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군정훈음악대 시절의 김생려사진, 미국 김영우 선생께서 보내주셨다. 악수를 나누는 여자 분은 그때의 해군 참모총장 손원일 제독 부인 홍은혜 여사다. 선생은 6.25전쟁중 김천애와 함께 해군 정훈음악대를 결성하고 그 대장이 되어 피난 내려온 음악인들과 함께 유엔군과 국군장병들을 위한 위문공연들 벌려 국위를 선양하며 사기를 높이고 산간벽지, 섬, 오지까지를 오가며 실의에 빠진 국민들에게 힘을 불러 넣었다. 해군정훈음악대는 교향악단과 합창단, 어린이합창단, 연예대 등이 있었는데 어린이 합창단에 관해서는 안병원, 권길상, 또 필자와 절친 송현식, 전영자 등이 있어 많은 애기들을 춘하추동방송을 통해서 전했어도 다른 분야는 생소하다. 기회되는 대로 그때의 해군정훈 음악대에 관해서 더 알아볼 것이다. 오늘 배경음악은 해방공간에서 김천애가 부른 그리운 강남이다.
음악가 김생려 金生麗 김천애 金天愛, 권려성, 김백봉, 존 김
김생려는 1912년 11월 25일 평안북도 영변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1남 4녀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 어린시절부터 음악적 재능을 타고난 김생려는 서울 경복고등학교를 거쳐 연희전문을 갔다. 음악을 반대하는 집안의 분위기와는 달리 연희전문에서 음악을 공부 할 수 있었던 것은 같은교회를 다녔던 봉선화 노래 작사자 김형준과 중앙악우회 결성, 운영의 중심인물 붓스(Boots)부인, 그리고 현제명교수 와의 만남 등이 큰 영향을 주었 다고 볼 수 있다. 그 시절 김형준은 홍난파, 현제명, 붓스(Boots)부인 (세브란스 병원 의사부인이자 바이올리니스트로 경성방송국 개국공연을 한 경성중앙악우회의 주 멤버였음) 과 친한 사이였다. 김생려의 음악적 재능을 인정한 김형준은 김생려를 이 분들과 연결시켜주었다. 붓스부인은 김생려를 지도하면서 중앙악우회에서 활동하도록 해 주었고 연희전문 교수로 있던 현제명은 김생려를 연희에 들어가 음악공부를 하도록 권유했다. 김생려가 연희전문 학생으로 경성 중앙악우회 단원으로 활동한 계기다. 다음 사진은 경성방송국 개국때의 중앙악우회 공연모습이다.
중앙악우회는 홍난파가 미국유학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1935년 경성방송국 JODK교향악단으로 새출범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교향악단이 탄생한 것이다. 홍난파의 신뢰를 얻은 김생려는 1939년 경성방송국 교향악단 악장으로 취임한다. 여기에 관해서 김생려가 직접 쓴 글이 있다.
김생려의 삶과 그 시절 방송교향악단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는 두편의 글을 인용했다. 1977년에 발간된 한국방송 50년사에 올라 있는 글인데, 1950년대 60년대에 발간된 방송잡지에 실린 글 중 일부를 간추려 두편으로 나누어 올린 듯하다. 글 원문을 찾기가 어려워 한국방송 50년사 51p와 63p에 있는 글 전문을 옮겼다. 연대가 잘 맞지 않는듯한 부분이 있지만 추후에 확인하기로 하고 원문을 그대로 올렸다.
김생려님의 회고담 (1977년 판 한국방송사에서)
김생려 나의 방송시절 1
내가 방송관현악단의 악장직을 맡은 것은 1939년 봄 JODK시절이었다. 10 여명의 단원으로 노래 반주나 하던 관현악단을 홍난파선생이 JODK 음악책임자로 임명되면서부터 확장 하기 시작해서 일본에서 악기를 구입하고 악단도 25명으로 증원하여 하이든 모차르트 심포니를 처음 생방송으로 내 보내기도 했다. 직업적인 관현악단으로서는 우리나라에서 처음 생겨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940년 5월 16일 홍난파 지휘 방송 관현악단의 방송 연주곡목은 다음과 같다.
