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역사 90년! 아나운서 역사 90년! 1927년 2월 16일 이옥경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전파를 타고 세상 사람들에게 전해졌다. 갖가지 화제를 뿌리며 고고의 소리를 (呱呱之聲)울렸다. 이옥경은일본인 아나운서 미쓰나가와함께개국방송 사회를 보며 정식방송을 내 보냈다. 방송역사의 시작이자,아나운서역사의 시작이다
방송역사 아나운서 그이름 그 얼굴 KBS 한국방송
여성들의 사회적 진출이 희소했던 시절이었지만 방송역사의 개시 목소리는 여자로 부터 시작되었고 여자들의 직업이 하나 더 탄생했다. 그리고 개국에 때 맞추어 한사람의 아나운서가 또 선발되었다. 그 아나운서 마현경! 그 역시 여성이었다. 또 한사람의 방송인 편성원 최승일의 부인이었다. 최승일은 그 시절 세계적인 무용가 최승희 큰 오빠다.
KBS 아나운서실에 가면 아나운서 역사가 담긴 석장으로된 족보가 있다. 1927년 경성방송국 개국이래 서울에 있는 중앙방송국에서 근무한 아나운서들의 이름이 적혀있다. 이 족보는 1964년에 처음작성되었다. 그래서 첫장은 그때까지 서울에 근무한 아나운서가 적혀 있지만몇분 빠진분도 있어서 이 글을 쓸때는 필자가 아는대로 보완했다.
또 한장은 이규항아나운서실장시절 1979년에 작성된 것으로 당대의저명한 서예가의 정성어린 서체로 작성되었다. 그때 그 얘기가 2015년에 발행된 '3인의 아나운서'에 기록되어 있다.
이 족보에는 1965년부터 1979년까지의 명단이 있다. 또 한장은 1980년대 방송통폐합으로 민영방송에서 합류한 아나운서들까지를 망라한 인명록이다. 여기 기초해서 KBS 아나운서 인명록을 모두 올린다. 그 이후 명단은 필자가 작성했다.
이 족보에는 서울 아나운서실에 근무한 순서대로 기록하는 것이어서 지역에서 근무한 아나운서는 없고 또 같은 기수라도 지역에서 근무 하다가 서울로 온 아나운서는 기록이 늦는 경우가 있다. 마현경 아나운서 등 몇 분 누락 된 분도 있고 1940년 7월 31일자 조선일보를 보면 이때 아나운서 공개모집에서 51명이 응시, 9명이 합격해서 그 합격자는 박용신(법학전문 졸), 구본명 (경성제대 졸), 서정안 (연희 전문 졸), 민재호 (연희 전문 졸),
이익령 (보성전문 졸), 이정호 (일본와세다대 졸), 여자 아나운서로는 이경환 (이화여전 졸), 김윤길(경성보육 졸)등 이 합격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족보에는 박용신, 민재호, 이익령 세분만 기록되어 있다.
이런부분을 필자가 할 수 있는데 까지 보완하고 지역방송국 아나운서는 해당 방송국 역사를 쓸때 아는데로 써 넣을 것이다. 그리고 관련 사진을 함께 넣어 이해를 돕도록 할것이다. 일제강점기 1945년 8월 15일까지는 방송국에는 방송인으로 아나운서와 기술자만 선발되었고 기자나 프로듀서 선발은 없었다. 편성원도 아나운서로 선발되어 편성을 담당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아나운서 역사 첫 머리에 오른 이름 ( ) 안은 아나운서실 족보에 없는 이름이다.
이옥경, (마현경), 김영팔, 박충근, 남정준, (심훈- 상록수의 저자), 1933년 한국말방송 전담방송을 실시 하면서 새로운 아나운서를 선발했다.이혜구, 이하윤,이석훈, 김문경, 김준호, 정문택, 윤태림, 최아지 (최아지를 최정석으로 개명), 1933년 우리말전담 방송을 앞두고 촬영한 단체사진. 우리방송인들이 일본방송인과 함께 촬영한 방송부 직원들 사진으로 귀한 방송사료다. KBS자료실에 있는 박충근 아나운서 엘범에 이 사진이 있다.
1934년 연말 특집 방송극을 끝낸 제2방송과 직원들의 모습으로 그시절 제 2방송과 우리말 방송을 했던 이혜구, 김문경, 최아지, 이석훈, 박충근, 남정준 아나운서가 함께 한 사진이다. 그 시절에는 방송과 직원이라면 아나운서를 의미했다.
