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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천애 2, 조민구 (LAKPO창설지휘) 선생님이 말하는 민족의 성악가, 제작 이혜자

이장춘 2015. 7. 7. 15:59

 

 

 

 

1972년 11월 4일 민족의 성악가

 김천애 선생님을 모시고 LA 코리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창단공연을 했어요. 민족의성악가! 김천애

선생님은 음악을 위해서 태어나신 분이고 그를 따를 분은 없었

어요,   대 없었어요. 앞으로도 그런분이 나오기는 어려울거라고 

생각해요. 소프라노라면 김천애, 말할 필요가 없어요. 봉선화는 가사나 곡이

좋은데다가 그 노래를 김천애가 불렀기 때문에 민족의 노래가 된 거요.」  몇번이고

 강조하는 조민구 선생님!  (이하 존칭생략)은 1969년 한국인이 결성한 해외교향악단의

 원조 LA 코리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결성, 미국땅에 한국음악의 씨를 뿌리고 가꾸며

 한미간의 문화 가교역할을 한 분이다. 조민구는 1951년 6.25전쟁의 와중에서 결성된

 해군 정훈음악대에서 김천애를 만나 1995년 3월 30일 저 세상으로 가실 때까지

 길고  인연 속에 오늘의 얘기가 전개된다.  프로그램의 미국취재와

 동영상 제작 등은 미국 LA에서 조민구와 함께 하는 시인이자

 미주동요사랑회 이가인 (본명 보나, 이혜자) 회장께서

수고해 주셨다.     고맙습니다.

    

 

김천애, 조민구 (LAKPO창설지휘) 선생님이 말하는 민족의 성악가, 이혜자 

 

  

조민구! LA 코리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Los Angeles Korean Philharmonic Orchestra)

「LAKPO」 창설자인 조민구가 1972년 11월 4일 LA필하모닉

창단공연에 특별초대한 민족의 성악가 김천애! 그로부터 23년간 

 미국생활에서 두분의  인연은 더 깊어졌다. 창단공연을 위해  처음으로

 미국 땅을 밟은 김천애는 한달 여를 조민구 자택에서 머무르며 함께 생활했고

 LA에 사는 동안 수시로 만나 얘기를 나누었으며 「LAKPO」공연무대에 섰다.

  1995년 3월 30일 김천애가 아무도 없이 홀로 세상을 뜨셨다는 얘기를

 듣고 먼저 달려간 분이기도 하다.  다음의 동영상을 통해서

그 조민구 선생 말씀으로 김천애 선생님

 얘기를 들어본다.  

 

 

동영상보기

 

 

동영상을 보시기 전에 음향을 끄셔요.

 

 

 

 

 

 

 

1950년 6.25 북한의 남침으로 나라가

백척간두에 섰을때 김천애는 부산에서 서울교향악

협회를 창설 방송을 통해서 또는 현지 위문공연을 통해서

국군과 유엔군 장병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고 전쟁으로 실의에 빠진

국민들에게 위안을 주기위해 눈부신 활동을 벌렸다. 1.4후퇴로 정부와

 방송국이 다시 부산으로 내려오면서 김천애는 해군과 인연을 맺고  김생려를

비롯한 음악인들과 함께  해군 정훈음악대를 창설  활동영역을 넓혀갔다.  이 무렵

플루트 연주를 하던 젊은 대학생 조민구는 해군에 입대 김생려를 단장으로 해군

정훈음악대가 발족되면서 그 대원이 되었기에 민족의 성악가로 널리 알려진

 김천애를 자연스럽게 만난다. 조민구는 그 시절에 만난  김생려,

김천애, 이인범, 김동진, 안병원, 권길상 등 음악가들도

그  길고 긴 세월 깊은 인연을 맺었다.

 

 

 

 

이 무렵 김천애는 노래도 노래지만

높아진 명성과 배경을 바탕으로  음악가들의

 활동을 도우며 특히 김생려와 함께 해군정훈음악대

결성하고 원활한 운영을 위해서 노력을 기울였다. 이승만 대통령의

 수양딸과 같은 위상속에 경무대를 무상 출입하는 사람중의 한 사람이었던

 김천애는 그 배경을 바탕으로 음악가들에게 도움을 주고 정훈음악대에

 힘을 실어 주었다. 조민구는 해군 해군정훈음악대의 실질적인

운영자는 김천애 였음을 강조한다. 그는 이승만대통령과

 해군참모총장 손원일 제독으로부터 직접지원을

받을 수 있었기에 그런 일들이 가능했다.

