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이광재 아나운서와 김무생님의 방송추억, 아나운서 생활

이장춘 2013. 1. 6. 21:20

 

 

 

1956년부터 1969년까지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모르른 사람이

없었던 이광재 아나운서! 라디오 전성시대,

아나운서 전성시대,  연예인이 아니면서도 연예인을

 능가하는 인기를 누린 이광재 아나운서! 그 이광재 아나운서의

 방송을 들으며 어린시절의 꿈을 키워온 분! 김무생(KimMooSaeng)

님의 삶의 바탕이었고 일생동안 머리에 간직한 추억이었습니다. 님이

이광재 아나운서에 관한 추억은 대한민국 인의 추억일 수있어서 공감

하는바가 있습니다. 김무생님이 춘하추동방송과 인연을 맺은이래  

이광재 아나운서의 추억을 생생히 기록 해 놓으셨기에

 여기에 옮겨 그날의 추억을 함께 해 봅니다.  

 

 

이광재 아나운서와 김무생님의 방송추억, 아나운서생활

 

 

김무생님

 

 

저에게 아나운서라는 그 꿈을 갖게 해버렸던

대 선배님!! 저의 개인적인 사정으로 떠나시는 모습

뵙지 못하고 영면 소식조차 뒤늦게 알게 돼 너무 서글프고

땅이 꺼지는 아쉬움만 제 맘과 뇌리를 짓누르고 있습니다. 97년

수서역 근처에서 된장찌개를 같이 드실 때 식사전 저를 위한

기도에서 "훌륭한 아나운서로서 성공할 수 있도록

 지켜주시라"는 기도를 정성으로 해 주시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60년대 당시 방송하셨던 방송자료들을
방송에 참고하라고 저에게 하나씩 하나씩 제가 사는

부천으로 꼼꼼히 챙겨 보내주셨던 대선배님!! 이 못난 후배를

용서해 주실것을 기도합니다. 천국에서 그 금속성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혹 못다하신 방송이 있다면 이 못난 후배가 끝까지

기도할테니 멈추시지 마시고 방송하십시오!!


대선배님!! 너무 아쉽고 저의 가슴과 머리는

어딘지 모르게 텅 비어있는 허전함이 메워지질 않습니다.
당신께서 미국 로스엔젤레스에서 해마다 20년 가까이 저에게

정성으로 보내 주셨던 크리스마스카드를 펼쳐보며 당신의 가르침을

듣습니다. 부디 천국에서 못다한 방송과 설교를 영원히

해 주실 것을 부탁드리며 기도합니다.

 

 

 

 

고맙습니다. 부족한 저는 사연이

무척 많은 (아마도 우리 나라에서 사연이

가장 많은) 늦깎이 프리랜서 아나운서로서

 방송활동을 시작했습니다.

 

 

 


KBS-TV:<이것이 인생이다.>

HBS-TV:<부라보 돈키호테> HBS-TV

<심씨와 여자들> 등의 프로그램에서 늦깎이

 "집념과 열정의 아나운서" 로 시청자 여러분들과

만나기도 했습니다. 저는 대선배님이셨던 이광재

아나운서님의 영향을 가장 많이(99.9%정도)

 받았던 사람입니다.


옛날 교복과 교모를 착용했던 중고교 시절

각 시(市) 대항 체육대회 현장 중계 소년 아나운서로

활동하게 담력을 불어 넣어 주셨던 분이 바로 이광재 대 선배

아나운서님이십니다.-까까머리 교모와 교복을 착용한 학생 현장

소년 스포츠 중계아나운서로서 인기가 아주 대단했었습니다. 관중들은

스포츠 경기를 관람하는 게 아니라 '이광재 아나운서님이 오신 줄 알고'

본부석의 이른바 중계석에 있는 어린 소년 아나운서인 저를 빙

둘러 싸버리는 촌극이 자주 연출되곤 했답니다.


관중들은 저에게 다가와 "학교 그만 다니고

서울 KBS 중앙방송국으로 빨리 가라"고 저를 자꾸

 떠밀 정도로 당시에 인기가 대단했던 소중하고 가장 행복한

추억이 있습니다.-이런값진 체험은 바로 대선배님이셨던 이광재

아나운서님이 이 세상에 계셨기에가능했었습니다. 故이광재

 아나운서님을 중심으로 에피소드, 생생한 방송생활과

체험 등 이야기 보따리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여기에 풀어 놓겠습니다. 

