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인물

강경화 외교부장관 지명자와 강찬선 아나운서 최홍준(최홍목)

이장춘 2017. 7. 17. 23:18

 

 



이 글은 원로방송작가이자

천주교 평신도 사도직 협의회 중앙회장을

역임하신   최홍준 선생님께써   경북동부신문에

 '최홍준 아호를 따 연재한 '서오칼럼'  2017년 5월 24일자

524호로 실린 글입니다. 신문 지면관계로 다 실리지 못했던 글 

원문을 모두 올렸고 신문 칼럼 원문내용은 밑에 올렸습니다.

 사진은 춘하추동방송 보유분을 활용했고 강경화 외교부장관

 아버지 강찬선 아나운서의 1950년대 방송프로그램 

해설 동영상을 끝 부분에 올렸습니다.






 강경화 외교부장관 지명자와 강찬선 아나운서

최홍준 서오칼럼 524호 2017년 5월 24일



5월 23일. ‘5·9 장미대선’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당선된 지 꼭 2주만인

 이날, 노무현·박근혜 두 전직 대통령의 운명이

엇갈렸다고 대중매체들은 보도하고 있다.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8주기 추도식이 열린 김해

봉하마을에는 노 전 대통령의 친구이자 비서실장이던

문재인 대통령이   19대 대통령 신분으로 찾아와서

 “반드시 성공한 대통령이 되어 임무를 다한 다음

 다시 찾아뵙겠다”고 말했고,     박근혜 직전

대통령은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법

 417호 대법정에서 첫 재판을 받았다.



첫 여성 외교장관 지명






그런 가운데서도 문재인 정부

초대  외교부장관 후보자로 지명된

강경화(62)   유엔사무총장 정책특보는

 몇 가지 점에서 화제를 모으고 있다. 국회

인사청문을 절차를 거쳐  장관으로 공식 임명

되면   70년 외교부 역사상 최초의 여성장관이

 된다.    뿐만 아니라, 정권과는 상관없이 방송계

일각에서는 축하하는 분위기로 술렁이고 있다.

KBS 프로듀서 출신인 이장춘 씨가 운영하는

‘춘하추동방송’과 그 동호회 홈페이지에는

축하글이 쏟아졌고, SNS를 통해서

 필자에게도     여러 가지

사연이 날아왔다.


강 지명자는 이화여고와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1977년 KBS 영어방송 프로듀서 겸아나운서로

 사회생활을 시작했으며,  이후 미국 매사추세츠대

에서 커뮤니케이션 전공으로 석사·박사학위를 받았고,

클리블랜드대학에서 조교수로도 일한 경험이 있다. 1990년

국회의장 국제담당비서관, 외교안보연구원 미주연구관 등으로도 

근무했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강 지명자의 아버지가 강찬선

(康贊宣, 1918-1998) KBS 아나운서였다는 점에서 방송인들의 관

심을 모으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야구 중계방송도 하고, ‘

네 잎 클로버’라는   대중가요를 불러 음반까지 내놓은

적이 있는 이규항 전 KBS 아나운서실장은 손으로

 직접 글씨를 써서 SNS에 올렸다.





 “1971년 어느 날 남산 아나운서실,

강찬선 이사님께서 나에게 하명하셨습

니다. ‘이보라우, 미타리(‘미스터리’를 평안도

사투리로 부른 말투)도 알다시피 우리 경화가 영어를

 잘 하잖아. 경화가 영어 웅변대회에 나가는데 우리말

 원고가 필요하대요. 미타리가 원고를 써줘야겠어.’ 이제

 경화씨는 초로의 장관이 되셨고,    나는 어느덧 석양의

 상노인이 되었습니다. 초대 국무총리이셨던 이범석

 장군의 비서를 지내신   사모님께 축하의 전화를

드렸는데,  강이사님과 함께 기뻐하지 못하는

 것이 못내 아쉽다고 하셨습니다. 사모님은

아직 청력(聽力)은 좋으셨습니다.”





강찬선 아나운서가 방송이사로

 발탁된 것은 국영 KBS가 공영으로

전환되면서 한국방송공사로 발족한 1973년

 3월 3일이었고,   이규항 아나운서에게 따님의

 한글 웅변원고를 부탁할 때는 그보다 2년 전이었다.

