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 '별헤는 밤' 임국희 아나운서 민족시인 윤동주 尹東柱! 29세의 짧은 생애에 그토록 깊은 감동을 준, 주옥같은 시, 흔들림 없는 애국정신, 1917년 12월 30일 북간도에서 태어나 1945년 2월 16일 일본의 감옥에서 의문의 생을 마감한 윤동주! 그는 애국 시인이자 건국훈장 독립장에 빛나는 독립운동가로 추앙받고 있다. 본인이야 순수한 마음으로 시를 썼을 지라도 감옥살이를 하고 세상을 뜬 후 그 시를 보고 그 얘기를 전해들은 사람들은 그를 독립지사로 애국시인으로 받들어 모시고 있다. 윤동주! 그가 남긴 시가 숫자로는 많지 않을지라도 한겨레, 힌민족의 핏줄을 이어 받은 사람들은 사는 곳이 어디든,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그 시를 읊으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1960년대 중, 고등학교 교과서에는 의례이 윤동주의 시가 실렸다. 학교에서 시 몇수는 외우도록 하던 시절 이고 그 시속에는 윤동주의 시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 가운데서도 ◆별헤는 밤은◆ 길이도 길고 외우기도 힘들었다. 선생님은 그 시를 외어 오도록 숙제를 냈다.외어온 학생도 있지만 대부분은 떠듬이거나 외워오지 못했다. 그런 학생은 그 시를 외울 때까지 학교에서 그 시를 외여야 했다. 그 시를 원망하는 학생도 있었음직하다. 그 무렵 1964년 MBC에서 '한밤의 음악편지'가 편성되었다. 갖가지 사연을 적은 엽서가 쇄도했고 그 속에는 별헤는 밤을 비롯해서 윤동주의 시를 희망하는 청취자들도 많았다. 임국희 아나운서는 8년간 그 프로그램을 담당하면서 여러편의 시를 띄워 보냈다. 그래서 그 시절을 살아온 사람들은 윤동주의 시와 한밤의 음악편지와 임국희 아나운서를 함께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임국희 아나운서는 지난날의 얘기들은 잊으려 하지만 별헤는 밤 등 그때의 윤동주 시 낭송에는 특별한 애정이 있어서 지금도 그때의 그 시 낭송을 들으면그때의 감회가 되 살아난다고 했다. 자세한 얘기는 임국희 아나운서 편에 있으므로 임국희의 별헤는 밤 '한밤의 음악편지' 그때 그 방송 내용과 함께 윤동주 시인에 관한 얘기를 지난날 춘하추동방송에 올렸던 내용을 바탕으로 다시 쓴다. 영화 동주에서
윤동주와 그의 시에 관해서 관심이 매우 높았던 때 1968년 11월 연세대학교 교정에 윤동주 시비가 섰고 중앙방송국에서 “북간도 동포에게” 프로그램을 맡고 있던 필자가 음악계장 이상만으로 부터 윤동주 시비 제막식이 있으니 북간도 동포에게 그 소식을 전해 드리면 좋을 것이라는 얘기를 듣고 그 시비 제막식장 연세대학교 교정을 찾아 15분간의 녹음구성 프로그램을 제작해서 윤동주의 고향 북간도동포를 향해 방송한 적이 있다. 극심한 냉전시대라 모든 연락이 두절된 채 전파만이 오고 가던 시절이었다. 그로부터 20여년이 지나 대한민국 수도 서울에서 열린 88올림픽을 계기로 동서 냉전의 벽이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1991년 필자는 북간도를 방문해서 윤동주시인이 어린 시절 살았고 공부를 했던 용정중학교를 방문해서 윤동주 시인 얘기며 이 지역의 독립운동사 등에 관해서 자세한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아직 한. 중 국교가 수립되기 전이었지만 얼마전 까지만 해도 발걸음도 들여 놓을 수 없었던 이 지역에서 윤동주 시인에 관한 얘기 등을 직접 듣는 것은 감명 깊었다. 