 

 

 

 

내가 초등학교 5학년 시절이었던

66년 6월 25일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우리의

김기수 선수와 이탈리아의 벤베누티 선수와의 "세계

주니어 미들급 타이틀 매치"가 벌어졌다. 이 중계 방송은

당시 최고의 인기 아나운서이셨던 故이광재님이 직접 중계를

담당하셨다. 난 그때 이발소에서 머리를 깎고 있었다. 이때 라디오

에서는 <<우리 김기수 선수, 라이트, 레프트 성공입니다. 얻어 맞고 있는

벤베누티, 로마에서 벤베누티에게 패배한 그 설움을 되갚고야 말겠다던 김기수

선수! 파인 플레이입니다.!....>> 난 이소리가 귀에 들어오자마자 손짓 발짓을

해 가며 힘차게 그대로 따라 해 버렸다. 그 중계방송이 그렇게도 신이나고

좋았기 때문에---) 그런데 갑자기 이발사 아저씨의 강력한 알밤

한 대가 내 머리에서 번쩍하질 않겠는가!

 

아뿔사! 내가 요동을 치며 중계를 하는 바람에

그만 가위가 내 왼쪽 귀를 스치고 지나가버려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는 게 아닌가! 난 그때 기억이 생생하게 나는데

그 순간엔 정말로 아픔을 느끼기는 커녕 그 이발사 아저씨가 그렇게

얄미울 수가 없었다. (신나는 중계 방송의 방해물로만 보였기에---)

이때부터  故이광재님처럼  그런 훌륭한 아나운서가  되겠노라고  내꿈을

완전히 굳혀버렸다. 그러면서 이때부터 초등학교 5학년 녀석이 길거리를

다니면서까지 혼자 중얼중얼 스포츠 중계방송을 꽤 높은 톤으로 하다가,

힘들다 싶으면 좀 낮은톤의 "백만인의 퀴즈" "재치문답"등의

공개방송의 MC멘트도 양념으로 섞어가며 꿈 많은

초등학교 시절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내가 이광재님에 의해 꿈의 씨앗이 아나운서로

영글었다 한다면 그 씨앗을 맺게한 텃밭이 있었다. 60년대의

농촌 시골 마을을 상상해보면 대충 짐작하고 남음이 있으리라. 너무

못 살고 가난했던 그 시절 ! 문화 시설과 정보 매체가 너무 메말라 있던 곳.
내가 초등학교 시절이었던 그 시절에 유일하게 방송을 만날 수 있는 게 꿈의

나라와도 같았던 일명 '유선라디오 방송'이 있었다. 초등학교 근처에 "유선

라디오 중계 사업소"라는 게 있었는데, 여기서는 각 동네마다 전신주에

전깃줄을 매달듯이 유선을 연결해 방송을 송출하는 시스템이었다.


집집마다 쌀과 보리 콩 잡곡 등 곡식을 계량할 때

쓰는 '되' 크기의 사각형 모양 속에 스피커가 내장된 기구를

설치해 꿈에 그리던 KBS방송을 청취하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 일명

'청취료'라는 걸 받아 가는데 일년에 두번 -7월쯤 보리 타작할 때 보리 한 말,
가을 벼 추수할 때 벼 한 말 이렇게 "유선라디오" 중계사업소 사람들이 집집마다

리어카를 끌고 다니면서 받아가곤 했다. 그런데 이 전신주 같은 장치가 바람이 세게

불거나 기타 등등으로 가끔 넘어진다거나 유선이 끊어지는 사고가 종종 발생해 애를

먹이는 경우가 많았다. 어느날 갑자기 방송 소리가 멈춰 버렸다. 웬 변고란 말인고!

큰일이다. 그렇게 좋아하는 방송을 못듣다니!!----. 난 그길로 바로

밖으로 나가 유선을 따라 뛰면서 죽 점검을 하기 시작했다.

 

 

 


(그때 난 어지간한 건 내가 또는 친구들을 동원해

직접 응급처치를 하기도 했다.-힘든 건 약 3Km 거리에 있는
유선방송 사업소까지 달려가 구조요청을 했지만---) 그날은 도저히

초등학생인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유선을 받쳐 꽂은 나무가 넘어졌고
유선이 끊겨 버렸다. 빨리 3Km를 달렸다. (집에서 그곳까지 약 3Km 거리)

상황 설명을 들은 그 유선 방송 사업주는 현재 자기 혼자인데 자기

혼자로는 힘들겠다며 안타까워 하고 있었다.


그래서 난 얼른 "제가 도와주면 되죠"했더니 "네가?

힘들텐데" 하는 것이었다. 난 빨리 방송을 들어야 하기에 그 아저씨

팔을 끌었다. 그랬더니 그 아저씨는 너털웃음을 웃더니 "일단 가보자"하며

여러 장비를 챙겼다. 그중 일부는 내가 들고 어른 유선방송사업자와 초등학교

꼬마 유선 방송 사업자가 한 팀이 돼서 바삐 현장으로 출동했다. 사고 현장에서

난 낑낑대며 유선을 끌어 주고 그 아저씨와 함께 간신히 유선을 이어 그렇게도

신이 나면서도 유익한 방송(뉴스,스포츠,공개방송,라디오 드라마,여러

정보 등)을 청취할 수가 있었다. 이렇게 나는 지금 생각해 봐도

방송이라는 텃밭을 꼬마 녀석이 조금씩 일구어 가고 있었다.

