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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MBC 초기방송비화 특별좌담, 이성화, 전응덕, 최광민, 김능화, 김영효, 정풍송, 김기자

이장춘 2015. 7. 16. 15:56

 

 

 

부산 MBC 문화방송이 우리나라

최초의 라디오 민영방송으로 개국한것은 

1959년 4월 15일이었습니다. 개국때 방송을 하신분들이

2008년에 만나 그 시절에 있었던 숨은 얘기들을 실감있게 말씀 해 

주신 내용의 글이 이성화 아나운서의 블로그에 올라있기에 특별배려로 

춘하추동방송에 올렸습니다. 한 방송국의 개국 초기 비화를 이토록 당사자

들이 생생하게 들려주는 경우가 많지 않아서   소중한 방송사료로 

보존되어야 할 내용으로 긴 글이지만 전문을 올렸습니다.  

 

 

부산 MBC 초기방송비화 특별좌담, 이성화, 전응덕, 최광민, 김능화, 김영효, 정풍송, 김기자 

 

 

오래전 부산문화방송 사우회(2008년)

'빛 과 소리에 에 보낸 글 이 페이지를 여신

사우님 반갑습니다.    저는 이 성화라고 합니다.

1958년 부산 문화방송 개국 때 설립자이신 (고)김 상용

사장님, 지금 병환 중에 계신당시 정환옥 전무님을 가까이 뵈며

 즐겁게 개국 프로그램등, 뉴_스 공개방송을 한 처음 아나운서입니다.

요즘의 건물 규모로 본다면 어떤 큰 건물의 휴식 공간만한 규모에서

한국 최초의 민간 방송 탄생이라는 벅찬 감격으로 마이크를

 잡았던 때의 여러 가지 모습들이 떠오릅니다.

 

  

이성화 아나운서

 

 

50년의 세월이 가는 동안 초창기 몸 담았던

동료들 중 많은 분이 유명을 달리했습니다. 지금

 5분의1정도의 숫자가 계시다고 하는데 그 중 몇 몇분 옛 날

 MBC 분들이 가끔 만나서 회포를 풉니다. 오늘 2008년 7월 2일은

서울 청진동 한 음식점에서 7분이 모였습니다. (존칭 생략합니다)

전 응덕, 최 광민, 김 능화, 김 영효, 정 풍송, 김 기자, 이 성화, 이렇게

 시간을 갖었는데요 내년 4월15일이 개국 50주년이기에 그 때의 잊지 못 할

감회가 꽃이 피었습니다. 저는 생각 하기를 ‘아, 이 이야기들이 모두 부산

문화방송의초기 역사이며 의의가 크다는 것을 느껴서  이야기들을

정리 해서 사우님들과 함께 나누고 싶어졌습니다. 음식점이

STUDIO라 생각하고 제가 사회를 봤습니다.

 

이; 뵐 때마다 반가움이 커집니다.

문화방송 이름속에 50년이 가네요. 아기가

 태어나면 좋은 뜻을 생각 해서 이름을 짓는데

문화방송도 이름지을 때 어떤 연유가 있었겠지요?

 

 

 

 

전응; 1948년 우리나라 건국 때도 국호를 고려,

동진, 조선등 많은 이름이 거론되지않았습니까? 그만큼

 이름 속에는 담고싶은 뜻이 있는 법인데 1958년 문화방송은

건전 문화창달이라는 뜻을 갖고 정해진 것이죠.

 

이성; 배경 설명을 해 주신다면..

 

전응; (고)김 상용 창업자와 정환옥 전무님이

 뜻이 있는 사업을 하기위해 전재산을 투입 한 것 아닙니까?

의의있는 사업이 무엇일까 할 때 정환옥씨가 방송사업을 권유 했고

김 상용사장님은 그 것을 혼쾌히 받아들인 것인데 회사 운영 목표를 정하는

 과정에서 한꺼번에 회사 이름도 짓자고 했어요, 운영 목표는? 이 물음에서는

 ‘시민에게 건전한 문화를 보급합시다‘ 했고 ’회사 이름은?‘ 하니까 정환옥씨께서

방송을 통해 문화 창달을 하는데 바로 이 문화의 창달은 국가 발전을 위해서도

 크게 기여 할 것이고 시민들도 문화의 긍지를 내 세울 수 있는 것 아니냐?

그러니 “문화방송 이라 하면 되겠네”‘ 해서 그 자리에서

곧바로 지어진것이죠

 

 

 

 

이 성; 어떻게 그 내용을 알게되셨어요?

 

전 응; 아 그 당시 전파가 나가기 전이라서

김 상용씨하고 정 환옥씨는 바삐 만나고 있을 시기였어요.

 나는 볼일이 있어서 때 마침 그 곳을 지나다가 들르니까 두 분이

그 말을 하고계 셨기 때문에 기억하죠. 정 환옥씨는 광복동에서

전파사를 하고 계셨기 때문에 그 곳으로 김 상용씨가 가서

 방송국 설립 의논을 하곤했어요.

 

김 능; 그렇게 중앙동 작은 건물에서

시작된 문화방송이 지금은 지역 이름만 달리

전국 MBC 네트워크가 되고 세계로 뻗고..

 

전 응 ; 그래서 이름이 지어졌고 영어로는

MBC 컴퍼니 Co, 로..

 

이 성; 오늘 날 MBC발전의 모태가

됬던 초창기 시절의 활동이 뿌듯한 기억이

되네요. 그런데 다른 분들은 제가 근무 때 직 ,

간접으로  부딫쳤는데   정풍송님은 서울에 와서 ‘

허 공’ 노래로 너무 유명해지신 걸 알았어요.

