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원! 방송 프로듀서, 연출가 그의 인생역정은 대한민국 TV드라마 초기역사다. 대한민국 본격적인 TV방송드라마 1970년의 돌풍「아씨」로부터 시작된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그 아씨를 만들어 낸 주인공 프로듀서이자 연출가, KBS TV가 개국하고 드라마 방송이 시작되던 1962년 으로부터 1990년대까지 TV드라마 방송과 함께 해온 고성원!, 국민이면 마음속 깊이 각인되어 있는 그 드라마들!. 아씨를 비롯해서, 마부, 여보 정선달, 대추나무 사랑 걸렸네, 청실홍실, 대명, 연화궁, 꽃버선, 숙부인 등등 KBS와 TBC 방송채널을 통해서 방송된 불후의 명작들이 그의 머리에서 기획되고 그의 몸과 마음으로 연출되었다. 오늘 글은 또 한사람의 TV방송 드라마와 함께 해온 임학송님이 1990년대 주간경향 1311호부터 1317호까지 7회에 걸쳐 연재한 글 전문을 올렸다. 이 글을 통해서 고성원의 방송인생 역정과 생생한 대한민국 초기 TV 드라마사를 알 수 있을 것이다. 필자 이장춘은 이 글을 접하고 감동한 나며지 이 작은 글씨로 된 긴 글을 침침한 눈을 부릅뜨고 밤, 낮 하루 만에 워딩을 마쳤다. 고성원(고성원의 부인이자 인기탤런트 출신 김희자님이 정리해서 보내준 史料)으로부터 받은 수많은 자료를 바탕 으로 춘하추동방송 이장춘의 글도 함께 올리려고 했지만 임학송님 글 양이 너무 많아 한편으로는 도저히 더 이상 올릴 수 없기에 다음 기회로 미루고 이미 써 올린 아씨에 관한 글 한편을 연결한다. 머리 동영상은 고성원이 기획 하고 연출한 아씨 마지막회인 253회에서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이동영상은당시의 기술감독 윤성현님이보존 해 오신 것이디 1963년 KBS-TV 드라마에서 열연하는 나옥주! 나옥주는 고성원이 추구하는 이상형 배우였다. 뒷날 나옥주 이메이지와 통하는 미녀 인기탤런트 김희자를 일생의 반려자로 맞아 드렸다. 김희자는 고이 간직한 고성원의 放送史料를 챙겨주셨다. 아씨 글 보기 아씨, 1970년 그때 그 드라마 고성원 기획, 연출, 임희재작, 김희준 주연 1987년 방우회 회원들과 함께 한 임학송 여의도 야화 고성원 편 임학송 서울예전 교수 전 KBS TV 연출가 한국 방송사의 인맥 뒷얘기 주간경향 1311호-1317호 아씨 촬영 스튜디오에서 고성원 PD, 「아씨」 주인공인 김희준과 포즈를 취했다 불시착 인생 요즘 KBS 제작단 상무이사로 재직 중인 고성원이 자신을 가리켜 스스로 하는 말이 다. 그의 인생은 분명 목적지를 향해 한동안 순조로이 날고 있었다. 그러나 활주로에 내려 앉자마자 주위를 둘러 보고는 목적지를 변경 또 다시 하늘로 치솟고 만다. 그러기를 몇 번 연료를 모두 소비해야만 구성원은 추락 직전에 가서야 어쩔 수 없이 아무데나 내려 앉고 말았다. 이른바 불시착이다 그것은 낯선 TV 방송이라는 신설된 공항이 없고 그는 드라마라는 격납고에 수용되고 그래서 난생처음 TV라는 매체를 통해 드라마라는 것을 공부 하기 시작했다 그의 인생은 참으로 우연히 그리고 숙명적으로 그렇게 시작되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60년대 초반 KBS에 발을 들여놓은 김재형과 고성원은 모든 면에서 좋은 대조를 이룬다. 김재형의 성격이 남성적이고 능동적인데 반해 고성원은 여성적이고 수동적이다. 김재형의 드라마는 선이 굵고 거친 반면 고성원 드라마는 정적이고 아기자기하다. 김재형은 일을 만들어 하는 천부적인 성격이지만 고성원은 주어진 일에만 열심히 방어적이다. 그래서 김재형과 부딪히면 적어도 표면상으로는 손해를 보는 것 같지만 결과적으로는 판정승 할 때가 많다. 아펠바흐의 성격 분석을 논의하지 않고도 여성이 남성에 비해 실리를 더 많이 확보한다는 것을 우리는 늘 상 보아온 터이다. 고 성원의 그런 성격은 그의 어렸을 적 인격형성 과정해서 비롯되었음을 찾아낼 수 있다. 고성원 나이 4살 때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지만 다행히 아버지는 넉넉한 유산을 남겨놓았다. 여자들 할머니 어머니 누나만이 집을 지키고 사는 틈바구니에서 애지중지 자라온 그는 할머니와 어머니의 뜻대로 온순하고 말 잘 듣는 착한 아이로 성장했다. 이른바 마마보이였다. 그러나 그의 장래를 결정하고 이끌어 줄 남자가 집안에 없었던 관계로 그의 목표는 항상 흔들리고 있었다. 중학교 졸업반이 되자 아들의 진로를 걱정하는 어머니에게 문간 방에 세들어 사는 아저씨는 그를 공업계인 건축과로 보내라고 충고했다. 한전 공사감독으로 일하고 있는 그 아저씨는 자기처럼 기술이 있어야 평생 먹고 사는데 걱정이 없을 거라고 했다. 당시 정부는 기술입국 정책을 내걸어 공업계열을 우위에 두고 선발 고사도 공업계열은 1차로 인문계열은 2차 전형일로 정하여 우 선 선발권을 공고에 주고 있었다. 고성원은 인문 계인 경동고를 지원하고 싶었으나 어머니의 애처로운 뜻을 거역할 수 없어 한양공고 건축과를 지원 무난히 합격했다. 공고를 다니면서 그는 건축관한계의 일이 자신의 적성에 맞지 않음을 세삼 느꼈다. 설상가상 6.25가 터져 학교는 폐쇄되고 그의 책가방은 방 한쪽 구석에 아무렇게나 내전 내던져졌다.수복 후의 혼란은 그로 하여금 학교와의 거리를 멀게 했고 그 발걸음을 영화관으로 옮기게 했다. 단속 교사들의 눈을 피해 까까머리를 감추느라 중절 모자를 눌러쓰고 영화관을 밤낮 없이 출입 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청소년들이 드나들 곳이 없었던 것도 이유 중 하나였다. 재수 없이 단속에 걸릴 때를 대비하여 학생증은 양말 속에 숨기고 다녔다. 그의 공부방 벽은 날이 갈수록 영화배우 사진과 포스터로 도배로 겹겹이 덮여 갔고 가방과 책상 서랍은 학교 공부 책 보다 영 화 브로마이드가 더 많았다. 