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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인생 음악프로듀서 박창학 방송사료 2

이장춘 2017. 10. 19. 02:42





음악이 좋아, 일생을 음악과 함께
살아온 박창학! 어린 시절 교회성가대로,
군 시절 軍합창단원으로, 1960년대의 대한합창
단원으로 합창과 오페라, 연극을 해오던 박창학은
KBS 정동시절 국제방송국 합창단원으로 또 그 시절
가장 활기차게 활동했던 「예그린」 합창단원으로
활동했던 박창학은 1964년 KBS프로듀서가
되어 음악방송에 심혈을 기울였다.

오래전에 올린 박창학
방송사료와 함께 올린 글에
2022년 8월 10일 새로운 글을
보내오셨기에 올립니다.

박창학 PD께서 보내온 글
2022년 8월 10일
 
[박창학] [오전 10:41]
나의 쇼pd. 인생일대기는.후라이보이,곽규석과막동이,구봉서.그리고 살살이,서영춘과 뚱뚱이,백금여로 시작해서 송해.박시명.이순주.남보원.백남봉.쓰리보이,신선삼.이금희.배일집.배연정.장고웅.박상규.뽀빠이,이상용.임성훈.왕영은.그리고 주걱턱,심철호와송도순.만담가,장소팔과고춘자.배뱅이굿으로 유명했던 이은관까지 이루해아릴수 없이 많고,거기에 당대 최고의스타이자,영화감독이며.제작자였던 최무룡씨와 연예가 대부로 통했던 장동휘 연예협회장과.허장강씨와함께했다. 그러니 세간은 나를 두고 하는 말이 살아있는 연예가의산 증인이니.. 전설이라 한다.
1964년, 중앙방송국시절 임시직 프리랜서 음악PD로 입사한 후 KBS한국방송공사를 떠나기까지가 내 연예PD.일생일대기이다.
만34년이란? KBS.에서의 추억을 이제 접어야 할 시점 점점 다가오고 있음을 최근 몸이 극도로 약해지면서 체험처럼 다가온다. 육체가 고장난것이다.발목관절에,하지정맥.허리협착증에 거동 어려우니. 몸 전체가 아프기 시작!
이젠 더 이상방법이 없음을 생각한다.
 
[박창학] [오전 10:42] 한국방송사에..
이름3개를 남겼다. 뮤직 라이프 같은 잡지에기고할땐,필명,박순식으로.초창기pd땐, 예명으로
박정준이란이름으로이름을난렸다.그리고,후일 중견간부PD가돼서는
지금의 본명. 박창학으로 이름을 바꾼 사연도많다.
[박창학] [오전 10:42] 지금생각하면, 나를 거치지 않은 m. c가 드물고, 나의 수많았던 쇼. 프로그램에 출연했던 가수는 또 얼마나 많았던가! 모두가 주마등처럼 스치는 추억됐다.
누군가가 인생은 추억을 먹고 산다고 했던가?
맞는 말인 듯 싶다!!,




음악인생 음악프로듀서 박창학 방송사료 2


아래사진은 1962년 오페라 마스타
공연 때 찍은 사진 가운데 줄 우측 세 번째가
 박창학으로  솔로 (solo)를 했다 국립극장 
 당시 명동에 있는 시공관에서다,








쉼 없는 삶과 음악활동을
통해서 그가 남긴 자료들은 수 없이
많다. 사진, 영상, 녹음물 등등 자료보존이
어렵던 그 시절에도 수많은 자료를 한점, 한점
모두 소중하게 보존 해 왔다. 그리고 그 자료들은
KBS와 춘하추동방송에 제공되었다. 그가 보존하고
있는 史料들 사진, 영상, 녹음자료 등은   「박창학
KBS 음악 PD, 방송 가요이야기」 에 일부 올렸고
 또 오늘 글에도 올리지만 길이 보존하면서
춘하추동방송방송역사 史料로
 활용 될 것이다.










독립운동가 박정환 선생님의
후손이기도 한  박창학은 투철한
애국정신으로 대통령 직속 헌법기관인
민주통일 자문위원, 독립기념관 이사, 임원
추천위원회 위원장 등을 맡아  쉼 없는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호남의 갑부였던 할아버지 박정환
선생님(위 사진), 그 많은 재산을 일제강점기 동양척식
주식회사 토지조사를 거부하고 은밀히 임시정부를 비롯
해서 수많은 의병장, 독립군의 독립운동 자금으로 보내
독립운동에  기여하면서 가산은 탕진되고 1930년
 38세의    짧은삶을 이어가던 중 사망원인을
모른 체 저 세상으로 가셨다. 자세한
 얘기는 다음에  올릴 것이다. 




머리 동영상 가곡 「보문사」는
1975년 경 그 시절 유명했던 주지승
정종수 스님과의   깊은 인연으로 살던 중
가족 초청을 받고 가족들이 하룻밤을 보문사에
머물며 시상이 떠올라 통일의 염원을 담아 쓴
가사에 일생동안 음악활동을 함께 한
이수인이 곡을 붙여 박인수가
부른 노래다.







앤드루 유! 세계적인 생명과학자
그는  한국의 아들이요   바로 박창학
PD의사위다. (위 사진 오바마 대통령과
악수하는 앤드루 유,     유승조박사!


미국 워싱턴대학 유승조 박사!






미국 이름으로는 앤드루 유라고 부르는
유승조박사는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의 초청을
받은 미국을 빛낸 인사 100인 가운데 한사람이다.
피부세포를 줄기세포로의 환원 절차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운동신경 세포로 전환하는 데 성공해서
 9월 7일자 (2019년) 과학전문지 '셀 줄기세포
'(Cell Stem Cell)에 발표했다. 자세한
사항은 끝 부분에 연합뉴스
기사를 올렸다.