 

정 풍; 예, 그 때 저는 대학 입학 전이라서

방송국 음악부 협조 업무를 했었는데 새벽에

방송국에 와서는 피아노를 연습하고 들락 거리며

일을 하다보니 직접 대화 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이 성; 네.. 그 후 세월에 이렇게 함께하는

 시간으로 정이 싸여가고 있는데요 부산 문화방송을

생각하면 아련한 감정이 생깁니다. 그리 김영효님은 아직도

우리 말 발음이 짧으신데 그 때는 더했어요. , 예를들면 ‘쌀’을 ‘살’

‘..그런데.. 를 그른데.. 하는 것을보고 재일 교포인 줄알았죠.

 

 

김영효님

 

 

김 영; 재일 교포는 아니고, 어렸을 때

일본에서 살았는데다가 (살은데다가)ㅎ ㅎ.. 해방

후에 귀국했는데 성격이 내성적이고 일본책으로 공부를 해서

 일본에 대해 좀 알지요. 그 때가 일본의 프로 야구가 막 시작이되서

 일본 방송을 많이 들었고   ‘라디오 브릿지’도    그러면서 아이디어가 떠

올랐습니다. 어떤 때는 발음이 잘 안풀려서 콤플렉스가 있기도해요. 한번은

이 발음 때문에 혼자서 얼굴이 빨개진 적이있었어요 어린이 퀴즈프로그램을

 할 땐데 김 부영씨가 음악 지휘도했고  패널도 있고한데   공개방송이 시작 될

때까지 패널 두 사람이 안오는거예요. 그 때는 성우도 없었어요. 하는 수없이

사회를 보는 윤 미자 아나운서와 둘이 패널로서 심사 평을 했고 나중에

방송 나올 때 라디오 앞에서 저의 사투리 섞인 짧은 발음을 들으니까

무안해서 얼굴이 확근 거렸던 생각이 않잊어버려져요

 

정풍; 아닙니다. 김 선배는 얼굴도

에쁘장하시고 체구도 아담하셔서 잘 어울립니다.ㅎ ㅎ

 

 

 

 

이 성; 그 때 시사다큐 라디오 브릿지는

그 날 그 날 사회 쟁점을 다룬 프로그람이었죠?

 

김 능; 네, 최초 민간방송 이라서 참고 할 곳이

없었어요 아무래도 일본방송을 많이 듣고 좋은 프로그램을

어렌지 하곤 했는데 그때 그때 사회 이슈를 다뤄서 시민들과 의식의

소통을 도모하는 의도도 있였습니다. 그리고 그 프로에 애국가를 작곡하신

안 익태 선생을 만나서 인터뷰 내 보낸적이있는데 안 익태 선생은 바이얼린을

배우고 싶어서 미국 선교사를 찾아갔더니 한국에서는 음악공부가 어려우니까

일본으로 가라 해서 일본에 가 음악학교를 가니까 일본에서는 ‘네가

정말 음악인이 되려면 빈으로 가라’ 해서 오스트리아로가

작곡공부를 하게됬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정풍; 그 때는 일반인들도 KBS와

일본 프로야구중계방송을 듣는 사람이

 많았었는데 문화방송이 생긴 후에는 재미있고

좋은 노래가 많이 나온다고 길에가면 스피커,

집에서도 거의 엠비씨가 고정이었어요

TV도 없고 라디오 천국이었죠

 

김 기; 그래서 저는 프로그람 때문에

좋은 노래 구한다고 광복동 다방을 많이 다녔어요.

 방송국에는 없는 레코드 판이 인기있는 다방에서 먼저

흘러나오니까 일부러 커피마시러 광복동 ‘청우

’ 다방에 가서 많이 빌려다 틀었어요

 

이 성; 방송국에서 자금난이라서 사 대지를 못한것이군요.

 

김 영; 자금난 하니까 생각이나는데

이 용태 PD가 민요강산을 할 땐데 지금은 고인이

 되신 명창들 박 초월 묵계월 이 은관씨등을 모셔다가

녹음을 하고나니 응당 잡음이 들어있고 간격이 너무 긴 것이

 있지 않습니까? 편집은 엣 날 구식 편집기, 높이는 1미터 정도에 폭이

넓은 기계에다가 테프를 걸고는 서서 틀어 가면서 잘라내야 했죠. 그 때

창업주 김 상용 사장님이 지나가시다가 본 거예요. 죽 죽 테이프 잡아당겨

 몇 번 끊어 내는데 한 30초정도 잘라내더라고요. 그 모습을보면서 “저놈의

새끼들 내 재산 막 끊어묵는데이-” 하는거예요.. 몇 사람이 보고서는

 소리도 못 내고 웃은생각이 납니다. 달러가 얼마나 귀한

때였습니까 그 시절 우리나라 영화도 필름 아끼느라

 여러가자 에피소드가 많이 있죠..

(그림)1

 

 

이 성; 돈은 대야하고 돈은 없고..

웃지 못 할 지난 현실이었습니다.

 

김 영; 환경이 그럴 때예요..

11월 연수 마치고 회사에 다니는데 12월

연 말 때 김 전무님이 직원들 월급주어야 하니까

광고비를 선불 해달라고 광고주에게 애원하는 모습도있었고

직원들이 출근해도 책상이 다 마련되지 않아서 총무, 업무, 편성

아나운서들이 양 쪽에있는 벤치에 일렬로 앉아 있다가 책상이 나면 가서

 원고도 쓰고 전화도 하고 ........ 이 성;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하여튼

 창업주 김 상용사장님은 자금 대느라 피가 말르셨겠어요. 그렇게 당분간

근무하다가 아나운서실은 삼층으로 옮겨갔어요. 책상은 하나였던

것같고 다같이 소파에 앉아 있다가 공개방송 때는 스튜디오나

 2층으로  갔는데 당시 가요계의 원로들도

공개방소 때 많이 뵜는데요..