 

 

 

 

초등학교 시절 기억에 남는 이광재님의

 방송 프로 중에 "백만인의 퀴즈"라는 프로가 있었다

고인이 되신  아버지께서도  이광재님을 퍽 좋아하셨고

 저녁 8시 "백만인의 퀴즈"시간이 되면 꼭 라디오 곁에 계셨다.

역시 나도 그 곁에 함께 있곤 했다. 좀 빠른 듯한 속도로 긴장감을

 주면서도 박진감 있게 진행하시는 진행 솜씨도 일품이려니와 출연자와

하나가 되듯이 호흡을 맞추는 모습이 너무 멋있었다고 기억한다.

그 방송을 듣고 계셨던 아버지께서는 이광재님의 재치 있는

 진행 솜씨에 웃고 출연자들의 엉뚱한 언행으로 또 많이

 웃으셨고 나도 역시 많이 웃었던 기억이 난다.

 

 

 

 

어느 날은 그해 시골에서 갓 올라와

서울에서 대학 다니며 같이 자취하는 대학

1학년생이 한 팀이 돼서 출연했다. 그 팀과 얘기 중

 -"이제 처음으로 서울에 올라와 처음 객지 생활에 자취를 하며

반찬도 자기들이 해결한다"고하니까 이광재님이 대뜸-"그럼 맛있게

김치 담그는 방법 좀 가르쳐 주십시오.!"ㅡ하니 그 학생들이 안절부절

못하다가-방법을 얘기하는데 김치 담그는 순서가 틀리고 엉망이 돼 가고

있었다.- 방청객의 웃음소리가 들리기 시작했고 아버지와 나도 크게 웃었던

기억이 난다. 생각건데 이광재님은 서툰 사회 초년병에게 전문 요리사에게

 물어 봐야 할 질문을 이들에게 던져 실수하는 모습을 청취자에게 들려

 줌으로써 청취자는 웃고 그 사회 초년병 자취생들에겐 긴장감을

풀어 주는 것으로 한 꼭지의 방송을 만들어

가셨던 것으로 생각된다.

  

물론 이것 외에도 많은 일화가 있겠지마는

----. 또 빼 놓을 수 없는 건 '정오12시 낮 뉴스'이다.

그 금속성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박진감 있게 진행하시는

 모습은 제격이었고 딱이었다. 얼마나 구성지게 잘 어울리는지

     최고였다. 또한 당시에 우리 동네 사람들 중에는 이광재님이

격정어린 멘트로 중계방송을 하면 "화장실에서 볼일

 보다가도 라디오 앞으로 뛰쳐나와 방송을 듣고

 다시 볼일 보러 간다." 이런 소리를

한 적도 있었으니까!-----.

 

 

 

 

내가 중학생이 돼서부터는 유달리

챙기는 담담??방송 프로그램이 하나 더 생겼다.

나는 꼭 거의 매일 그날 신문을 가지고 다녔다. 학교에서

 쉬는 시간이면 틈나는대로 뉴스낭독을 하는 것이다. <워싱톤에서

 UPI 통신의 보도~~~~~~~. 이상 이광재가 전해드렸습니다.KBS>

다음 쉬는 날에는 <박정희 대통령은 오늘~~~~~. 이상 김무생이가

 전해드렸습니다. KBS> 이광재님의 톤과 스타일로 이렇게 뉴스 낭독을

제깐에 멋들어지게 하면 동창 친구들이 내 주변을 에워싸고 애청자가

돼 청취해 주면서 뉴스 마지막 "KBS"하면 친구들이 "아주!!!"

하면서 큰 박수를 "짝짝짝"쳐주는 것이었다.

  

그런데 내가 위에 적은대로 한 번은

 <~~~이광재가 전해 드렸습니다. KBS>

또 한 번은<~~~김무생이가 전해 드렸습니다.

KBS>로 바꿔서 방송??한 이유는 내가 이렇게 이광재님

처럼 방송해야겠다는 의지와 더불어서 청취자 (여기선 중학

동창들)들에게 이 김무생이가 이광재님처럼 방송하고 있다는 것을

은근슬쩍 알려 주고 싶어서였다. 이걸 듣고 있던 친구들이 "야! 너 김무생!

 넌 임마 도데체 이광재씨야 김무생이야?! 넌 정체가 뭐야?!" 하고 따지는

 것이었다. 뉴스할 때는 이광재님이되고 평상시엔 본래의 김무생

이었으니까 주변 친구들에게 꽤나 혼란을 줬을 것이다.

