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기술

한덕봉이 방송기술을 이끌던 시절

이장춘 2009. 5. 23. 04:49

 

 

 

 한덕봉이 방송기술을 이끌던 시절

 

1925년부터 방송국설립에 참여한 한덕봉은

우리나라 최고의 방송기술인으로 경성방송국 연주소 건립,

우리말 전담 방송전파를 발사하게 된 연희송신소의 신축, 개소 

동양최고의 50Kw출력증강, 부산을 비롯한 전국 라디오방송망의

건설등 실로 일제강점기 방송국 건설 기술적인 운영에

그의 손이 미치지 않은곳은 없었다.

 

그 시대의 최고 방송기술인이었다. 

우리나라 사람이기에 주요보직은 오르지 

못했을지라도 기술력이나 영향력은  일본  기술인을 

능가하는것이었다.  1950년 6.25로 북한에 납북당할때까지

우리 방송기술을 이끌어간 사람은 한덕봉이다. 

 

 

 

 

 無線電信一級技士

 

日本國際汽船의 韓德奉氏入京,

 

옛날 長薰學校츌신, 大西洋上의 生活//

 

「三一運動 消息도 大西洋上에서 들엇소」

 

 

 또 배를타야겠다는 한덕봉씨의 말

 1924년 12월 5일자 동아일보 2면 한덕봉님에

 관한 기사 머리글이다.  위에 있는 기사와 아래 있는

사는 같이 붙어 있는 것인데  편의상 분리했다.

 

 

 이 기사를 보면 한덕봉이 방송국에

들어오기 전부터 어떤 분이었는가를 짐작

할 수 있다. 일본에서 조선인 무선기사 3명 가운데

 한분이고 1급기사는 한덕봉 한분이었다고 되어있다.

한덕봉은 1995년 10월 25일 서울에서 테어나셨고

1908년 장훈학교를 나오신분임을 말씀드리며

지금쯤은 이미 고인이 되셨을 법하다.  

 

어쨋던 이 기사에서는 배를 더타겠다고

했지만 방송국 설립 얘기를 듣고 그뒤  더 이상

배를 탄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1924년 말의 기사이고

 이 때는 시험방송을 하고 있을 무렵이다. 국사편찬위원회에

 보존되어 있는 자료는 동아일보의 이 기사와 1929년 무선전화에

대해서 직접 글이 있다. 1945년 10월 1일자 대한매일신보에

조선방송협회 기술부장이 되었다는 기사도 있다.

 

 배 타면서 연간 수입이 2,200원이라고

해서 한국은행에 조차 정확한 계산을 못한다.

그 시절에 사시던 분들이 쌀 한가마니에

1원 50전이이었다고  하는것을 보면

가늠되지 않는 금액이다.

 

 

세계적인 무선기술자가 우리나라

 방송기술계를 이끌어 간 것이다.  한덕봉보다

더 먼저 기술인으로  방송에   참여한  노창성은

방송국 초창기부터 어려운 경영난을 타개하기위해

경영쪽에  힘을  기울였고   1938년  함흥방송국장,

1939년 조선어방송 전담부서였던 제2방송부장을

 맡아 방송에 힘을 기울였지만 한덕봉은 오직

방송기술 한길만을 걸어왔다.

 

다음 사진은 선생님이 함흥방송국

가술과장 재직시에 전 직원이 함께 한 사진이다.

 

 

한덕봉이 방송국에 들어 오기전부터

무선계에서는  '한국의 마르코니"로 널리 알려졌고

1924년말 12월초 제물포항에 입항했을때는 대대적인

 환영과 위의 기사에서 보듯이 신문에서도 대서

특필 할 정도로 명성이 있었다.

 

1급 무선무선기술사로, 단독으로

 송 · 수신기를 책임지고 다룰 수 있는 능력이

있었으며, 또 외국어에도 능통한한덕봉이 방송국에

영입(迎入)되어 방송국일에 여념이 없었다. 

 

방송국을 설계하고 기계를 들여오고

방송국 건물을 짛고  기계를 설치하고 또 방송국

 문을 열면서 어려운 경영문제를 해결하기위해 라디오

수신기보급에 힘을 기울이고 방송국 기술자 양성은 물론

 라디오 상회를  운영할 사람들에게  기술을  보급하고

값싼 보급형라디오를 만들도록 하는등 늘 바쁘기만

했다.  한덕봉 곁에는 건강 유지를 위한  한약

 다리는 냄새가 끊이질 않았다고 한다.

 

 

1937년 연희송신소 50Kw출력증강때는

 일본에서 공부한 천재기술자 황태영을 영입해서

성공리에 일을 마치자 일본인들을 설득해서 파격적인

 기사 승진이 이루워질 수 있도록했고 뒤에 최초로 이리방송국

 기술과장보직을 무여 할수 있도록 하면서  본인은

 평양방송국 기술과장을 맡았다.

 

평양방송국 기술과장시절

항일단파방송 연락운동의 훼오리가

몰아쳤다.  소속직원들을 보호하기위한 나름대로의

 대책을 강구해서 평양방송국 직원들은

큰 피해없이 난국을피해갔다.

 

단파사건 후 다시 경성방송국으로

돌아왔을때는 기술과 부과장이 되었다고 했다. 

부과장이라는 정식 직제가 있었는지는 몰라도

이 보직마져 경성방송국에서 기술자에게

주어진 최초이자 마지막보직이다.

