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방송사상 최 장수 프로그램 노래자랑

이장춘 2010. 11. 16. 11:32

 

 

 

노래자랑 공개방송! 그 이름

 

1950년 라디오 방송에서 첫 선을 보인이래

60여년을 이어 오면서 대한민국에서 제일 오래된 방송

프로그램이 되었습니다. 할아버지도 할머니도, 남, 녀, 노, 소

모두가 하나되어 즐기는 노래자랑은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며 

때로는 휴전선이나 국경을 초월해서 우리 국민들이

있는 곳이면 찾아갔습니다.

 

 

 

 

 

 방송사상 최 장수 프로그램 노래자랑  

 

 

 

 

1955년 5월 27일 동화백화점 (지금의

신세계 백화점)에서 스무고개와 노래자랑 첫방송을

하고 촬영한 기념사진입니다. 스무고개에 출연한 문제안,

이덕근, 이경희 박사와 사회 임택근아나운서, 문시형 프로듀서가 

함께 했고 노래자랑 사회를 맡은 장기범 강영숙, 아나운서 프로그램을

맡은 김창구,  기술을 맡은 한기선, 김성열, 편성책임 노정팔 경음악단

지휘 손석우님 등입니다. 이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길고 긴 세월

노래자랑은 오늘에도 오늘에도 대단한 인기를 모으며 이어오고

있습니다. 아래는 그 때 임택아나운서 사회로

 진행된 노래자랑입니다.  

 

 

 

 

1957년에 시작되어 2007년 10월로 50년이 된

  KBS무대 보다 더  더 먼저 생긴 프로그램이 이 노래자랑

이고 1972년 4월 기본방송순서 개편 때부터 KBS배 쟁탈 노래자랑

으로 라디오와 TV 동시방송이 이루어 졌습니다. TV에서 전파를 타던 때

부터 2009년 말까지 1,500회가 넘게 방송 되었습니다. 1980년 TV칼라방송이

실시되면서 TV에서 새로운 모습으로 탄생했습니다. 2010년 11월 11일이

노래자랑  TV방송 30주년 기념일이라고 해서   11월 14일 노래자랑은

두시간 특집방송으로 진행 되었고 26년간 이 프로그램의 진행을   

담당했던 송해님에게는 KBS 명예사원증이 주어졌습니다. 

 송해님에 관한  예기는 뒤에 따로 안내되어  있습니다. 

 

 

 

이 노래자랑은 오랜세월 가수 등용문이

되기도했고 일선장병 위안 프로그램이 되기도

했습니다. 노래자랑이 처음 라디오 방송전파를 탄것은

 1950년 6. 25가 일어나던 해 5월로 방송 2회를 내 보내고

중단될 수밖에 없었지만 부산피난 시절에서 돌아와 다시

이어졌습니다. 처음 시작할 때는 촐연자가 있을것인가도

걱정을 했지만 그것은 기우였고 출연하려는 사람들이

많아서 진행에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래서 출연자의 시간을 조절하기 위해

등장한 것이 체임벨이고 이 체임벨은 지금도

노래자랑에는 명물로 등장합니다. 지금의 체임밸은

아주 작은 것이지만 그때는 엄청 컸습니다.

 

 

 

 

1957년 7월 23일 대한 공론사

스튜디오 공개방송시절을 거쳐 남산에

훌륭한 시절을 갖추면서 노래자랑 공개방송이

있는 날이면 창청객이 몰려 들어 대 혼잡을 빚기도

했습니다.  노래를 부를 지망자가 앞을 다투었고 여성들의

 사회활동이 적었던 그 시절에도 출연자의 40%를 차지했습니다.

특별히 금지곡으로 지정된 노래가 아니면 무슨 노래던지 제한이 없던

시절이라 자유로운 속에서  노래를 불렀고 그러다 보니 일제 강점기에

 부르던 왜색가요라고 일컬어 지던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이 많아

 지식층의 우려를 자아 내기도 했지만 프로그램으로서는 

성황을 이루었습니다.  방송에서 흘러나오는 왜색

가요따라 그런 유의 노래들이 많이 유행

되던 시절이기도 했습니다.