 

 

 

 

중학 1 학년까지는 교내 체육대회가

열릴 때면 경기 장면을 보면서 혼자 서 중얼중얼

중계를 하는 게 그렇게 재미가 있었다. 그런데 2학년

 체육대회 때는 그냥 혼자 중얼거리는 걸 참을 수가 없어서

 담임 선생님께 부탁을 해서 그 땐 아예 마이크를 직접 잡고

실전 현장의 생중계를 대담하게 감행해 버렸다. 되도록 경기

상황을 전달하되 조금은 재미있게 할려고 신경을 썼던 것으로

기억한다. 왜냐면 그때 그 현장의 친구들과 선생님들의

웃음 소리가 지금도 아련히 들리고 있기 때문이다.

 

경기 중간 중간에 가지고 다니던

신문을 펼쳐 그 날의 새소식을 이광재님처럼

 이광재님 톤으로 뉴스를 전하니 지루하지 않았고

선생님과 친구들도 좋아했던 기억이 현실처럼 선명하게

 떠오른다. 그런데 여기서 언급하고 싶은 건 "KBS"라는 콜사인

이다. 당시에 이광재님은 방송 끝머리에 하셨던 이 "KBS"라는

콜사인을 참 멋있게 하셨다. 나도 왠지 마무리에 이광재님처럼

 이 "KBS"란 말을 하지 않은면 퍽 꺼림칙했다. 그래서 이 "KBS"

라는 콜사인을 하면 못한것도 잘한 것처럼 느껴졌고 나도

 더 멋있게 보였다.. 당연히 체육대회 뉴스를 중간중간에

 전할 때도 꼭 뉴스 끝머리에 이광재님처럼

멋있게 "KBS"로 마무리를 했었다.

 

 

 

 

여기에 덧붙여서 故이광재님의

60년대 중계방송의 실제 육성자료를 중심으로
이광재님의 그 방송의 숨소리를 다시금 들어보고
부족한

식견이지만, 당시의 방송환경과 그 때의 사회환경 내지 문화

 수준 등을 간략하게 되짚어보고자 한다. 여러가지가

있지만 몇가지만 예를 들어 보기로 한다.

먼저 나에게 아나운서라는 꿈을 굳혀 버리게 한
66년 우리 김기수 선수와 이탈리아 벤베누티 선수와의

"세계 주니어 미들급 타이틀 매치" 경기다. --이 경기의 흐름을

 보면 이광재님이 전국의 청취자들에게 우리 김기수 선수가 꼭 이겨야하니
아낌없는 응원을 해 주시라 부탁을 간간히 하시며 방송을 하시는 걸 들을 수 있다.
그런데 그 음색의 분위기가 지금의 스포츠 중계 아나운서의 음색이 아니고 정말 진정으로

 꼭 응원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소위 애국심을 바탕으로 호소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심지어

 중계 도중 "우리 김기수 선수 이겨라!!" 이렇게 직접 응원하는 멘트도 있으니까 말이다. 지금

스포츠캐스터가 중계도중 "우리 000선수 이겨라!" 하고 중계한다면 다 웃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엔 이광재님 같이 애국심에 직접 호소하는 멘트가 더 어울렸을

것이고 아마도 그게 오히려 당연한 멘트였으리라 (당시 국가와

   사회 환경과 여러 여건으로 봐서---)


실제 당시 초등학교 5학년 때 그 중계방송을

직접 들었던 나도 우리 아버지께서도 그밖에 주변 사람들도

그게 오히려 당연했었고 마땅했다고 봤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때 모든

방송인들은 이처럼 애국심을 불러 일으키는 선두에서 방송을 했다고 판단

한다. 거기에 방송 최일선의 선두 주자 중의 한 분으로 꼭 빼 놓을 수 없는 분이

바로 故이광재님이셨다. 이번에는 66년 8월 27일 중앙청 광장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3부 요인들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된 "백마부대

환송식 실황 중계방송"이다.

 

 

 


시작멘트가 "여기 백마가 있다.

전국의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여기는 중앙청광장입니다." 로 시작해서 중간쯤에