미국에서 보내온 사진과 글
2019년 4월 30일










박창학님이 이달(2019년 4월)
생전에 미국 딸집을 방문했으면 좋겠
다는 부인의 원에 따라 미국에 가서 현재
딸집에 머무릅니다. 필자가 미국의 방문
사진을 보내 주셨으면 좋겠다고 했더니
아래 글과 함께 위 사진을
보내오셨습니다.
 
위에 있는 사진이, 막내사위
유승조 박사이고 아래사진은 저의 집
사람입니다.     집근처 산책 나왔다가
찍은 사진입니다.    이 이사님 말씀대로
유승조 박사는 지금. 독일. 스위스. 일본.
중국 등세 계유명대학들로부터 강의
요청으로 바쁘게 활동하고
있읍니다.




사진서명 중 '박창학'을 '박장학'
으로 오자가 있음을 발견 했지만 올린
 사진 수정이 어려워    그대로 둠을
 이해 해주셨으면 합니다.




유경환 (유카리나) 여사님 글 


 




2017.10.23 07:08
나라를 위해 몸바치신 분들의
후손을 하늘에서도 어떤 형태로든
도우신다는 생각을 합니다. 더러는 그렇게
애국애족의 삶을 살고가신 분들의 안타까운
사연이 들려서 마음 아프기도 하지만요. 가문의
가르침에 따라 본인의 큰 노력이 박창학 선생님의
성공의 삶을 이룰 수 있었으리라   생각하며
복되고   화려한       삶을 이루신
분이라 생각합니다.
.






자손들 역시 그러하여,
세계적으로 유명한 생명과학자를
사위로 두셨음도 얼마나 큰 자랑인지요.
지구상에서 앞으로 두고두고 많은 사람들이
이분  (앤드루 유승조 박사)의 연구의 혜택을
누릴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하면    장인되시는
박창학 어른께서 얼마나 흐뭇하고 자랑스러우실
까요.?이렇게 늘 보이지 않는 곳의 자료를 찾아
정리하시고편집하시어,    넷티즌들이 편히
접하고         배울 수 있게 힘쓰시는
춘하추동방송의 이장춘 국장님께
큰 박수로 감사드립니다.




박창학 방송사료








이 사진은 살짜기옵서예에
이어 두번째로 세종문화회관에서
올린 뮤지컬 새색시 시집가네 일명
노래하는 성춘향 배비장전의 한 장면
사진 맨 위쪽네 번째가 박창학











 


1961년 대한 합창단
창립 2주년 공연 장소 명동
국립극장 당시 시공관 지휘 나운영
선생 우측 첫 줄 세 번째 박창학 두 번째
장호성 뒷줄 첫 번째 김원경 베이스 바리톤 등
이들은 예그린 멤버, 대한 합창단 KBS 국제방송
합창단 은종 합창단 단원 예그린 서울 시립
가무단 멤버들은 거의 중복 활동했다.






 


1960년 박창학이
대한 합창단 단원 시절
4중창 단원으로 대한 합창단
지방 공연 때    찍은 사진으로
왼쪽 박창학과  맞은 편이 가수
하청일,도 그때 대한 합창단
단원 이였다






 


대한 합창단 시절 오페라 마르다의
출연했을 당시 사진으로맨 좌측부터
장호성 박창학 이종욱 문영삼 후일
예그린 멤버들이 됐다








 


1961년 대한 합창단 시절
뒷줄 좌측 세번째 박창학 우측
두 번째 하청일 가수










박창학 피디가 KBS
정동 방송시절 KBS 국제방송
합창단원으로 있을 당시 ‘KBS의 향연’
이란 공개방송에 특별출연해 당시 유행했던
김희창 작 .열두냥 짜리 인생‘ 주제가를 부르는
장면이다. 후일 박창학은 PD가 되어 KBS 향연을
연출했다. 좌측 첫 번째 가슴에 손을 올리는
김계현은 후일 예그린 멤버로 봉봉
사중창단을 했다.     우측에서
세 번째가 박창학 PD 다




 



1962년도로 기억된다.
박창학 오용한이   kbs pd가
되기 전     MBC 다이어트 쇼에
중창단을 조직의 출연한 사진 맨 왼쪽
박창학 오용한 이영수(연출자 이보라씨의
아들 맨 우측 김의승 (KBS 국제방송국 합창단
단원) 4중창을 지켜보고 있는 사람 뒤쪽은
MBC 바라이어티 쇼 진행자
최계환 아나운서 다







 


1963년 6월 22일
박창학 음악 PD가 서울
시립 민속 가무단 시절 서울
시민 회관에서 뮤지컬 노래하는
성춘향 공연을 마치고 찍은 사진
이다 사진 뒤에서 세 번째 중
중앙 박창학 pd (좌측에서
여섯 번째










당시 서울시장은 윤태일 이었으며
구성 연출 백은선, 음악 김동진 김희조
황문평 최창권 합창반장 나영수 후일 (국립
합창단 지휘자) 안무 임성남 강선영 미술
김정한이었다.    사진 맨 앞줄 좌측에서
세번째 김희주 김동진 선생이 보인다 
 (오케스트라지휘)




납량특집 차 목포 시민
위안공개방송을 할 당시 목포
유달산 해수욕장에서 KBS의 향연
공개방송을 하던 날 뒷줄 왼쪽에서부터
심철호 코미디언, 배송 가수, 박창학 PD,
방은미 가수,       장고웅 MC 우측
송영수 PD  앉아있는 사람



