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고복수 高福壽, 타향살이

이장춘 2016. 7. 30. 23:21

 





 

   1911년 2월 10일 울산에서 출생

 1972년 2월 10일 세상을 뜬   고복수!

 이 땅에서 최초로 공개모집을 통해서 선발된

 대중가요가수다. 1932년 콜롬비아 레코드사가 전국을

대상으로 가수를 공개모집 했을 때 정일경, 조금자(원로

 드라마 작가 김영수 부인)와 함께 입선해서 가수로 등단한

 고복수다. 2위로 입선한 고복수이지만 여자가수에게 관심이

쏠리던 시절이라, 고복수를 선발한 콜롬비아 레코드사에서

 정일경,   조금자에게 관심을 집중하는 동안   우리나라

사람이 운영하는 유일한   레코드사 「오케」 이철

 사장에 의해서 스카우트 되어 소속사를 옮겼다. 



고복수 高福壽, 타향살이



 이난영이 오케 레코드사에서

활동하던 시기이기도 하다. 그 시절

남자가수로는 채규엽, 김용환, 강홍식 등

선배가수들이 대중가요의 싹을 틔우던 시기이기도

했다.  손목인, 박시춘이 활약하던 오케 레코드사에서

김능인이 작사한 노래 말에 손목인이 곡을 붙혀 고복수

 독창곡으로 레코드가 발표되었다.   그때의 레코드는

SP판이라고 해서 두곡밖에 취입할 수가 없었다. 

 1934년 이 레코드가 발매되자 음반은 날개

 돛인 듯 팔려나가고 고복수는 순식간

스타대열에 올랐다.





1935년 삼천리지가 실시한

 대중가요 남자부문 인기순위에서

채규엽, 김용환(김정구 형)에 이어 3위에

오를만큼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뒷날 고복수와 결혼

 부부 가수가 된 황금심이 오케레고드 전속가수가 된 것은

고복수가 인기절정에 오르던 때였고 일제강점기 중 대중가요

 전성기이기도 했다.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고, 곧이어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면서 문화부문은 위축되고

연예인들에게도 어려움이 닥쳤다. 





  노래 부르는데도 큰 제약을 받게 되고

 일본을 찬양하는 노래, 일본어로 부른 노래가

강요되었으며 감시의 눈초리가 매서웠다. 살기위해서

그들의 뜻을 따라야 했던 때라   노래 부르기를 포기한

 사람도 있었다.  고복수는 이때 일제의 손길이 덜 미치는

 만주를 무대로 활동하는 기회가 많았다.     그렇기에

 2,000년대 들어 일제강점기 가수들의 친일논란이

 거세었을 때도 고복수는 자유로웠다.


그가 부른 「타향」은 여러 제약을

받는 가운데서도 민족의 노래로 승화되어

사람들은 고복수의   특유한 목소리의 그 노래를

들으며 마음을 달래고 민족의 비분을 공감했고 이 노래를

부르면서 모두가 부둥켜안고 울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고복수가

 간도 용정에서 공연하던 때 이 노래를 들은 한 여인이 비탄에 못 이겨

자살했다는 일화가 있기도 하다. 고복수와 같은 시대에 대표적인 남자가수

 채규엽과 강홍식(최민수 외할아버지), 김해송(이난영 남편) 등의 노래는 6.25를

 지나면서 들을 수 없게 되었지만 고복수의 노래는 남인수, 백년설, 김정구의

 노래와 함께 계속 들을 수가 있었다. 그러나 고복수도 6.25때 강제로

인민군에 편입되어  하마터면 그의 노래도 못들을 뻔 했다.

북한군에게 끌려가던 중 원산에서 미군 폭격 때 국군에

의해 구출되어  군 예대에 편입       전방

위문공연 등에 참여했다.







6.25후에도 계속 활동하던

고복수도 1957년 고별연을 계기로 진로를

 바꾸었다. 전국의 유명극장에서 2개월간에 걸쳐

열린 고별공연에서는 이난영, 남인수, 신카리아, 장세정

당대 명가수 명연예인들이 총출연한 큰 무대가 형성되었고

 1957년 8월 10일 명동 시공관 (1963년 국립극장이 되었음)에서 열린

 서울공연은 KBS가 그 실황을 중계방송 했다. 이때 이난영이 울부짖으며

 부른 목포의 눈물이 2016년 6월, 이난영 탄생 100주년 기념 KBS가요무대

에서 이난영의 딸 김숙자가 참여한 가운데 공개되어 장내를 숙연하게

한 적이 있다. 고복수 고별공연에서 나온 수입도 만만치 않아서

 수입금은 고복수에게 돌려주었다. 이때 무대에 오른

고복수는 ‘임금도 부럽지 않다. 며 목메어 울었다.





그가 은퇴후 우리나라 최초의 가요학원

 ‘동화예술학원’을 설립해서 이미자, 안정애, 유성민,

오기택, 하춘화 등 60년대부터 그 이름을 떨친 가수들을

양성하는데 힘을 기울였다.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며 즐거운

 삶을 누리던 부부가 악극단을 결성해서 운영하기도 했다. 노래

로는 성공했지만 그러나 사업에는 별로 재미를 못 보아서 재정적

으로 어려움을 겪다가    1972년 2월 10일 세상을 떴다.  그가

세상을   뜬 후 고향 울산에서는 그를 기리는 ‘고복수

가요제’를 해마다 열고 ‘고복수 길’을 열었다.





1941년 결혼으로 부부가수가

되어 활동해온 황금심은 이 땅에서

이미자가 나오기 전 가장 많은 노래를 부른

 가수로 국민의 사랑을 받으며 고복수가 떠난 후에도

30년 가까운 세월을 더 살다가 2001년 7월 30일 세상을

떴다. 고영준, 고병준 등 3남 2녀 자녀들과 아들 며느리까지

노래를 부르고 악기를 다루는 음악가족이 되었고 어려운 속에서도

훌륭한 가정을 지켜 황금심에게 장한어머니상이 수여되기도 했다. 

 1997년 3월 10일 황금심을 주제로 한   가요무대에 후배들과 함께

직접 노래를 부르기도 하는등 세상을 뜨기 직전까지도 가요무대

등에서 그 모습을 보여 주었다. 1992년  옥관문화훈장을

비롯해서 여러 차례 수상경력도 있다. 더 자세한

사항은 써 올린 글로 대신한다.

 


유경환 (유카리나) 여사님 글



영화같은   음악가족의 이야기 잘
읽었습니다. 이 글을 읽으면서, 사람에겐
운명이라는 이미 놓여진 길이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되는군요.  맨 아래 기타를 들고있는
사진은 두분의 아드님이신가봅니다.
 부친을 많이 닮았군요.



하광율 선생님 글 


 

[오전 2016,11.28. 11:26]

저는 실버뮤지컬    '타향살이'를

작 연출하고 있는 하광율 이라합니다.

인터넷에서 자료를 찾다가 선생님 블로그를

 보고 연락드리게 되었습니다. 선생님과 좋은

인연이 되어 대한민국의 실버세대들에게

소중한     우리 문화유산들을 널리

 알릴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아직은 미완성이지만 앞으로

 많은 분들의 도움으로 채워가야 할

지난번 진행했던 실버뮤지컬 성동구편을

보내드리오니 참고하시고 많은 관심과 지도

 편달 바랍니다.  참고로 지인을 통해 고복수

 선생님 아들이신 고영준씨와 함께 내년부터

실버뮤지컬 타향살이를 만들어 보려합

니다.     기회가 된다면 선생님

고견도 듣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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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황금심(黃琴心) 고복수(高福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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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고복수, 타향과 민족의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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