 "월남땅으로 떠나는 여기 백마용사! 인류공동의 적인 공산

베트공을 무찔러 우리는 다 같이 꼭 한사람 빠짐 없이 살아 돌아

오리다." 이렇게 반공의 의지와 애국심으로 국민 단합을 호소하는

멘트를 하고 계심을 볼 수 있다. "우리는  돌아와 우리의 또 남은 과제

~~~~백두산 상상봉에 태극기 날리고 조국통일을 보고야 말리라"

 이어진다. 이렇게 앞선 복싱 멘트의 애국심과 방금 소개한 백마부대

환송식 멘트의 반공과 조국통일의 의지 멘트가 방송을

통해서 굵은 선으로 부각된 점을 볼 수가 있다.

 

 

 

 다음으로 66년 10월 31일 아베베선수가

출전한 "9.28 수복 기념 국제마라톤 대회"다

중앙청 광장으로 아베베 선수가 40Km를 통과했을 때

이광재님이 "지금 기록이 어떻게 됩니까? 방송센타!" 하고

방송센타(남산 KBS)를 부르게 된다. 그러면 방송 센타가 바로

받아서 "2시간 9분 35초에 통과했습니다." 이렇게 대답하는 식의

방송 시스템으로 아주 열악한 당시의 모습을 보여주게 된다.

지금의 최첨단 기록 시스템으로 기록을 측정해버리는

 것과는 아주 먼 삼국시대 내지 심하게 표현해서

고조선 시대의 얘기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격세지감을 느끼게 된다.

 

또,아베베 선수가 시청앞 광장을

통과하기 직전에 이광재님은 "(도로)양쪽가

시민들이 찝차 한 대만 지나갈 정도의 길만 남겨 놓고 밀어

 닥치고 있습니다. 많은 관중들 응원은 좋습니다만 질서를 지켜주실 것을

부탁해 맞이 않습니다." 이렇게 호소하시는 멘트도 있다. 이어서 "계속 경적을

울리고 있습니다만, 시민들이 너무 붐비는데요!" 옆의 해설자이신 함기영씨에게

 말하자 함기영씨(이거 야단인데요 이렇게 해선 골인할지 모르겠습니다.)하고 계속

 걱정어린 멘트를 주고 받으시는 모습이 퍽이나 안타까워 보였다. 방송차는 계속

경적을 울리고 이광재님은 계속 시민들께 "질서 지켜 주시라"는 부탁을 하며

아나운서와 해설자가 땅이 꺼지는 듯한 걱정으로 국제 마라톤 대회를

중계방송 하는 모습에서당시의 우리의 시민 문화 수준이랄까 어떤

의식이랄까하는 것들을 짐작하게 해 주기도 한다. (물론

소위 조국 근대화의 물결이 막 일렁이기 시작한

어려운 시대였다는 걸 마음속에 두면서도---)

 

 

 

 

마지막으로 69년 12월 31일 방송된

 KBS 40여명의 아나운서들께서 각계 각층의 사람들께

송년 인사를 드리는 "아나운서 언 퍼레이드" 라는 방송에서

난 이광재님에 대해 조금은 깜짝 놀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인사말

 순서가 아나운서 실장이셨기에 맨 먼저 송년 인사를 드리게 되는데

평상시 중계나 뉴스는 카랑카랑한 금속성의 목소리로 온몸에서 터져

 나오는 상대를 압도하는 듯한발성으로 방송하셨고 공개방송 MC도

중계나 뉴스보다는 부드럽게 방송하시지만내 개인의 생각으로는

그래도 조금은 강한 카리스마 내지 무게를 느꼈었다.

 

그런데 "아나운서 언 퍼레이드"에서의

송년인사에선 다른 톤의 또 다른 멋을 발견 할 수가

있었다. -"69년이여 안녕! 전국의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그리고 친애하는 북한 동포 여러분!~~~"이렇게 계속되는데 정말로

흔히 말하는 은쟁반에 옥구슬이 굴러 가듯 솜사탕이 바람에 날리듯

부드러우면서도 감칠맛 나게 전국의 청취자 여러분들께 송년

인사를 하셨다. 내면에 저렇게 부드러운 면도 가지고

계셨구나 하고 난 고개를 여러번 끄덕끄덕 했다.

 

 

 

 

----앞서 얘기했듯이 중학 시절은 주로

교내 각종 체육대회 현장의 중계 아나운서

역활과 행사 MC로 이광재님과 똑같은 멘트 중심으로

일명 지방방송 활동을 했다. 이제 고1부터는 더 대담해졌다.

여기서 참고로 말하자면 이런 배짱은 단순히 난 이광재님을 대신하고

 있다는 어떤 자부심이랄까 이광재님이 지켜 주신다는 "자기최면"같은 게

날 따라다녔다. 교복을 입고 교모를 쓴 고1 때 소위 10월 "문화의 달"인

 일요일날 시군 대항 체육대회가 열렸다. 난 지체없이 현장으로

달렸다. 조금은 가슴이 두근거렸던 것으로기억된다.

현장에선 시군대항 축구경기가 진행되고 있었다.

 

 

 

 

본부석으로 뛰어가 시장 군수들께 다가가

인사를 정중히 하고는 "저는 고등학교 1학년 학생

김무생입니다. 제가 축구 중계 방송을 하겠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하니까 시장군수들이 한참 멀뚱멀뚱 쳐다보더니 "네가?"

 하며 의아하듯이 쳐다보고 있었다. 저는 급해서 바로 "네 제가 하겠습니다.

제가 중계를 안 하면 재미도 없고 관중들도 슬슬 다 가버릴 겁니다.허락해 주십쇼"

 했더니 대부분의 시장군수들이 "그래 해봐 중계하면 재미가 있을 것 같다.