이계원, (송진근, 양제현-단파방송수신 관련),박용신, 고재경, 이현, 이원구, 송영호, 1930년대 말까지의 아나운서 이름이다. 지금까지 나온 아나운서 명단에서 빠져 괄호안에 넣은 성명 중 송진근은 월북했고 마현경의 남편 최승일이 월북한 사람이어서 극심한 냉전시대에 그 성함을 포함하기가 어려웠을 듯하고 심훈(상록수 작가) 은 잠시 근무하다가 퇴직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되며 양제헌은 뒷날 편성원의 일을 보았기 때문일것이라고 생각된다. 1940년 7월 31일자 조선일보 아나운서 합격자 명단에 나타난 아나운서 합격자 명단 9명 중에서 3명만 기재된 것은 곧 퇴직했거나 지역에 배속된 아나운서가 있어서 라고 생각되지만 신문내용대로 이름을 올린다.
이때 조선일보는 아나운서 공개모집에서 51명이 응시, 9명이합격해서 그 합격자는 박용신 (법학전문 졸), 구본명 (경성제대 졸), 서정안(연희 전문 졸),민재호(연희 전문 졸), 이익령 (보성전문 졸), 이정호 (일본와세다대 졸), 여자 아나운서로는 이경환 (이화여전 졸), 김윤길(경성보육 졸) 등이 합격한것으로 되어있다. 이때까지 재직한 아나운서의 사진을 모았다. 1943년 단파방송사건으로 송진근, 박용신, 이현 등 아나운서들이 방송국 문을 나서면서 윤길구, 이덕근, 장운표, 홍 준, 문제안, 다섯사람의 아나운서가 새로 들어왔다. 이때 들어온 아나운서들이 일제강점기 말 또는 해방공간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문제안은 해방되던 다음날 구두로 기자발령을 받고 우리나라 최초의 방송기자가 되었고 이덕근은 보도계장, 연출과장이 되었으며 훗날 방송학자가 되어 후진을 양성했다. 윤길구는 방송과장, 부산방송국장을 거쳐 국제방송국장, 두차례의 중앙방송국장을 지냈다. 윤길구의 사망때 오늘날 원로방송인들의 모임 사단범인 방우회 (한국방송인 동우회)가 창립되었다.
방송국에 같이 들어 오신 문제안, 윤길구, 장운표, 홍준님과 함께 한 사진
아래는 1947년 11월의 방송과 직원들이 함께 한 사진이다. 이때 방송과에는 아나운서와 기자가 근함께 무했다. 번호따라 1.문제안, 2.이계원, 3.윤길구, 4.민재호, 5.전인국, 6.최용희, 7. 9.김인현, 10.이덕근, 12.강문수, 13.윤용노, 14. 편용호, 15.강준원, 16.이진섭, 17.홍준, 18.이성수, 19. 위진록 7. 8. ,11번은 미확인
해방전,후 그리고 해방공간, 6.25 이전에 선발된 아나운서들이다. 전인국, 윤용노,호기수가 해방될무렵 들어왔고 1945년 해방되던 해 새로운 여러병의 아나운서를 선발했다. 조봉순 (얄게 작가 - 조흔파), 강문수, 조준옥, 박인자, 노정팔 (아나운서로 선발 되었지만 아나운서는 해본 적이 없다.) 이분들에 관한 상세한 기록은 다른 글에 있다.
1946년 부터 훌륭한 아나운서들이 많이 들어와 해방공간에서 부터 6.25를 거치는 동안 활발한 활동을 했고 6.25가 일어나 홍양보, 위진록, 유덕훈,김유선 아나운서 처럼 VUNC나 VOA로 옮긴 아나운서도 있다. 이진섭,이성수,장균, 서명석, 박광필, 황순덕, 장기범, 한희동, 임채흥,박정희, 홍용기, 박남중, 이성실, 이증원, 이옥열, 김영권, 최승주, 양현문, 양대석, 공승규, 민영환, 김순철, 강익수, 이용훈, 양재현, 김유준, 김경자 등이 이때 들어왔다. 위는 부산 피난 시절에촬영한 아나운서들 사진이다.