그가 본 영화 중에서 특히 그의 가슴을 친 것은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몽고메리 클리프트가 주연한 젊은이의 양지였다. 그 영화를 보고 너무 흥분한 나머지 며칠 동안 잠도 자지 못했다고 한다. TV에서 줄곧 멜로드라마를 즐겨 해 온 것은 그 영화의 영향이 크다고 그는 술회하고 있다. 이 때문에 공전의 히트작 아씨를 기점으로 남이 추종할 수 없는 멜로드라마 연출의 대가로 군림 한 것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그 당시 그는 영화감독이 된다거나 배우가 되겠다는 꿈은 한 번도 보지 못했다고 한다. 한양공고를 졸업할 무렵에 집에서 진을 치고 살다시피 한 친구들은 거의 소양됨을 보고 국문학과를 지원하라고 했다. 그도 내심 그런 생각도 있었지만 평생 먹고 살기 위해서는 기술자가 되어야 한다는 어머니의 간절한 소망은 어쩔 수 없는 착한 아이 고성원은 서울공대 섬유공학과를 지원 했다. 그러나 낙방의 쓰디쓴 고개 고배를 마시고 말았다. 그래도 기술자가 되는 길이 어머니를 기쁘게 하는 일이라 생각한 그는 한양공대 전기학과를 지원했다. 열심히 학교를 다니긴 했지만 전기란 그에게 끔찍한 괴물 덩어리 외에 아무것도 아니었다. 3학년 2학기 때 군에 입대한 그는 3대 독자에게 주는 특전을 받아 10개월 만에 제대를 한다. 비록 짧은 군대 생활이긴 했지만 어머니와 떨어져 혼자 살 수도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았다. 군 생활은 사나이들만의 세계였다. 그 사나이들은 제각기 독립된 꿈을 지니고 있었다. 그 사나이들에게 그는 값진 자극을 받았다. 기술자가 되는 것 만이 효도하는 길은 아니지않겠는가. 요는 돈이다. 그가 우선 생각하는 것은 돈이었다. 돈을 많이 벌어 어머니를 즐겁게 해드리자 복학을 포기하고 친구들과 어울려 장사를 시작했다. 서울에서 의복이나 양품을 사다 시골에다 팔고 시골에서는 쌀과 야채 실어와 서울에서 파는 이른바 유통 사업이었다. 장사를 한답시고 온 지방을 다 돌아 다녔으나 장사는 그의 뜻대로 쉽지만은 않았다. 장사 한답시고 많은 돈만 거덜냈다, 실패의 원인을 경제지식 부족으로 여겼다. 경제학 공부만 하면 장사 잘하는 방법을 터득할 것이라 믿었다. 못해도 은행 같은데 취직은 될 게 아닌가. 다니고 있던 한양대학교는 공과대학 이었기 때문에 전공해야 할 경제학과가 없어 동국대 경제학과 3학년으로 편입했다. 당시에 대학 제도는 전공에 관계없이 재직 중인 학년으로 전과나 편입이 가능했던 엉성한 시절이었다. 졸업하자마자 고성원은 KBS에 임시직으로 특별채용 되었다. 경제학과 졸업장이 위력을 발휘한 것이다‘ 한 달 후 그는 TV 재작요원 공채 모집에 응시하여 정식 공무원이 된다. 직급은 주사보였다. 그는 난생 처음 드라마를 대하게 된다. 극장 관객 속에서나 먼발치로 볼 수밖에 없었던 그 유명한 배우들을 면전에 대하고 보니 가슴이 벅차 심장이 멎을 것 같았다. 80년대 고성원 PD의 모습 그는 살아있는 멜로드라마의 대부로 아씨라는 불후의 특잡을 남겼다 2. 드라마로의 불시착 그것은 불시착이 아니라 충분히 예상했던 일이다. 다만 가정적 환경과 그 성격이 자기 개발을 더디게 하는 것뿐이지 청소년 시절의 행적은 거의 오늘날을 점치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릴 적 동네 아이들을 거느리고 한 바탕 연극 놀이를 한답시고 깨끗이 빨래 해 놓은 이불을 둘러메고 나와 뒷 뜰 장독대에 무대를 꾸며 막을 치는 등 화장품은 온통 못쓰게 절단내 어머니와 누나에게 혼나는 일들 하며 단속 교사의 눈을 피해 새로 들어온 영화는 빼놓지 않고 봐야 직성이 풀리는 중고시절 대학시절 적성에 맞지 않은 전기학과에 다니면서 스스로를 달 래가며 이곳저곳 연극 공연장을 찾아다니던 시절 그는 그 때부터 이미 자신도 모르는 또 다른 세계에 빠져 들어가고 있었다. 거역할 수 없는 어머니 바람과 갈수록 태산인 학과 공부로 고통 받고 있었던 그는 예술성과 작품성이 농후한 드라마보다 멜로드라마 풍의 영화와 연극을 즐겼다 젊은이의 애틋한 사랑이야기를 접하면서 자신도 몰래 흘리는 눈물과 감동은 그 카타르시스를 자극하여 머리를 시키는데 최고였다. 특히 이런 드라마에 등장하는 여주인공들은 어쩌면 그렇게도 한결 같이 아름다운지 황홀하기 그지없었다. 엘리자베스 테일러, 그가 좋아하는 배우다. 그녀가 출연한 영화는 하나도 빼놓지 않고 쫓아다녔다. 그래서 그 후 그는 그의 드라마에 등장하는 모든 여자주인공이 미모이기를 한사코 고집했다. 멜로드라마 구성요건 제1조를 자연스레 터득한 셈이다. 모든 할리우드식 멜로드라마의 정석은 미모의 선남선녀를 등장시켜 일차적으로 관객을 사로잡아 놓은 다음 시련과 역경으로 점철된 애틋한 감상적 스토리텔링의 물결을 쏟아 부어 흥행에 성공한다. 그래서 할리우드 영화의 주인공들은 신인시절부터 막강한 자본주의의 계약에 묶여 개성 없는 그런 역할로 운명을 다 하다가 상품성이 없어지면 하찮은 휴지처럼 버려지고 만다. 1950년대에 들어와 미국의 젊은 작가들이 이런 자본주의 영화에 반기를 들고 보다 자유로운 영상 작품을 제작하기 위해 독립 프로덕션을 만들어 병패를 개선한다. 그 결과 성격 배우가 탄생되었고 개성 있는 명작들이 양산됐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네 TV는 아직도 그 구태의연한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어쨌든 고성원은 중. 고 시절 엘리자베스 테일러이 「영상적 환상」에 사로잡혀 성장했고 대학시절에 연극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등으로 빛나는 미모의 여주인공 나옥주의 「무대적 실상」에 매료된다. 그의 드라마 수업은 배우에 대한 팬으로 시작했고 수련장은 객석이었다. TV 드라마가 무대와 영상의 결합에 의한 것이라는 설도 있고 보면 그의 오늘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그의 여성관은 독특 하다 여성을 하나의 이성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모성으로 인식하는 버릇이 있다. 