용정중학교 학교였지만 많은 동포들이 찾으면서 요즈음은 학교모습이 많이 변했다는 얘기를 듣는다. 윤동주는 북간도로 불리는 만주에서 태어나고 어린 시절 그곳에서 학교를 다녔다. 시인이면서 경희대학교 교수로, 학장으로 또 장로 신학대학교 교수로 널리 알려진 윤영춘 교수는 윤동주 시인의 당숙이자 명동학교 시절부터 그의 스승이었고 일본 형무소에서 시신을 거두어 고향으로 안고가 안장한 주인공이다. 윤영춘 교수는 필자가 1960 년대 “북간도 동포에게” 프로그램에서 북간도를 향해 자유대한의 소식을 전하기도 했다. 윤동주와 윤영춘 교수의 아들 윤형주와는 6촌 형제지간이다. 윤형주가 윤동주의 시를 노래로 불러보고 싶어 아버지에게 그 뜻을 얘기 했지만 그때는 말이 없던 아버지가 세월이 한참 지난다음 “시는 그 자체가 하나의 노래이다. 한 마디 한 마디에 음정이 있고 박자가 있다. 너는 이 시가 가지고 있는 아름다운 선율과 리듬을 깨뜨리려 하느냐.” 그래서 윤형주는 형 윤동주의 시를 노래로 부를 수가 없었다고 했다. 윤동주가 어린 시절부터 주옥같은 시를 썼지만 일제강점기에 그 시를 발표 할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그 시를 발표할 수 없었다고 하는것이 더 정확하겠다. 그의 갑작스런 채포와 감옥살이 또 출옥하기도 전에 당한 의문사로 오늘날 그토록 큰 감동을 주는 주옥같은 윤동주의 시가 세상에 빛을 못 볼 뻔했다. 윤동주가 1941년 11월 그 때까지 써놓은 시중에서 18편을 고르고 서시를 붙여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라는 제목의 시집을 엮어서 함께 하숙하던 후배 정병욱에게 주었던 그 시가 깊이깊이 간직되었다가 발견되면서 1948년에 출판되어 빛을 보게 된 것이다. 윤동주(좌)와 정병욱(우) 정병욱은 뒷날 서울대학교 국문학과 교수를 지낸 분으로 윤동주와 함께 하숙생활을 했던 분이다. 그 시집을 보존하고 있던 정병욱이 학병에 끌려가면서 그 시집을 잘 보관 해주도록 어머니에게 부탁했지만 세월이 지나 어머니는 그 시를 어디에 숨겨 놓았는지를 기억이 나질 않았다' 세월이 지난 훗날 우연하게 발견되어 1948년 출판된 것이다. 전라남도에 있는 그 정병욱 교수 집은 대한민국 근대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민족시인, 그 젊은 날에 남긴 주옥같은 시! 하마터면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한 채 뭍혀 버릴 뻔 했던 그 시가 1948년 정병욱에 의해서 햇 빛을 보고 그로부터 윤동주의 시 세계는 물론 투철한 민족정신과 애국정신이 널리 알려진 것이다. 일본 유학중에 독립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채포되고 국내도 아닌 일본 땅의 후쿠오카 감옥에서 세상을 떴으니 얼마나 애통한 일인가? 필자는 “단파방송 청취사건” 이라고도 하고 “항일 단파방송 연락 운동” 에 관해서 오랫동안 연구를 해 온 터이라 사상범으로 분류된 독립 운동가들이 끌려가면 고문 등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어야 하며 어떤 과정을 거쳐 옥사(獄死)가 이루어진다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안다. 일본 땅에서 독립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감옥에서 옥사를 했으니 어떤 과정을 거쳤으며 얼마나큰 고 통을 겪었을 것이라는 상상이 머리를 스쳐간다. 