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관영아나운서! 1980년 TBC동양방송이 마지막 깃발을 내리던 날 「뉴스 기상도」마지막 뉴스를 울먹이는 목소리로 들려주던 그 목소리에, 대한민국 서예문인화 원로 총연합회 회장에 취임했다는 목소리를 함께 듣고 계신다. 禹田 孟寬泳 맹관영! 그에게는 아나운서가 소중한 직함이지만 또 일생동안 지켜온 서예 문인화가로 살면서 그 분야의 최고 직함! 「대한민국 서예문인화 원로 총연합회 회장」자리는 그에게 최대의 영광이고 방송인들의 축복이기도 하다, 우전 맹관영, 대한민국 서예문인화 원로 총연합회 회장, 아나운서 맹관영! 아나운서로는 널리 알려졌고 서예나 문인화로 높은 평가를 받는 인물이라는 것은 알면서도 우리나라 서예 문인화계에서 그의 위상이 어느정도인지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늘 같이 지내는 방송인들도 그런 경우가 많고 필자 역시 그랬었다. 그러던 중 2014년 5월 29일 아나운서 클럽 모임에서 맹관영 아나운서가 「대한민국 서예문인화 원로 총연합회장」에 선임되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렇다고 쉽게 이해 될 수 있는 부문이 아니어서 그로부터 약 3개월이 지나면서 알아보니 그 자리기 실로 대단한 위상임을 일있다. 필자가 젊은시절 국전 초대작가라면 대단히 우러러보는 분들이었다. 국전에서 시상하는 최고의 상 「대상」을 두번이상 수상하던지 「특선」을 네번이상 수상해야 초대작가가 되었고 그 초대작가의 작품 한점이라도 갖게 되면 큰 영광이고 자랑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맹관영 아나운서가 그 반열에 있는 초대작가이고 서예, 문인화, 사군자, 통털어서 국가에서 초대작가로 인정해주는 3개단체 즉 미술가협회, 서에협회, 서예가협회 또 올해 새로 인정을 받은 서도협회까지를 어우르는 4단체의 65세이상 원로 예술인 들의 모임, 「대한민국 서예문인화 원로 총연합회 회장」에 선임되어 6월 23일 취임식을 가졌다. 예술작품을 돈으로 애기하는 것이 좀 그렇지만 우전 맹관영의 그 분야에서 위상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까해서 그의 그림값이 얼마나 되는지를 알아보았다. 시중에서 거래가 된다면 엽서 크기의 호당 100만원, 화선지 한장이면 보통 40호라고 하니 화선지 전(全)지에 그린 그림은 4,000만원이 된다. 그렇다고 시중에서 그의 작품을 쉽게 살 수 있는것은 아니다. 그는 그의 작품을 소장한 분들에 대한 예우로 시장에는 내놓치 않기에 그 그림을 구 할 수가 없다. 맹관영이 국전에 출품했다는 얘기를 못들었는데 어찌된 영문인가도 알어 보았다. 그의 서화인생은 길고도 길다. 어린시절부터 서예에 능한 아버지로부터 기본 필법 등을 배우고 중학교 시절 대(大)화가 이경배선생님을 미술선생님으로 만나 서에와 그림을 익히기 시작해서 오늘에 이르렀다. 石淵(석연) 이경배선생님은 일제강점기부터 이당 김은호선생님 등과 함께 미술을 해온 대가다. 우전은 나름대로 오랜세월 수준높은 서예를 하고 그림을 그렸지만 국전 등에는 출품하지 않아 사람들은 그 그림 수준을 잘 몰랐다. 그가 1997년 KBS정년 퇴직과 동시에 개인전을 열었다. 그때 그 개인전을 관람한 분들은 그의 작품을 보고 깜짝 놀랐다. 