 

최 광; 네 원로로는 남 인수 고 복수

황금심 백 설희 씨등 그리고 부산 출신 (고)김상국

방 태원 김 향기 정 훈희 은방울 자매 남 백송 최 갑석

 박 애경 정 향 등이 있는데 고인이 된 분들이 많이 있고요

원로 이름을 대다보니까 일화가 하나 떠오릅니다. 당시 극장 쇼를

 남포동 동명극장에서 할 예정이었었는데 불이 나서 범일동 3.1극장에서

공연을 했다가 관객이 없는 바람에 묵고있던 여관에 가수들이 잡혀있다는

 정보가 들어 왔어요.   그래서 문득 생각하기를 공개방송에 모셔 올려면 돈도

 더 들고 섭외도 어려운데 ‘잘 됬다, 모셔오자’ 해 가지고 그 여관엘 찾아갔죠.

주인을 만나니까 밀린 숙박비와 밥 값을 한꺼번에 내지않으면 못 내보낸다는

 거에요. 그래 “얼마요?” 하니까 “얼마..” 머릿속으로 공개방송 출연료를

생각하니까 모자라는 거예요 “당신, 쇼가 흥행이 않되서 이렇게

됬는데 이 사람들 잡고만 있으면 뭐 합니까 좀 깎읍시다.

 

“ 얼마나요?” “60%로 합시다”

“좋소” 된 것이거든요? 그래서 모셔다가

하루에 공개방송 3회분을 하느라고 지금은

고인이 된 최 창식씨아나운서가 ‘히트 ! 퍼레이드!! 를

세 번이나 외쳐치느라 고생하고 가수들도 땀 뺐죠.

 

김 기자; 그래서 그런 돌발 상황으로 공개 홀

 배정 시간이 잡혀 먹혀버면 한 밤의 멜로디는 허 영철

악단과 공개 홀에서 경음악 연주 녹음을 해야되는데 할 수

 없이 전속 밴드하고 엔지니어를 FM CAR 에 태우고 영도

다리 건너 ‘야광’ 댄스 홀에 가곤 했었다니까요.

 

이 성; 영도다리 건너 야광 댄스홀..

대중가요 노래제목같네요 ㅎ ㅎ 그리고

제 생각인데요 정 풍송씨의 ‘허공 ’ 가사 첫 구절

‘꿈이었다~~고 · ·생각 하기엔 너무나도 아쉬움 남아~~·.‘

하는 작사의 의미를 우리는 다 알고있는데 많은 분들은 작사

의도가 사랑의 안타까움으로 이해 하며 부르는 것같아요

 

정 풍; 그런 것 같습니다,

 실은 가사는 5공화국 탄생 전에 썼고

 발표는 5공 말에 했는데 당시 군사독재가 끝나고 민

주화가 되겠지 하는 생각으로 가슴이 설레일 땐데 12,12사건

5.17이 터지면서 민주화 꿈이 허공에 묻히는 것을 보고 ‘너무나도

 멀어진 민주’ 라고 하고싶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는 없었고 당시

 공윤심의 위원회에 검열 받으러 넣을 때 ‘너무나도 멀어진 그대’ 라고 고쳐서

 넣었죠. 검열 인들이 혹시 ‘민주’라고 눈치채지 얺을까하고 가슴 좋였었습니다.

 제 주변 가까운 친구들은 당시 그런 뜻으로 많이 불러 주었고 그 후 가사에

 얽힌 얘기를 뜸뜸이 하다보니 이제는 많은 분이 당시 제 마음을 알아

주는 것같습니다. 녹음은 85년에 조 용필씨가 했습니다.

 

이 성; 여기 이 사진(박 정희, 전응덕)이

어떻게 제손에 들어와서 지금 껏있는지 모르겠는

데요. 오늘 모이는 날이어서 갖고 나왔어요.

 

 

 

 

전응; 참 오래전군요.. 이 때가

아마 1962년 봄에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이

초도순시 차 부산에 왔을 때 부산 수산물 검사소를

 방문 했을 때였나보네요...김 능; 저도 취재갔을 때 기억이

 납니다. 그 검사소에 오징어가 잔득 싸여있었어요. 박 의장이

오징어를 한 마리 들어 보이더니 “오징어를 말릴 때 머리에

구멍을 뚫고 말리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이유는 오징어도

조상 제사에 오르니 구멍 뚫린 것은 보기에도 흉하지

않는냐.. 고 반문하는 말을 들었어요.

 

이 성; 뒷 쪽에 차 지철씨도 보이네요

 

김 능; 그리고 전 응덕 과장님은

다른 내용으로도 인터뷰 할 일이 있어서

제가 어깨에 메는 녹음기들고 따라가서 녹음한다고

진땀 뺀일이 있었어요 왜 아이스 케키 통이라고 우스갯소리

 하지않았습니까 녹음 테잎 돌아가는 것이 플라스틱 판 속으로

 다 보이지않아요? 인터뷰 시작되니까 딱 눌렀지요.. 아, 근데 이것이

 돌지를 않는거예요.. 그래서 말은 시작 됬고 방법은 없고 눈치를 않주기위해 .

들고 있던 신문지로 슬그머니 녹음기를 덮고는 녹음 시간을 마쳤능거라예.. 그래

녹음이 끝나고 나니 이 후락씨가 “언제 방송이 나갑니까?” “저녁 7시부터 8시 사이에

 나갑니다”고 답을 하긴 했는데 방송이 나간 후에 이 후락씨로부터 나를 찾는 전화가

 왔어요 마음이 덜컹하긴했죠 “네 김 능홥니다.” “아 그. .그런데 (이 후락씨는

 말을 약간 더듬는 습성이 있었습니다)바..방송 들었는데 장군 말씀이

아.않나오던데요?” “ 아 / 아까 나갔는데 못 들으셨습니까?” “?