그런 가운데서도 그 시가 세상에 빛을 보게 되어 그 시 세계와 그 정신이 널리 알려졌기에 오늘에 이 글을 쓸 수 있게 되었고 시 낭송을 보내 드릴 수 있게 됨을 그래도 다행으로 생각한다. 필자가 처음 연세대학교 교정에 선 시비 제막식을 취재 방송한 그날로부터 45년이 지나 2013년 그 시 비를 다시 찾아 현장을 촬영하고 취재해서 춘하추동방송에 글을 올렸으며 2014년 한양도성 탐방 길에서 청운동에 있는 윤동주 서시정과 문학관을 만나 현장을 취재 글을 써 올렸다. 연세 대학교 시비의 전면에는 서시가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윤동주 약력과 이곳에 비를 세운 동기가 기록 되어 있다. 그리고 종로구 청운공원의 제일 높은 자리에 그의 넋을 기리고 그 뜻을 널리 알리기 위한 윤동주 시 언덕이 조성되어 있고 서시정이 있으며 서시비가 있다. 여기에 1전시관과 2전시관 3전시관으로 나뉘어 마련된 윤동주 문학관은 그가 살던 시대상과 문학세계 그리고 그가 살아온 발자취가 간결하게 정리되어있다. 3전시관에서는 그의 생애에 관해서 10분정도의 동영상을 상영한다. 관람시간 안에는 한사람이던, 두 사람이던 사람 수에 제한 없이 영상을 보여준다. 요즈음 윤동주 시인과 시에 대한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동주’가 방영되기도 해서(동주 영화 한정면) 윤동주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더 자세히 알게되고 관심이 높아졌다. 아침마다 배달되는 ‘고도원의 아침편지‘ 그 고도원 선생께서 용정을 다녀와 사진과 함께 글을 올려 고도원과 함께 하는 분들에게 전했다. 고도원의 아침편지에서 용정에는 윤동주시인의 생가가 있습니다. 윤동주시인이 나고 자란 곳이 바로 이곳 용정 명동 마을입니다. 생가 입구에는 이곳에 주정부의 문화재임을 표시하는 비석과, 시인의 유고 시집명이 적힌'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 비석이 양 옆으로 세워져 있습니다. 윤동주 생가 바로 옆에 있는 옛 명동교회는 이처럼 전시관 역할을 합니다.
이 마을에 대한 역사, 이곳에서 배출한 인물 등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해주셨습니다. 전시된 인물사진의 아랫줄 왼쪽이 윤동주시인.그 옆은 윤동주와 동갑내기 사촌지간 이자 일생을 동고동락한 독립운동가 송몽규. 이 둘의 이야기는 최근 영화 '동주'로 개봉되어다시 많은 이들에게 회자되고 있습니다. 유경환 (유카리나) 여사님 글 윤영춘교수님과 문재린 목사님 부부 그리고 나 대학교 재학 중 윤영춘교수를 스승으로 모셨고 춘하추동방송과 함께 하는 유경환 여사는 윤동주에 관한 내용을 잘 알아서 이 글을 쓰는데 많은 도움을 주셨다. 1970 년대에서 90년대 초까지 이 나라 민주화를 위해 힘을 기울인 문익환 목사는 윤동주 시인과 같은 곳에서 태어나 같은 교회, 같은 학교를 다니며 어린 시절부터 절친한 친구였다. 윤영춘이 평양 숭실중학교 선생님으로 재직시절 윤동주와 문익환은 숭실중학교에 편입해서 같이 공부를 했다. 문익환의 아버지 문재린은 윤동주의 아버지 윤영석과 가까운 사이이고 윤동주가 마지막 가는 장례식을 집전한 인연이 있다. 유경환 (유카리나님) 글
아직도 그의 아름답고도 뜨거운 청춘은 우리들 가슴속에 살아있지요. 가수 윤형주의 아버지이시며, 윤동주 시인의 숙부라고 하셨던 윤영춘 선생님이 경희여자 초급대학의 학장 (1969년)이셨을 때 제가 그분께 배웠었어요 그리고 제가 학교를 졸업하고 갖 결혼하여 카나다의 토론토에 살 때 (1970년대 초), 연로하셨던 문재린 목사님 부부와 같은 한인교회에 다녔었지요.