 납량 특집 목포방송국 임준택
국장 당시 목포 시민 위한 공개 방송
KBS의 향연 목포 유달산 해수욕장에서
공연을 마치고 당시 KBS향연 MC는 장고웅
PD 박창학이었다. 앞줄 심철호 코미디언 그 옆
박창학 PD       뒷 출 왼쪽 매니저 두 번째
송영수 PD,     세 번째 장고웅 mc






1984년 10월 여의도 KBS
별관 공개 홀에서 장수무대 공개
방송 현황 왼쪽부터 변순복 아나운서
출연자 할아버지 MBC
김양일 아나운서







1973년 KBS 지방방송국
시찰 당시 부산에서 사진 왼쪽부터
박창학 PD 최창봉 부사장 비서,    변형하 
관리부장 김동석 부산 방송국장 (현 가요무대
MC 김동건 아나운서 친형)   최창봉
부사장 강찬선 이사 맨 우측




.




육군 116 병원 복무하던 시절
군종과 사병과 116 병원 교회 군목과
군인들과 간호장교들과 찍은 사진
앞줄 중앙 군목


셋째 줄 왼쪽 첫 번째가
박창학 일병 성가대 일을 했다
당시 일등병으로 가장 하급 계급인
일등병 (성가대원) 간호장교와 군의
의사관들을 지휘했다.






 
논산에 있는 제2군사 116 병원
군종과 사병들 여섯 명 하사 병장
일병 군종과 소속이었다.




 


1960년 박창학 피디가
해병대사령부 교회 성가대원으로
있을 때 군 종과 군목 들과 성가대원들이
함께한 사진, 좌측 두 번째가 박창학 PD
당시 사령부 교회 성가대 원은 프로
들로 직업 성가대 사례를 받았다








 


박창학 피디가 해병대사령부
교회 성가대원으로 있을 때 해병대
사령부 교회 당시 후암동 소재 성가대원들과
군목 군종과 사병이 함께 찍은 사진 앞줄 앉은
자세 세번째가 나수성, 해병 일등병이덨던 성가대원은
현역이어서 돈을 못 받았다. 나 수성은 제대 후 MBC
음악 PD가 되어 나규호라는 이름으로 배호의 당신,
안개 속에 가버린사랑 등 작곡가로 유명하다.
앞줄 다섯 번째 박창학 PD 당시 박창학
PD는 성가대 총무로 일했다.










1960년도 박창학이
학창시절 김포 미군 교회
성가대 시절 미국 공군 비행장
막사 앞에서 사진 앞줄 흰 잠바 차림
박창학 PD 추출 우측에서네 번째 모자
쓴 사람이 미 공군 비행단 교회 캔들
 목사다 계급은 중위었다








 공군 비행단 성가대원은 여의도에 있는 미군 교회와 김포에
있던 공군비행단 교회에서 예배를 드렸다,
어렵 던 시절 당시 우리는 달러 미국
화폐로 봉급을 받았다




 


1960년 박창학 피디가
후암동에 있던 시절 해병대사령부
교회 성가대 총무로 있을 당시 해병대
교회 창립 예배 때 군종감과 해군사령관과
군종  목사  성가대원들이 기념사진을
찍었다   네 번째 줄 좌측에서
두 번째 박창학이 보인다.



 


1968년 박창학 피디가
다큐멘터리 그때 그시절 프로그램
PD 당시 진행을 맡은고 강찬선 아나운서
전 KBS 방송     당시 구성작가는 하중희
진은 강찬선 아나운서와 방창학이다




 

86년 박창학 피디가
EBU 유럽방송연맹가 주최한
국제합창제 심사위원으로 참석 했을 때
길 잃은 독일 궬른 방송 스튜디오에서
심사 도중 휴식시간에 심사위원들과
찍은 사진이다 당시 동양인은
박피디 한 사람이었다.


사진 좌측 첫 번째 박창학 PD






 


박창학 PD가 88 올림픽 앞 두고
KBS IBC 개관 기념 세계 방송의 날 초청
리셉션 참석 때 사진 다 좌측에서 신윤생 TV 국장
고은정 성우 세 번째 박창학 올림픽 본부 총괄부장
왼손으로 턱을 보이고 뭔가를 옆 사람에게 말하고
있다. 대한민국 톱 성우 고은정은 박창학 PD가
8시 음악편지 PD 시절 인기 가수 박상규 와
함께 진행을 맡았고 신윤생 국장은
남산시절 라디오 제작과 문예게장을
맞는 등 남산 시절과 여의도 시절에 함께
했다. 사진설명 우측 첫 번째 신윤생 TV 국장
두 번째 고은정 세 번째 박창학




 
박창학 PD 와 KBS 남산 방송
시절부터 방송통폐합 이후까지 35 년
세월을 함께 해온 KBS 경음악단장 김인배씨가
정년퇴 하던 날 박창학 좌측에서 두 번째 세 번째
김인배, 가슴에 꽃을 단 사람 네 번째 박일호 블루벨스
멤버 (전 한국 연예 협회장) 두 사람은 너 우측 끝에서
두 번 째 석훈 코미디언 우측 첫 번째가  이상우 트럼펫
연주 경음악 단장이다. 아래 사진은 좌측 두 번째
박창학, 김인배 (가슴에 꽃단이) 맨 우측은
김인배 악단장 부인
.




한국을 대표하는 트럼펫 연주자라고
하면 KBS 김인배, MBC의 여대형 일반무대의
이상우를 꼽는다. 색소폰은 패티 김의 남편 길옥윤
tbcTV 악단장 이봉조 (현미 남편) , 이종묵 (무교동
엠파이어 나이트클럽 악단장-가수 김세레나
남편), 이동기 (조애희 남편) 을 꼽는다.