</ 6.25 전쟁중 1951년 9월, 5사람의 아나운서가 선발되었다. 강찬선, 임택근, 황우겸, 정순형, 이수열, 홍일점, 정순형은 원래의 전공을 살려 의사가 되어 하와이에서 살았고 강찬선, 임택근, 황우겸은 1950년대, 60년대 아나운서의 중심 인물이었다. 이수열은 부산문화방송 창설의 주역이 되는 등 활동을 했고 KBS에서 퇴직했다. 위 사진은 장기범 선생님 묘비 제막식 때 촬영한 사진으로 문시형 선생님은 당시 방우회 회장이었다. 아나운서는 아니다.
1957년 5월 1일부터 한달간에 걸쳐 실시한 제1회 아나운서 강습회 사진이다. 서울 중앙방송국의 최계환, 이광재, 박종세, 임동순,장금자, 윤영중, 부산 전응덕, 최재희, 대구 권오상, 광주 황의돈, 마산 서용수, 이완희, 청주조창동, 이규영, 이리 백기홍, 서정복, 이외에 기독교방송 1명,
육군 정훈국 1명이 참여해서 촬영한 사진이다.(윤영중 제공)
부산에 있던 임시중앙 방송국이 서울로 와, 1954년 아나운서를 모집했다. 이때공모로 아나운서에 입문한 이가 최계환, 전영우, 강영숙, 김인숙, 이순길 아나운서다. 이 무렵 이리방송국에서 근무하던 윤영중, 최세훈, 그리고 부산방송국에서 근무하던 장금자 아나운서가 서울 중앙방송국 아나운서실에 합류했다. 1956년에는 박종세, 이광재, 임동순 등 남자 아나운서들이 들어왔고 1957년에 들어온송석두, 문복순, 민병연, 송영필, 이현숙, 다섯명 가운데 남자는 송석두가 청일점었다. 1954년부터 늘어나기 시작한 여자 아나운서는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늘어나 1960년대에는 숫적으로 남, 여 아나운서가 균형를 이루면서 어린이 프로그램, 음악, 주부 프로그램은 대부분 여성아나운서들의 몫이었다. 1957년의 청일점 송석두는 곧 기자로 전직했다. 뒷날 필자가 물었다. 왜? 전직했느냐? 고 농담인지, 진담인지, 여자아나운서들 틈에 기가 죽어 옮겼다는 답이 왔다. 그 시절에 촬영한 두장의 사진을 올렸다.
1957년 연말특집 아나운서 언파레이드를 마치고 촬영한 사진으로 앞줄오른쪽부터 장기범, 민병연,강영숙,황우겸, 김인숙, 최세훈, 송석두,윤영중,이현숙,장금자, 송영필, 뒷줄 왼쪽부터 박종세, 이광재, 임택근, 강찬선, 임동순, 문복순, 강익수, 최계환.
1958년 봄 남산 중앙방송국 스카이라운지 에서 촬영한 사진 장기범 아나운서 실장을 비롯한 아나운서들, 그리고 이승만대통령의 아들 이강석이 함께 한 사진으로 1.최두헌, 2.유창경, 3.최세훈, 4.한경희, 5.민병연, 6.문복순, 7.황우겸, 8.장기범, 9..이강석, 10.강익수, 이강석은 틈이나면 남산에 있는 방송국을 들렸다. 남선의 방송인들과는 개인적인 친분이 있었고 남산의 방송인들은 형님이고 누님이었으며 친구였다. (사진 민병연제공)
1959년 김경숙 아나운서와 함께 들어온 동기생들이 입사교육을 시작하던 시절 1959년 5월 3일 남산 약수터에서 촬영한 사진. 왼쪽부터 김정현, 김순영, 강익수 (계장), 장기범 (실장), 서선벽, 김현수, 김경숙으로청일점 김주환은 이 사진에 없다. (김경숙 제공}
1959년 아나운서 신입사원 강습회를 마치고 촬영한 사진 7. 이종훈 (기술과장), 8.이운용(중앙방송국장), 9.이규일(방송관리국장), 10.전성천(공보실장), 11.거스 (미국인 방송고문관), 16.배준호, 17.김규, 18.서병돈,19.김순환,21.이병열, 22.24.박진현, 25.허환, 26.김인권, 27.조병해, 29.노정팔, 34.김영길,36.오남열, 38.최규락,39.박노설, 40.김주환, 41.홍종선, 43.송한규, 44.강익수,45.강찬선, 이때 김정현,김경숙,김현수, 서선경, 이연영 등5 분의 여성 아나운서가 입사했는데1. 2. 3. 4. 5번이 화인되는데로 기록 하도록 할것임