?” 이렇게 얼버무려 넘어 간 일이있었어요. 웃음

 

 

이 성; 참 그런 낡은 방송기자재로

3,15 4,19 취재 다니느라 늘 긴장하셨겠어요.

 

김 능; 그 것도 그려려니와 그 때는 무차별 총탄이

 날아다니는 속을 목숨 걸고 뛴 것같슴니다. 돌이켜 생각

해보면 어떻게 그런 용기가 났었는지. 하긴 중역실에서도 적극

 협조 해주어서 겁 없이 뛰었지 제제를 가했더라면 사진같이

 생생한 내용이 전파를 타지 못했을 겁니다.

 

이 성 ; 기자는 몇 분이었죠?

 

김 능; 전부 다섯사람이었습니다.

이 상철 조 재필 박재영 김 능화 강 광윤등이었습니다.

 

이 성 ; 그 적은 인원으로 뉴스 교양 스포츠등을

 다 카바했어요..그렇죠?

 

최 광; 아 그래서 마산 의거 때는

 음악PD인 나도 차출 되지않았습니까..

그 때 4월 중순이니까 진해에 벗 꽃이 만발 할

때였어요. 공개방송을 진해에 가서 하고있는데

정 환옥전무님이 급히 나를 찾는다는거예요.

 

“네, 최 광민입니다.”

 

“채(최) 강(광)미(민)이야?”

 

“네, 접니다.”

 

“지금 가수 몇 명 남았어?”

 

“두 명입니다.”

 

“니 지금 빨리 중단하고 마산으로

넘어 가레이_!” 그래 허겁 지겁 마무리하고

마산으로 갔죠. 진해에서 마산은 많이 먼 거리는아니고

그 때 가보니까 학생들 소요사태가 폭동으로 변하고 있었어요.

김 주열 학생의 눈에 수류탄이 박혀서 물 위로 떠 오른 것을

시민들이 보고 너도 나도 뛰쳐나와 학생들 의거에

합류하는 현장이었어요.

 

전 응; 그 때 그런 현장의 모습이

 생방송으로 나가니까 당국에서는 당황했고

 “누가 문화방송을 허가 해줬느냐고 책상을 쳐봐도

 뒤 늦은 일이었고    당국도 3.15 4.19를 겪으면서

 방송이 언론의 역할을 하는 것을 깨닫게 됬죠.

 

최 광;; 그 때 정 환옥 전무님이

진두 지휘 할 정도로 윗 분들이 소신있게

밀어주었고 안 성수사장님도 정의감을 갖고 뚝심있게

열성을 갖도록 격려해 주었습니다. 않그렇더라면 아무리

하고싶어도 모두 역량을 발휘하지 못했을겁니다.

 

김 능 ; 네 그렇죠. 4.19당시

자유당 독재정권의 최후 발악을 저지하는

 방송을 계속한 것은 누구보다 안 성수 사장님과

정환옥 전무님 그리고 전응덕 보도과장님이 뒷받침

해주셨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만일 이분들이 경찰

검찰의 협박에 넘어갔더라면 우리나라 정치 상황

또는 역사는 달라졌을겁니다.

 

전 응; 내가 보도과장으로서 역할을

다 할 수있었던 것은 부하들이 잘 따라주었기

때문이고 언론인으로서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는

 사명감 때문이었죠.

 

김 영; 오늘 날 부산 MBC가 존재

하게 된 것은 60년 마산 3.15와 4.19혁명을

성공 시키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점입니다. 그로인해

아까 말씀하신 바와같이 방송이 언론기관으로

확실히 자리를 굳히게되었지요.

 

김 능; 부산 MBC 50년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입니다. 바로 특기 사항이예요

 

이 성; 그 당시 건물 안 팎으로 사복 형사들도

 어찌 할 바 모르고 분주히 들락거렸던 기억이 납니다.

그 적은 인원으로 큰 일을 해내셨군요. 급히 들어오는 뉴스

 많이 읽었고 기자는 원고를 다시 한 번 훓어 볼 여유도없이

 휘갈겨 쓴 원고지를 그대로 스튜디오에 던져야 할 정도로

時急과 흥분의 보도였습니다. 그 후에 최 광민 님은

 마산 의거의 노래를 만드셨죠?

 

최 광; 현장을 목격 했고 학생들의 뜻을

 기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안 성수사장님께

품위를 올렸고 마산 시민 극장에서 발표회를 했어요.

그 후 매년 4.19때마다기념 노래로 불리는 걸

로 알고있습니다

 

이 성; 아유 _ 그 때 얘기 나오니까

가슴이 후끈거리네요. 그런데 정풍송님은

 식욕이 아주 좋으시네요..

 

정 풍; 네 저는 음식이 나오면

않남기고 다 먹습니다. 지구 온난화의

원인이 음식 쓰레기가 심각하답니다. 환경

단체중에 음식 쓰레기 않생기기에 참가해서

 열심히 실천하고 있습니다.

 

이 성 ; 지구 온난화 하면 정신이

번쩍나요. 너무 가까이 온 현실같아서요.

참, 아까 김영효님이 순대국 얘기했었죠?

 

김 영; 네 그 시절 추억이 떠오르니까

지금도 침이 도는 순대국이 생각납니다. 방송국

 오른쪽으로 가면 당구장 옆에 조그마한 순대국집이

있었어요.순대는 쏙(속)이좋아야 맛있는거아닙니까 양념한

숙주나물울 듬뿍넣고 매콤하게 끓여팔았는데 자주 먹으러

갔습니다. 부산에만 가면 꼭 들러서 사먹었어요.