 

 

 

 

위 사진은 명동 카토릭 문화관에서

 장기범 아나아운서 (위 좌)사회로 진행된

노래자랑 모습입니다. 6.25전의 공개방송이 6.25전에

 선을 보여2회를 하다가 6.25를 맞이해서 중단되었다는 얘기가

 있지만 어디서 여떤 형태로 한것인지 자세한 내용이 없어 1955년

동화백화점에서부터의 노래자랑을 그 시초로 봅니다. 노래자랑은 변변한

 스튜디로가 없던시절 동화백화점(지금의 신세계백화점)이나  카토릭 문화관

 등을 빌려 사용하고 또 1957년 7월 23일에 문을 연 대한공론사 스튜디로를

 활용하다가 남산에 스튜디오가 마련되면서 공개방송이 활성회 되었

습니다.  또 노래자랑은 그 특성상 야외 공개방송이나

현장에서 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이 프로그램은  대부분의 지방방송국에서도

편성되어 지역주민들의 적극적인 참여하에 화합과

즐거움을 더해주는 프로그램으로 자리매김 했습니다.

방송국별로 전속경음악단도 두고 전속가수도  뽑아서 지역

가수를 양성했습니다.  큰 지역 행사가 있을때는 노래자랑

공개방송이 등장해서 청중들과의 호흡을 같이 했습니다.

위 사진은 1960년 춘천방송국에서 김영길 아나운서

사회로 진행된 춘천방송국 군 위문

공개방송 모습입니다.

 

 

 

 

1960년부터 전국 아마츄어 톱싱거 대회가

마련되어어 가수 등용문이 되었습니다.  첫 대회은

1960년 12월 18일 오후 1시부터 3시까지  을지로 6가에 있었던

서울 음악대학 강당에서 게최되어 이후 연례행사로 정해진 대회로

이때의 참가자격은 서울은 KA의 아마츄어 · 쇼에서 4회이상 연승한바 있는

매월의 톱싱거이고 지방은 각 지방국별로 심사를 거쳐 1명이나 두명을 추천했습

니다. 서울대표 여자 4명과 남사 1명 지방대표 18명 모두 23명이 참가한 대회에서

 1등에는 서울 송미현양이 10만원의 국무원사추처장 상금을 받았고 2등 서울 한명자양,

 3등 서울 이길남군4등 목포 백수련양, 5등 서울 이미애양이 입선되어 전속가수

 자격을 얻었습니다.  이밖에도 대전 김선풍군과 부산 남상규 군이 장려상을

받았습니다. 이때의 심사는 박시춘, 송민영, 황문평, 손석우, 현인,

 김호길님이 맡았고 김광수 악단이 출연했으며 사회는

임택근 아나운서가 맡았습니다.

 

 

 

 

위사진은 두번째로 열린

61년의 톱싱거선발대회 모습이고

아래는 64년에 개최된 전국 아마츄어

톱싱거 대회 모습입니다.

 

 

 

 

 

 

 

 

노래자랑이 인기있던 그시절  군부대 위안방송이나

지역의 시, 군민 위안방송이라는 이름으로 이 노래자랑

공개방송이 등장하고 그날이면 그 고을의 최대 명절이었습다.

서울이나 지역방송을 막론하고 가는곳마다 환영을 받고 여기에 모인

청중들은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 시절의 노래자랑은 서울의 경우 장기범,

임택근등 이름있는 아나운서가 맡아 왔고 이분들의 뒤를 이어 곽규석, 위키리님

등의 연예인들이 사회를 맡기도 했습니다. 송해님이 사회를 맡은것은 1980년대

부터였습니다. 지역에서도 간판급 아나운서가 사회를 맡았고 때로는 중앙의

연예인을 초청해서 사회를 보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위의 사진은1966년

서울방송국과 부산방송국, 해수욕장, 군 부대등을 연걸한 5원방송으로

 진행된 대형 노래자랑 공개방송이고 아래는 1960년대에 있었던

춘천방송국의 군부대 위문 공개방송 모습입니다.

 

 

 

 

노래자랑 프로듀서 6.25전후 김창구님,

문시형님 시절에 마련되어 송영수님으로 이어 오면서

라디오 방송전성시대에 라디오 방송프로그램의 중심 프로그램으로

 자리 잡았고 TV방송에서 지금도 그 맥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1960년대

중반 춘천방송국에서 프로듀서를 했던 저도 군부대나 시, 군민 위안

공개방송을 한다면서 많이 돌아 다녔습니다.

 

 

 

 

노래자랑 공개방송 초기 체험담 1,  문시형님

 

 문자 그대로 우뢰와 같은  박수 소리가

서울의 한 복판 소공동에 자리 잡은 공회당을

뒤흔든 것은 1950년 5월초의 일이다.  방송사상 처음으로

 KBS마이크가 대중 속에 깊숙이 파고들고 대중과 더불어

호흡을 같이 할 스무고개 공개방송이 공회당

대 강당에서 막을 올린 것이다.