그것은 유아 시절부터 여자들만 있는 가정에서 여자들 만의 손에 의해 형성된 인격의 결과다. 일찍 홀로 된 할머니의 맹목적인 사랑, 젊어서 과부가 된 어머니의 눈물 그리고 누나의 어른스런 쓰다듬이, 몸에 배인 고성원은, 성장 하고 나서도 모든 여성을 할머니로 어머니로 누나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드라마에 등장하는 모든 여주인공은 한결같이 그의 여성관에 의해 적립 되고 있다. 임시직으로 발을 붙인 KBS에서 공채시험으로 정식 공무원이 된 그는 TV국 제작과에 배속된다. 환상의 존재로만 생각했던 기라성 같은 배우들과 가수들 틈바구니에서 이제는 낯익은 얼굴이 되어 마주칠 때마다 미소로 눈인사를 나누며 혼자 행복해 할 수만은 없었다. 프로그램 제작 현장에 투입된 고성원은 객석과 팬의 수준밖에 되지 않은 지식만으로 그 엄청난 일을 감당 하기에는 불가능했다. 모두가 숨 가쁘게 돌아가고 있으니 아무도 그를 가르쳐 주기는 커녕 돌아보지도 않았다, 전쟁터와 다름없는 현장, 새로운 산업이라 참고서적도 없다. 연극에 관한 책을 몇 권 구입 했지만 여유 있게 그 책을 소화해 내기란 이미 늦었다. 당장 현장에서 뛰어야 하고 만약 차질이 생기면 그 많은 배우들이나 가수 앞에서 벼락같은 실제 그 수모를 받아야 한다. 대학까지 나온 놈이 무슨 망신인가. 그는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자신과 관계없는 프로그램 제작에 현장까지 쫓아다니며 보고 듣고 행동으로 미쳤다. 말하자면 도제식 훈련을 스스로 쌓아가는 것이었다. 국. 영, 수로 명문 대학에 입학, 졸업하는 드라마 연출 지망생들이 견뎌 내지 못하고 도중하차 하는 것은 특수한 현장의 지식과 인내와 집념이 부족에서 오는 결과에 다름 아니다. 막연한 동경과 환상으로 시작된 취미만으로는 뒤엉킨 실타래 같은 신경으로 형성된 인생 속으로 뛰어든다는 것은 무모한 것이다. 인생이란 곧 철학이며 그것은 곧 드라마인 까닭이다. 초창기 TV 방송사는 다각도로 연출 능력을 측정했다. 드라마를 연출하기 위해서는 좌담 프로와 어린이프로 연출 과정을 겪게 하여 TV 메카니즘 훈련을 시작했으며 마지막 확인 작업으로 어린이 드라마를 연출했다. 이 연출에서 무난하다는 평가를 받으면 공격적인 성인드라마 연출을 맞게 된다. 고성원은 무난히 그 난관을 돌파했다. 개국초 KBSTV는 hlkz-tv에서 경험을 싸운 이른바 최창봉사단 연출자 이기하 허규 황은진 황재목 등등 계국 준비 요원으로 들어와 모든 연출을 맡고 있었으나. 정책적으로 KBS 공채 시험을 치르고 들어온 젊은 엘리트들로 연출 교체가 점차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개국 준비 요원들이 요구하는 직위와 직책들이 형평의 한계를 넘어 있었고 방종아리 만치 자유로운 그들은 사고방식과 행동이 조직의 시각으로는 수용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 배경을 안고 고성원에게도 드디어 드라마 연출 기회가 주어졌다 기쁘다기 보다는 겁이 났다. 주위의 축복에도 불구하고 며칠을 끙끙 앓다가 사양하고 말았다. 기존 연출자들처럼 잘 해 낼 자신이 없었다고 한 고성원의 성격을 엿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전성기의 정윤희 3 도무지 자신이 없어 고성원은 연출을 사양했다. 그러기를 몇 번, 이제는 자신을 보는 동료와 상사의 눈초리도 이상해졌다. 막무가내로 덤비는 김재형의 철판 같은 심장이 부럽기만 했다. 몇 번을 망설이다가 드디어 상사를 찾아갔다. 자꾸만 아래로 깔아 내려앉는 눈동자를 치켜세우며 빤히 쳐다보는 상사의 눈을 되받는데 필사적이었다. 고성원이 연출 하겠다고 결심할 때까지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다. 금요무대 40분 단막극- 31년 전 채색된 기억의 수첩에는 작가 이름도 드라마 제목도 지워진지 오래다. 그러나 주연으로 캐스팅된 나옥주라는 이름만 뚜렷하다. 대학시절 객석에서 그리던 나옥주 손이 닿지 않는 무대라는 피안에 서있던 그녀를 드디어 자신이 연출하는 드라마에 등장시킨 것이다. 이제 나옥주는 멀리 있는 게 아니라 자신의 옆에 배우로서 존재한다. 드라마의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상사도 동료도 그리고 나 없이도 그의 첫 데뷔를 축복해 주었다 그러나 그의 추억 속엔 선배격인 이기하가 못내 섭섭했다. 녹화기가 개발되지 못한 당시의 모든 TV 방송이 생방송으로 진행되고 있었음을 독자들은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고성원이 그 첫 드라마를 방송하는 날 이기하는 며칠 후 방송할 자신의 드라마에 사용할 야외 장면 인서트 (VTR이 없었으므로 필름으로 촬영 현상 편집하여 사용했다) 촬영을 요구했다. 고성원은 프로듀서로 이기하 팀에 속해있었다. 생방송으로 드라마를 송출하기 위에서 연출은 할일이 태산 같다. 원활한 카메라 워크를 늘 염두에 두며 완벽한 연출, 콘티를 짜느라 몇날 새우는 한 편 방송 당일은 스튜디오에 세워진 세트와 소품을 점검하랴, 의상을 챙기랴, 드라마 리허설 세트에서 연기자와 함께하는 연습과 카메라리허설 (카메라 움직여 연출 콘티에 의해 실제 방송과 똑같이 하는 거 연습)을 간신히 끝내고 음악과 효과음을 담당자와 상의하고 나면 어느새 방송시간이 닥쳐 허둥지둥 부 조정실로 뛰어 가야만 하는 그야말로 정신없는 하루가 지나갔다. 그렇게 일정이 벅차다는 걸 뻔히 알고 있으면서 이기하는 자기 드라마를 위해 구성원을 야외로 내몰았다. 웬만한 사람 같았으면 형편을 이야기하고 촬영을 다음날로 미루던가. 