 

그 시절 해군정흠음악대는 민간인이나

방송국에서 재정형편 등 제반사정으로 운영이

불가능했던 교향악단과 합창단, 어린이 합창단, 연예단

광범위한 음악활동을 벌려 음악인들이 해군정훈음악대와

인연을 맺고 활동하게 되었다. 전쟁으로 불시에 부산까지 밀려온

 음악인들이 군과 함께 하거나 그 지원 없이는 생계마저 어렵던 시절이라

자연스럽게 해군정훈음악대에 모이고  그 해군정훈음악대를 위해 김천애가

이승만 대통령, 손원일 제독 등 막강한 배경을 바탕으로 헌신한 것이다.

 KBS 어린이 합창단이 해군정훈음악대 어린이 합창단

이라고 불린것도 이런 연유에서다.

 

 

 

 

김천애는 부산 피난시절 해군정훈음악대가

구성되기 전 이인범,  김생려, 김동진씨 등 음악가들

함께 서울 교향악 협회를 창설해서 처절한 전쟁 와중에서도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참전한 16개국 유엔장병을 위해  5백회에

달하는 위문공연을 가졌고 3백회의 국군장병 위문공연을 가졌으며 

산간벽지 까지 순회하며 실의에 삐진   국민들에게  힘을  불러 넣었다.  

6.25때 전라남도 담양고등학교 1학년 재학중이었KBS 아나운서실장을

 지낸 방송인 김승한은  1951년 김천애가 학교를 방문,     강당에 전교생과

생님들이 함께 한 자리에서  낙동강 등 가곡을 들려주어 60년이 더 지난

 지금도 그 감동이  가슴에 고동 치는듯 하다는 얘기를 한다.   동옥

 여사에게 물었더니 낙동강 가곡은 김생려 작곡으로 민족의 울분을

반영한 노래여서 순국선열을 기념하는 날이나 6.25와

 관련된 행사에서 김천애가 자주 불렀다고 했다

 

김천애는 해군정훈음악대 외에도

여러 활동을 벌렸다. 1951년 피난지 부산에서

윤심원,  이동훈,  장수철, 김노현, 이영애, 채리숙

등과 함께 필그림 성가단, 창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고

1951년 6월 16일 백낙준, 황성수, 김상돈, 윤심원, 이인범,

김치묵,  이동훈,  장수철,  박재훈, 등과  함께  역사적인

한국교회음악협회를 창립하고 4회에 걸쳐 역사적인

전국 중계방송 대 연주회를 가졌다고 했다.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이루어지고

정부가 서울로 돌아오면서 해군정훈음악대에서

활동하던 음악인들은 서울로 돌아왔다. 해군정훈음악대

어린이 합창단은  KBS 어린이 합창단으로 복귀해서 1954년

3개월간에 걸쳐 미국전역을 순회하며 대 환영속에 국위를 선양하고

 2,000 달라 라는 큰 돈을  경제부흥자금으로 들여왔다. 해군정훈음악대

 교향악단과 육군교향악단을 주축으로 1956년 KBS교향악단이 창설되었다.

김생려는 미국 국무성 초청으로 미국에 가 지휘자로도 활동히디가 1957년

국내에 돌아와 서울 시립교향악단을 창설 본격적인 활동을 벌렸다. 김천애는

 1956년 숙명여자대학교 교수로 취임 강단에서 활동하면서 KBS교향악단을

 비롯해서 KBS와 깊은 인연을 맺고 지속적인 방송활동을 벌렸고

나라의 각종 기념일에는 방송이나 행사장에서 의례이

그의 노래가 울려퍼졌다.   

  

 

 

 

대학교수로 또 학장으로 재직하면서

국내, 외적으로 여러 활동을 벌리던 김천애는

1956년의 KBS 교향악단 창설멤버이자 해국정훈음악대에서

알게된 조민구가 미국 LA 코리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Los

Angeles Korean Philharmonic Orchestra)「LAKPO」를 창설하고

그 창단공연을 열면서 그 공연에 초청받은 것을 계기로 미국으로 활동무대를

 옮겼다.   1972년 시민회관 (세종문화회관의 전신) 에서 갖은 독창회가 그의

국내 팬들과의 고별무대가 된 샘이었다. 조민구도 창단공연이 끝나면 본국

으로 돌아갈 줄 알았고 국내 팬들도 아주 떠나리라고는 생각치

 않았던 것이었지만 김천애 자신은 미국으로 활동무대를

옮기려는 생각을 갖었는지도 모른다. 