해라!" 는 허락이 떨어 졌다. 난 정말 신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때가 정오 12시였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아나운서 김무생입니다.

지금부터 00시(市)와 ##시(市), ##시(市)와 00시(市)와의

축구 경기 여러분에게 중계방송 해드리겠습니다." 하고 이광재님 톤과

이광재님 멘트 중심으로 멘트를 막 날렸다.---- 여기서 내가 잘 모방해 썼던

 멘트 소개를 하면서 동시에 故이광재님을 회상하는 의미에서 69년 11월

한국 대 말레이시아 "킹스컵 축구대회"의 실제의 육성자료에 나오는

그 생생한 멘트를 그대로 요약해서 몇 문장을 소개한다.

 

<<<<<~~~이회택잡았다. 골문 앞에서

[[슈우웃~~ 고오린 고오린됐습니다. 고오린!]]

이회택군 정면에서 [[고올 고오린 고오린 됐습니다.]]

고국에 계시는 동포 여러분 [[기뻐해 주십쇼오오! 또 한 점을

추가했습니다.~~~~]] 우리 한국팀 전반전에서 한 점! 후반전에서

 한 점! 우리 한국팀 2:0으로 리드하기 시작했습니다. 다시 서서히 몰고

 들어가는 말레이시아! 말레이시아 볼 잡아가지고 [[오른발로 길게 찼다.

한국군 진영으로 들어 옵니다마는]] 이진욱 골키퍼가 나가고 있습니다.

 2 : 0입니다. 우리 한국군 오른발로 길게 내찼다. 다시 길게 내찼다.

[[앞으로 시간 얼마 남아 있지 않습니다]].

 

 

 

 

옆의 해설자에게--이광재님이-->우리가

한점을 먼저 [[얻었더라면 더 신나게 되는 건데 말이에요.

너무 늦었어요오오]] 이럴까저럴까 모션쓰는 말레이시아 이때

심판이 발이 높이 올라 간 걸 지적하자 [[크게 90도각도 경례를 올렸던

 말레이시아]] ~~~~(중간 생략) ~~~드디어 타임아웃됐습니다아!

2:0으로 우리 한국팀이 승리를 거두었습니다아!>>>>>

대략 이렇다.

 

시 애청자 여러분께서는 기억하시리라

믿지마는 위 멘트 중 [[ ]]표시 안의 멘트는 이광재님의

 특유의 톤과 억양으로 하시기에 누구나 감히 흉내를 낼 수 없는

 멘트이다. 당시의 애청자이셨던 여러분은 이 부분을 상기하며 읽어 가면

그 당시의 이광재님의 그 목소리를 조금이나마 재생시켜 음미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또 멘트의 특이할 만한 것은 가끔 가다. 한국팀을 "한국군"으로 표현

하시고,위 [[ ]]부분의 "더 신나게 되는 건데 말이에요! 너무 늦었어요.

오오"도 흉내내기 어려울 특유한 톤으로 표현하신다.

 

그리고 "각도(角度)"라는 말 사용을 결정적일 때

잘 하시는데 농구중계에서 가장 잘 사용하시는 45도 각도

 그 다음이 90도 30도 순이다. 이 축구 경기에서는 보다시피 90도

 각도를 사용하셨다. 이렇게 난 故이광재님의 멘트에다 내 자신의 멘트를

 조금씩 양념으로 섞어가며 정말 신나게 축구 중계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면

관중들은 축구 경기를 보는 게 아니라 이광재님이 오신 줄로 알고 본부석 중계석

 소년 아나운서인 나를 빙 둘러 싸버리는 촌극이 자주 연출되곤 했다. 날 유심히

바라보던 관중들은 이광재씨야? 이광재씨가 아직 고등학생이란 말이야?

말도 안돼!! 아니야 그 사람 어른일텐데! 그렇지! 당연히

이광재씨는 어른이지! 그럼 저 학생은 이광재씨

 아들인거여? 맞다! 틀리다!

 

옆사람끼리 축구경기는 보지 읺고

 입씨름을 하기 시작하는 어이없는 일 이 벌어지는

 것이다. 이건 그래도 덜한 축에 속한다. 주로 난 교복을 입고

 교모를 쓴 모습으로 중계를 많이 했었다. 그런데 내가 교복과 교모을

 벗고 일반 체육복 차림에 운동모자를 쓰고 중계 방송을 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관중들이 아예 이광재님으로 알아버리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저사람이

 이광재아나운서다. 아니다 두 패로 완전히 나뉘어져서 계속 입씨름이 좀 심하게

발생하고 있었다. 이광재 아나운서가 저렇게 젊어?? 너무 젊은데??

어떤 사람은 더 가까이 와서 "학생 같은데! 학생! 학생이구먼!!

  

그래도 난 거기에 절대로 휘말려 들어가지 않았다.

당시 생각으로 내가 중계 멘트를 조금이라도 쉬면 경기가

재미가 없을 것이라는 것과 그러면 관중들이 경기장을 빠져 나갈

것이라는 두려움이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신들은 알아서 다투시오'

라는 배짱으로 아랑곳하지 않고 더 열심히 이광재님의 멘트와 그 톤 중심으로

중계를 계속 해 버렸다. 정오부터 7시 30분까지 장장 7시간 30분 동안 생중계를

 한 것이다. 그 시간 동안 먹은 것이라곤 콜라 사이다 몇 잔 뿐이다. 중계석으로

 빵과 여러 먹을거리가 계속 전달됐지만, 입에 먹을 거가 들어 있으면 어떻게

이광재님처럼 정확한 발음과 힘차고 카랑카랑한 금속성 소리로 중계를