미국 워싱턴에 사는 김정자 아나운서가 보내준 사진 두장을 올렸다. 김정자 아나운서는 1961년에 입사 71년까지 재직했다. 위 뒷줄 왼쪽부터 송경원, 임문택, 이규항, 김난숙, 김재영, 심광진, 송한규, 이병열, 이팔웅, 뒤에서 두번째 줄 가운데 김규은. 김정자, 앞에서 두번째 줄 최두헌, 강찬선, 이원춘, 배덕환, 앞줄 김기행, 이계영, 안용민, 아래는 65년 2월 7일 이라고 쓰여있는 여자 아나운서들이다.왼족부터 김난숙, 김정자, 김규은, 윤미자, 이게영, 조길자, 송경원
1962년 KBS 연말 남 : 여 청백전 특집방송 사진, 임택근 : 임국희 아나운서가 사회를 보는 가운데 가수 현인, 신카나리아가 어느편이 먼저하나 가위, 바위, 보 히는모습이다. 1년차 임국희 아나운서가 대스타 임택근 아나운서와 함께, 대 스타들이 출연한 공개방송에서 흔들림 없이 사회를 보는 모습을 본 주위 분들로 부터 칭찬을 받으며 대성 할 수 있는 아나운서로서의 재능을 보여주었다.
1960년대 아나운서
5.16이 일어나던 1961년에는 두차례의 공개모집으로 많은 아나운서 들이 들어왔다. 전반기의 모집은 기자, 엔지니어, 행정요원 등을 함께 모집, 5월 16일이 첫 소집일 이었는데 그날 마침 5.16이 일어난 날이라 소집일이 무기한 연기 되었다가 6월 들어 소집 되었다.
위는 엄복영 아나운서가 제공한 사진으로 1.윤천영, 2.엄복영, 3. 4. 5. 김종영, 6 권영원,7.김광식,8.이원춘, 9. 10. 11.전재만, 12. 13.김정자, 14.이기자, 15.박정희, 17.김용문, 18. 19.이규항, 20.박근주, 21. 조남호, 22.강윤영, 23.박용석, 24.홍기욱, 25. 26. 27.최승일, 28.이팔웅, 29.김충기 , 30.이기우,31. , 32.이홍우, 33. , 34.길종휘, 35. 36. 37. 38.최춘, 39 . 60년대 부터는 남녀 아나운사가 숫자적인 균형을 이루었다. 앞에서도 말씀 드렀듯 지역 근무를 거쳐 서울에 온 아나운서는 순서가늦는 경우가 있다.
위: 1962년 9월 10일 KBS 중앙방송국 아나운서들이 함께 한 사진이다. 동아방송과 동양방송이발족하기전이어서 뒷날 민영방송 아나운서 책임자가 된 박종세 임택근, 최세훈, 김인권 아나운서 등을 볼 수 있는사진이다. 전영우아나운서등 몇분은 그 기간중 군 복무 등 사정이 있어 참여하지 못했다. 아래 같은 사진 번호따라 1, 배덕환, 2 박종세, 3 이광재, 4 장기범, 5 강찬선,6 임택근, 7 최세훈, 8 한경희, 9,최두헌 10 홍종선,11 김주환 12 이규영,13 길종휘, 14 유영옥, 15 이정희 16 최승일 17 김인권, 18 박노설 19 최정현, 20 인주희, 21 이규항;22 송영규;23 이병열. 24 송한규 아나운서
1962년 KBS중앙방송국 아나운서들이 함께 한 사진,앞줄 왼쪽부터 최귀영, 김윤희, 한사람건너 송한규, 김주환 뒷줄 왼쪽부터 이정희, 성선경, 이규영 한사람건너임택근, 박종세, 오른쪽에서 두번째 안용민
1962년 쯤으로 추정되는 KBS 중앙방송국 아나운서들이 함께 한 사진으로 앞줄 왼쪽부터 최귀영, 김윤희, 한사람건너 송한규, 김주환 뒷줄 왼쪽부터 이정희, 성선경, 이규영 한사람건너 임택근, 박종세, 오른쪽에서 두번째 안용민
\ 위는 1966년 KBS 중앙방송국 (우리말 라디오 & TV)과 국제빙송국 (외국어) 아나운서들이 청와대초청 방문때 촬영한 사진이다. 앞 줄 왼쪽부터 이규항, 방원혁, 김용, 김재영, 이병렬, 김규은, 대통령 영부인 육영수 여사, 소병규, 이근배, (?), 임문택, 이팔웅, 김기행 아나운서, 뒷줄 서 있는 사람 왼쪽부터 (?), 송한규, 이광재. 강찬선, 최규락, 이종명 (일어) 한 사람 건너, 송인상, 최징훈(영어) 한사람 건너, 최두헌, 이소원, 한 사람 건너 김용문(불어), 김정자, 박용순(일어), 최경호(중국어), 손상욱(일어), 네 사람 건너, 이우백(일어)두사람 건너 김승한, 김영애,이수자, 최승빈 아나운서 (사진제공 : 김정자, 김승한)
1965년 100대 1읠 경쟁률을 뚫고 들어온 아나운서, 5월 연수를 마치고 촬영한 사진, 앞줄 왼쪽 3번째부터 이광재 아나운서 실장, 장기범 방송과장, 최두헌·송한규 방송관 보 이때 들어온 아나운서는 최평웅 아나운서를 비롯해서 정경래, 이명종·이기원·이명종·이철규· 방원혁·원병희·최승빈·김영조· 양승현·장현길·송영자.