이 아나운서는 국문학과 출신으로 필자에게는 대학

선배로서 방송국을 떠난 이후로도 이따금씩 반주를

곁들인 점심식사를 하고는 해왔다. 또한 강찬선

이사의 부인은 김길임(金吉任) 여사로서,

남편과 함께 등산하기를 매우 좋아한

분으로 기억한다.



경향신문 1961년 1월 12일자

문화면 ‘노변정담’ 칼럼에 당시 HLKA

 제1방송계장 강찬선 아나운서의 글이 실려

있다. ‘묵은 이야기’라고 제목을 붙인

 이 글은 이렇게 시작된다.


 “실은 금년 정월 초하룻날 아침,

아내는 새해 첫날을 기분 좋게 스타트

시키기 위한 충심에선지 새로 사온 내 신발을

 구두닦이 소년에게 내주었더니 그 소년은 고맙다는

 얘기 한 마디 없이 신식말로 아주 꺼지고 말았던

 것이다. 그래서 아내는 구두 값 8천환(圜)도

 그렇거니와    정월 초하루  꼭두새벽에

신발은 도둑맞았으니 신년 재수는

 다 틀렸다고 야단법석이다.”


구두 도난사건을 들려주면서

강 아나운서는 “그랬더니 어느 친구가,

그것은 도난당한 것이 아니라, 이쪽에서 손수

 내어준 것을 가져간 것이니 도적맞은 것으로는

 해석하지 말고 재수니 액운이니 따위로도 말하지

말라더라”고 적고 있다. 1961년 정초였으니 4•19

학생혁명이 난 바로 다음해 1월의 글이고, 여기서

 그는 3•15부정선거 때 아나운서들이 용감하게

 원고를 수정해서 방송한 일화를

 곁들이고 있다.


3월 15일 그날 저녁

“제4대 대통령과 제5대 부통령을

 선출하는 선거는 극히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 무사히 끝났습니다”라는 내용의 기사가

 아나운서 부스로 올라왔는데, 이 중에서 ‘극히’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 ‘무사히’라는 부사를

 빼고 방송했던 사실을 무용담으로

 정리해서 적어놓았던 것이다.



강찬선 아나운서





1964년 초 미국의 소리

 ‘VOA’ 아나운서로 파견돼 워싱턴으로

 갈 때  김포공항 2층 전망대를 뒤로 하고

 지상에서 환송 나온 아나운서들과 함께 촬영한

 사진이 위의 ‘춘하추동방송’에 올라 있다. 김주환,

김정자, 전영우, 임택근 아나운서들이 서있고, 강찬선

 아나운서 가족들, 그 중에서 만 9세의 경화 어린이가

바이올린을 들고 있는 모습도 보인다. 1966년 말까지

 3년이 채 못 되는 기간에 미국 생활을 했던 것이고,

 아이들은 영어를 무척 잘 익혔던 모양이다.


원래 평양방송국 출신인

강찬선 아나운서는 1•4후퇴 때

남하해서 피란수도 부산에서 1951년

 KBS 아나운서 시험을 거쳐 다시 마이크를

 잡았던 방송인이다. 그분과 나는 KBS 제1라디오

 ‘마음의 샘터’와 ‘고요한 밤에’ 등 심야 프로그램을

 함께 제작,  송출했으며, 1972년 7•4남북공동선언에

 따라 남북조절위원회가 가동됐고,   12월 11일 0시를

기해 대북방송이 전면 중단됐을 때, 이 고별방송을

 강찬선 아나운서가 담당했던 것이다.

=========================


주 : 경북동부신문은 경북 영천에서

 발행되는 주간지이고,  필자는 지난 몇 해

동안 이 신문에 ‘서오’(瑞午)라는 아호를 붙이면서

 칼럼을 이 달    7월5일까지 집필했습니다.

  

 



 관련 글 보기




최홍준(최홍목)님의 생생한 체험기록 방송작가 반세기 50년

http://blog.daum.net/jc21th/17781386



강경화 외교부장관 지명자 삶과 인생역정 

http://blog.daum.net/jc21th/17783175



아나운서 한길로 살다가신 강찬선 님

http://blog.daum.net/jc21th/177808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