 

김 기; 지금도 있습니까?

 

김 영 ; 한동안 있었는데 성공해서

자리옮겨 큰 음식점하다가 계가 깨져서 뭐..

어떻게 할 수없었나봐요.

 

김 기; 그 계라는 것이 잘 되면

보약이고 않되면 망쪼예요...

 

이 성; 정답입니다. 그리고 정규 프로그램중

연 말 가요대전이 인상적이었는데요..

 

최 광; 네, 다 달이 일등한 사람들의

 실력 겨루긴데 당시 자장면 한 그릇이 300환

인가 할 때 1등 상금이 100만환이니까 .. 아마 요즘

화폐  가치로는 1억원일거예요 그러니 연 말이되면 그

화제로 해가 뜨고 해가 질정도로 관심이 많았습니다.

 

김 기; 그 때의 진로소주 회사도 크지 않았을 텐데요..

 

최 광; 네 않컸어요, 상금 협의하러

 번 갔었는데 사무실이 하나 있고 옆에

 부속 창고가 하나있었는데 한 백평정도로 보였습

니다.그런데 오늘 날 발전상을 보면 대단하지요?

전 국민의 진로소주가 된 것같아요.

 

이 성; 야 야 야 야 야 야 차 차차하는

 가사는 손 권식씨가 썼는데 작곡은 누구입니까?

 

최 광; 당시 경음악 단장 허 영철씨입니다.

 

정 풍; 아마 최 선배께서 당시

경음악 단장을 이 봉조씨로 교체했더라면

 허 영철 씨는 대 작곡가가 되셨을 겁니다.

그 분은 대단한 작곡가의 기질을

 가지셨던 분입니다.

 

이 성; 섹스폰 연주자 이 봉조씨는 어떻게

 문화방송과 인연을 맺었는데요?

 

최 광; 어느 날 전화가 왔어요.

‘나는 5인조 밴드 악단장인데 그 요즘 허 영철

악단의 연주가 구식이니까 자기의 연주를 한 번 들어

보라는 거예요. 그래서 일단 들어 보자고 했고 들어보니

당시로서는 정말 젊고 연주가 뛰어나더라고요. 그 후 공개 방송등

경음악 프로에 종종 출연 하게 됬죠. 그렇게 이 봉조씨의 방송국 출입이

잦아지던 어느 날 전속 경음악 단장 허영첳 씨가 차를 한 잔 하자고

하더니 자기와 이 봉조씨를 교체 할 계획이냐고 묻는거에요.

그래서 아니니까 다른 생각 말고 현재처럼

함께 일 하자고 했어요.

 

이 성; 작고 하신지 꾀 오래됬지요?

 

정 풍; 네, 오래됬습니다. 그런데

그 분 빈소에서 저의 30년 전의 감사한 일을

안 것이 있는데요. 딩시 새벽에 피아노 연습을 하러

가니까 매일 열려있던 스튜디오 문이 잠겨 있더라고요.

그래서 ‘어쩌나..’하고 서성이고 있는데 유 창굉 총무 과장님이

 오시더니 “너 연습 할 때는 나한테 와”하셔서 그렇게 했는데 그 때마다

문을 열어 주셨거든요? 그런가 보다고 연습은 계속 했는데 전문 연주인들이

녹음을 하려고 건반을 두드려보면 이게. 음이 않맞는다고 자꾸 조율을 하라고

 하니까 조율비용 아끼느라고 잠그라는 명령이 있었대요.     제가 팔 힘이

얼마나 셌겠습니까 마구 두드리며 연습을 했을테니 그럴만도 하죠.

유 과장님이 몰래 열어 주셨던 거라고 최 동섭 총무님이

옛 얘기를 들려주더라고요.

 

이 성; 조용히 돕는 고마운 손이셨네요.

물자 부족은 피아노 한 대뿐 만이 아니었죠?

 

김 능 ; 그 때는 차량이나 녹음기도

돌아가며 쓸 때도 있었어요.. 급 한 현장에는

 찦 차 를 갖고나갔는데 나는 차 신청했다가 없을 땐

 버스를타고 녹음하러 나가라해서 .. 그 때 부산에서 구포까지는

 꾀 먼 거리였어요. 한 해, 논 농사. 밭 농사가 홍수 피해가나면 어찌

됬는지 녹음기 메고 논 길 밭 길을 취재를 하곤했는데 어떤 때는

 Dadge 찦차를 타고 갈 때도있어서 취재하고 오는데 고장이난거

예요. 방송시간 대느라고 알마나 헐떡거리고 들어왔는지..

 

최 광; 그 때는 중고 기계를 사다가

엔지니어들이 손을 많이 봐서 썼고 차량도 아마

중고를 샀을겁니다. 모두가 돈이 귀한 때라 직원들도 한달

 점심을 근처 식당에서 먹으면 월 말에 식당 주인들이 손바닥 안에

들어가는 조그만한 수첩을 들고 우루루 몰려와서 돈 받으러

아래 위층으로 사람 찾아다니곤 했죠

 

김 영; 그래서 옥신 각신 하는 모습도

종 종 보였어요.. 어떤이는 꼼 꼼 해서 먹고 와서는

 책상 달력에다가 표시를 했는 데 왜 더 많느냐? 며 실랑을

하기도하고..이 용태씨는 당구를 좋아해서 그 때가 당구가 시작

되는 시기였거든요 방송국 오른 쪽 2층에 다방 있고 그 옆에 조그마한

 당구장이 있었어요. 유일하게 당구외상 받으러 게임아가씨가

 오곤했습니다. 다 정겨운 옛그림이예요.

 

 

김 영; 진로소주 CM송도 허 영철씨죠?

