) 5 박종국(TV부장),
6 장욱제(주연), 7 태현실(여 주인공), 8 최창봉(중앙방송국장), 9.권오진,
10 오승룡(기술), 11 김광식, 16 인운섭(성함을 확인되는데로 올리겠
습니다. 아시는 분 댓 글난에 써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1960년대까지 지지부진하던 수상기의
보급률이 급속히 늘어나면서 질 나가던 영화관이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곧이어 영화배우들이 TV
화면에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TV수상기 80만대이던 시절, 서울인구가
500만이 채 안되던 시절, 시골 농촌 큰 마을이라야
한, 두 대의 수상기가 있을까. 말까. 하던 시절 ! 수상기가
있는 집이면 동내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도시에서도
수상기가 없는 사람들은 이웃집으로 또 다방으로,
만홧가게로 모여들었습니다.
코 묻은 돈을 모으던 동내 만홧가게는
입장료를 받고도 앉을 자리가 없어 만홧가게 해서
돈을 번 분들도 꾀 생겼습니다. 버스도 택시도 그 시간에는
장사가 안 되었습니다. 해수욕장에서 여로를 시청하려는 피서객
들이 TV 있는 곳을 찾아다니는 바람에 백사장이 텅텅 비었다는 일화도
있습니다. 주인공 영구(장욱제)의 머리 가운데 부분에 하옇게 생긴
기계 충 모양이 어린이들 사이에 유행이 되기도 했습니다.
주인공 영구가 울면 따라서 울고,
병신 짓을 하면 따라서 병신 짓을 하면서.
주인공들과 함께 하면서 자기도 모르게 사람들의
마음이 바뀌어 버렸습니다. 이로부터 라디오 전성시대는
저물어가고 TV시대를 맞으면서 TV에 접하는 시간이 많아지고
TV는 사람들의 생활을 지배하는 도구로 변했습니다. 돈이 없어도
대학졸업 초봉 5개월분에서 7개월분을 주어야 사는 16안치 흑백 수상기를
사기 위해 모여 들었습니다. 돈이 없으면 빌려서라도 사려고 했고 월남에
갔다 돌아온 병정들은 수상기 티켓 두 장 씩은 가지고 와서 스스로
보기도 하고 팔기도 했습니다. 외국 갔다 돌아올 때면
수상기가 제일 큰 재산목록이었습니다.
이것이 70년대를 맞으면서 TBC아씨와
KBS여로의 방영에 따르는 삶의 새로운 모습이었
습니다. 그때의 여로의 시청률이 70%가 넘었을 것이라고
애기 하시는 분이 계시지마는 시청률은 의미가 없었습니다.
이웃이던지, 다방에서 던지, 만홧가게에서 던지 TV를 볼 수 있는
분들은 만사를 뒤로하고그 프로그램을 보아야 했고 TV를 볼 수
있는 사람은 어디 가서든지 TV를 보았던 시절에 시청률
자체의 의미가 없었을 줄 압니다.
여주인공 분이는 (태현실)일제 강점기로부터
5. 16후가지 20년간 격동기를 살아온 대한민의 강인한
여성상의 표출이기도 했습니다. 여로는 멜로드라마 이면서도
멜로드라마를 뛰어넘는 드라마라고 평가 되었습니다. 작품의
제목을 딴 상품과 상호가 생겨났고, 남자 주인공 이름인
‘영구’는 바보의 대명사가 되기도 했습니다.
1972년 4월 3일 부터 12월까지
저녁 7시 반부터 50분까지 211회가
드라마 여로의 줄거리를 올려 드립니다.
'여로'는 전형적인 시대 비극이었습니다.
1942년부터 1962년까지를 배경으로 해 가난 때문에
여주 유지인 최주사의 아들 영구의 짝으로 씨받이 겸해서
팔려온 술집 작부 출신의 분이가 겪는 고생담이 줄거리였습니다.
신랑 영구는 지능이 모자라고 신체가 불편해서 지능은 기껏해야
'아버지야 제기차기 하자'는 말을 할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나이 스물이 되서도 글 한 줄 읽을 줄 몰랐습니다.
분이는 비록 머리가 모자라지만 남편에게
온갖 정성을 다하려 하고 영구도 분이를 진심으로
좋아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분이는 시집온 그날부터 극성맞은
시어머니(박주아)와 시누이(권미혜) 사이에서 갖은 고초를 당했
습니다. 시어머니 윤 씨는 며느리 분이를 구박하고 그녀를
짝사랑하는 달중(김무영)이 툭하면 시어머니와 흉계를
꾸며 어려움은 더했습니다.
아들 기웅(송승환)을 낳고 행복한 시간도
잠깐, 분이는 술집에서 일했다는 사실이 탄로나
남편, 아들과 생이별을 당합니다. 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분이와 영구는 피난지 부산에서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되지만 과거가 들통 나
시어머니에게 쫓겨납니다.
6.25 기간 동안 피란지 부산에서 국밥집을
하며 큰돈을 모으고 그 돈으로 주위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줍니다. 또 10년이 흐르고 국밥장사를 해서 모은 돈을 사회에
환원한 분이의 미담 기사가 신문에 실려 마침내 대전역 대합실에서
온 가족이 눈물의 상봉을 합니다. 분이가 사놓은 옛날 최주사의
영구 역의 장욱제님과 그 의부인 분이로 나온
태현실님은 당시 최고의 스타로 부상했습니다. 여로는
영화로도 제작되어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고, 2003년에도
연극으로 공연되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극본을 쓰시고 연출을 맡으신
고 이남섭님은 최고의 연출가로 발돋움 했습니다.
이남섭님은 전 KBS사장 홍두표님, 전 서울대학교 강현두
교수님등과 함께 KBS-TV 1기 PD였습니다. 불문학 전공인 님은
연출뿐만 아니라 극작에도 소질을 발휘해서 여로 외에도
임자 있었네, 10분쇼 등 의 극본을 쓰는 등 많은
활동을 하시던 분 이었습니다.
불행히도 1987년 일직이 세상을 뜨셨습니다.
깡마른 체구에 밤낮없이 일만 하시다가 세상을 떠나신
방송인이셨습니다. 부인 고 김난영님은 KBS-TV 1기
탤런트로 많은 활동을 하셨지만 이남섭님에 앞서
뜨셨습니다. 작가와 주인공에 대헤서는 좀 더
자세히 쓸 기회를 갖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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