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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방송국과 가수왕 왕수복(王壽福-왕성실)

이장춘 2022. 9. 18. 13:20

경성방송국 출연시의 왕수복(왼편) 과 광고모델(오른편)

 

일제강점기 36년을 통해 최고의 가수로 평가 받은 왕수복!

1933년 말 그의 히트곡 「고도의 정한」을 취입 할 무렵 경성방송국에서는 만주와 대만을 포함한 일본전역에 중계 방송되는 프로그램을 새로 마련, 그 첫 프로그램으로 1934년 1월 8일 JODK 관현악단의 반주에 맞춰 왕수복의 대 히트곡 ‘고도의 정한’을 비롯해서 신민요 ‘아리랑’ ‘雪의 沙漠’ 세곡이 전파를 탔다.

평양기생 왕수복이 비행기로 서울에 와 경성방송국에 출연하던 때 그를 능가하는 가수는 없었다. 17세에 부른 고도의 정한 음반이 무려 120만장이 팔렸다고 한다.

민족잡지 삼천리지가 1935년 1월부터 10월까지 전국을 대상으로 실시한 가수 인기투표에서 1,903표를 얻어 남·여를 통틀어 1위에 올랐다. 우리가 흔히 잘 아는 이난영은 873표, 고복수는 674표를 얻었다.

조선일보, 동아일보를 비롯한 신문과 삼천리 지를 비롯한 잡지 등에 가장 많이 오른 가수

이름이기도 했다. 그러던 중 「중·일전쟁」 등 차츰 어려운 시절로 접어들고 일본말로 노래를 불러야 하는 시기가 오자 23살 때 노래를 접고 성악공부를 위해 일본유학을 떠났다.

유학길에서 돌아와 문필가 이효석과 뜨거운 사랑에 빠지면서 결혼을 하려 했지만 요절하자 임종을 지켜보면서 실의에 젖었을 때 그에게 힘을 준 김광진 (김일성의 경제선생님)과 결혼해서 살게 되었고 김광진의 약혼자였던 노천명은 미혼으로 생을 마쳤다.

남·북이 갈리면서 남한에서 왕수복의 노래를 듣는 것은 멀어졌지만 북한에서는 김일성·김정일 2대에 걸쳐 영웅대접을 받으며 살다가 2003년 86세로 세상을 떴다.

춘하추동방송 블로그를 처음 열던 시절 「고도의 정한」을 비롯, 몇 곡의 노래를 어렵게 구해서 올렸을 때 아버지·어머니, 할아버지·할머니가 듣고 싶어 하신다며 파일을 요구해온 분들이 있었다. http://blog.daum.net/jc21th/17782938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