 

정 풍; 네 그렇습니다

 

이 성; 저는 공개방송 때 허 영철씨,

이 봉조씨 두 분과 많이 일했고 훗 날 가요계에도

큰 별 가수가 많이 나왔어요.

 

최 광; 네.맹꽁이 타령의- 박재란

노란 샤쓰의 한 명숙 현미. 밤안 최 숙자 삼다도 소식 .

 ?처녀 뱃사공? 곽 순옥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 팝 송

가수로는 패티 김, 박 형준, 유주용, 현미 씨 등이 있었는데 정말

노래들을 잘 불렀지요..이 성; 패티 김의 파드레를 들을 땐 폭포가

 흐르는 것 같았어요 그리고 그 시절 공개 홀 못 잡을 때 김 기자씨는

 야광 댄스 홀 말고 도 어떤 곳을 다녔어요? ㅎ ㅎ

 

깁 기; 네 FM CAR 타고 초등하교

다니면서 노래자랑을 할 땐데요 그 시대

동요로는 ‘우리 산, 우라 강 같은 노래가 있었고

 상품으로는 연필 공책같은 것이주었습니다.

 

이 성; 요즘 같으면 게임기나 노 트북이였을 텐데. 웃음

 

김 기; 그럴 겁니다. 그리고 참,

OK, Go TOP 이라는 프로그램,기사와

차량에 대한 대상 방송이 있었는데요. 희망 곡

엽서를 받아야 되는 데 처음이라서 엽서가 않오는 거예요.

그래가 버스 다니는 큰 길에 나가거나 방송국 앞에 서서 택시에서

사람 내리면 다가가서 ‘..이만 저만 하니까 좋아하는 가요 한 곡 신청

하라하고 ’ 몇 시에 나가니까 들어 보시라며 계몽? 까지 하면서 며칠 하니까

 엽서가 들어오기 시작하더라구요 아. 참 방송 실수로는 이런 일도 있었어요

‘노래의 날개 위에라는 음악 프로그램이었는데 남자 아나운서였어요.. 방송국

 재정이 않좋으니까 좋은 판도 부족하고 해서 어떤 때는 판의 앞 면과 이어서

뒷 면의 노래가 나가야 하기 때문에 우리끼리 싸인주는 글자로 괄호 열고 ‘

 레코드 판을 뒤집어야 하니까 멘트를 천천히 읽어 주세요’ 썼는데

 아니 노래 끝난 뒤 그 멘트부터 읽어 내려가지않아요? 얼마나

당황하고 웃었던지.. (우리는 다 함께 웃음으로

 뒤집어졌습니다)

 

최 광; 정말 레코드판도 귀했지만

그 당시 방송국에는 미국 LP 판이 한 이천장

있기는 했습니다. 그런데 이 판들이 클라씩이 아니고 거의

종교음악이어서 활용도가 극히 빈약했고 정말 레코드 판 구하는라

애 많이 썼습니다. 그 때가 78회전 SP시대. 33회전 LP레코드 시대로

 오는 과정인데 그나마 겨우 골라서 틀면 잡음이   어찌나 나는지 음질이

엉망이어서 도저히 방송을 내 보낼 수 없는 거예요.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부산의 레코드 소장한 분들을 아홉분을 소개 받아서 일주일 에 두 번정도

그 분들의협조를 받아가며 내 보내고 멘트 끝에는 ‘이 곡은 아무분의 협조’

였다는 말 사례를 하곤했죠. 그렇게 해도 레코드판 이 부족하니까

USIS 미국 공보원을 교섭해서 새로 나온 LP판을 한 번에

한 20장씩 발려다 쓰곤했는데 정말 고생이 많았어요.

그래서 음악프로가 한 70%되니까 연에계

식도 넣고...

 

이 성 ; 기억에 남는 취재는요?

 

김 능; 요즘 간통죄는 어떤지 모르겠는데

 옛 날에는 유치장가고 그랬지않았습니까 최 무룡씨하고

 김 지미씨하고 떠들썩 한 뉴스가있을 때 마침 유명 영화인들이

산에 극장 공연 내려온거에요. 녹음기 들고 취재를 나갔어요.

노 경희, 윤 인자, 도 금봉씨등이 왔어요.   그래서 연예계의 반응을

 알고싶다며 도금봉씨에게 “마이크 한 마디입니다, 말씀 좀 해 주십시요”

했더니 “사랑은 자윤데 무슨 문제야!” 하면서 저 쪽으로 가고 윤 인자씨에게

다가가 “꼭 한 마디만”하니까 “아이 창피해! 않 해!”하며 비켜 버리고..

노 경희씨에게 “꼭 한 마디만!”했더니 “전체 배우들에게 창피하다”고

했어요. 그 말만 방송에 나간거죠. 그랬더니 동료들이 그 방송을

 듣고 노 경희씨에게 핀잔을 많이 주었나봐요.    방송 후

나한테 전화를해서 막 항의하고 한 기억이나네요...

 

이 성 ; 아나운서는 그런 애로가 있는 줄도

 모르고 스튜디오에서 편하게 진행을 했네요.. 매우

늦게나마 그 때의 노고를 치히합니다. 웃음 그 일층 시절

사연도 많은데 다른 집기류는 어땠는지 기억 나시는대로 ..

 

김영; 개국 준비 서두를 때 입사직원들이

출근 하면 책상 걸상이 준비가 않되서 일층에

 벤치를 3갠가 놓고 업무 직원 프로듀서 출근 하는대로

 일자로 앉아 있다가 책상이 나면 가서 원고도 쓰고

 전화도 하고 그랬죠.

 

이 성 ; 하여튼 창업주 김 상용 사장님은

자금 대느라고 피가 말르셨겠내요.