박창학 PD가 KBS 라디오
fm 부국장으로 있을 당시 KBS
FM 대행진 진행자였던 이숙영 아나운서와
함께 송년회 모임에서 찍은 사진이다.      이숙영
아나운서는 경기여고를 나와 이화여대 영문과 졸업생,
인기 아나운서로 1991년 에세이‘애처기질 본처기질’
1992년 에세이집 ‘어쨌든 튀는 여자’ 1994년 장편소설
‘광기로 혹은 향기로 그리고 ‘이숙영의 연애학
개론’을 출판한 작가이며 MC로도 유명하다




 
1990년 6월 12일 박창학 피디가
KBS FM 부국장 때 서울랜드 삼천리
극장에서 FM 젊음의 축제 공개방송을 마치고
당시 젊음의 행진 MC는 탤런트 황신혜와 임백천의
더블 mc로 진행했다 사진 임백천과 함께








 1983년 인기가수 이용과
박창학 PD KBS 창원 육군 공수
특전사 위문 공연을 마치고




 
이미자의 흑산도 아가씨
진송남 덕수궁 돌담길 남진의 가슴
아프게 나훈아의 물레방아 도는 내력 등
수많은 히트곡 작사가이며 방송 구성작가인
정두수와 함께 좌 박창학 PD 그는
시인 정춘수이 동생이기도 하다






 
인기가수 태진아






 
위키리 눈물을 감추고 작곡가
홍현걸 선생과 김세환의 옛친구 작곡가
김우택 (음악 저작권 협회 부회장)과
함께 사진 왼쪽부터 박창학
작곡가 홍현걸 김우택









흑산도 아가씨 섬마을 선생님
비내리는 호남선 등 3000여 곡을
출반한 한국 가요계의 산 증인 박춘석
작곡가 와 함께 박춘석 씨는 KBS 배
쟁탈 노래자랑 심사위원 등
오랜 세월 함께 했다




  
이 석의 두 마음, 비둘기처럼
박경희 ‘머무는 곳 그 어딜지 몰라도’
등의 인기 작곡가 김기웅과 함께한 사진
우측에서 두 번째 김기웅 (좌측 두분은
한국음악저작권협회 회원들임)
.




김기웅 씨는 한때 국가대표
권투 선수였다. 챔피언 김기수 대결
다운된 뒤 권투를 청산하고 작곡에 전념
국제가요제 작곡가로까지 유명세를 얻은
특별 전적의 작곡가로도 유명하다.
샹송 가수 이미배를 발굴 스타로
만든 장본인이다




 
비둘기처럼 머무는 곳 어디에 등을
작곡한 작곡가 김기웅과 함께 박창학




 
1983년 11월 전국 농업기술자
대회대회 농촌 후계자 위한 공개방송 때
시청 앞 구민회관에서 KBS 향연 공연을
진행하기 직전 찍은 사진 좌측 김인배
악단장 박주호 MC 박창학 PD










키다리 미스터킴 작곡가로
유명한 황우루 씨와   인기 가수
최정자  (처녀농군)가  결혼 하던 날
내노라  하는  연예기자   연예 PD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사진 중앙 신랑 황우루
신부 최정자, 뒷줄 우측에서 다섯 번째가 정홍택
주간한국 일간스포츠를 대표하는 연예계 대부 안경
쓴 사람그 앞에 KBS 오용한 피디, 뒷줄 좌측에서
세 번째가 박창학,        그리고 맨 앞줄 좌측
첫 번째가 경향신문 연예부기자
이호씨다 키 큰 사람






 
1983년 4월 육군 특전사
장병 위문 KBS향연 공연 때 PD
박창학과 인기가수 남궁옥분 정훈찬모와
개그맨 장찬익이 함께 찍은 사진




 
박창학 피디가 1975년
노래 고개 세계 공개 방송 PD로
있을 때 초청가수 와 심사위원들과 함께한
사진 앞줄 왼쪽부터 황성자 심사위원 소프라노
성악가 두 번째 김화용 심사위원 테너성악가
세 번째 박창학 PD 뒷줄 유경손 심사위원
엘토 성악가, 우측에 중창단
‘별셋’ 멤버들이 보인다.






 
한국 연예인 협회 모임 때
박주아 탤런트 와 함께한 박창학 PD
고 박주아 씨는 KBS 인기 프로그램
여로에서 그 연기력을 과시했다










 
1984년 4월 장수무대
전국 순회공연 때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찍은 기념사진이다.
왼쪽에서 두 번 째 MC 김양일 (추적
60분 MC 아나운서) 세 번째 박창학 PD
네 번째 김득수 고수 인간문화재 다섯 번째
황문평 작곡가 심사위원 그 옆에 전달영
가야금 명창(인간문화재 호주머니에
손을 넣고 있다)






 
박창학과 하기송
(한복 남 씨 장남 이면서 작곡가-
빈대떡 신사로 유명한) 전 우 본명 전승우
작곡가 배상태씨의 아들 돌잔치 날, 찍은 사진
작사가 전우는 인기 가수 배호의 매니저로 배호의
누가 울어, 안개 속에 가버린 사랑,    문주란의
보슬비오는 거리        박경희 머무는 곳 그
어딜지 몰라도 등   수많은 히트가요를
냈다.       좌측 박창학  PD,    중앙
하기송,  작곡가 전우 전승우




 
1991년 박창학 피디가 KBS
청주방송총국 편성제작국장으로 있을
당시 편성국 직원들과 등산을 갔다가 하산 때
찍은 기념사진, 좌측 김지문 아나운서 세 번째가
이병환 방송부장 맨 우측 박창학 편성
제작국장 흰 모자 쓴 사람




 
박창학 피디가 KBS
라디오 공개방송 노래고개 세고개
PD 당시 초청 가수 별 멤버들과 함께 한
사진 세 번째가 박창학 PD 네 번 째는
심사위원 황성자 소프라노 성악가




 
1986년 라디오 PD · 성우
단합대회 때 사진 앞줄 김선옥 PD
두 번째 줄 오승룡 성우 박양원 피디
정창명 pd, 박현순 pd, 박인채pd,
박창학 pd, 김재준 PD, 넷째 줄
좌측 이시일 pd가 보인다.