이런수준의 작품을 한 분이라면 국전을 거치지 않았어도 초대작가로 충분이 대우를 받을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러자 미협, 서협에서 서로 초대작가로 모시겠다고해서 초대작가가 된 것이다. "추대된 초대작가" 가 된 것이다. 이런 경우는 극히 드물지만 우전 맹관영은 이렇게 해서 초대작가가 되고 미술가 협회, 서에협회, 서예가협회의 65세이상 원로 초대작가들로 구성된 대한민국 서예 문인화 원로 총연합회 수석 부회장으로 재직 해 왔다. 그동안 총연합회 회장을 맡아오던 93세의 동강 조수호 (東江 趙守鎬)선생님이 그 자리를 물러 나시겠다고 하심에 2014년 5월 28일 임시총회를 열어 부회장 9명중 수석부회장으로 있던 우전 맹관영을 만장일치로 대한민국 미술을 대표하는 원로 중에도 원로모임의 회장 「대한민국 서예 문인화 원로 총연합회 회장」에 취임했다. 맹관영 아나운서! 그러고보니 오랜세월 여러 일을 많이도 해 오신 분이다. 1960년 대학교 2학년때 기독교방송의 성우가 되어 활동했고 1961년 MBC가 개국하면서 성우모집이 있어서 또 MBC 성우로도 활동했다. 음악에도 재능이 있어 합창단 지휘 등 음악활동도 했다. 1963년 ROTC 1기로 입대 군생활을 하고 나와서는 삼각지에 있던 상명여자고등 학교선생님으로 재직했다. 이때 주위분들로 부터 목소리가 좋으니 아니운서를 해 보라는 권고를 받아 1967년 TBC 동양방송 아나운서 시험에 응시했다. 자신이 없어 아무도 모르게 응시했지만 시험에 합격해서 TBC와 KBS에서 30년간의 아나운서 생활을 했다. 아나운서생활중 뉴스는 물론 널리 알려진 프로그램 장수무대, 유쾌한 응접실 등 대형공개방송을 오랬동안 진행을 보는동안 시청자들과 친근한 벗이 되었다. 화 보 위는 TBC아나운서 마지막방송 기념(1980. 11. 30)으로 촬영한 사진이고 아래는 통폐합으로 KBS에서 만난 아나운서들과 함깨 한 사진이다. 위 앞줄 왼쪽부터 박병학, 이장우, 원종관, 이정옥, 지영서, 이희옥, 최희선, 뒷줄 왼쪽부터 박성명, 맹관영, 이재명, 원종배, 이경숙, 서기원, ( ), 이영혜, 원창묵, 박광호, 아래사진 뒷줄 왼쪽부터 임건재, 황량, 송지헌, 원종관, 김영소, 이정부, 박기만, 김윤한, 이계진, 최윤락, 김영길, 허주, 김승한, 전우벽, 강성곤, 이천규, 임화숙, 유수호, 박영웅, 이규항, 윤성원, 김상준, 맹관영, 최평웅, 윤영미, 박용호, 박영주, 신은경, 원창묵, 최선, 지영서, 손석기, 강성희, 박경희, 황인우, 이미선, 서재원, 차경애, 홍승택, 정혜실, 김주환, 박병학, 정미홍, 임문택, 유애리 아나운서. 위는 1978년, TBC뉴스를 진행하는 맹관영 아나운서이고 아래는 1968년 TBC-FM "어느시인의 노래 "방송중에 촬영한 사진이다. 마르고 매서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1996년 KBS TV "서울 600년 서울 야화" MC를 하던때의 사진이다. 기독교방송 성우 시절 KY극장 녹음장면 좌로부터 전원주, 정근우, 유기현, 임옥영, 맹관영, ( ), 연출가 이보라 할아버지 사진님 글 안녕하세요 저는 22년전 초등학교때 캐나다로 이민을와서 어떻게 블로그 주인님과 연락해야할지 잘몰라서 여기에 글을 남겨요. 이 블로그에 1962에 돌아가신 저희 할아버지 사진이있어서요. (ky 극장 녹음장면 사진이요)..저희 엄마랑 할머니께 할아버지 사진을 인쇄해서 드리고싶은데 블로그에 사진이 너무 작아서 화질이 않좋아서요..