 

최광; 선풍기도 스튜디오 끝 구석에 한 대

돌아가고 너무 찌는 삼복에는 큰 고무 다라이에다가

얼음 한 판 갖다 놓으면 밤 숙직 때 뉴스 하는 아나운서는

 얼음에 식힌 세수 수건을 어깨에 두르고 원고를 읽어 내려

갔죠..최 광; 얼음 수건을 그렇게 쓰면 사실 에어컨

보다 더 시원하답니다 웃음

 

이 성; 송신소는 어디에 있었죠?

 

김 영; 송신소요? 광안리에 있었는데

시험 전파 쏠 때 총소리 아세요? 전화가 준비 되기

전인가 봐요 처음 방송이 시작 할 때는 애국가부터 나가고

사가 나가고 하는데 김 상용 사장님이 늘 첫 방송부터 들으시는데

5시에 애국가가 않나오는거예요.   ‘이 거 방송 사고구나!’ 곧바로

 기사데리고 광안리로 가는데 총소리 들릴 만한 지역에 도달 하면서

 ‘탕 탕 탕’ 공포탄을 쏘신거죠. 엔지니어와 아나운서가 화들짝

 놀라 깨서 테이프 걸고 야단났던거죠.

 

이 성; 그런데요.. 우리들은

그런 일들을 휘_드 백 해서 들을 땐 재미

있는데 젊은 사람들은 옛 날의 이슈에 대해선

그 건 그 때고..하는 경우를 가끔 경험해요.

 

김 능; 아쉽죠. 과거 없는 현재는 있을 수

없지요. 요즘 젊은이들은 그런 점을 소홀히 하는

 것같아요. 이 기회에 특별히 하고싶은 말은 MBC의 산실인

부산 중구 중앙동 옛 사옥을 사들여 기념관으로 보존 하기를

 바랍니다. 구입 자금은 전국 MBC에서 자금을 모아 더 늦기 전에

실현하기를 아울러 바랍니다. 혹 서울 MBC에서 자기들이

최고라며 도외시 할 지 모르겠으나 실제 MBC는 부산

에서 출발했으니 異論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 성; 굉장한 발언을 하시네요..

김 영; 참.. 별 보고 나와서 별 보며 일 하고

 

김 능; 옛 날 그 열악한 환경에서도

언론의 사명을 다 하며 건전 내용으로 일관하던

그 때를 생각 하면 지금은 너무나 좋은 환경이라서

오락에만 너무 치중 하지 말고 좋은 방송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 합니다.

 

전 풍; 저도 그렇게 생각 합니다

 방송은 무의식 중에 국민에 큰 영향을

 끼치니까 귀한 전파에 어떤 유익함을 실어서

내보내면 좋겠고 젊은 방송인들은 이기적인

 어떤 영합을 거부하고 국가관도 깊이

갖이면 좋겠어요.

 

김 영; 말 하자면 정의감

건전 문화 창달에 투철하면 좋겠네요.

 

김 능; 우리가 역사에서 배우는 것은

 엄연한 정의 구현을 해 보겠다는 시대 정신을

초월 하는 것이기때문입니다.

 

 

 

 

이 성; 그 시절로 돌아 간 것같이 행복합니다.

우리 가능한 한 젊은 마음을 잃지 말고 후배들에게

 애정 담긴 격려의 마음을 길게 갖어야지요.전 응; 전 재산을 털어

 창업 정신으로 건전 문화 창달이라는 기치를 올려준 김 상용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부산 MBC입구에 흉 상을 세우기까지 뜻을 합해주신 분들께 감사한

마음이 듭니다 그리고 늘 마음에 아쉬운 점이있는데 당시 정 환옥 씨라는 분이

 않계셨더라면 과연 문화방송이 탄생 할 수 있었을까... 하는..그 功勞가 큰 무게로

 오고있어요. 50년 전에 두 분의 소박한 대화로 시작 된 한국 최초의 민간 방송이

 탄생 될 때 언론의 사명을 해야 하는 큰 뜻이 잉태 됬었다고 봐야 하죠.

 

이 성; 네 생각은 생각을 낳고 하는데

오늘은 가볍게 시작 된 얘기가 많은 思念이 떠 오르게

 된 것같습니다 제가 말을 맺자면 이 모든 말에는 기본적으로

애정이 담겨 있다는 점과 대한민국이 존속 하는 한 MBC 부산

문화방송도 늘 발전적인 언론의 역할 속에서 개인의 보

람과 행복도 누리시기 바랍니다. 사우회 여러분 많이

웃고 건강하게 지내시기 바랍니다. 감사 합니다

  

 

 춘하추동방송에서 위 글을 보신

 이성화 아나운서께서 부산 MBC개국 무렵의

회고담과 감회 그리고  산 MBC 개국50주년 때의

 사진 한장을 사연과 함께 보내 오셨습니다. 부산 MBC는

 2015년 4월 15일로 56주년을 맞이했습니다.

먼저 사진입니다.

 

 

 

 

부산HLKU50주년 행사 때 사진입니다. 

뒷날 유명한 검사가 된 부산문화방송 안성수사장님의

아들 안광민님이 이성화 아나운서가 근무 할 당시는 대학생

이었는데 방학 때마다 내려와서 방송을 많이 들었다면서 HLKU50주년

기념햇사때 사진을 함게 찍었어요. 왼쪽부터 KU 방송초기 보도과장으로

 계셨던 전응덕선생님과 제가(두번째) 안성수 사장 아드님이신 안광민님이

 함께 촬영한 사진입니다.  오른쪽 끝 여자분은 저와 동기

부산 mbc 윤미자 아나운서입니다.