 
1985년 11월 17일 KBS
제 1라디오 임성훈 정혜경과
함께 일요스페셜 프로그램에 출연한
인기가수조용필과 당시 PD였던
박창학 PD가    함께한 사진









 
박창학 피디가 1980년
KBS   제 3 방송   693 khz
저녁의 희망가요, pd시절 박창학
PD 와 DJ 송도순 성우 심철호 (코미디언)
가 생방송 진행되기 직전 프로그램에
대한 의논하는 모습




 1990년 6월 12일 KBS
제 2라디오 FM 부국장 당시
젊은이의 대행진 공개방송을 마치고
왼쪽부터 김정태 PD, 박창학 국장, 황신혜
탤런트, 강현국 pd, 긴진규 pd, MC 임백천
박기완 PD     이날 MC는   황신혜와
임백천 더블 mc로 진행했다










1978년 5월 9일 구미공단
산업전사 위문 공연에 앞서 박창학
PD가 프로그램 리허설 하는 장면 사진
왼쪽부터 가수 한규철 PD 박창학
가수 김연자 MC 곽규호




 


1962년 KBS 음악회 직원들이
동구 능에 야유회 갔을 때 찍은사진
왼쪽 첫 번째가 박조자 (코드실 자료원)
두 번째 이희목 음악계장 가수 (정미조 개여울을
작곡) 맨 우측 박창학 PD 우측 세 번째 고기찬 PD
네 번째 송영수 PD 다섯 번째 김정민 PD (김강섭
악단장   여동생으로     후일        권오성
PD 와       결혼했다.




 



 
1983년 12월 강원도 원주
1군단 장병 위문 공연 때 야외
가설무대 위에서 왼쪽 원로가수
원방현중앙 인기가수 강영숙
우측 박창학 피디





1983년 11월 수원시민의 날을
축하하는 화홍문화제에서 KBS 향연
공연 당시   인기 가수    방미와 함께
대표곡 올 가을엔 결혼을 할 거야






kbs라디오 퇴직 선배 환송연
때 사진 하던 날 앞줄 좌측 서기철
후배 PD 중앙 박창학 위원, 우측 김혜경
후배 PD주는 강현 국 후배 피디가
양팔 감싸고 있다






 
1998년 3월 23일 KBS 라디오
퇴직 선배 환송연 및 단합 대회 좌측
첫 번째 옥 충헌 FM PD 두 번째 이기청
사회교육 PD,      세 번째 윤군 사회교육
PD네 번째 이공진 FM PD, 다섯 번째
중앙 박창학, 한 사람 건너 송현식 pd,
맨 끝이     강미란 아나운서






 


박창학 피디가 98년 명예퇴직후
한국 언론 재단 프레스센터 언론인 연구실
전문위원으로 있을 때    전문 위원 들과 함께
좌측에서부터 박정진 세계일보 논설 위원 김영환
전 동양방송 출신      PD 박창학 전 KBS 국장
네번째 김광석 중앙일보 부국장 명태균
전 경향신문 편집위원






1971년 KBS 지방방송
순시 때 박창학은 김재중 부사장
비러로 수행했다 사진 박창학 피디
이무근 춘천방송국장 김재중
부사장 우측 김근호
속초방송국장








1961년 1962년
KBS 정동방송 시절 추억
KBS 국제방송국 합창단 시절 인천
덕적도 해수욕장에서 박창학은 베이스 파트
(합창단) 중앙 오용한 피디는 테너 파트너였다.
우측은 김형세 테너    KBS 국제방송     합창단은
당시 합창단 지휘는 안소겸 씨로      KBS 관현악단
콘트라베이스 주자로 러시아     볼쇼이 악단을 거쳐
평양 김일성   악단에서   일하다가  월남한 분이었고
KBS 경음악단장 겸    음악계장은이 이희목씨였다
당시 영화 주제가 음악 영화 배경음악    돌아오지
않는 해병 돼 구봉서 주역 김희창 작 열두냥짜리
인생 옹해야 등 수많은 한국 영화 음악을
작곡가 황문평 김정근 선생님과
함께 만들었다




박창학과 오용한은 드라마센터
개국 뮤지컬 유치진 연출, 거쉰의 포기와
베이스에도 함께 출연했다. (주제가는 썸머타임)
함께했던 배우는 최상현 오현경 김동원 장미자 최지희
김성욱 등이 생각난다 후일 최상현은 TBC 피디가
되었다가 KBS PD로 옮겨 받고 오용한은 라디오
PD로 있다가 tv 시대가 열리면서 KBS TV로
옮겨 갔으며 나는 라디오에 그냥 남아
KBS 라디오를 지켰다.