혹시 더 큰 이미지 파일이있으시면 구할 수있을까 해서요. 감사합니다. HLKY 초기 성우 (미국의 소리 방송에서) 들이 함께 한 사진이다. 좌로부터 정건우, 맹관영, 임옥영, 한경돈, 정은숙, 김영배, 홍석진, 그시절 성우 교육을 마치고 준 수료증서를 올린다. 1960년 손으로 써 등사해서 거기에 이름을 쓰고 국장 도장을 찍었다. 50 여년전 우리의 자화상의 단면을 본다. MBC 성우시절 1960년부터 CBS 4기 성우로 활동하던 맹관영은 1961년 MBC가 개국하면서 성우를 모집할떼 응모해서 MBC개국성우가 되어 활동했다. 위 사진은 프로듀서와 아나운서등 MBC개국요원들이 성우와 함께 교육을 받으면서 촬영한 사진으로 앞줄 왼쪽부터 차범석, 피세영, 백수련, 뒷줄 왼쪽부터 세번째 원창묵, 한사람 건너 맹관영, 최응찬 한사람건너 김영옥, 김석옥, 맨 끈 나문희다. 맹관영의 합격증서지만 성함이 자견수라고 쓰여있다. CBS성우로 MBC에 응모하는 것을 허용치 않아 부득이 맹관영의 한자 일부를 따서 자견수로 응모했다고 해다. 1961년 말까지는 공식적으로 단기를 썼다. 맹관영의 1957년 고등학교 3학년때로 부터 1963년 ROTC 1기 육군소위 시절, 1967년 부인이 될 금계향과 꿈을 그리던 시절, 1991년 ROTC서울클럽 창립 기념식에서 금계향여사와 함께 한 사진. 1958년 대학생시절 그린 작품 "예수"로 종암장로교회에 기증작이다. 1974년 가을 이천 수광요에서 위는 상명여고 시절 1966년 4월 30일 서오릉에서 이경희, 신성님, 김복님, 박영애, 앞, 박금언 학생들과 함께 한 사진이고 아래는 1966년 합창부 연습하는 모습이다. 그 유명한 작곡가 김동진과 함께 서울합창단 고등부를 지휘하던 시절의 사진이다. 1992년 4월 미국 LA에서 흑인폭동이 일어나 한인촌이 잿더미가 되어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4.29폭동이라는 이름으로 가슴깊이 새겨져있다. 그때 KBS와 미국 교민회 주최로 대한민국의 인기 연예인들이 출연하는 대규모의 공개방송이 현지에서 있었다. 그때 그 공개방송을 위해 사회를 맡을 아나운서를 김동건, 맹관영 두 아나운서에 대해 투표로 결정해서 맹관영 아나운서가 선발되어 그 공개방송의 사회를 보았다.는 얘기가 있다. 맹관영 아나운서는 그때 '가요무대 PD가 담당했던 공연을 FM가요무대 담당 아나운서가 담당하게 된 것을 이색적인 일로 받아 들여졌다고 핶다. 위 기사는 스포츠한국 기사이고 아래는 그 공연 출연자 현철, 설운도그리고 사회자 맹관영 아나운서가 함께 한 사진이다. 1992년 여름 LA교민 위문공연 MC로 갔을때 가수 현철, 설운도와 함께 한 사진이다. 위는 1960년 성균관대학교 국문학과 회장시절 정능 야유회에서 앞줄 오른복 부터 최진원, 조윤재, 박종화교수, 뒷줄 오른쪽 네번째 맹관영님이고 아래는 맹관영 40세 되던 날 집에 모인 동창생들이다. 위는 정도 600년기념 1994년 "서울주제 서예 큰 잔치" 에 초대 출품된 작품으로 마마츄어 시절에 쓴 작품이다. 禹田 개인전 도록에도 올라있다. 1961년도 「성균」지와 「성대문학」에 실린 학생시절 맹관영의 단편소설 「미친것들」과 「더러운 것들」을 보신월탄 박종화 선생께서 맹관영에게 "현대문학" 응모 하라고 권했는데 「正午」문학활동을 하던 맹관영은 더디든 심사 받는데는 작품을 내지 말자는 결의에 따라 소설추천 심사위원장이었던 월탄선생의 권유를 거졀했다. 