남에게 의뢰했지만 고성원의 소심한 성격은 그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었다. 초창기 TV 연출가는 한 컷, 한 컷 촬영하는 영화적인 몽타주 기법과 편집과정을 잘 몰라 경험이 있는 영화 출신 카메라맨에게 많이 의존하고 있었다. 이기하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당시 TV 드라마는 hlkz 출신 이기하, 황은진 허규 그리고 정소영 내 사람이 번갈아 독점 연출하고 있었고 공채로 들어온 이남섭, 김재형, 김현철 고성원은 프로듀서 자격으로 드라마 제작에 참여하면서 그들에게서 TV 연출기법을 익히고 있었다. 요즘 조연출 같은 존재이기도 했지만 엄밀한 의미에서는 행정적 책임이 강한 프로듀서 권한이 주어졌다. 드라마 결과가 나빠도 프로듀서 책임이 었고 드라마의 기획 제작 중 문제를 책임 있게 집행하는 철두철미한 프로듀서 시스템이었다. 방송국으로 보자면 이기하 등은 연출료를 받고 연출만 하는 책임 없는 객원이고 공채로 들어온 이남섭 고성원 등은 프로그램의 책임을 지는 직원이었다. 그래서 업무분담도 뚜렷했다. 프로듀서는 작품과 작가 연출자 선정을 비롯, 연기자 캐스팅까지 책임을 져야 했다. 이런 관계로 연출과 프로듀서와의 알력이 종종 일기도 했다. 프로듀서의 원하는 방송사의 간부들도 존중하여 침범하려 하지 않았다. 그 대신 방송 결과와 예산집행의 관해선 엄격했다. 고성원을 비롯한 공채출신 (공채 1기로 공보부 국립영화제작소 감독으로 근무하던 필자-임학송-도 전근해서 합류)들이 TV메카니즘을 익혀 드라마 연출에 본격 진출하게 되자 영상적 연출의 신선함이 시청자의 좋은 반응을 일으켜 종래의 영극출신 연주자들의 입지가 약화되기 시작, 그들의 이름이 TV 브라운관에서 하나둘씩 사라지고 시작했다. 이때부터 고성원은 본격적인 드라마 연출가로 확약하기 시작했다. 그가 연출한 드라마는 항상 시청자에게 어필했다. 그 이유는 그의 생각하는 방식이 시청자의 의식구조와 맞아떨어 졌고 드라마의 전개를 특수상황에서 찾지 않고 상식적인 보편타당성의 두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의 성품구조는 방송사 PD들이 흔히 갖게되는 엘리트의식 우월감이 없었고 둘째 줄곧 서민대중의 보통 가정에서 살아온 그는 명문가 출신으로 자손들이 알게 모르게 갖고 있는 교만합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그는 공고 건축과를 졸업하고 공대 경제학과를 거쳐 장사꾼이 되기 위한 일념으로 경제학과를 졸업 철학이다 문학이다 하는 학창 시절을 심각한 고민을 겪어 보지 못했던 것이 일반대중과 흐름을 같이 하는 드라마를 만드는데 큰 도움을 주었으리라 생각 한다. 고성원의 진가가 발휘된 것은 64년, TBC가 개국하고 부터였다. KBS 단독방송 막이 내리고 TV 드라마가 경쟁시대를 접어들자 비교평가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연출의 배테랑이라는 이기하 황은진 허규 저돌적 파괴력으로 그 물결 속에 뛰어든 김재형 그리고 그동안 KBS에서 활약하여 주가를 올렸던 나옥주 이순재를 비롯한 모든 스타들을 검어쥔 tbc는 커다란 위협이 아닐 수 없었다. 그동안 대중적 작가인 김형곤을 발굴, 연속사극을 연출하여 많은 시청자를 확보하고 있었던 고성원은「연화궁」이라는 연속극을 기획하여 대담하게도 그 주인공으로 이름없는 신인 하명종 (예명하명중 현 영화감독 겸 영화배우)을 캐스팅했다 주연감을 모두 TBC에 빼앗겨 이렇다 할 연기자가 없는 KBS에서 고성원은 배수진을 친 것이다. 최초의 대하 일일연속극 「동기」 출연진과 자리를 함께 한고 고성원(오른쪽) 「동기」는 아씨 마부에 이은 그의 세번째 히트작이다. 왼쪽부터 김동원 천선녀 김희준 고성원 슈팅에 들어가기전 스튜디오에서 콘티를 점검하고 있는 고성원 PD, 드라마는 85년당시 인기를 모았던 「길손」이다 4 신인 하명종의 인기 있는 드라마 「연화궁」과 함께 날이 갈수록 대담해져 갔다. 상대역은 당대 스타 조희자, (조영일) 둘은 나이에 비해 얼굴이 10대 초반이나 다름없었고 눈이 크고 영롱해서 겁 많 고 꿈 많은 대표적인 사춘기 멜로드라마 주인공이다. 엄한 궁궐 안에서 법도다 채신이다 제도다 하여 숨 막힐 듯 살아야 하는 동궁 명종은 유일한 말동무이자 그리운 동궁 조희자를 만나기 위해 충복 내시의 등을 밟고 담을 뛰어넘거나 여의치 못하면 담 밑에 구멍으로 기어나간다. 천신만고 끝에 뜻이 이루어지게 될 찰라 호랑이보다 더 무서운 조 정대신의 눈에 띄어 사랑하는 「동기」를 저만치 두고 발길을 돌리는 나이 어린 왕자의 얼굴은 온통 눈물로 얼룩진다. 남몰래 숨어서 하는 소꿉장난 같은 사랑 한 나라의 임금이 되기 위해서는 그만 법도를 따라야 한다는 지상명령 설상가상 정권을 넘나 보며 날뛰는 간신배들에게 둘러싸여 궁녀들의 모함과 책략에 한나라의 어린왕자와 동기는 실로 풍전등화 격이다. 부귀영화가 다 무엇인가 차라리 왕관을 벗어 던지고 궁궐을 뛰쳐나가 농부처럼 자유롭게 살고 싶어 하며 울 때 시청자들도 하염없는 눈물로 손등을 적셨다. 64년 12월 TBC가 개국하여 한때 반짝이는 시청률을 확보했으나 1년이 조금 지난 66년 방송문화연구소가 실시한 TV 시청률 조사에 의하면 TV 몇몇 영화가 1, 2위를 차지했을 뿐 KBS 드라마가 압도적이었음은 이것을 증명하고 있다. 순위에 오른 드라마 마늘 순서대로 옮겨본다. 1. 사직골 구서방 코믹드라마 이남섭 연출, 2. KTV 연화궁 멜로드라마 김영곤 작고성원 연출 KTV, 3.아직 끝나지 않았다. 홈드라마 이은성 기재형 연출 KTV, 4. 수양대군 정통사극 김영수 작 임학송 연출 KTV, 이와 같은 반응에서 엿 볼 수 있는 것은 시청자는 항상 새로운 이미지를 브라운관에 요구하고 있다는 흥미로운 사실이다. TBC TV는 종래의 KBS에서 보여준 연극출신의 연극적 연출에다가 매일처럼 KBS에서 지겹도록 보아왔던 낯익은 스타들의 겹치기 출연 (TBC는 많은 드라마를 편성하여 연기자들을 중복 출연시켜 그들은 수입을 보장했다,) 은 시청자로 하여금 그 얼굴이 그 얼굴이라는 식상을 주었고 반면에 KBS는 신인 TV 출연 신성한 영상 연출과 함께 새로운 얼굴들의 등장으로 시청자의 시선을 빼앗았다. 