할 수 있느냐 말이다. 지금 돌이켜보면 난 그때 소위 말하는 중간에

방송이 끊기는 방송사고를 내지 않는 모범 방송인이었는데

이런 배짱은 앞서 말한대로 故이광재님이 내 뇌리와

가슴 속에 나침판처럼 자리잡고

계셨기 때문이었다.

 

 물론 중간에 쉬는 시간에는 준비해간 신문으로

 이광재님 톤으로 뉴스를 전하고 뉴스 끝에는 꼭 콜사인

 "KBS" 를 이광재님처럼 아주 멋있게 했었다. "~~~이상 0시 뉴스

 김무생이가 전해 드렸습니다. KBS" 7시간 30분의 현장의 생방송이 끝나니

내 몸은 땀으로 범벅이 됐지만 너무 행복해 미친듯이 집으로 가면서 멘트대신

계속 웃음과 야호라는 소리를 지르며 가을 저녁을 더욱 진하게 물들이고

있었다. 그래 집 앞에 다다르고서는 정신차리고 마지막 멘트-

"중계방송을 마치겠습니다. 프로듀서000,기술000.

아나운서 김무생이었습니다."를 다시 한 번

 하고 마당으로 들어섰다.

 

故이광재님의 스포츠에 얽힌 체험담이나

일화와 에피소드 등은 이외에도 참 많지마는

 얘기할 수는 없고 여기서 이광재님을 중심으로한 스포츠

중계방송 얘기는 마지막 한 가지만 소개하기로 하고, 70년 왜

미국의소리(VOA)방송을 떠나게 됐는지 그 이유와 미국생활, 선교사

생활,  목사님으로서의 목회활동 등을 이 분이 들려 주신 생생한 얘기를

중심으로 간단간단 요약을 해서 얘기를 펼치려한다. 이광재님의 스포츠

 중계방송에 대한 추억 중에서 "프로 레슬링 중계"를 빼 놓을 수 없을

것이다. 특히 김일선수의 경기는 정말 대단했다. 여기서 참고로

다른 선배 아나운서께서 하신 얘기를 요약해서

 잠깐 소개하기로한다.

 

 

 

 

<이광재님은 어느날 춘천에서 오후 4시에

농구 중계방송을 끝내고 바로 그날 저녁 7시에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김일 선수와 일본의 안토니오 이노끼 선수와의

레슬링 중계방송을 했는데교통수단이 열악한 그때는 춘천에서 3시간

만에 서울로 와 방송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광재님은

그날 군부대의 도움을 받아 군헬기를 타고와 무사히 방송을 끝냈다는 것이다.

이광재님의 당시의 선동적인 음성과 특유의 억양으로 "이노끼의 반칙으로 쓰러졌던

 김일 선수 일어나 박치기!다시 한 번 박치기!"하며 소리칠 때 흑백TV 앞에 앉은 시청자

들을 흥분의 절정으로 몰아 넣었다. 이 경기 시청하다 지나치게 흥분한 나머지 갑자기

 쓰러져 병원에 실려가거나 목숨을 잃는 경우도 있었다고한다. 지금과 비교하면 소위

신파조라고도 할 수 있겠지마는그 당시 그 이상의 능력은 없다고 평가 받았으며

 이광재님을 대신할만한 아나운서는 없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술회하셨다.>

 

 

 

 

난 중학시절부터 이글을 쓰는(2013년 1월)

지금까지 소위 "방송 진행자(아나운서) 노트를 쓰고 있다.

물론 내가 이 세상을 떠나는 그날까지 계속 쓴다는 것은 100% 확실한

얘기다. 내 노트를 보면 역대 아나운서나 명 MC 여러분들의 MC얘기 기타

 필요한 얘기들이 참 많이 수록이 돼 있다. 물론 거기에 故이광재님의 얘기도 있다.

우리나라의 선배 아나운서님들은 감히 말하건데 난 무척 존경한다. 또 전부 기라성

 같으신 분들이다. 그 중에서 난 이광재 아나운서님의 멘트를 다시 보게되면

         종이에 써 있는 것에 불과한 무생물이지마는 어쩐지 그 글씨가 꿈틀꿈틀

 움직인다는 느낌을 받는다. 지금은 떠나고 안 계시지만 그만큼

우리 국민들의 가슴을 요동친 방송으로 한 세상을

 살으셨다고 생각한다.

 

고 이광재님이 나에게 직접 들려 준 얘기에서

자신은 부지런히 늘 연습하며 방송을 준비하셨다고

 말씀하셨다. 특히 "부지런함"을 힘주어 강조하셨다. 나도

그 분을 닮아서인지 초등학교 5학년(아나운서로서의 꿈을 굳혀

 버린때)부터 중고교 시절까지 참 부지런한삶을 살아왔다는 생각이 든다.

 난 95년부터 늦깍이 공채 아나운서로 방송을 시작한 방송인(아나운서) 출신이자,

일명 교육전문가이다.(87년부터 교육학원 강의를 시작으로 현재 여러 교육 강의 경력

 25년) 방송과 교육을 95년부터 겸직했다는 얘기다.특히 수도권 지역(서울 경기)에서

나를 거쳐간 제자들이 수 없이 많다. 따라서 그의 부모님들을 비롯해서 내가 만난

사람들을 계산하면 숫자가 엄청나게 불어난다. 난 교육현장에서 부지런함을

교육할 때나 자기가 맡은 일에 대한 집념과 열정을 소개할 때

꼭 우리 이광재님의 그 열정을 소개하며 교육을 많이 했다.

(학부모나 기타 성인들에게도)

 

 

 혹 이 글을 읽는다면 고개를 끄덕끄덕

하리라 믿는다. 이 글을 읽는 청소년이나 학부모

기타 여러분들께 내가 감히 한 말씀 올리고 싶은 건 우리

이광재님처럼 좋은 습관과 일에 대한 집념과 열정으로 또 부지런

함으로 앞으로 힘차게 전진해 주실것을감히 부족한 교육전문가의 한