 

 

 

 

이성화님 (부산 MBC 개국 아나운서) 회고담  

 

 

글을 쓴 장본인으로서 위의 기사를

다시보니까 감개무량합니다.(고) 김상용사장님,

(고)김지태 사장님 의 모습이 희미하게 어른거립니다.

저는 철없는 20대 초 였고 정말 세상을 몰랐습니다. 개인적

으로도 막내여서 삶의 일선에서 일어나는 일을 전혀몰랐었지요.

그런데 이제 70 능선을 한참 넘고나니 걸어 온 발자욱이 눈에

보입니다. 짧게 당시의 감회 몇글자 올리지요.

 

김지태 회장님이 강당인지 어딘지

 모이라고 해서 간 일이 생각납니다. 사원

강의에서 들은 말이 (이럴 때 말씀 이라고 해야

 하는지 '말'이라고 해야 하는지 바른 말, 실천시민협의회장

 이팔웅님에게 조언을 듣고싶습니다.)생각납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 한토막이 아직 귀에 남아있습니다.

  

"나는 소년 시절에 길을 지나다 보면

 굴뚝에서 연기가 올라오는 것이 보이더라구요.

그 것을 보면서 '나도 나중이 크면 굴뚝에 연기를 내는

공장을 만들어야겠다 . .'이렇게 마음을 굳히고 . . 그 결과 . .

"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나는 산업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고

"이상하다. . . 굴뚝의 연기 . ?' 한 그 당시의 그 한토막이 기억에

남아 있었습니다.    세월을 보내고 나니 인생경험으로 이제는

 다른이에게 설명을 할 수 있는 자막이 머리에 나타납니다.

이런 것이 인생인 것같다고 느낄 때가 많습니다.

  

 한가지만 더 말씀드리자면 5.16 전 날 김지태 사장님 댁에서

잤는데 아침에 사모님이 저를 깨우시면서(엣날이나 지금이나 아침 잠이

 많아서요) "미쓰 리, 구테타가 일어났대요.' 나는 "?'이었죠. '구테라'를 22세

 처녀가 어떻게 알아듣겠습니까. 하여튼 이상한 말이고 해서 시청 앞에 가보니까

군 탱크며. . . 한마디로 해서 5.16 하면 나오는 사진 그 모습을 목격했답니다.

길어지는 것을 여기서 줄이겠습니다. 자막을 멈추면서 떠오르는 그림은 그 때 그 댁의

긴 마루를 닦기 위해 걸래를 집는 바구니를 보니까 새하얀 광목이 비틀어 짜여져

수북히 담긴 바구니를 보면서 내가 느낀 일입니다. "응? 광목이 걸레네 . .

옷 해입는 것아닌가?'       그런 후 세월은 여기까지 왔고 이장춘

춘하추동방송국 사장님 인연으로   옛 일을 추억하는 시간을

갖게 해주셔서 .해주셔서 감사한 말씀 올리고갑니다

 

 

 

유경환 (유카리나) 여사님

 

 

이런 꼼꼼한 기록들이

해가 갈수록 귀한 자료들이 될것이라

 확신합니다. 이미 가신분들은 가셨지만, 그래도

 아직 건강하셔서 이렇게 모여서 옛 방송국에서 일어났던

일화들이나 방송국의 발달사를 알 수있는 근거가 되는 자료들이니

기회 있을 때마다 듣고 기록할 수가 있기를 기대합니다. 어려운 시절

 MBC를 세우시고, 사원들에게 월급을 주기위해 애쓰고 다니셨을

김상용 MBC 설립자의 노고가 정말 크셨엤어요.

그런 희생이 있었기에 오늘의 MBC가 있는

거겠지요. 고마운 일입니다.

 

 

윤후현 (팔방미남) 선생님 글 

 

 

특별 대담 잘 보았습니다.

'내 고향 남쪽바다!'노래가 수평선

저 멀리에서 이곳까지 메아리쳐 들려 오는 것

같습니다. 이성화 아나운서님!은 저번에 관악 방송에

나오셔서 이장춘 사장님!과 대담도 나누시고 사장님!의 애창곡도

 들려 주셨지요.   오래된 기억들을 찾아서, " 부산 MBC 초기방송비화

특별 좌담회!"를 새롭게 재 조명 해 주신데 대하여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답글을 써 주신 이성화 아나운서님!은 망 80을 바라보는 연세(78세) 답지않게

 글 속에는 지금도 20대 청춘시절의 정열이 살아 움직이고 있는 것 같습

니다. 1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변함없이 점점 더 빛을 발하고 있는

춘하추동방송블로그!를 많이 많이 애용 해 주시고

참여 해 주셨으면 감사 하겠습니다.

 

저는 불과 2년 전에 춘하추동방송블로그!를

만났지만 마치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친구를 만난 것

 같이 오늘도 변함없이 오손도손 인연의 끈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소식 감사합니다. 이장춘 사장님!...

 

 

 

관련글 보기 영문자 클릭

 

 

부산 문화방송 HLKU 탄생의 역사적 의미와 초기방송, 전응덕, 최광민, 김능화, 이성화

http://blog.daum.net/jc21th/17782570

 

이성화 아나운서와 이장춘의 만남 관악방송 스튜디오

http://blog.daum.net/jc21th/17782541

 

부산 문화방송 mbc HLKU 최초의 라디오 상업 방송 김지태 김상용 정환옥

http://blog.daum.net/jc21th/17780116

 

사진으로 본 최초의 라디오 상업 방송 부산 mbc 문화방송

 http://blog.daum.net/jc21th/17780990

 

이성화 아나운서, 글 황인우 아나운서 한국 아나운서클럽회보 줌인

http://blog.daum.net/jc21th/17782277

 

방송인 전응덕, 광고단체 연합회 회장

http://blog.daum.net/jc21th/1778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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