주된 스타급의 TBC에로의 유출은 자연 KBS 새로운 TV 연기자들의 탄생한 계기를 마련 해 주었고 빛을 보지 못한 연기자가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면서 스타로 급부상하게 되었다 최불암 김혜자 이상순 김무생 백일섭 박근형 문오장 장욱제 박주아 남능미 이신재 이정길 오지명 남정림 하명종 등이 그들이다. 고성원 드라마 만들기는 끈질긴 다짐으로 시작된다. 그의 드라마는 대중을 상식선에 기조를 둔다. 가장 서민적인 계층의 지식수준과 의식을 토대로 (자신이 그런 계층이 서민임을 항상 강조) 하고 있다. 작가를 선정 자기주의 사고방식의 척도를 맞추게 한다. 때문에 작가는 자연 대중 작가의 범주를 넘지 못한다. 작가와 의견이 상충되면 끈질긴 설득으로 작가를 설득한다. 대본 만들기가 끝나면 연기자를 선정하는데 (연기자를 미리 예약해 놓는 경우도 있다) 전술한 바와 같이 주연 주인공만은 선남선녀 미남, 미녀를 부른다. 캐스팅이 끝나면 연습 과정에서 시간을 조금이라도 어기면 그날은 벼락이 떨어지는 날이다. 당시 정상 가도를 달리고 있는 여배우 정윤희는 좀 늦을 들 어떠냐 싶어 (스타 프리미엄을 갖고 있던 그녀는 항상 20분 늦었고 다른 PD는 용납 되었다.) 마지막 영화 촬영을 마치고 연습장에 들어섰다. 고성원의 외마디 소리와 함께 나오는 것은 유리 컵이었다. 빗나간 유리컵은 김순철이 앉아 있던 책상에서 박살이 났다. 하마터면 김순철이 다칠 뻔 했다. 순간 시간이 멈추는 듯 숨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구성원에게 스타라는 프리미엄이 없었다. 그 다음날 정윤희는 꼭두새벽 5시 연습장에 나와 의자에서 새우잠을 자고 있었다. 그 연유를 묻는 동료에게 정윤희는 꿈속의 고 감독님의 야단치는 소리가 들려 잠결에 뛰어 나왔다며 다시 졸기 시작이다. 집합 시간은 8시 그러니까 3시간 전에 나온 것이다. 그 후 부터 정윤희는 연습시간을 한 번도 어긴 적이 없었다. 마지막 연습 과정에서 고성원이 특히 중점을 두는 것은 철저한 책이다. 책 을 읽는 동안 감정은 물론 호흡 하나하나에 신경을 곤두세운다. 웬만하면 넘어갈 것 또 그는 그러지 못한다. 자신의 이미지에 와 닿지 않으면 몇 번이고 몇 시간이고 물고 늘어진다 오늘 되지 않으면 내일 똑같은 일이 반복된다. 당사자는 물론이고 같이 연습하는 연기자도 지겹다 못해 지쳐 버린다. 얼마나 지독했는지 정윤희와 얽힌 이야기 또 하나 끄집어내야겠다. 언제부터인가 정윤희는 대사를 마치자마자 고개를 살랑살랑 좌우로 흔드는 버릇이 생겼다. 왜 그러는지 아느냐는 필자의 말해 저도 모르겠어요. 이런 버릇이 생겨서 큰일 났어요 하고 그녀 역시 걱정이다. 고성원과 책읽기 연습을 하는 동안 사사건건 지적당하는 정윤희는 대사 한마디를 하고 난 다음 자신이 없어 고성원을 쳐다보며 이건 아니지요 하는 표시로 고개를 살랑살랑 젓는 것이 습관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런 방법으로 고성원은 작가와 연기자를 장악한다, 적어도 고성원에게 있어 작가와 연기자를 생각한다는 것은 드라마를 장악 한다는 뜻의 다름 아니다. 고성원에게 연희궁의 의미는 자못 크다. 갓 들어온 무명신인 하명종을 인기 정상에 끌어올려 급기야는 동양의 헐리우드라는 홍콩영화배우 수출의 다리를 놓았으며 연화궁에 등장한 궁녀 1,2,3에서 나옥주와 이미지가 같은 미모의 신인 연기자 김희자를 자신의 반려자로 삼아 오늘에 이른다. 또한 연화궁으로 그는 연출의 황금기에 들어선다. 시대극「길손」 야외 녹화장에서 pd, (빨간 운동모) 가 쓴 연기자는 탤런트 김병기 5 인력 부족으로 에이디가 따로 없었던 당시 마음 맞는 PD 서로가 함께 프로그램 제작을 담당했다. 필자는 고성원의 KBS 시절 그는 필자와 한 팀이 되어 거의 모든 작업을 계속 했다, 그가 있는 곳은 필자도 있었고 그 현장에 반드시 필자가 있었다. 이런 이유들로 그 이야기를 쓰는 동안 필자의 행적이 지면을 채우게 되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녹화가 없었던 당시는 거의 모든 프로가 큐시트란 간략한 진행표로 방송 되었으나 드라마는 그 복잡성과 정확성 때문에 오전부터 정규방송이 시작되기 전까지 카메라 연습을 하며 완성도를 다져간다. 그러니 모두가 드라마가 방송되는 시간을 초조하게 기다려야 한다. 생방송 때 일어나는 예측할 수 없는 사건은 부지기수다. 그리고 웃지 못 할 해프닝도 무성하다. 고성원도 그런 사건과 해프닝이 예외일 수는 없었다. 아니 그는 방송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인 커다란 방송 사고를 겪기도 했다 .유치진 선생의 「별」 을 필자가 각색하고 연출한 창극풍의 연속사극 아가씨를 방송 할때다. 금방 선생 역을 맡아 열연하고 있던 탤런트 이신재는 저녁 되면 동료들과 같이 밖에 나가지 않고 20대 초반의 소녀가 정성스레 싸온 도시락을 기다렸다, 젊은 날의 이신재 왼쪽 애인을 동생으로 잘못 소개하여 「도시락 사건」이라는 뜻 밖의 곤혹을 겪기도 했다. 한, 두 번도 아니고 매번 도시락을 싸 들고 방송국 분장실을 찾아오는 그 소녀의 다소곳하고 얌전하며 관심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더욱이 미모까지 지녔으니 말할 나위 없다. 무슨 관계냐고 캐묻는 주위 사람들에게 이신재는 누이동생이라고 가볍게 응수했다. 그 소녀를 눈여겨보고 있던 고성원이 하루는 이신재를 따로 불렀다. 이신재! 동생 나 안 줄래 고성원의 진지한 표정이 이신재는 매우 당황하고 난처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실은 그 소녀는 이신재의 애인이었던 것이다. 