최평웅 아나운서 마이크 뒤에 숨겨둔 이야기들 P21에서 옮김
위 사진은 KBS 1966년 신입 아나운서 연수 교육중 남산 중앙방송국 정원에서 찍은 사진이다. 왼쪽에서부터 조춘제·정규용·윤두식 심재일·이광주· 차인태 ·권윤기·홍현업·(?) ·김용·강수문 이다. 동기생은 남녀 37명 이었으나 11명만 함깨 찍었다. 아래는 1968년도 아나운서 언 파레이드를 마치고 촬영한 사진 최평웅 아나운서 마이크 뒤에 숨겨둔 이야기들 P 33 에서 옮김
황우겸 선배님이 생전에 KBS TV 아나운서실장을 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아나운서를 사랑하는 황선배님 입장에서 그리 말씀 하셨고 틀린 말씀은 아니지만 KBS TV에 아나운서실이라는 직제는 없었습니다. 직제 상으로 말하면 제작과 교양계 안에 아나운서들이 근무했지요.
그래서 아나운서를 사랑하는 황우겸 선배님이 아나운서실장을 하셨다고 하신 것이지요. 저도 거기에 이의를 제기하지는 않습니다.
초대 교양계장에 황우겸, 2대교양계장에 전영우, 3대교양계장에 윤기범(행정),
전영우 계장님은 동아로 옮기시며 DBS 동아방송국 방송부 아나운서실장을 하시다가 부국장을 하셨지요. 개국 프로그램 유쾌한 응접실은 처음부터 통폐합 때까지 하시고 KBS에서 하시다가 교수로 적을 옮기시며 맹관영 아나운서 몫이 되었습니다.
아나운서실은 직제 상으로는 서울 중앙방송국에만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1968년 서울 중앙방송국 · 서울 국제방송국 · 서울 TV방송국이 통합되었습니다. 그 중간에 설명이 좀 필요하지만 요약하겠습니다.
화 보
1993년! 전국의 KBS아나운서들이 한자리에 모여. 이토록 많은 현직 아나운서들이 함께 한 것은 극히 이례적입니다. 김영길님이 제공 해 주신 이 사진을 접하고 모두의 성함을 기록하려는 마음으로 아나운서 클럽에 확인을 요청했습니다. 20 여년이라는 세월이 지나 모두의 확인이어려웠지만 일일이 확인을 거쳐주신 황인우 회보 편집장님의 노고에 진심으로 고마운 말씀을 올립니다. 이 사진 역사 기록으로 영원히 남을 것입니다.
같은 사진을 두편으로 나누어 아래 올렸습니다. 3.박원철, 4.서기철, 5.김동우, 9.손석기, 11.최평웅, 12.전우벽, 14.홍승택, 15.이명용, 16.임문택, 17.이규항, 18.김영길, 19.김승한, 20.조춘제, 21.김병래, 22.유수호, 24.이계진, 25.홍현업, 26.차경애 27.김영숙, 28.이미선, 32.김진형, 33.이종섭, 34.이종태,
2012 첫 방송터 기념일에 한국 아나운서 클럽 회장님을 지내신 황우겸, 전영우, 강영숙(고문), 박종세, 최만린님과 김규홍 부회장,정경래, 박민정 사무총장, 황인우 편집장 등 많은 분들이 참여 해 주시면서 특별한관심을 가져 주셨습니다. 6월 15일 발행되는 아나운서 회보에 첫 방송터에관한특집을실을 계획이라고 하는군요.
