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대구방송총국의 어제와 오늘 ( 1 )
대구방송국은 1939년 4월 19일
조선방송협회 대구출장소를 설치하면서
비롯됩니다. 호출보호 JBGK,출력 50W로 시작 했습니다.
실재 방송은 1940년 10월 30일부터 실시했지만 방숭국 생일을
계산할 때는 1939년부터 시작되어 금년 (2009년)으로
대구방송국 개국 70주년이 되었습니다.
전국적으로 방송을 실시한 순서로 보년 서울, 부산, 평양, 청진, 이리, 함흥에 이어 7번째로 문을 연 방송국이지만 이곳에서는 문을 열 때부터 일본어 방송이 함께 방송되었습니다, 개국한지 3년이 지나 1944년 3월 10일 출력 300W로 늘려 방송하게 되었고 해방되면서 500W로 증설되었습니다. 500W라면 지금으로 보면 너무 보잘 것 없는 것이지만 그 때로서는 서울의 방송도 1Kw로 시작한 것이니 상당한 것이었습니다. 해방을 맞이할 때 대구방송국에는 우리방송인으로는 심경구, 김익모, 조준기님 등 주로 엔지니어 분들이 근무했고 광주방송국에서 근무했던 엄상선님이 이곳 방송국장을 지냈습니다. 아래 사진 앞줄 두번째 문이 엄상선입니다.
대구시 원대동 1169번지에서
4,000여평의 대지에 단층건물 한동을 지어
방송과 송출을 같이 했었고 서울과 유선 선로를 사용해서
방송 상태는 비교적 양호 했었지만 6.25로 전국의 피난민들이
모여들면서 원대동의 대구 방송국은 너무 좁았고 맨손으로
밀려드는 방송인들은 머무를 곳이 없었지만 그래도
8월중순까지 한달동안 중앙방송국 역할을
하던 방송국이었습니다.
이때는 방송국 명칭도 공보처 방송국으로 되어 있어서
방송 콜 싸인 은 신경 쓸 것이 없었고 방송은 군 감독 하에
군가를 비롯한 음악과 전쟁 뉴스 등을 내 보내면서 VOA, VUNC등을
중계 방송하는 등 명맥만 유지하던 때였습니다. 각 지방방송국에
근무하던 방송요원들이 대구로 또는 부산으로 몰려들었지만
이들을 수용할 수 있는 능력도 없어 일부만 방송에
투입되던 때 이기더 했습니다.
8월초 국군과 UN군이 낙동강 전선을
방어선으로 완강하게 버티었지만 언제 어떻게
될는지 알 수 없는 급박한 상황에서 최후의 보루로
제주도에 방송국을 새우기로 하는 한편
부산으로 옮길 준비를 갖추어 8월 중순
부산으로 떠났습니다. 6.25전란중 대구방송국 앞에서 찍은 사진이다. 중앙방송국장 노창성님과 ( 오른쪽 두변째 ) 방송과장 송영호님, 대구방송국 방송국장 서희택 님( 오른쪽분 ) 작가 최요안 ( 왼쪽분 )님등의 모습이 보고 찦차 앞에 대구방송국 호출부호 KG글자가 보인다. 사진 제공 : 노라노님(노창성님 두째딸)
9 . 28로 서울을 수복하고 압록강까지 진격했던국군과 UN군이 다시 밀리면서 대전과
이곳에서 중앙방송국의 키 스테이션 역할을 할 수 있는
대형출력의 필요성을 느껴 10Kw송신기를 설치하게
됩니다. 그때로서는 획기적인 일이었습니다.
여기에 관해서 이승균 원로 회원님께서 대구방송국 개국 50주년을 맞아 1989년에 써놓으신 글을 옮겨 보겠습니다.
“UN군 총사령부 심리전국에서 파견나온 루미스 소령의 주선으로 한기선씨가 일본에 출장하여 NEC 10Kw송신기를 구입 해 왔다. 그 당시에 10Kw출력 전국을 카버할 수 있다고 생각할 정도 였으며 설치공사에는 약 1개월 정도가 소요 되었는데 전시중이라 공사를 급히 서둘러야 하기 때문에 잠은 거의 잘 수가 없었다. 그때 같이 고생하신 분들은 이인관, 한기선, 김석모, 권오진, 김시욱, 이덕채, 권혁래씨등이 생각 난다. 10Kw송신기 준공기념 공연은 52년 10월 5일 당시 지금의 한일극장에서 이서구 각색의 쇼와 노래로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이상은 이승균님의 글에서 옮겼습니다.