고성원은 그때 왜 장가를 생각도 하지 않느냐고 어머니와 매일같이 부대끼고 있었다. 젊어서 과수가 된 어머니는 하루빨리 대를 잇지 않으면 조상 어르신들께 죄인이 된다고 눈물까지 흘렸다. 60년대 보수적인 사회 풍속은 이른바 딴따라에게 딸을 성큼 내 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니 드라마 PD는 연애할 수 있는 대상을 찾던가. 현지 조달 (같은 직장 여성 또는 탤런트) 하는 방법 밖에 없었다. 그러나 고성원은 성미 까다로움도 있었거니와 나날을 일에 미쳐 뛰어 다니다 보니 가까이 지내는 여자도 없었다. 그렇다고 길가는 아무 여자에게나 결혼하자고 졸라 될 수도 없지 않은가 아니 그렇게라도 해서 맺어 질 수만 있다면 눈 딱 감고 결혼 해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머니 눈물에 약한 고성원이가 아닌가. 이런 때 이신재 누이라는 처녀가 나타났다. 평소 이신재의 사람 됨됨이로 품질은 보존되고 인물도 좋다 어쩌겠어? 줄래 안 줄래 난처해진 이신재에게 졸라댄 고성원의 외아들 류의 응석이 시작된다. 매주 적어도 4 5일은 같이 지내야 할 처지고 보면 그 때마다 적당히 얼버무릴 수도 없는 일, 본시 성품이 야멸치다 못한 이신재는 고성원을 면전에 두고 사실을 말할 수도 없었다. 심각해진 이신재는 동생이라는 그 소녀와 서둘러 결혼해 버리고 말았다. 이것이 바로 「도시락 사건」이다. 연속사극 숙부인 (김영곤 작)은 고성원으로 하여금 전무후무의 사고를 겪게 됐다. 당시 영화계에서 톱스타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강미애는 분주한 스케줄이 쫓긴 나머지 자기가 등장하는 장면을 방송 직전에 연습하기로 하고 영화 촬영 현장으로 떠났다. 방송은 밤 8시 늦어도 방송 30분 전에 온다는 강미애 소식이 없다, 이제나 올까. 저제나 올까 모두가 조마조마하게 기다렸으나 강미애는 그림자도 나타나지 않는다. 방송국 안은 벌컥 뒤집혔다. 방송국은 편성을 변경 9시 뉴스뒤에 연속사극을 보내 드리겠습니다. 시청자 여러분 많은 이해 바랍니다. 라는 자막 방송을 하게 되었다. 그때까지는 강미애가 나타나리라고 믿었던 것이다. 1시간 동안의 공백은 문화영화로 대신했다. 그리고 시청자 양해를 구하는 자막을 계속 내보냈다. 숙부인는 대단한 인기 프로여서 그만큼 시청자의 전화항의도 드샜다. 뉴스가 진행되는 동안 고성원은 방송국 현관에 나가 강미애가 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뉴스가 끝나도 나타나지 않았다. 빗발치는 시청자의 항의 전화를 받느라 방송국은 온통 불 날 지경이었다. 그날을 숙부인은 방송 되지 못하고 다음 주로 미루어졌다. 워낙 인기 있는 프로그램이라 강미애를 징계 할 수도 없었고 생방송이라는 불가항력의 내 탓으로 돌렸다. 고성원도 견책 되지 않았다. 일주일 후 지난주 방송 되지 못한 숙부인이 방송되는 날 작가와 고성원은 물론 모든 출연진은 머리끝까지 긴장하고 있었다. 그 이유인 즉 공교롭게도 이번에 나갈 드라마의 궁녀를 다스리는 상궁 (윤인자 영화배우) 이 강미애를 호되게 질책하며 머리칼을 휘어잡고 사정없이 뺨을 때리는 장면 있었기 때문이다. 윤인자는 방송을 펑크 낸 강미애를 가만두지 않겠다고 공언 하며 벼르고 있었다. 영화계에서 윤인자는 성적이 고약하기로 이름 나있었고 강미애 역시 고 고로 (일본어 마음 제 마음대로 행동 한다는 뜻)로 영화계에서 유명했다. 만약 연기를 진짜 윤인자가 성미 그대로 인정사정없이 후려치는 날이면 틀림없이 강미애는 방송 도중에 나 안 해 하고 뛰쳐나가 버릴 것만 같았다. 폭풍전야 같은 숨 막힘 방송국 안을 감돌았다. 간부들과 직원들이 혹시 일어날지 모르는 거니 염려스러워 스튜디오와 조정실에 모여들었다. 그러한 긴장감속에 방송은 겉으로 순조롭게 진행되어 됐다. 드디어 강미애가 윤인자에게 맞는 신이 닥쳐 왔다. 예상했던 대로 윤인자의 앙칼지고 벼락같은 소리와 함께 천천히 올라갔다. 철썩철썩 한두 번도 아니고 몇 차례인가 윤인자의 손이 바람을가르다. 강미애는 다소곳이 맞고 있더니만 방바닥에 쓰러졌다. 이윽고 고개를 쳐든 너의 얼굴은 눈물에 범벅이 되어 있고 강미애의 애절한 대사는 심금을 울렸다. 모두가 안도의 한숨을 내뱉은 것은 물론 방송국 으로 걸려온 전화는 이들을 나는 연기를 한결같이 격찬하고 있었다. 6 TV 드라마 대사 외듯이 고등학교 공부를 했으면 일류대학에 들어가고도 남았을 거예요. 톱클래스의 영화배우 고은아가 TV 연속 사극 「꽃버선」 (김영곤 작, 고성원) 연출해 출연하면서 한말이다. 영화 촬영은 동시녹음 아니어서 대사를 외우지 않아도 촬영할 때 연출자들이 던지는 대사를 따라 중얼거리면서 연기하면 더빙 (녹음) 과정에서 촬영된 화면은 입 놀림에 맞추어 직접 녹음을 하든가 성우가 대신 하면 되었으나 TV 드라마는 전체 대사를 암기해야 하기 때문에 훈련 되지 못한 tv출연이란 고역중의 고역이다. 마이크를 쓰지 않는 연극은 프롬프터 (무대 같이 설치된 무대 앞에 설치된 전용 막 무대 앞에 설치된 전용 박스에서 연극배우가 대사에 막히면 즉시 소리죽여 대본을 읽어주는 보호 장치)를 이용할 수 있으나 숨소리까지 흡수 방송하는 예민한 TV 마이크는 프롬프트 소리라고 해서 예외를 주지 않는다. 때문에 TV 연기자에게 대사 암기란 절대 필수조건이다. 암기 능력이 부족한 연기자들은 눈에 잘 띄는 곳곳에 자기의 대사를 적어 놓거나 커다란 종이에 써서 후배로 하여금 들게 해놓고 (지금도 그런 방법으로 연주하는 중견 탤런트가 허다하다) 그럴싸하게 연기를 한다. 자신의 대사도 외우지 못한 주제니 남의 대사는 더욱 깜깜할 수밖에. 만약 상대방이 대사를 쓰거나 막힘 감정을 흐름상 호흡 포즈를 둘 경우 대사가 끝난 걸로 착각 거침없이 자기 대사를 줄기차게 해대어 드라마의 앞뒤 순서가 바뀌어 방송 되는 일 또한 한두 번이 아니다. 