 


1988년 9월 서울 올림픽 때
박창학 PD 와 외국인 피디가
잠실 메인 스타디움에서
함께 찍은 사진







 


제 24회 88 서울 올림픽
방송에 참가해서 서울을 감동과
영광을 함께했던 PD들과 올림픽 본부장
왼쪽부터 이정석 본부장 정건일, 심의표,
카메라 PD, kbs pd 박세호 일본 pd 맨
우측 박창학 PD 수퍼바이저 총감독




 서울 올림픽 당시 잠실
탁구 경기장에서 스포츠
리포터 정현숙 탁구
국가대표 와 함께




 
1974년 7월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섬 흑산도에서
공개방송 하던 날 흑산도 사리 초등
학교에서 도서민 위한 노래 고개 세고개
공개방송을 마치고 돌아오는 도중 페리호
선상에서 사진 왼쪽부터 심사위원 작곡가
이수인 두 번째 초대 가수 김광진
별 셋 멤버 박창학 PD 이창호
아나운서 MC






박창학이 1998년 명예퇴직 후
한국언론재단 프레스센터 전문위원으로
있을 때 한국기자협회 주관으로 국제 산업
현장 및 산업 연구 시설 시찰 때        동료들과
찍은 사진 이성춘 전 한국일보 논설위원 기자협회
14대 회장 역임, 정신모 전 한국경제일보 이사
이형균 전 프레스센터 전무 계양 신문
편집국장, 박창학 전 KBS 국장






 


박창학 PD가 1998년
명예퇴직 후 한국프레스센터
전문위원으로 있을 때 2001년 10월
23일부터 26일 2박 3일까지 한국기자협회
주관으로 국제 산업 현장 및 산업 연구
시설 시찰 때 동료들과 찍은 사진




왼쪽에서부터
함진규 전 교열기자 협회 회장
명태균 경향신문 편집위원
김광섭 중앙일보 부국장
박창학 KBS 국장
이형균 프레스센터 전무, 경향신문 편집국장
이정춴 한국일보 편집위원
김종찬 불교신문 국장
박정진 경향신문 국장 세계일보 논설위원











 


1995년 4월 15일 KBS
안동방송국 후원 안동성소병원
주최, 이화대학교 무용과 유완순 교수
뮤지컬 슈퍼스타 지저스    크라이스트
무용제를  마치고,   사진 좌측 이원희
명성교회 장로,    중앙 박창학 PD,
우측 권정달 전 민정당 사무총장




 



박창학 · 한성호 박사가 함께 찍은사진이다.   




한성호 박사는 국민당 정부시절
장개석의 바른 팔로 보안대장 출신이다.
1992년 중국과 한국이 국교를 수립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 중국인 한의사로
1940년대 말 국공내전을 피해 한국에 정착 차지철
청와대 경호실장 주치의로 후일 노태우 대통령
주치의로 활동했으며 12, 12 사태 중심에 있던
인물로 박창학의 KBS 라디오 8시 음악편지
인기가수 박상규 와 고은정 인기성우가
함께 진행을 맡은 프로그램에서




건강코너 가운데 한방 식이요법에 관한
상담 코너에 고정 출연했던 분이다. 저서로는
식이요법건강 관련 서적 만 12권이 넘는다,
한중수교 후 강택민 중국 국가주석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박정희 대통령이 폐쇄했던
인천 화교 촌을 재개 성사시킨
중국어 큰 인물이다.






1991년 KBS 청주방송총국
편성제작국장 박창하 국장이
충청도씨름 대회 때 1등한 수상자
에게 상장을 수여하고 부상을
주며 좌측 박창학 국장






제 3공화국 당시 국가 홍보를
위해 방송 PD, 기자, 아나운서, 작가들을
산업시찰보냈다 왼쪽 박창학 PD 모자 쓴 사람
세 번째 이상익 PD, 이기명 작가, 정유일PD
이원배 PD, 김영효 PD






1993년 제작 위원으로 있을
당시 제작 위원실에서, 왼쪽부터
이수익 장미화 인기가수, 안평선,
박창학, 박인재











1990년 12월 뮤지컬 슈퍼스타
지저스 크라이스트 공연 후 왼쪽
탤런트 최선자 중앙 박창학 우측
혼성 중창단 로맨티카 닐니리
멤버였던        김경희






 
KBS 제작 위원으로
있을당시 디스크자키 한은경
박창학 유은하












2002년 5월 14일 박창학
PD가 KBS에서 명예퇴직 후
상명대학한국방송제작단 방송
아카데미교수시절 제자들과
함께 KBS 견학 KBS
현관에서 촬영




 


 2001년 5월 7일
퇴직후 박창학 피디가 상명대학교
출깅힐 때 제자들과 찍은 사진 세검정
상명대학 종합 강의실에서






2008년 국제외교안보포럼
신년하례식 때 김현욱 이사장
으로부터 공로패를 받는 장면 왼쪽
김현욱 이사장 중앙 박창학 상임 이사
맨 우측 전세원 상임 이사 (김현욱
국회 4선 의원 민주평화통일
자문위원회 부의장)






 2013년 정부포상 시상식 때
국무총리 정홍원으로부터 표창장과










 


총리 훈장을 수상하고 축사를
듣는 박창학, 장소 정부종합청사 강당
시상식을마치고 청와대를 방문 박근혜
대통령 초청 만찬에 참석했다.






 


2013년 국가보훈처가 실시한 모범
국가보훈대상자   발굴 포상 시상식에서
정부표창 대통령상과 국무총리상을 수상
하는 수상자들  중앙에 국무총리 정홍원원과
수상자들 총리 옆에 황금 목걸이를 건사람
대통령장을 받은 사람이다.














2012년 대통령 직속 자문기구
민주평화통일자문위원회 제 16회
자문위원 위촉장 전수식 민주 통일
자문회의 의장 이명박 대통령
.