 

공회당은 방송과 인연이 매우 깊은 곳이다.

 KBS가 탄생되기도 전인 1925년에 조선일보사가

 주최한 공개시험방송이 실시된 곳도 역시 이 공회당이어서

 그 인연이 매우 두터운 곳이라 아니할 수 없다.

 

30평 남짓한 정동연주소 제1스튜디오에서

불과 4-5십 명의 방청객을 모시고 공개방송을 하던

 스무고개는 최고 인기를 독점한 인기 프로그램이었다. 그러기에

 방청객은 쇄도하고 수용능력은 없고 5월의 늦은 봄이건만 너무

더워 어름기둥을 두세 개 세워놓는 야단을 부리기도 했으나

더 이상 스튜디어에서 스무고개  공개방송을 실시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되고 말았다.

 

이럴 때 넒은 공회당으로 옮기고

경찰악대와 어린이 합창단의 동원도 동원이지만

기마대 까지도 동원하였으니 얼마나 성황을 이루었는지는

 제언 할 필요가 없겠다. 불행히도 6.25사변으로 단 2회의

공개방송으로 끝을 맺어 안타까운 일이었다.......

 

 

 

 

1953년 정부기 수복된 후 스무고개는 또다시

스튜디오를 떠나 동화백화점 ( 지금의 신세계 백화점 )

 4층으로 진출하여 청취자들의 박수갈채를 받았다. 이때 탄생한

프로그램이 노래자랑으로 스무고개와 파트너를 이루었다. 당시는

 KBS독주 시대였음으로 장소 사용료도 없이 심지어는 쇄도하는

 방청객으로 인해 유리창이 깨져도 보상함이 없이 스무고개와

노래자랑은 인기절정을 이룩했고 일선장병 위문과 산업전사

위문에 전후방을  동분서주 하며  정열을 쏟기도 했다.

이 스무고개   공개 방송은  새로운  프로그램을

탄생시키면서 또한 방송과 청취자의 거리도

좁히는데 크게 이바지하기도 했다.

 

 

노래자랑 공개방송 초기 체험담 2,  김창구

 

 

 

 

김창구님 방송사상 최초의 노래자랑 공개 방송이

드디어 시작되었다. 광고방송을 멏차례 하고 나니 당일

동화백화점에는 출연자와 방청자가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너무 사람이 많이 들어와서 출입문을 다치고나니 유리를 깨고 다친 문을

부시고 노도처럼 밀려 들어 왔다. 속수무책이었다. 입추의 여지가 없어 공개방송을

진행하기 어려 웠지만 첫 약속을 어길 수도 없었다. 사회를 맏은 장기범 아나운서에게

녹음개시 신호가 같다. 그런데 당대 제 1 인자 였던 장 아나운서가 부들 부들 떨고 있지

않은가? 지금도 그 모습이 눈에 선하다. 사실 무대에 처음 서게되면 조명은 비치는데

객석은 불을 꺼서 자세히보이지 않고 부엉이 눈마냥 눈 동자만 역광에반짝 거리니

떨릴 수 밖에. 딩 동 댕 합격한 출연자에게 지정곡을 주기 위해  8절지만한

 메모지에 큰 글씨로 곡목을적어 내가 넘겨 주었는데 장 아나운서는

 공개방송이 끝난 후 너무 떨려서 그 글씨가

안 보이더라고  말 한적이 있다.

 

 

KBS 남산방송국, 노래자랑 공개방송을 방청하기 위해

사전에 방청권을 받은 방청객들이 장사진을 이루웠습니다.

 

 

노래자랑이 선풍적인 인기를 누리면서 

대중가요 가수를 지망하는 사람들은 늘어 났고 

대중가요는 한층 더 생활 속 깊숙이 파고 들었습니다. 

대중가요 프로그램이 늘어 나고 KBS향연과 같은  

대형 프로그램이 탄생 했습니다.

 

  

노래자랑 장면 몇 편을 올렸습니다.

 

 

 

 

춘천방송국에서 1960년대 중반에 행한

 일선장병 위문 공연 장면. 장병 노래자랑 위주로

진행되었는데 군단장이하 장병들이 참여한 모습입니다.

전방에 위치한 춘천방송국은 군을 대상으로 군가 경연대회도

가졌습니다.   PD이었던 이범진, 엔지니어 이었던 윤성호,

김중기님이 보이십니다. 윤성호님은 남산송신

소장등을 거쳐 현재 사우회 회원이십니다.

 

 

1971년에 청주 방송국에서 실시한 군민위안 공개 방송 모습입니다.