녹화방송일때는 NG로 처리되어 가닥을 잡아 다시 녹화 할 수도 있으나 생방송은 NG자체가 여지없이 방송되는 바람에 넌센스 코미디 코믹드라마 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고은아는 암기에 천재적이어서 어떤 드라마에서든 NG란 없었다. 그러나 「꽃버선」 녹화 도중 갑자기 자취를 감추고 심약한 고성원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적이 있었다. 꽃버선 녹화가 중반에 접어들었을 때 고은하는 장장 5, 6분쯤 걸리는 어려운 대사를 필사적?으로 구사하고 고비를 넘겼다. 고은아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다음 장면을 준비하고 있을 때 녹화를 중단한 고성원이 스튜디오로 내려 왔다. 나는 내심 받을 걸로 생각하며 그를 맞이했으나 야멸찬 그는 감정 처리가 미진하다며 클레임 거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NG라는 것이다. 자존심이 상할대로 상한 고은아는 스튜디오 콘크리트 바닥이 뚫어져라 시선을 내려 꽂으며 말이 없었다. 심상치 않은 차가운 기류가 감돌았다 방금 녹화 한 거 나쁘다. 는게 아니고 다시 하면 더 좋아질 것 같은데 고성원의 말꼬리가 흐려졌다. 곰곰이 무언가 생각하는 고은아가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고성원은 급히 조정실로 뛰어올라가 재녹화 스탠바이 싸인 준비 지시를 주었으나 더디게 되돌아온 조연출의 조심스러운 목소리는 고은아가 행방불명이라는 것이다. 고성원은 난감해졌다. 자존심 상한 주인공은 바로 지금 막 인기 상승 물결을 타고 있는 꽃버선이 행여 중단 되지 않을까 겁이 앞었다. 얼마 전 강미애 에게 깊은 아픈 상처가 되살아나는 순간이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그러나 고은아는 나타나지 않는다. 조정실 철판 계단을 뛰어 내려와 분장실과 휴게실 심지어 화장실과 스튜디오 세트 사이사이를 찾아 다녔으나 허사였다. 헝클어진 머리속을 정리하기 위해 스튜디오 밖으로 나와 한숨 같은 심호흡을 할 때 바로 옆에 위치한 소품실에서 가느다란 여자 목소리가 스며 나왔다. 문을 열어보니 고은아가 깜짝 놀라 쳐다본다. 다시 녹화할 장면을 어수선한 스튜디오를 피해 혼자 열심히 연습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날 고은아의 연기는 압권 이었고 녹화를 마친 후 구성원과 마주 보며 미소짓는 그녀의 눈동자는 유난히 영롱하고 아름다웠다. TV가 단독 방송 시대를 마감하고 2국 시대가 열리면서 치열한 경쟁 시대로 접어들자 TV 드라마의 인기는 걷잡을 수 없는 치솟음을 보여준 반면 영화는 차츰 쇠잔의 길로 들어갔다. 영화계는 생존의 위협을 느끼기 시작하자 자구책으로 앞으로 TV에 출연하는 배우는 영화 출연을 거부하겠다는 제작자와 감독의 결의과 나왔다. 그러나 인기를 먹고사는 배우들에겐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60년대 말에 접어들면서 연기자들의 움직임에 대이동의 일어났다. 영화배우는 TV로 탤런트는 그 주연 바꿈이 현저히 눈에 띠었다. 이런 흐름을 타고 고성원의 드라마에도 기라성 같은 많은 영화배우들이 명멸하게 된다.
눈물의 여왕 전옥 (배우 강효실 어머니 탤런트 최민수 외할머니) 고성원의 드라마 출연이 끝나자 타계했고 조영일 스캔들로 유명해진 「태양은 늙지 않는다」 (장사공 작)에서 성격배우 이예춘 (최고 탤런트 이덕화 아버지)은 일본 군 사령관으로 명연기를 펼쳤다. 박암은 임꺽정 (조흔파 작)에서 주인공을 맡다 본래의 중후한 연기를 더욱 빛내고 영화 자유부인에서 최고급품이라는 유행어를 남긴 주선태는 고성원의 유일한 단골 출연자로 호흡을 같이했다. 세월의 흐름은 덧없음인가. 이 모든 이들도 어느새 유성처럼 흘러 그 자체를 찾을 길이 없다. 그러나 지금 그들은 커다란 흔적을 그리고 있다. 69년 MBC TV 개국으로 TV계는 또 한바탕 소용돌이에 휘말린다. 인적자원이 없던 MBC는 TBC 드라마 부장으로 있던 이기하를 제작국장 으로 영입하면서 그를 이용 핵심 PD 대부분을 전격 스카우트 해버렸고 탤런트는 KBS에서 최불암 김혜자 백일섭 정혜선 이정길 등을 빼내 전속화 해 버렸다. 국영방송인 KBS는 전속 제도가 없어 소수 속수무책이었다. TBC라는 텅 빈 성을 지키고 있던 김재형은 고성원을 불러내어 그 독특한 제스처를 써가며 눈물로 호소했다. 고성원 나좀 도와주라. TBC 드라마가 쑥대밭이 되었다. 모두 배신하고 MBC로 가버렸으니 나는 고립무원이다 어쩔래! 나를 살릴래! 죽일래! 고성원의 손을 잡고 놓지 않는 김재형 손을 가느다랗게 잡고 떨면서 땀에 차 있었다. 김재형은 당시 TBC 드라마 부장이었다. 효종의 북벌정책을 드라마화한 「대명」 81년 작품을 마치면서 출연진 스태프들과 포즈를 취한 고성원 PD, 앞줄 중앙, 효종역의 김흥기 (앞줄 오른쪽) 와 세자빈으로 분한 원미경 (앞 줄 오른쪽에서 세 번 째) 열굴도 보인다. 7 69년 6월 김재형의 끈질긴 간청에 고성원은 TBC로 자리를 옮겼으나 남들처럼 스카우트 될 때 보장받을 수 있는 조건들을 김재형은 함구일번도로 있었는데 는 새삼 섭섭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드라마 담당부장이었던 이기하가 선봉장이 되어 TBC의 핵심 피디들인 최상현 황은진 허규 이효영 표재순 이대섭 유길촌 (최상현 황은진은 상무였던 김규의 막대한 뒷거래로 TBC에 잔류) 등을 인솔 MBC로 입성 해 버려 고성원의 회고처럼 TBC는 황무지나 다름 없었다. 드라마 담당 차장이었던 김재형은 얼마 후 대우라는 꼬리가 붙긴 했으나 부장으로 승진했고 친구를 곤경에서 구한 고성원은 평사원 일 뿐이었다. 25년이 지난 지금 김재형은 고성원의 눈물이 날 정도로 고마웠다고 필자에게 술회하고 있다. 입사 한달후, KBS때부터 호흡을 같이했던 시나리오 작가 임희재와 TBC 첫 작품에 들어갔다. 