0. 스페인 소야곡 (비제 작곡) 0. 유모레스크 (드보르작 작곡)
0. 금혼식 (마리작곡) 0. 작은 장난감 병정 ( 로세이 작곡) 0. 춤추는 인형(폴디니 작곡) 0. 사막의 대상 (자메니크 작곡)
얼마 되지 않아서 홍난파선생이 불행히도 병석에 눕게 되자 내가 1944년(주 : 연대가?)부터 촉탁이란 직명으로 난파선생의 일을 대신하게 되었고 상임이 되었다. 난파선생이 작고한 뒤 계정식 선생을 임시 지휘자로 모시게 되고 방송국의 전속단원 외에 약 20명의 증강단원을 모집해서 대외 연주활동을 시도 했었다. 25명의 전속단원 예산으로 40명의 오케스트라가 된다는 것은 JODK로서도 유익한 것이었다. 이 사이 당시 업무과장 으로 있던 일본인 小野田이 빈에서 지휘공부를 했다는 中川英治를 책임지휘자로 초청해 왔다. 이것이 1942년인가 보다. 우리의 기대가 컸었지만 처음 연습 해보고 실망을 하고 말았다. 그래서 40여명의 음악동지들은 桂貞植선생을 받들어 대외 연주에 노력을 경주했었다. 그러나 小野田은 민족적인 감정에서인지 대외출연을 허락치 않았다.
우리는 小野田에게 여러 차례 교섭하기를 20여명의 무보수 단원들도 中川英治지휘로 방송을 여전히 할 터이나 대외 출연만은 계정식 지휘로 해 달라고 했으나 번번이 거절당하고 말았다. 비로소 처음으로 싹 트려던 우리나라 오케스트라 운동이 일본인 한 과장의 편견으로 좌절될 운명에 놓였었다. 결국 10 여명의 전속단원을 제외한 모든 단원이 JODK를 물러나게 되었고 나도 사의를 표하고 물러나게 되었다. JODK를 물러난 동지들이 모여서 따로 별개의 오케스트라를 만들려고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겨우 실내악 운동으로 후성실내약단을 조직해서 일제하 전시중에 대외연주로 명맥을 이어 오다가 8.15가 되자 이것이 고려교향악단의 전신노릇을 했다. JODK 오케스트라는 이 사건이후 다시 10 여명으로 된 노래 반주 오케스트라로 전락했다가 8.15후 없어졌고 1949년부터 지금의 시향의 전신인 서울 교향악단이 정동 방송국에 자리 잡고 당시 미국인 고문 롤포 자코비씨 지휘로 본젹적인 방송 교향악 운동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김생려 나의 방송시절 2
20대의 악관으로 고 홍난파선생을 모시고 방송으로 나날을 보내던 기억이 오늘까지 새롭다. 그당시 양악방송은 레코드 음악이 매일 약 2시간 방송되었고 방송관현악단의 실연이 일주일에 두 세번 정도 있었다. 약 20명의 방송관현악단은 주로 연예 오락방송때의 유행가 반주에 동원되었으며 기껏해야 행진곡 정도의 관현악 실연방송은 일주일에 한두번쯤 하는 정도였다. 그때 마침 일인들의 강압에 의한 최팔근씨의 한국말 나니와 부시 방송의 장려로 그나마 양악시간의 할당이 줄어들지 않으면 안되게 되어 그당시 제2방송부장이던 노창성씨와 말다툼하던것이 아직도 기억에 새롭다. 홍난파선생은 그당시 병석에 드러눞게 되었다. 할 수없이 매일 방송되던 레코드음악의 편성과 양악 프로그램의 편성 그 밖의 연주가의 알선이나 관현악단의 연주곡목 작성 심지어 편곡, 사보, 연주에 이르기까지 나 혼자서 요리하지 않으면 안 되었었다. 방송에 있어서 음악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의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 양악방송은 의붓자식처럼 천대를 받아왔다
김생려가 경성방송국 교향악단을 뒤로 한 1943년부터 미국 국무성 초청으로 미국에 가 지휘자로 활동히디가 1957년 국내에 돌아와 서울 시립교향악단을 창설 본격적인 활동을 벌렸다. 는 얘기까지는 김천애 2에서 써 올렸다. 이후 시립교향악단을 운영, 지휘활동을 하던 김생려는 1960년이 되면서 국내 정치상황의 소용돌이 속에서 대한민국의 음악계를 떠나 미국 유학을 갔다가 1976년 미국 이민길에 올라 미국에서 남가주필하모닉 상임지휘자 등으로 활동했고 1995년10월 18일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세상을 뜨셨다. 세상을 뜨기 직전 한국교향악 50주년 음악회에 특별초청 받고 마지막 지휘에 임했다. 조민구 선생님에 따르면 미국 성함은 존 킴이라고 했다. 김생려 얘기가 실린 신문기사를 골랐다.