그때 선생의 권유를 따랐더라면 맹관영은 소설가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라고 했다. 아래 창작소설은 「성대신문」 제 273호부터 8회에 걸쳐 연재한 단편작이다. 2005년 제18회 「성균문학상- 월단문학상으로 개칭」시상식에서 축사하는 맹관영, 왼쪽은 조건상 성균관 대학교 문리과 대학장이고 오른쪽은 수상자 엄한정시인디다. 성균회보 제자를 새로 쓰고나서 "성균회보"는 성대 총 동창회 회보로 현재 20만 동문이 빋이보고 있는데 자전에서 집자(集字)한 제호를 30년만에 우전작품으로 바꾼 것이다. 이 글씨는 한국 서예의 대가인 여초 김응현 선생이칭찬해준 작품이기도 하다. 1977년 박순천 여사와 함께 한 사진 성균관대학교 전총장 변희용 출판기념회에서 앞줄 왼쪽부터 김영소, 손석기, 남우평, 이정부, 뒷줄 왼쪽부터 이계진, 황량, 김재영, 최선, 원종배가 맹관영 아나운서 생일날 함께 만나, 조건진 박영주 아나운서와 함께 1991년 KBS 59회 (59학번) 일본 여행길에서 뒷줄 좌로부터 김자규, 김창동, 윤용설, 최평웅, 이정훈, 맹관영, 앞줄은 부인들이 함께 한 사진 1992년 KBS 59회 (59학번) 제주여행에서 좌로부터 김자규, 이정훈, 이광주, 맹관영, 김무인, 임연택, 신광식, 최평웅, 김창동, 앞중은 부인들 1993년 제주 골프장에서 우로부터 맹관영, 금계향, 김영희, 최평웅, 윤용설, 이성옥 KBS 아나운서 송년회에서 촬영한 사진이다. 좌로부터 황수경, 맹관영, 김성은, 조건진, 진양혜, 김병찬 1985년 강화에서 바다낙시를 하던중 좌로부터 최평웅, 윤성원, 이정부, 고광수, 맹관영,박용호 아나운서가 함께 했다 TBC 아나운서 야유회 위 아래 사진은 제 49회 방송의 날 방송인들이 함께 한 산으로 위는 왼쪽부터 성대석, 박찬숙, 강민옥, 박승현, 김인규 KBS사장, 맹관영아나운서이고 아래사진은앞줄 왼족부터 정도영, 홍승택, 황량, 이종태, 뒷줄 왼쪽부터 김규홍, 이계진, 이장춘, 김명숙. 정미홍, 박민정, 박찬숙, 황인우, 채영신, 이혜옥, 윤영미, 맹관영, 전우벽, 이팔웅, 김상준 아나운서가 함께 한 사진이다. 김동건 방송 50년 기념회에서 만난 맹관영 김동건 아나운서 한국아나운서 클럽 전 현직 아나운서가 함께 한 사진이다. 번호따라 1.차인태, 2.김규홍, 3.맹관영, 4.박종세, 5.김동건(회장) 6.배덕환, 7.박영웅, 8.김상준, 9.김효석, 10.이형균, 11.원종배, 12.이현경, 13.박은경, 14.황인우, 15.박민정, 16.이혜옥, 17.이성화, 18.이승현, 19.정흥숙, 20. 강승화, 21.조항리, 22.김지원, 23.이각경, 24.유지철 안고 찍은 사진은 백일쯤 된 손주이고 옆에 붙인 흑백사진은 30년 시차의 아들 나섬의 100일쯤 된 사진인데 지금 보니 아들이나 손주나 얼굴이 같고 크기도 같아서 사진으로는 구별이 않되신답니다. 1971년 나섬 100일 기념 2000년 설날 큰딸 나래 내외와 1985년 제주에서 부인 금계향여사와 함께 맹관영의 어린시절 천성적으로 특출한 재능이 있었전 맹관영은 국민학교 5학년때 "모범전과" 창간기념 책 표지그림 공모전에 출품해서 당선되어 놀라움을 자아냈다. 그 표지 그림이 출판되어 세상에 나오자 맹관영에게 천재소년이라는 말이 붙었다. 1950년 6.25가 나던 그해다. 6.25와 더불어 맹관영 에게는 불행이 닥쳤다. 충청남도 아산군 배방면장이던 아버지가 반동분자로 몰려 아버지는 학살당하고 온 집안이 추방당하는 바람에 풍지박산되었다. 사라져 버렸다. 