 

1979년 서남 해안의 섬 흑산도에서 있었던

 노래고개 세 고개 공개방송 모습입니다.

 

 

 

대전방송국에서 실시한  노래자랑  공개방송에서

 입선자에 대한 시상 장면. 당시의 방송부장 전응우 님이

시상 하고 있습니다. 방송부에는 지금의 편제국과

보도국기능이 그 안에 있었습니다.

  

 

 

 

 

 KBS 홍보실 제공 2011년 연말결선 관련 글

 

 

전국노래자랑 2011 연말결선이 12월 18일, 오후 5시 KBS홀에서

열렸다. (방송: 12월 25일 일요일 12시 10분부터 120분간) 지난 7월부터

12월까지, 2011년 하반기동안 각 지역에서 입상한 팀을 대상으로 연말 결선

 예심(12월 4일)을 치러 최종 통과한 총 스무 팀이 2011년 하반기 최우수상을 놓고

 열띤 경합을 벌였다. 이날 하반기 최우수상의 영예는 인천 옹진군편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했던 박비엔나(여/28, 필리핀에서 한국으로 시집 온 주부)씨가 수상했는데,

 뛰어난 가창력과 무대매너로 마야의 ‘진달래꽃’을 불러 관객과 심사위원

모두를 압도했다. 무엇보다 전국노래자랑 2011 연말결선의

백미는 상반기 최우수상 수상자와 하반기 최우수상

수상자가 벌이는 대상 결정전!

 

대상결정전에서는 상반기 최우수상 수상자인

원진경(여/20,학생)씨가 우연이의 ‘당신만’을, 하반기

최우수상 수상자인 박비엔나(여/28)씨가 다시 한 번 마야의

 ‘진달래꽃’을 불러 진정한 노래 왕을 가린 끝에 박비엔나(여/28)씨가

 전국노래자랑 2011 연말결선 영예의 대상을 수상했다.

 

일요일의 남자 송해와 KBS 아나운서 박은영의

공동 진행으로 치러진 이번 연말결선은 뛰어난 노래실력을

자랑한 출연자들 외에 다양한 볼거리가 많았다. 유치원생(황민우/7)의

 화려한 춤 실력부터 83세 할아버지가 보여준 열창의 무대까지 남녀노소

 전 세대를 아우르는 풍성한 무대를 선보였는데, 특히 6세 손녀와

60세 할아버지가 함께 ‘당신이 좋아’ 듀엣 무대를

선보이며 훈훈한 장면을 연출하기도 했다.

 

또한 전국노래자랑 2011 연말결선에서는

포복절도할 입담과 화려한 개인기를 선보이며 객석을

뜨겁게 달군 출연자, 박진영의 ‘Honey'를 부르며 찰떡 호흡을 선보인

 부부, 송창식을 꼭 빼닮아 관객을 놀라게 했던 출연자 등 다양한 사연과

재주를 가진 출연자들을 만날 수 있었다. 특히 태진아를 쏙 빼닮은 출연자와

 진짜 가수 태진아가 ’동반자‘를 함께 부르며 듀엣 무대를 연출하기도 했는데,

관객과 심사위원의 폭발적인 환호와 응원 속에 특별한 무대를 만들기도

했다. 한편 2011 전국노래자랑 연말 결선을 맞아 기획한

 하이라이트 모음(VCR)을 통해 전국노래자랑의

한 해를 돌아볼 수 있었다.

 

예심현장의 뜨거운 열기를 느낄 수 있었던

 ‘예심현장 열기 속으로’, 넘치는 끼와 열정을 보여준

 ‘2011 팔도명물열전’, 다양한 사연과 의미가 담긴 ‘2011

전국노래자랑 이모저모’, ‘전국노래자랑 앗! 이런 일이’ 등

전국노래자랑의 지난 시간을 짚어볼 수 있는 의미 있는 영상도

만날 수 있었다. 전국노래자랑 2011 연말결선은 오는 12월

25일(일) 낮 12시 10분부터 120분간 KBS

1TV에서 방송되었다.

 

 

관련 글 보기 영문자 클릭

 

송해의 방송인생, 송해를 품다, 딴따라 송해, 노래자랑

http://blog.daum.net/jc21th/17782480

 

최고령, 최장수 노래자랑 사회자 송 해님!

http://blog.daum.net/jc21th/17780297

 

방송사상 최 장수 프로그램 노래자랑  

http://blog.daum.net/jc21th/17780321

 

아리랑, 평양 노래자랑에서 남과 북이 함께 불렀던 민족의 노래 사회/송해, 전성희

http://blog.daum.net/jc21th/17780980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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