 

해방되고 일본인이 모두 면직되면서

1945년 10월 1일자로 조선방송협회 기술부장이

된다. 그때의 조선방송협회 경영진은

다음과 같았다.  

 

會長代理 李晶燮

 

庶務課長 權泰雄

 

總務部長 李晶燮

 

技術部長 韓德奉 

 

경성방송국장은 이혜구였고

 협회 부장은 경성방송국장과 동격이었다.

해방되고 부터 명실공히 모든기술책임이 한덕봉에게

 주어진 것이다. 내부적인 문제도 일도 많았지만 국제적인

일도 많았다. 콜 싸인등 당장 해결해야 할 일도 많았고

 ITU등과 관련되는 여러일도 있었다.   

 

 ITU 에서 우리나라가 처음으로

국제사회가 인정하는 HL을 배정받은 것이

1947년 9월 3일이고 그날을 방송의 날로 정해서

해마다 행사를 하고 있지만 그 때만 해도 미군정 시대라

미국대표를 통해서 일이 처리 되었다.

 

1948년 정부가 수립된후부터  우리 대표가

 회의에 참석하게 되어  이 때 우리 대표로  한덕봉이

 참여했다. 우리나라가 국제 방송관련 회의에

처음으로  참여 한 대표가 되었다.

 

 

 1948년 제네바 ITU대표참석 송별연 ( 왼쪽 네번째)

 

한덕봉님이 제네바에 도착한 것이

 1949년 2월 27일로  옵서버 자격으로 참여코져

 했는데 소련 대표가 반대해서 결국 표결을 거쳐 22:10으로 

침석이 가결 된 것은 4월 1일 이었다. 이 회의를 통헤서

 필요한 주파수를 얻고 국제적으로 무선 기술의 협력을

얻을 수가 있었다. 우리나라가 정식으로 ITU에

가입한 것은 1950년 10월 19일의 일이었다.  

 

1949년 ITU참석기념(앞줄중앙)사진으로

앞줄 왼쪽부터 권태웅, 이관희, 한덕봉, 정효근, 박노연,

뒷줄 왼쪽부터 민재호, 신경석, 이규일, 권한섭,

송영호, 하기영, 김도현,민병설

 

 

 

1949년 기감직제가 신설되던 초기에

 기감자리를 아나운서 출신 이계원이 그 자리를

맡은적도 있었지만 11월부터  6.25전란으로

납북 될때까지 기감을 맡았다.

 

한덕봉은 1940년대 초에 “방송은

호랑이보다 더 무섭고 위대한 힘을 지닌

 괴물”이라고 얘기 했다고 한다. 방송의 중요성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방송인이었다. 

 

최후로 납불될 때까지 직원들에게는

 피신을 권유했고, 6월 25일에 수령해야 할 직원들의

보수가 지급되지 어려웠을때 손수 서무과에서 보수를 수령해서

나누워주어 그때  받은 보수를 피난길에서 요긴하게  쓸 수 있었다고

그 당시 기술직원들의 한결같은 회고담이고 보면 직원사랑하는 마음

 각별했음을 할 수있다.    선생님은 방송국과 직원들을 아끼고

 사랑하는 진정한 방송인이었고 최고의 방송기술자였음은

그분과 같은 시대에   기술업부를 수행하던

후배 직원들의 한결같은 회고담이다.

 

님과 해어진지 오래여도

그 업적은 남고 그를 기리는사람들은 많다.

2001년 대한민국 방송인 명예의 전당이 발족하면서

 첫번째 명예의 전당에 오르고 그동안 그 증표를

전해주지 못하다가 그의 가족이 나타나

 2009년에 전달되었다.

 

 

KBS방송기술인 협회에서는

한덕봉상을 마련하고 방송기술에 공이

많은분을 찾아 한덕봉상을 준다. 다음은

2005년 한덕봉상 수상장면이다.

 

 

  

 

 

 

 

 

 

한덕봉 선생님 약력

 

 

KBS방송 박물관과 필자가 조사한 내용을

토대로 작성된 사항입니다. 일부 불명확한

내용은 계속 확인 하겠습니다.

 

 

1895년10월25일 - 서울에서 출생

1908년 9월12일 - 경성 장훈학교(사립) 졸업

연도미상        -  일본 메구로(目黑) 고등무선학교 졸업

1922년 7월8일     (일본 체신대신) 사설무선 전신통신종사 1급

                    자격검정합격, 증서(제526호)

1925년, 26년간  - 경성방송국(JODK) 개국요원으로 방송계 입문

1931년 12월14일  (일본 체신성) 무선통신사1급 자격검정합격,

                    증서(제1236호)

1936년 9월7일  -  조선방송협회 기술과 근무

1938년10월7일  - 중앙방송국 기술부 기술과, 조사과 겸직

                    이후 공무과 근무

1940년2월6일~41년(불명) -함흥방송국 기술과장(기수)승격

1941년-1943년(불명)     -평양방송국 가술과장

1945년 1월1일           - 조선방송협회 기술과 부과장(기사)

1945년 10월 1일         - 조선방송협회 기술부장

1946년  8월31일         - 조선방송협회 기술국장

1948년11                 - 제네바 무선회의 한국대표 참가

1949년                   - 공보처 기감(技監)(1949년 8월 이계원으로 교채)

                            (공보처 방송국 서무과소속 근무)

1949년11월              - 이계원 퇴직후 기감복귀

1950년                   - 한국전쟁시 납북 (拉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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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마르코니 한 덕 봉 / 전 방우회장 문시형님 유고

http://blog.daum.net/jc21th/17780776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