사진속의 한영섭 방우회 회장
2012년 위진록아나운서 만난 원로방송인들. 1. 이혜옥, 2.황인우, 3.임택근, 4.강영숙,5.박민정, 6.윤영중, 7.문복순, 8.황우겸, 9.위진록, 10.한영섭, 11.전영우 12.홍기욱
1950년대 여성 아나운서 왼쪽부터 이연영, 김인숙, 김윤희, 윤영중, 문복순, 장금자, 민병연, 2012년
황 량 아나운서
이대표님 참 ...대단하십니다. 100년가까운 아나운서의 방송사를 그림처럼 엮어서 문화유산으로 승화 시켜주셨네요... 그저 감사하고 또 고맙습니다.
김규홍 한국아나운서클럽 부회장님
이장춘선배님에 대한 황량국장의 아나운서 문화유산으로 승화시켰다는 표현도 부족하리만큼 정말로 대단 대단 대단 또 대단하신 일을 하셨습니다 ???UN본부에 보고합시다
윤영중 (1950년대) 아나운서님
깜짝 놀랐어요. 말로 전해오던 내용 얘기로만 듣던 그때 그 얘기, 그 이름 부분, 부분 알고 있는 얘기일지라도 이토록 사진을 모으고 이름을 모으고 사연을 모아 집대성 해 놓으니 생생한 아나운서 방송역사네요. 후손들에게 영원히 남겨야 할 우리들의 발자취이고 문화유산입니다. 사진과 내용을 전해주신 분들에게도 고마움을 드리며 밤, 낮없이 이 일을 해 오신 이장춘님에게 진심으로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전옥수 아나운서님
이국장님! 이국장님께서는 아나운서의 역사적기록과 인연을 이어 살 수 있도록 하는데 큰역할을 하신 국내 유일무이하시는 분이십니다. 국장님덕분에 아나운서 선배님과 후배들과의 연대가 더욱 강화되고 잊어버렸던 과거의 기억들을 되살릴 수 있게 되에 얼마나 감사하고 고마운지 모르겠습니다 저도시간되면 사진들 찾아 보겠습니다
황인우 (아나운서클럽 회보편집장)아나운서님
세상에, 놀랍습니다! 우리 아나운서들이 못한 일을 춘하추동방송에서 정리해 주셨네요 역사학자도 해내지 못한 귀중한 사료가 아닐 수 없습니다.이장춘 선배님, 존경합니다! 고맙습니다!
이혜옥 아나운서님
정말 대단하신 영원한 아나운서 방송국장님! 존경해 마지 않습니다 어쩌면 이렇게 역사적인자료들을 모으셨을까요?무어라고 감사의표현을 해야 할지? 말이부족합니다 정말 감사합 니다 이장춘방송국장님 만세!!!
김무생 아나운서님 글 ***제가 KBS 아나운서실에서 "아나운서 족보"를 본 것은 시골에서 이제 막 올라와 서울 생활이 시작된 1974년 봄 3월 대학 1학년 때입니다! 고 이광재 아나운서님이 미국의 VOA 방송을 하시기 위해 떠나신 그때인 제가 중 3 늦은 때 KBS의 고 최규락 아나운서 님께 최 아나운서님께서 생각하시는<아나운서가 되려면- 아나운서로서의 갈 길>에 대해 알려 주시라 편지를 올렸더니 뉴스 용지 5쪽의 쉽고도 자상하게 답장을 주신 것이 인연이 됐습니다!
