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7년 2월 16일 이 땅에는 최초로 방송국 개국식과 함께 라디오전파가 발사되었다. 라디오전파가 정식으로 발사된 것은 이날이 처음이지만 방송을 준비한 것은 1924년 봄이고 시험전파가 발사된 것은 1924년 12월 9일이다. 이때는 방송국이라는 말 대신에 무선전화라는 말이 사용되었다. 이 무렵까지 어떤 형태로 방송국이 설치될지에 대해서 정해지지 않아 총도부에서도 방송을 준비했고 민간인들도 방송국 설립을 준비했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그 대표적인 것이었고 조선일보 에서는 총독부 시험방송에 이어 12월 17일부터 조선일보사에서 종로에 있던 우미관 까지 그리고 그 우미관이 장소가 좁아 소공동에 있던 경성회관까지 전파를 발사했다.
최초방송국 경성방송국과 조선방송협회
그 전파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동안 환호를 올렸다. 아무 연결된 선도 없이 사람소리가 들려오니 당시로서는 도무지 알수 없는 신기한 일들이 벌어졌다. 시험방송은 계속되고 경기도나 충청도로 옮기면서 그런 시험방송이 시행되었다. 사람들에게 방송이 이런 것이라는 것을 알리고 방송이 시행되기 전에 라디오를 보급 하는 등 여러 다목적 효과를 노린 것이었다. 그러는 과정에 차츰 방송국 설립 윤곽이 잡혀 가면서 시험방송이 정규방송처럼 실시되었다.
1926년에 이르러 방송은 일본에서와 같이 사단법인체로 운영된다는 원칙이 결정되고 지금까지 방송실시를 준비하던 민간사는 이 사단법인체에 참여하도록 했다. 그래서 만들어 진 것이 「사단법인 경성방송국」 이다. 1926년 12월 말에 개국할 예정이던 방송국이 일본 대정 천황의 사망 등으로 미루어져 1927년 2월 16일부터 정식방송국의 전파가 발사된 것이다. 오늘 배경음악은 그 그시절에 불린 윤극영 작사 작곡 이정숙의 「반달」이다. 이 노래는 1924년 시험방송을 실시할 때 불리기 시작, 이 땅의 방송전파를 탄 최초의 동요곡 이기도 해서 방송의 역사와 일치한다. 색동회 회원이기도 했던 윤극영선생님은 자주 방송국에 드나드셨다. 반달은 이 나라 방송과 특별한 인연이 있다.
방송국은 조선조 태조 이성계 둘째 왕비 강비의 묘가 있었던 정동 1번지에 세워졌다. 그 땅은 태종이 강비의 묘 정릉을 해체해서 버린 뒤 빈 땅으로 있다가 덕수궁에 편입된 이왕가의 땅으로 지대가 높아 서울(경성) 시내를 내려다보는 위치에 있어서 그때는 그런 지대에 방송국을 세워야 전파가 잘 전달되어 방송이 잘 들린다고 생각해서다. 여기 땅 190평을 빌려 2층건물 방송국을 세우고 두 개의 안테나를 세워 1Kw출력의 전파를 발사했다. 지금 같으면 1Kw로 중파방송을 한다면 웃을 일이지만 전파장애가 없던 그때는 그것으로도 경성이라고 부르던 서울일대와 경기도, 충청도 일원가지도 들렸다. 그러나 이것 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방송 들리는 지역이 너무 좁아 듣는 사람이 한정적이었고 방송채널이 하나밖에 없어서 일본어와 우리말을 한 채널에서 방송하다 보니 일본방송에 비해서 방송양이 적으려니와 방송시간도 우리말방송은 잘 듣지 않는 시간에 편성되었다. 여기에 라디어 값은 쌀 50가마니 좋은 라디오는 100가마니를 주어야 되고 청취료가 월 2원씩이 부과되어 연간 쌀 네 가마니 이상을 주어야 했기에 어지간한 사람들은 방송을 듣는 것이 꿈같은 일이었다.
이러다보니 방송국이 문을 열때 1,500대 정도로 시작된 라디오가 쉽사리 늘어나질 않아서 1929년에 이르러서야 10,000대를 겨우 넘었다. 청취료로 운영하는 방송국에서는 비상이 걸리고 방송국 존, 폐의 기로에까지 왔다.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서울의 방송 출력을 늘림과 동시에 일본어 방송과 우리말 방송채널을 분리해서 두 개의 채널로 방송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리고 지역에도 방송국을 설치하기로 했다.
연희에 송신소를 세우면서 10Kw출력 송신기 2기를 세워 일본어 방송과 우리말 방송을 따로 송출하기로 했고 여기에 대비해서 1932년 기구를 개편했다. 서울에 있는 방송국의 이름은 「경성방송국」 으로 하고 전국을 어우르는 방송을 「사단법인 조선방송 협회」로 한 것이다. 그래서 「사단법인 조선방송 협회」라는 이름으로 출범한 것이다.
「조선방송 협회」에 「경성방송국」, 「기술부」「총무부」「사업부」를 두었고 지역에 부산, 평양, 이리, 함흥, 광주, 대구 등 지역 방송을 시설 해 갔다. 서울에서 방송하는 경성방송국은 호출부호 JODK로 방송부와 기술부 서무과, 업무과 등을 두어 방송을 했다. 지역에는 부산의 JBAK로부터 시작되어 평양 JBBK등으로 이어졌다. 지금으로 보면 KBS란 전국의 방송을 어우르는 명칭이고, 부산방송총국, 대구방송 총국등은 그 지역의 방송을 말하는 것으로 보면 된다.
이렇게 해서 새로 마련된 제2방송 채널은 해방 될 때 까지 우리말을 지키는 파수 군이 되었다. 그 부서에서는 우리방송인들이 방송을 했고 우리말을 제대로 지키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우리말 방송에 일본어를 섞으려는 총독부의 기도가 있었지만 좀처럼 어려운 일이었다. 중. 일 전쟁이 한창일 때 일본총독부가 방송국에 일본어를 석어 방송하라는 지시를 내리자 그때 우리말 방송책임자 제2방송과장 심우섭은 그렇게는 못하겠다면서 총독부에 항의하고 방송국을 물러났다.
일본이 자기들 식민지 정책으로 세워진 방송국이라 해도 조선인들의 협조 없이는 운영 할 수 없는 방송국이어서 모든 관공서, 학교 등에서 일본어 사용이 강요되었어도 경성방송국 제2 방송과에서 만은 조선어가 사용되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조선방송협회 우리방송인들은 해방 될 때 까지 우리말을 지켜 오면서 때로는 해외에서 들려오는 소식을 국내에 전하며 나라의 독립을 위해서 힘을 기울였다. 더 자세한 얘기는 이미 써 올린 글을 연결하는 것으로 대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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