1996년 10월 9일 경향신문
1996년 10월 2일 경향신문
김생려 부인은 그 유명한 세계적인 무용가 최승희의 제자 권려성으로 해군정훈음악대 시절 무용지도에 큰 힘을 기울였다. 김영우선생님이 보내 주신 그시절의 사진을 올렸다. 권려성과 김백봉은 함께 최승희의 제자로 그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다.
2007년 5월 7일자 경향신문의 권려성에 관한 글 일부를 인용했다. 한국무용가 권려성(75). 그는 해방공간 시대 한국무용계의 신데렐라였고 1964년부터 미국에 우리춤의 아름다움을 알려온 주인공이다. 그러나 지금 이 땅에서 그 이름을 기억하는 이는 많지 않다. 43년 동안 미국에서 한국춤을 알려왔기 때문이다. 외국여행이 힘들던 당시 50명의 예술인들이 3년 동안 미국에서 공연한다는 건 빅뉴스였다. 미국 현지에서도 공연평론가들이 흥분을 접지 못한 채 쓴 글들이 신문지면을 장식했다. 64년 9월1일 하와이 공연을 시작으로 미국과 캐나다 62개 도시를 순회하며 한국문화를 알리고 공연사상 최초로 외화벌이에 앞장섰다. 미국명도 지었다. 스텔라 권. ‘별’이라는 의미였다. 권려성은 말한다. “무서운 게 없습니다. 춤말고는.” 미국 최고의 무대에 서기 위해 안간힘을 썼을 터. “당시 서울 충무로 3가와 재동에 있는 집 두 채를 팔아 비행기표를 구입했습니다. 한국춤을 미국인들에게 보여주려면 일단 미국까지는 가야 하잖아요
김천애와 김생려, 1943년 경성후생실내악단시절 두분이 만나 10여년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일을 하며 인간적인 삶을 이어가셨던 그 두분을 아시는 분이면 그 이후 그토록 멀어져 버린 두 분의 관계를 안타까워 한다. 두 분은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난 기독교 신자로 음악을 사랑했다. 김생려가 바이올린을 비롯한 여러 악기를 다룰 줄 알고 지휘자로 폭넓은 활동을 해 나가는 동안 김천에는 마음으로 부터 샘솟는 목소리로 한겨레 한민족의 마음을 모으며 민족의 성악가로 추앙 받았다. 두분은 1960년대 70년대 이후 미국에서 살았으며 우연인지 필연인지 1995년 같은 해에 미국에서 세상을 뜨셨고 또 저 세상으로 가시는 그날까지 음악과 함께 하셨다. 김생려에 관한 글은 음악계의 큰별이자 늘 춘하추동방송과 함께 하시는 유경환여사 남편이시기도 한 송방송 박사의 저서 「한겨레 음악대사전」에 자세히 나와있어서 연결하고 또 이미 써 올린 글을 연결하는 것으로 대신한다.
유경환(유카리나)여사님 글
음악계에서 이분의 명성을 그저 성함만으로
알고 있었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업적을 남기신 분인지는잘 모르고있었군요. 더구나 그 부인되시는 권려성 무용가에 대해서도 그렇군요. 그때 당시에는 '성형'이라는 것도 없었을 터인데, 미모와 끼가 얼굴에 가득합니다. 작년엔가 홍은혜 여사님 의 피아노 치시는 근황을 이 춘하추동 블로그에서 읽은 기억이 나는데, 아직 건강하시겠지요. 김생려: 권려성 두분의 이름부터가 천생연분인거 같군요. ^ ^
이가인(미국 본명 보나 이혜자)선생님 글
조민구지휘자님께 다니러 갈때마다 지난시절 그리시며 하시는 말씀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요즘입니다 주시는 말씀 들으며 예나 지금이나 예술가들의 삶은 남다른 정서로 채워가는 여정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김생려님의 부인이 정말 미인이고 아름다운 여인입니다 더구나 최승희님 제자라니 더욱 대단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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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3월 11일 동아일보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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