사람으로서  부탁드린다. 초중고시절의 내 얘기를 듣고 나에게 "김무생씨는

 그럼 초중고시절 학교 공부는 엉터리였겠구먼!" 이렇게 질문하는 분도 계신다.

그런데 여기서 정말로 양해를 부탁드리면서, 공부를 등한시하면서 소년 아나운서의

 특별활동을 하지 않았다는 그 증거를 하나 제시하고자한다.(결코 내 자랑을 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는 걸 다시 한 번 강조하면서--진심으로 이해를 부탁드리면서,)

고등학교 2학년 겨울방학 때 내가 담임 선생님께 보낸 편지의 답장

 일부이다. 현재 그편지를 그대로 보관 중이다.

원문 그대로 요약 소개한다.

 

<----지금까지 김무생이가 전해 드렷습니다.

다음 뉴스는 3시에 있겠습니다. 정말 그토록 아나운서의

소질이 있는지는 몰랐었거든-----2학년 때 너의 성적이 1등으로

 나가자 아벗님이 얼마나 좋아 하신 줄아니? 너의 대한 부모님의 기대도

크고하니 부디 몸 건강하고 공부 잘 해서----나도 기대해 본다.>

 

난 아나운서는 다방면에 풍부한 지식을

쌓아야된다는 걸 알았기에 결코 학과공부를 게을리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난 지금 남녀노소 학력 불문하고

 어떤 방송 프로그램을 맡더라도 별 힘이 들지 않는다. 실례로 원고 없이

진행하는 난생 처음하는 스포츠 생중계도 그냥 무리없이 처리한다.

나도 故이강재님처럼 어떤 일에 부지런히 해 봤더니

정말로 그렇게 좋더라는 얘기다.

 

 

여기서 특별히 이 글을 읽는 청소년이 있다면

 자기가 장래 어떤 일을 하더라도 청소년 학창시절 때 꼭

 학과공부를 철처히 해 줄 것을 부탁한다. 자녀를 두신 학부모라면

이 얘길 자녀들에게 꼭 해 주실것도 아울러서 부탁드리고 싶다. (부족한

교육 전문가의 한 사람으로서-교육현장에서도 늘 얘기했지마는) 여기서 내가

말하고자하는 건 내 얘기가 절대 아니고 (난 그 분에 비교하자면 정말"새발에

 피"이지만) 故이광재님처럼 부지런함으로 매사를 준비하고 열정을 가지면 보다

더 알찬 삶이 펼쳐지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다. 위에서 말한대로 故이광재님의

 스포츠 중계 등에 관한 일화는 여기서 맺기로한다. 이어지는 얘기는 70년

미국의 VOA(미국의 소리 방송) 왜 떠났는지부터 그 분이 들려 주신

 생생한 얘기를 중심으로 요약 정리 해보려 한다. 부족한 이 글을

읽어 주시는 여러분께 고맙다는 말씀을 정중히 드리며

아울러 다음 안내따라 두번째 글도 끝까지

 읽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여기까지는 첫번째글입니다. 아래 영문자 주소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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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log.daum.net/jc21th/1778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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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재 아나운서 영면. 1950, 60년대 국민의 벗이었던 인기아나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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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재 아나운서, 고국에 계신 동포 여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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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올림픽과 이광재 아나운서의 중계방송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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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재 아나운서 백만인의 퀴즈관련 회고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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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용 아나운서와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