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부터 50년대까지를 시대 배경으로
여필종부를 미덕으로 하는 한국 여성상을 그려 갔습니다.
극중 아씨(김희준)는 남편(김세윤)이 신여성과 공공연히 외도를
일삼았지만 삼종지덕 여자의 길을 따르면서, 시어머니와 시누이의
구박을 참아내며 남편이 밖에서 낳아온 아들까지 친자식처럼 키워가는
전통적인 한국 여성상을 그려내는 드라마였습니다. 극중이라고는
하지만 못된짓을 하는 남편, 구박하는 시어머니와 시누이는
시청자들로 부터 손가락질을 받고 아씨는 칭찬을
받은것은 지금보다 훨씬 더 했습니다.
아씨가 방송된지 40년이 더 지나고 보니
그 작품을 구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이 글을 쓴후 마침
그 방송 프로그램을 녹화했던 기술감독 윤성현선생님이
마지막회 프로그램 녹화테잎을 보관하고 있었고 또 다음
에서 대용량 동영상을 올릴 수 있어서 한시간 모두를
전편과 후편으로 나누어 올렸습니다.
아씨! 마지막회 동영상보기
동영상을 보시기전에 음향을 끄셔요.
1960년대까지 TV에서 단막극이나
주간 연속극은 있었지만 일일 연속극은 사실상
어려웠습니다. 생방송이라는 제약과 제작비의 한계를 뛰어
넘을 수가 없었습니다. KBS가 1969년 5월 주간 기본방송순서에서
일일연속극을 편성하고, 5월 21일부터 당시 최고 반열에 있던
임희재 극본에, 최고의 연출력을 보여준 이남섭이 연출봉을
쥔 신부 1년생이 30회를 방송 하면서 일일극의 가능성은
보여 주었지만 시청자의 큰 관심을 끌지는 못했습니다.
1970년을 전후해서 방송국 사정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완전치는 않았어도 TV 전국방송망이
갖추어지고, 국산 텔레비젼이 보급 되면서 TV수상기가
급속히 늘어 났습니다. 때를 맞추어 MBC가
1969년부터 TV방송을 했습니다.
제작비에 제약을 덜 받던 TBC가 야심찬
일일연속극에 승부수를 던졌습니다. 임희재 극본,
고성원연출의 아씨가 1970년 봄 프로개편에 중심에 자리
잡았습니다. 8개월전에 방영된 임희재극본 KBS신부 1년생이
시청자의 관심을 끌지 못했던 것과는 달리 아씨는
처음부터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TV가 아직 100만대가 보급되기 전이었지만
텔레비년을 갖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씨의 방영시간이면
TV화면앞에 시선을 집중했습니다. 그 시간이 되면 거리가 한산해
질 정도였습니다. 이 프로그램은 대 성공을 거두면서 그
다음해인 1971년 1월까지 253회가 방송 되었습니다.
예상치 못한 대 힛트였습니다.
작가 임희재는 중간에 건강이 나빠져 이철향이
대필했지만 그 인기는 시들지 않았습니다. 이때부터
영화는 어려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아씨는 TV의 후광을 업고
당시의 대 스타들이 총 출동해서 영화를 제작해서 TV드라마가
끝날 무렵 상영되었지만 큰 재미는 못보았습니다.
아씨 작가 임희재는 얼마 안 있어
그해 3월에 세상을 떴지만 최고의 극작가로
추앙 받았고 뒷날 고향 충청남도 금산에서는
그를 기념하는 문학비 건립을 비롯해서
대 작가 반열에 올랐습니다. 배역진 김희준,
김세윤, 노주현, 여운계 등은 이로부터 대 스타가
되었습니다. 잡지나 신문은 아씨에 관한 자주 얘기를
썼고 특히 여 주인공 김희준에 관한 얘기는 화제였습니다.
드라마가 진행되고 있던 때 미국엘 가게 된다는 얘기가
있어서 관심이 집중되기도 했습니다.
이 프로그램에 출연할 때의 김창세는 김세윤으로,
노운영은 노주현으로 이름이 바뀌어 스타로서의 그 위치는
확고부동 해 졌습니다. 동양방송 아씨의 열기는 1972년
KBS 여로로 이어져 전무 후무한 시청기록을 세우면서
라디오와 영화를 뒤로 밀어내고 TV가 새로운
매체로 각광을 받게되었습니다.
아씨 주제가
옛날에 이 길은 꽃가마 타고
말 탄님 따라서 시집가던 길
여기던가 저기던가
복사꽃 곱게 피여 있던 길
한 세상 다하여 돌아가는 길
저무는 하늘가엔 노을이 섧구나
옛날에 이 길은 새색시적에
서방님 따라서 나들이 가던 길
어디선가 저만치서
뻐꾹새 구슬피 울어 대던길
한세상 다하여 돌아가는길
저무는 하늘가에 노을이 섧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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