장소 장충동 타워호텔
대통령 대행 수여자 민주 통일
자문 위원회 부여의 부의장 김현욱 의원은
당진 출신 국회의원으로 국제외교안보포럼
이사장 국제외교 분과 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다






2011년 1월 국가 외교 안보 포럼
초청연사 김신조 씨 1968년 1.21 청와대를
침투한 공비 중 유일한 생존자 김신조 씨를 초청
한 것은 그날 주제가 하남 연평도 포격 사건과 안보란
주제 였기 때문에 김신조 씨를 초청 1968년 자신이
임진강을 넘어 오직 박정희 박정희 모가지 따야
한다는 생각 밖에 없었다는 1.21 사태
당시 얘기를 듣게 위함이었다. 


 왼쪽 세 번째 김신조,
 김현옥 (국제외교안보포럼 이사장 민주평통
부의장) 김유혁 박사, 이정린 국방부차관 박긍식
과학기술부장관, 정규호 박사 한국외국어대학 명예교수
뒺 줄 중앙 방창학 국제 외교 포럼 상임 이사
세사람 건너 허철부 박사 (외대) 이계성교수
(한국통일 진흥원) 김신조 씨는
성락교회 원로목사 다














박근혜 대통령 취임 후 첫 째
광복절 날 청와대 영빈관에서
박 대통령과 독립유공자를 사진
좌측 네 번째 박창학














2012년 815 광복절 날 청와대 초청
만찬을 마치고 영빈관 이명박 대통령과
독립 유공자 유족 기념 사진 사진 중앙 이명박
대통령 우측 두번째 박창학 맨 좌측 보훈처장
맨 우측 행정부 행정자치부장관






 
박창학이 국제외교안보포럼
상임이사로 있을 때 연사로 초청한분
가운데 가장 소중한 분 최서면 옹, 당시
87세 2008년 3월로 기억된다.


앞 줄 우측에서부터
박긍식 과학기술처장관
공주 갑사 주지승 세 번째 김현욱
국제 외교 포동 이사장, 네번째 최서면
선생 최열곤    전 서울시 교육감, 유기남
전 자유시민연대 대표, 전규호 한국 외국어대
명예교수,    백성길 수원 백병원 원장 뒷줄
좌측에서       다섯 번째가     박창학 PD
국제외교안보포럼 상임이사,    최서면
선생에 대한 설명은 춘하추동방송
다른 글에있어 생략한다.




 


박창학 PD가 국제외교안보포럼
상임이사직을 맞고 있을 때 찍은
사진 2010년 한나라당 원래 총무
김무성 씨를 조청연사로 모셨다.




왼쪽 첫 번째 황수연 대한 체육회 학교체육 위원장
두번째 유기남 전 자유시민연대 대표
세 번째 김현욱 국제외교안보포럼 이사장 당진 4선의원
네번째 김무성 한나라당 원내대표
다섯 번째 박긍식 전 과학기술처장관
원자력분야 1호 박정희 대통령
여섯 번째 김유혁 박사 단국대학교 종신 명예교수
뒷줄 일곱 번째 중앙에 박 정 PD






 
박창학 PD 서재에 걸려있는
애국지사 고 박정환 선생의 건국포장
증과 영정사진 그리고 백범 김구 액자
월은 이라는 호처럼 은밀히 독립군
자금을 지원하는 큰손 박정환과
백범 김구는 서로
은밀히 통했다








만석 군의 아들로 태어났으면서도
애국지사 월은 박정환 선생을 아들이라는
이유로 불령선인 불량한 조선인이라는 낙인찍혀
평생 취직도 한번 못해보고 낙인찍혀 33세에
요절한 월은 박정환 선생의 아들이자
박창학 PD 부친이기도 하다.
아호 향상 박재남 씨








육해공군 의장대


박정환 선생과 장천년 여사
배위 합장 장면이다




1999년 4월 7일 애국지사
박정환 선생님이 운구 안장식이
있던 날 대전 현충원 영안실에서 애국지사
묘역으로 영구를 옮기는 장면이다.








 


1942년에 찍은 사진이다,
애국지사 고 박정환 선생 가족
중앙 아이 안고 있는 분이 박정환 선생의
부인 장천년 여사, 어린아이가 박창학 PD다.
사진 우측 박 pd 어머니 이화파 여사 일 뒷줄
중앙 박창학 PD 붙인 박재남씨
좌측 소녀박창학 피디의 막내
고모 박동순









 

가곡 보문사 1975년 경 가곡 보문사 작사가 PD가 보문사 주지승 정종수 스님의 가족 초청을받고 찍은 기념 사진이다

주지 스님 응접실에서 안고 있는 아이가 큰 딸 박지나 맨 우측 지호 매니저 (송춘희 수덕사의 여승) 코미디언,오른 쪽 두 번째 정종수 스님 그리고박창학 PD와 가족들


1970년 12월 16일 연예피디박창학 결혼식 주례 강신명 목사 서울 새문안 교회 당 회장. 광화문에 있는 새문안 교회 선교사 언더우드 박사가 세운 한국 최초 장로교회다강신명 목사는 숭실대학교 총장을 역임했다.



박창학 피디가 결혼식을 마치고 신혼여행   차에 탑승 하기 전 신부 권문자와 얘기하고 있다. 사진 중앙에시어머니 이화경 여사가 보인다.









