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3년 2월 중순경 나는 단파사건에 말려 들어
경성방송국의 다른 아나운서와 편성과원 기술과원등 수많은
방송관계자 들과 함께 경성도경 유치장 감방 여섯방에
나뉘어 같이게 되었다.
특히 아나운서 들은 따로 따로 격리시켜 놓아서
한방에 담당 아나운서( ? ) 한사람씩 있게 배치 하였다.
하도 혼이 나서 지금도 기억이 생생 한데 동일 감방에는
내가 있었고 동 2 감방에는 송진근 아나운서, 동 3 감방에는
김준호 아나운서 서 1방에는 양재현 아나운서,서 2 방에는
박용신 아나운서,서 3방에는 손정봉 아나운서 등이
포진하고 있었고 방송기계 기술자는 각 방에
5명 내외씩 있었다.
그런데 차례로 끌려 나가 고문받고 들어오기도
지긋 지긋 한데 유치장 간수들은 갇혀있는 아나운서들을
시켜서 매일 아침 궁성 요배 ( 遙拜 )의 구령을 부르라고
하는가 하면 밤에는 심심 파적 삼아 신문을 갖다 주고는
뉴스 방송식으로 크게 읽어보라기가 일수라 아무리
강제로 목이 매어서 끌려간 강아지 신세 이기로
그 속에서 아나운서 복습을 할 기분이
날리 만무 했다.
그 때 하도 어이없고 기막혀 하던 일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 하다. 그러더니 송진근 아나운서는
간수들에게 졸리다 못해 하루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
축구 실황 중계 방송까지도 강요 당해서
한 일이 있었다.
아마 유치장 속에서 까지 방송(?) 해본 아나운서는
우리들 밖에는 없을 것이다.
이현 선배님의 옥중 방송기였습니다.
이 현님은 1938년 경성방송국 22세로
아나운서 공채로 입사해서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농구 중계방송을 한 아나운서이기도 하다.농구 협회 전무이사
방우회 결성 초대회장, 사단 법인한국 방송회관 이사장,
덕수 이씨종친회장등으로 활약했다.
일제의 탄압애서 어렵던 그날을 생각 하면서
더욱 자랑 스러운 나라를 이룩하고 더욱 자랑스런 방송사를
써 나갈 수 있도록 다같이 힘을 기우렸으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