지역에서는 대전에 이어 10Kw출력으로 방송을 내 보내게 되었고 1966년 11월 15일 경산송신소에 연희송신소의100Kw송신기를 설치하게 되면서 이 또한 지역국 에서는 최초로 대형출력 송신소가 되었습니다. 한편 원대동의 건물은 초기 건물로 비좁아청사 이전 계획을 세웠는데 여기에 관해서
당시의대구방송국 기술 과장님으로 계시던 이승균님의 글을 옮겨 보겠습니다.
“방송국 이전계획에 따라 여러 곳을 물색 하던 중 대구시 로부터공회당을 임대받아 지하에는 공보관 1층부터 5층까지는 방송국으로 사용하는 공사가 10월부터 착공하여 62년 6월 23일 낮 음악방송부터 이곳에서 방송을 시작했다. 이로서 대구방송국은 연주소와
송신소가 분리된 것이다.2층에는 570석의
객석과 40여 평의 무대 그리고 조명실,영사실,
분장실 등을 고루 갖추고 공개홀까지 구비한
대구방송국 최초의 연주소였다.
이때 뜻밖의 화재가 발생 했는데 여기에 대해 이승균님은 “6월 25일 아침 새 청사에서는 처음가진 간부 회의가국장실에서 있었는데 갑자기 펑 하는
소리와 함께 건물이진동하고 유리창 깨지는 소리가 나서
나와 보니 이미복도에는 한 치의 앞도 내다 볼 수
없을 정도로연기로 덮여 있었다.
방송실 공사장에서 바닥타일 접착제에 일꾼들의 담뱃불이 인화되어 폭발한 것이다. 순식간에 청사가 모두 연기 속에 잠겨 버렸고 나는 급히 뛰어가 전원을 차단하고 후문으로 탈출 하였다 ....중략... 연기가 한없이 뿜어 나오기 때문에 접근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한점의 기계라도 건지기 위해 타월을 물에 축여 입과 코를 막고 창문으로
들어가서앞을 볼 수 없지만 손으로더듬거리면서
잡히는 대로 기계를 꺼냈다. 몇 번이고 쓰러져 가면서 결사적으로 행동한 것을 생각 하니생명이란 것을 의식 했었는지 의심이 갈 정도다....중략.... 온통 무릎 까지 물이 찰 정도 이었다. 기기를 점검 해 보니 다행이도 별 이상이 없었다……. 12시 40분경부터 연주소에서 방송을 재개했다. 이상은 이승균 회원님의 글을 옮겼습니다.
이 화재로 해서 인부 한사람은 방송실에서 새까맣게 타 사망하고 부상당한 방송요원도 있었다고 하셨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기계보호를 위해 필사적으로 임했던 우리 방송인들이었습니다. 이승균님은 이 글에서 어린 딸이 앓고 있다는 말을 듣고도 가보지 못하다가 결국 다 키운 딸을 잃고 말았다고 하셨습니다. 우리 선배님들 그리고 그때의 모든 방송인들이 이토록 일을 해 오셨기에 그 바탕위에 오늘의 KBS가 서 있는 것입니다. . 이승균님은 올해 84세로(2009년) 1945년 10월 방송국에 들어오셔서 오랜 동안 엔지니어로 계시다가 대구기술부장을 끝으로 정년퇴직 하신 후 KBS 사우회 대구 지회장을 지내셨습니다.
앞으로 옮기고 1962년 7월 11일 국장 11대 한기욱 국장이 떠나고 12대 한남석 국장이 부임할때 촬영한 사진, 시계방향으로 이승균 기술과장, (?), 한남석 12대 국장, 이름을 모르는 국장 관용차 운전기사 송씨, 한기욱 11대 국장, (?), 김창회 방송과장, 유필기 아나운서, 드라마 연출자 김태유?, 이재춘 엔지니어, 사환으로 추정, 박연옥 아나운서, 이원춘 아나운서?, (?), 박진우 기자, 권영원 엔지니어 (필자), 임병윤 엔지니어, (?) 김영우(대구방송국 건물 아래층에 있던 중앙공보관 대구 분관장), 맨 뒷줄 두사람은 왼쪽부터 (?), 엄동훈 엔지니어, 우달수 기자. 대구방송총국에 관한 얘기를 더 보실분은 아래 영문자 주소를 클릭 하셔요.
KBS 대구방송총국의 어제와 오늘 ( 2 )
사진으로 본 KBS 대구방송총국의 역사 지억국 최초로 건립된 100Kw 대출력의 경산송신소다.
이 송신소는 1966년 11월 5일에 준공되었다.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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