 

1970년 12월 16일 KBS 연예 PD 박창학의


결혼식에 참석한 인기 가수




김세레나의 젊은 시절 









애국지사고 박정환 선생의
막내딸 박동순 여사가 박정환 선생이
건립한 영광 유치원 원장 지내고 영광
가정 양재 전문학원을 건립 영광 가정
양재 전문학원 제 4회 졸업생 졸업식날
제자들과 찍은 기념 사진이다.
중앙 가슴에 꽃을 단 분
박동순 여사








 


박창학 PD 소화 학교 시절
사진 좌측 앞줄 첫 번째 흰 옷 차림
초등학교 일학년으로 기억된다,
여자 담임선생과 함께









 


박창학 PD가 중학교 시절
서울 숭실 중학교 2학년 때로 기억
된다. 좌측 첫 번째 박창학 두 번째 이희주,
세 번째 정형찬, 절친했던 3인방 친구들이다.
숭실중학교 본교는 평양에 있는데 피지난 시절을 거쳐
서울 완도 오후엔 서울 후암동 종점 산 언덕 해방촌에
있었는데 당시 건물은 판자 건물로 책상도 엉망이었다,
주변은 온통 보로박스로 만든 집을 집들 천지였다.
전신 숭실전문대 학이 숭실대학으로 바뀌고
숭실중·고등학교 플러스 숭실전문,
숭의여고는 같은 기독교
장로회 재단이다




 
박창학 고등학교 시절
서울 수송전기공업고등학교
규율부원으로 활동할 때 찍은
사진 뒷줄 중앙 박창학 PD
좌측에서 세 번째








2005년 강릉방송국 초청
강릉 박물관 개관 기념식 참석
중앙 황명수 김영삼 대통령 당시
국회부의장 의원 박창학
서병주 김선초






김선동 선생님 글




이장춘 선배님!
풍부한 자료수집과 계속적인

게재로   우리나라  방송에 대한  인식을
고취 하심은 물론, 우리나라 방송문화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고 계신 이장춘  선배님께
 머리숙여 깊이 감사드립니다.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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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창학 (박정준)KBS 음악 PD, 방송 가요이야기


박정환! 항일 독립운동 애국지사 호남의 만석꾼 독립운동 자금줄
http://blog.daum.net/jc21th/17783281


음악인생 음악프로듀서 박창학 방송사료 2
 
강화도 보문사 普門寺 탐방 노래와 사찰 석모도


강찬선 아나운서 편 「그 시절 그 노래!」 (강경화 외교부장관 아버지) 대담, 박창학 PD
http://blog.daum.net/jc21th/17783279











(서울=연합뉴스) 한성간 기자 =


미국 연구팀이 피부세포를 줄기세포로의
 환원 절차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운동신경 세포로
 전환하는 데 성공했다. 피부세포를 다른 세포로 만들려면
 피부세포를 유전자 조작을 통해 일단 배아줄기세포와 유사한
 유도만능 줄기세포(iPS)로 환원시킨 다음 다시 원하는 다른
 세포로 분화시키는 것이 일반적인 방법이다.




미국 워싱턴대학의 앤드루 유 발달생물학
교수는 성인의 피부세포를 2개의 특정 마이크로RNA에
노출시키고 여기에 2개의 전사인자(transcription factor)를
 결합하는 방법으로 직접 운동신경 세포로 전환하는 데
성공했다고 사이언스 데일리가 8일 보도했다.




이 새로운 기술은 루게릭병,
척추성 근위축증(spinal muscular atrophy)
같은 운동신경 세포의 퇴화로 발생하는 치명적인 신경
퇴행성 질환의 원인 규명과 치료법 개발에 새로운 전기를
가져올 것으로 보인다. 20대 초반에서 60대 후반의 건강한
 성인들에게서 채취한 피부세포를 이 방법으로 운동신경
세포로 직접 전환할 수 있었다고 유 교수는 밝혔다.




피부세포를 2개의 마이크로
RNA(miR-9, miR-124)에 노출시켜 유전명령
(genetic instruction)을 재구성하고 여기에 2개의 전사인자
(ISL1, LHX3)를 추가하자 약 30일 만에 피부세포가 척추 운동신경
세포로 전환됐다는 것이다. 그는 피부세포를 iPS를 거쳐 다시
 분화시키는 것이 집을 허물고 새로 짓는 것이라면 직접
전환하는 것은 집을 개축(renovation)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피부세포를 줄기세포로 되돌리는 번거로운
 절차를 생략하는 데서 얻을 수 있는 이점은 전환된
 운동신경 세포가 피부세포가 원래 지니고 있던
 '나이'와 일치한다는 것이다.




각기 다른 연령층에서 발생하는
 신경 퇴행성 질환을 연구하는 데는 운동신경
세포의 '나이'를 그대로 유지시키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유 교수는 지적했다. 이번에는 건강한
 사람의 피부세포만 이용했지만, 다음에는 운동신경
질환이 있는 피부세포로 운동신경 세포를
만들어낼 계획이라고 그는 밝혔다.




환자로부터 직접 운동신경 세포를
 재취하는 것은 어렵지만, 채취가 손쉬운
 피부세포를 이용하면 어렵지 않게 운동신경
세포를 만들어 원인 규명과 치료법 개발에
이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그는 강조했다.




유 교수는 앞서 피부세포를 같은
 2개의 마이크로RNA와 이번과는 다른 2개의
전사인자를 이용, 불수의 근육운동을 유발하는 치명적인
 또 다른 질환인 헌틴턴병에 관여하는 선조체 중형돌기
신경세포(striatal medium spiny neuron)로 직접
 전화시키는 데 성공하기도 했다.




이 연구결과는 과학전문지
 '셀 줄기세포'(Cell Stem Cell) 최신호
(9월 7일 자)에 발표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