김재준 목사님의 사위되시는 이상철 목사님이 시무하신 한인교회였는데 그 교회에서 결혼했고, 제 남편이 한 때는 그 교회 성가대 지휘를 하기도 했답 니다. 그러고 생각하니 참으로 오래전 이야기가 되었 어요. 뒤 늦게 윤영춘 학장님의 명언을 읽었네요. 노래이다. 그 한마디 한마디에 음정이 있고 박자가 있다." 아름다운 노래입니다.
별헤는 밤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합니다.
가슴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의 시와 별 하나의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의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 경, 옥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애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잠,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슬히 멀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위에 내 이름자를 써보고 흙으로 덮어 버렸습니다.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게외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시 - 윤동주
유경환(유카리나) 여사님 글 유경환 여사님이 춘하추동방송과 인연을 맺던시절 많은 도움을 받아 이 글을 올렸는데 3년가까운 세월이 흘러 원래의 글을 수정 다시 올리게 되어 유경환 (유카리나) 여사님께서 또 글을 올리셨군요.
국장님! 제가 국장님 블로그에 감탄하며 매일 공부하러 들어오던 때에 썼던 글이네요. 국장님 블로그처럼 제 블로그에도 검색창을 만들어야 하는데, 아직 설치하지 못하고 있어요. 영화 '동주'는 개봉할 때 부터 벼르다 아직 못보고 있는데, 이제는 집에서 TV.로 보아야겠군요. 국장님께서는 용정에 다녀오셨군요. 저도 언젠가는 갈 수 있으려나 모르겠군요. 제가 태어난 곳이 길림성이라서, 한번 둘러보고 싶으나, 젊은 시절엔 살림하느라 바빠서 못 갔는데, 이제 기력이 ...^ ^ 윤후현(팔방미남) 여사님 글 별 헤는밤, 북간도의 밤,서정시도 아니고 청춘시도 아닌 민족의 슬픔을 글,로써 노래했던 민족시인 윤동주,,,29세의 짧은 나이로 생을 마감 했지만 그의 시, 하나 하나, 삶의 흔적 하나 하나에 민족의 슬픔이 묻어나 있습니다. 오늘을 힘겹게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기억나는 사람 하나 소개 해 주라고 하면, 29세 청춘 나이에 유명을 달리한 너무나도 유명한 윤동주 시인,을 소개 합니다. 왜요? 그 뒤는 ............ 관련글 보기 영문자 클릭
임국희 한밤의 음악편지 MBC 여성싸롱 한국아나서클럽회장 http://blog.daum.net/jc21th/17782847 임국희 아나운서 그때 그 목소리와 그 모습 그리고 오늘(어느 소녀에게 바친 사랑) http://blog.daum.net/jc21th/17781283 임국희 아나운서 그때의 방송(시낭송 초혼과 장기범선생님 추모)오늘의 목소리 http://blog.daum.net/jc21th/17781737 이종환 PD(DJ)와 임국희 아나운서, MBC 한밤의 음악편지(조병화 시) http://blog.daum.net/jc21th/17781773 .
윤동주 별헤는 밤 임국희 아나운서 http://blog.daum.net/jc21th/17782850 한국아나운서클럽 창녕고택 모임 임국희 회장, 2016년 4월 11 http://blog.daum.net/jc21th/17782829
임국희 (네이버 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wiki/%EC%9E%84%EA%B5%AD%ED%9D%AC 동영상으로 본 1991년의 중국/_개혁, 개방초기의 모습 http://blog.daum.net/jc21th/17780181 화 보 용정 대성중학교 필자 이장춘과 함께 한 연주반 윤동주 시인이 연희전문학교를 다니던 시절 통인동 근처에서 하숙을 했으며, 아침마다 청운동 언덕을 올랐다. 그런 인연으로 가압장과 물탱크가 있었던 건물을 개조해서 문학관을 열고 주변을 공원화 했다. 한양도성 역사탐방 길에서 발길을 멈추고 이곳을 몇 번이고 돌아보며 시인 윤동주를 생각했다. 1968년 연세대학교에 세운 시비와 1991년 용정중학교에서 보았던 윤동주에 관한 추억도 함께 떠 올랐다. 윤동주 시언덕에서 본 창의문과 한양도성 영화 동주에서 고도원의 아침편지에서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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