주간 연속극 화요드라마 「빨간 카네이션」 (69년 7월 25일부터 11월 4일까지 총 15회) 방송과 그 뒤를 이어 방송된 「마지막 낙엽」(69년 11월 10일부터 2010년 2월 17일까지 총 15회)으로 근 6개월간 상업방송적 조율을 마친 고성원은 드디어 한국 방송사의 길이 남는 금자탑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1970년대 대표적 드라마 「아씨」! 1930년대 일제시대부터 1970년대까지 사회를 배경으로 3대에 걸쳐 한국 가정의 파란 많은 수난사를 한 여성을 통해 파노라마처럼 전개한 이 드라마는 71.9% 라는 가공할 시청률을 보인가운데 70년 3월 2일부터 71년 1월 9일까지 총 253회 동안 꾸준히 지켜왔다. 「아씨」는 실로 우리나라 텔레비전 단일 프로그램 중 최고 시청률을 보인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면서 TV 삼국시대 초반에 TBC TV 드라마에 시선을 주게 된 중요한 계기가 되었으며 각 방송국의 프로그램 편성에 일일 연속극 붐을 일으켜 획기적인 성공을 거둔 작품이었다. 「아씨」가 클라이맥스에 접어들자 임희재는 암으로 몸져눕게 되어 집필을 계속할 수가 없었다. 인기 절정에 있는 아씨가 위기에 봉착한 것이다 고성원은 작가의 동의를 얻어 신예작가 이철향으로 하여금 바통을 이어받게 했다. 드라마가 마지막을 향해 달리고 있을 때 임희재의 임종도 그만큼 가까워졌다. 임희재를 찾아가 고성원은 하실 말씀이 계시면 하십시오. 아씨 마지막째 해설로 넣겠습니다. 라고 했다. 임희재는 꺼져가는 숨을 힘겹게 몰아쉬더니 「사람은 태어났다 가는 거란다」라는 말을 남기고 저 세상으로 떠났다. 고성원은 아씨 마지막 회 테마를 임희재의 유언으로 장식했다.「아씨」에서 김희준과 김세윤을 스타덤에 오르게 했다. 계속해서 고성원은 임희재 원작 「마부」를 연출 김창숙을 등장시켜 히트 연속 기록을 세운다. 아씨가 끝을 맺을 때 고성원은 후속타로 「마부」를 내심 결정 하고 있었다.
「마부」는 라디오드라마와 극영화로 이미 세상에 널리 알려진 임희재 대표작이다. 고성원은 어쩌면 대히트한 아씨의 이미지를 업고 죽음을 눈앞에 둔 동일 작가의 작품을 기획하는 것이 또 하나의 히트성을 내포 하고 있다. 고 판단했을지도 모른다. 평상에 누워 있는 임희재를 찾아 갔다. 그리고 후속작품의 마부를 방송할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하였다, 눈을 감고 있던 임희재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TV 드라마 사상 명작으로 꼽히는 마부의 한 장면, 김세윤, 김창숙 젊었을 당시 모습을 볼 수 있다.아래는 아씨를 마무리 하고 마부를 각 색한 이철향 (가운데 분) 함께 한 고성원 이철향에게 각색을 맡기고 싶다고 했다. 아씨에서 이철향은 임희재의 분신이나 다름 없을 정도의 필력을 과시하고 있었다. 임희재는 쾌히 승낙하면서 자기 작품의 각색 방향을 제시 하기도 했다. 라디오나 영화에서는 벙어리인 김창숙의 상대역이 편상인으로 등장하나 TV에서만은 김창숙의 똑같이 벙어리로 설정 대사대신 수화 등으로 의사를 표현하면서 드라마를 진행시키면 시청자는 같은 벙어리로 속을 것이 아닌가. 그러다가 10회 쯤 흐른 다음 정상인과 같이 다른 말을 하게 되면 시청자는 무척 재미 있어 할 것이다. 이승에서 결코 TV로 볼 수 없는 자신의 작품 앞날을 신나게 이야기하는 임희재의 눈에 이슬이 맺혀 있었다. 이 역은 신인인노주연이 맡아 연기의 또 다른 가능성을 보였다. 외아들이었던 고성원은 남지현 작 「아들」을 134회나 연출하는 동안 고부간의 갈등 등 자기와 너무나 흡사한 이야기가 전개되는 바람의 7개월간 집에서는 TV를 아예 끊었는 등 고통을 받기도 했다. 지금은 미국에서 다시 돌아와 톱의 위치를 차지한 가수 E의 팀 스캔들을 폭로 고발하는 드라마로 나연숙의 아빠를 당시 홍회장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기획, 연출했다가 대표적 퇴폐프로그램으로 지목받아 방송을 개시한지 한 달도 안 되어 도중하차 하는 쓰라린 기억도 있다. 고성원 PD가 연출, 3년간 장기 방영했던 고전해학극 「여보 정선달」이 드라마로 73년 대한민국 방송상 연출 부문상을 수상했다 71년 12월 고전해학극 「여보 정선달」 (이성제 작)을 기획연출 연출가는 바꿔가며 74년 12월까지 만 3년 동안 739회까지 계속 텔레비전 사상 가장 긴 방송 횟수를 기록했으며 이 드라마로 73년 제 1회 대한민국 방송 tv 부문 연출상을 수상했다. 방송 통폐합으로 TV 드라마가 10년 후퇴했다고 주장하는 고성원은 KBS 장수 프로 「대추나무사랑걸렸네」를 작가 양근승과 함께 출범시켰다. 홍두표가 사장으로 부임하자 고성원은 KBS 제작단 상무이사로 자리를 옮겼고 1년 반동안 연출에서 손을 떼는가 싶더니 아침 드라마 시청률이 떨어지자 신인 작가 정경애 작 「이별 없는 아침」 메가폰을 다시 잡았다. 이 작품 으로 화려하고 끈 질겼던 과거 경력이 또 다시 되살아나기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 지역 드라마 「영산강」 방영에 앞서 고성원PD(뒷줄 중앙)이 출연자들과 포즈를 취했다. 유인촌 김자옥 김형자의 모습이 보이고 고 김난영 얼굴도 새롭다.
|
'방송인물'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방송인 고성원 (0) | 2017.09.19 |
---|---|
방송인이자 시인 모윤숙과 6.25, 국군은 죽어서 말한다. (0) | 2017.09.10 |
음악계의 큰 별 박용구 선생님 (0) | 2017.08.31 |
박경환, 김성배 6.25 참전 유공 방송인, 이천호국원 참배 탐방 (0) | 2017.07.28 |
강경화 외교부장관 지명자와 강찬선 아나운서 최홍준(최홍목) (0) | 2017.07.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