반동분자로 몰리고, 물론 오랫동안 이어오던 반장도 떨어 지고 모든 어려움이 한꺼먼에 닥쳐왔다. 공산군이 물러가고 다시 학교에 다니면서 공부는 여전히 전교 1등을 했다. 6학년 전교 1등으로 졸업하면서 충청남도 도지사상으로 「표준 한국자전」을 상품으로 받아 당시, 최초의 학교전체의 사전 소유자가 되었다. 1학년과 5학년만 2등을 했어도 항상 1등을해서 5년간 줄곧 반장을 했다. 빛나는 졸업장을 타신 언니께....! 1940년대 50년대 전교생이 울며 불렀던 국민학교 졸업식! 전교 1등을 한 학생에게는 도지사 상을 주었던 시절! 그 시절에 성적표와 상장, 상품 (포준 한글 사전) 참으로 귀한 것이기에 맹관영 회장님이 보존한 그때 그 사진을 올렸습니다. 붓글씨를 잘 쓰신 선친으로부터 어렸을 때부터 필법 등 기본기를 익였다. 그리고 이당 (以堂) 김은호 선생과 함께 활동한 충남 공주 출신 석연 (石淵) 이경배 선생이 피난 차 낙향해 고향인 온양중학교 미술교사로 부임 하셔서 좋은 스승을 만난 덕분에 소질을 개발하게 되었다. 1970년대, 그때만 해도 아이들이 태어나면 호적에 올리때 한자이름으로 올렸다. 이뿐이 라는 이름은 業紛, 길수라는 이름은 道水, 이런식으로 올리곤 했다. 그러던때 맹관영은 아이들 이름을 한글로 지어서 화제가 되고 또 그대로 호적에 올렸다. 그래서 한글집안상 상을 받기도 했다. 큰아이 나래는 날개의 얫말로 마음껏 날으라는 뜻이고 둘째 나섬은 「나서다」의 명사형으로 정진 하라는 뜻이며 샛째 나리는 백합꽃 처럼 향기를 전하라. 는 뜻이다. 맹관영 아나운서 근황 故 酉山 민경갑 선생과 작고하시기 3개월전에,어 느 전시장에서 찍은사진 아나운서로서의 맹관영, 우전 맹관영의 작품세계 등은 별도로 올렸기에 그 글을 연결 하는 것으로 대신한다. 관련글 보기 영문자 클릭 맹관영(우전) 서예문인화 작품세계, 대한민국 서예문인화 원로 총연합회 회장 http://blog.daum.net/jc21th/17782317 맹관영 아나운서 특집대담 febc 극동방송 양현민 아나운서 http://blog.daum.net/jc21th/17782276 그때 그 시절 방송비화 맹관영아나운서 생방송 박정희 대통령 하관식 http://blog.daum.net/jc21th/17782349 제9회 대한민국서예문인화 원로총연합회전 회장 맹관영 http://blog.daum.net/jc21th/17782339 TBC 동양방송 아나운서 이름(명단) 그때 그 얼굴들 http://blog.daum.net/jc21th/17782344 맹관영 (우전), 대한민국 서예 문인화 원로 총연합회 회장 한국아나운서클럽 http://blog.daum.net/jc21th/17782169 2023년 8월 맹관영
|
2023년 8월 맹관영
아나운서님께서 제가 함께하는
카톡 방에 남기신 글을 기록
보존을 위해 이곳에
옮겼습니다.
'방송인물'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승한 아나운서 뉴스, 해설방송, 대한뉴스, 대한늬우스 (0) | 2014.11.18 |
---|---|
이장우 아나운서 (3) | 2014.09.14 |
윤영중, 청자색음성으로 사랑받던 1950년대의 그 아나운서 (0) | 2014.08.15 |
김봉구 최초의 TV방송 아나운서 HLKZ (0) | 2014.07.07 |
원종관 아나운서 그때 그 목소리 (0) | 2014.06.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