그래서 그때 학생의 신분으로 7 4년 봄 3월에 남산에 있는 KBS아나운서실을 찾았더니 고 최규락 아나운서님께서 반갑게 맞아 주셨습니다!중 3인 3인 학생이 의지가 강하고 정성을 다 해 편지를 잘 써서 관심을 갖고 바로 답장을 해 주셨다는 말씀도 해 주셨습니다! 그때 제가 아나운서실을 찾을 때 뭔가 허전해서 넉넉하지 못한 학생 신분에 별 다른 것은 못 하고 담배 한 갑을 사서 잘 포장을 해서 최규락 아나운서님께 드리면서 "이건 별 거 아닙니다! 제 마음입니다, 받아 주십시오"하니까 자꾸 안 받으려 하시자
바로 옆에 앉아 계셨던 "정기채 아나운서님"이→ "아! 받으세요! 성의인데요!" 하시니까 마지못해 받으시며 "이런 것 가져 오지마!"하시며 멋적은 웃음을 웃으셨던 그때 그 시절 42년 전의 모습이 어제 오늘 일처럼 선명하게 아른거려 옵니다! 46년전에 고 최규락 선배님이 제게 주셨던 그 편지 물론 현재 가지고 있죠! →아주 소중한 것이니까요! 1995년 3월에 <집념과 열정의 아나운서>라는 주제로 KBS-1TV:<이것이 인생이다> 에 제가 소개될 때 제가 직접 이 편지를 시청자 여러분께 보여드리기도 했습니다!
여기서 아나운서실을 빛낸 <아나운서 족보>를 바라보고 있으려니까 그때의 모습이 희미하게 영상 필름처럼 스쳐 지나가고 있습니다! 기라성 같으셨던 선배님들이 한 분 두 분씩 떠나시고 없는 지금의 그 빈 자리는, 솔직히 너무 허전해서 슬픔에 잠기기도 합니다! 그만큼 후배들의 몫이 크다 할 수 있겠죠?
제가 여기에 글을 올릴 때 이장춘 이사님을 가리켜 <대한민국 방송 문화와 역사의 보물창고의 박물관장님>이시라고 칭해 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 나라의 역사가 없고, 그 역사가 하나로 정립되지 않은 나라는 이미 나라가 아니죠! 그 나라의 문화의 샘터요 길잡이 인 →"방송 문화와 역사"가 없거나 하나로 정립되지 않은 나라는 그 나라의 문화가 없는 거나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365일 묵묵히 우리나라의 방송문화와 역사를 또 거기다 "아나운서의 역사 "까지도 일목요연하게 틈틈히 이렇게 견고하게 하나씩 하나씩 탑을 쌓아 주시는 이장춘 이사님!
현재의 모든 방송인들과 이곳을 방문하시는 여러분, 후세의 모든 방송인들과 후배 여러분! 할 것 없이 이곳을 방문하시는 모든 분들도→ 이장춘 이사님을 "대한민국의 방송문화와 역사의 보물창고 관장님이시자 상록수"로 기억하게 될 것입니다! 변함 없는 건강을 기원 합니다! 무척 고맙고 흐뭇합니다! 우리 "춘하추동 방송"을 사랑해 주시는 여러분!건강과 축복이 늘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고맙 습니다! 김무생드림...
남초 이정부 아나운서 글
<옛 동산에 올라>를 들으며 지난날을 반추한다.
저희보다 훨씬 앞서, 방송의 未明期 부터 아나운서의 길을 걸어오신 기라성 같은 대 선배님들과...저처럼 막 아나운서를 은퇴했거나 한창 현역의 길을 가고 있을 후배 아나운서 여러분 모두 에게, <춘하추동방송>화면을 통해 어제와 오늘의 아나운서 역사를 한눈에 보시는감회는 다 같이 큰 행복이 아닐까 상상해 봅니다.그리고페이지를 열어 그곳에 나이테 처럼 음각된 소중한 방송사료들을 볼 적마다 감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11년 전 국경도 울타리도 없는 인터넷이라는 막막한 공간에 <춘하추동방송> 블로그를 개설, 단기필마로 일인 언론을 일구어, KBS자료실에서 마저도 사라져 찾을 길 없는 방송, 예술 등의 역사는 물론, 관련 종사자들의 삶의 기쁨과 보람, 고통과 극복의 이야기를 소중히 보존하고 국내외에 널리 알려온 방송사의 증인, 이장춘님의 시대를 앞서가는 생각, IT 역량, 사명감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 역시 68년부터 아나운서로 살아온 사람으로서, 동시대의 방송인, 그것도 저희보다 연로하신 방송원로서 해내신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업적에 경의와 깊은 감사를 표합니다. 한국방송인 동우회(방우회)이사이시며 한국 아나운서클럽 특별회 원이신 이장춘 선배님께서 (-그는 청사없는 방송의 연봉 없는 국장이란 별칭을 얻고 있습니다.) 방송역사 아나운서 편을 위해 기울여 주신 각별한 애정과 노고에 다시한번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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