 

「LAKPO」창단공연을 마치면 본국으로 돌아

갈줄 알았던 김천애가 LA에 머무르면서 한달 여를 

조민구 자택에서 함께 살았다. 조민구는 그때 김천애가 참으로

음악만을 위해서 태어났고 살아온 사람임을 깊이 알았다. 조 민구의

아이들도 함께 살던 그 자택에서 자다가도 빔중에 노래를 불러 아이들이

잠들기 어렵던 때가 많았지만 10 여년이나 연상이고 민족의 음악가로 추앙받는

  분에게 애기 할 수 없는 나날이 계속되었다고 하셨다.     음악인들이라도 음악을

 하다가 다른 생각을 하기도 하고 다른 일을 함께 하는 경우들이 있지만 김천애는

오직 음악뿐이었다. 음악과 하느님이생의 전부였음을 강조한다.   다음

사진들은 김천애가 조민구 자택에서 기거하는 동안 촬영한 사진들로

조민구 집무실에는 아래 사진들이 붙어있다. 수십년간 벽에

붙은 사진이라 상태가 좋지는 않지만 참으로 귀한

사진이어서 이가인께서 촬영해서 보내주셨다.

 

 

 

 

  

집무실에는 전축이 있고 그 전축에는

김천애 가곡이 포함된 레코드가 놓여있어 수시로

돌아간다. 선생은 그 레코드를 들으며 감동하며 추억을

떠 올린다. 김천애는 1972년부터 1975년까지 3년간 LA에 머무르는

 동안에도 쉼없이 활동을 했다. 이기간 LA가 주 무대이기는 했어도 뉴욕,

워싱턴, 필라델피아, 휴스턴, 샌프란시스코 등 전역과 케나다, 유럽 등지

에서 특별순회공연을 가졌다.    일반 공연무대에도 섰지만 모든교회의

초청에 응하면서 수 없이 많은 미국 한인교회를 순회했다. 김천애가

 목사의 딸로,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수 많은 찬송가를 불러 미국의

교회는 앞다투어 그를 초청했다. 조민구는 말한다. 김천애는 

미국의 모든 교회로부터 환대를 받았다고 했다.    

 

 

 

 

 1975년부터 1981년까지 6년간은

뉴욕에 머무르는 기간이었다.  박인수,

이영애, 강원, 김재희, 김석순, 이해경, 이춘성

등과 함께 미국전역의 한인교회를 순회하며 선교

활동을벌렸던 김천애가 1981년 다시 LA로 돌아왔다.

박정희 정권의 유신반대 활동 대열에 섰던 김천애가

국내에 돌아오기는 어려웠어도 미국에서 한국인

들의 중심적인 역할을 하면서 폭 넓은

 활동을 벌렸다.

 

 

 

 

1981년 다시 LA로 돌아온 김천애는 

세상을 뜰때까지 이곳에 머무르면서 음악계의

 중심적인 역할을 하며 선교활동에 테너 이우근, 김창무

, 김춘환, 바리톤 박철주목사, 장동은, 노형건, 베이스 조규함,

소프라노 노혜숙, 방연옥, 이귀임, 김옥자, 이동희, 노성애,

알토 원정숙, 지휘 김순세, 박철환등이 그와 함께 활동한

 멤버이고 음악선교와.S olist로 특별공연 활동을

 가졌다.  아래는이 무렵「LAKPO」

공연무대 사진이다.

 

 

 

 

LA에서 살던 1987년 퓨리탄대학에서

음악박사 학위를 받았고 1988년에는 LA밤비노

음악학원을 설립, 운영하며 가난하고 재질이 많은

청소년 음악가 발굴과 특별지도를 했다. 그동안 정치

상황과 맞물려 국내에 올 수 없었던 김천애가 고국을

 떠난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17년이 넘어 국내에

온 것은 1990년으로 여기에 관해서는 김천애

1편에서 썼음으로 생략한다.

 

 

이때 방문길에서 남긴 경향신문 글 한편을 인용했다.

-1990년 11월 23일자-  

 

 

 

 

1991년 2차대전의 종전 46년 기념으로

일본 아사히 신문에서 봉선화를 취재해 큰 기사로

 실었으며 1994년 천애음악재단을 설립 이사장으로 임했다.

 1994년 가을 리승만박사와 신흥우, 송현영, 김형식 목사 등이 1903년

창립한 대한기독교 협동장으로 취임, 윤심원, 최병인 목사 김창하 장로,

권정호 목사등과 교회발전을 위해서 상당한 헌금과 헌신으로 많은 교회를

순회하며 음악선교에 진력했다. 1995년 3.1절 기념 음악회와 리승만 탄신

 120주년 행사 (3월 26일)기념음악회에   테너 김창무 장로 소프라노

노혜숙, 플루트 한옥주, 색스폰 김종옥드이 연주를 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4일이 지나 3월 30일 세상을 뜨셨다. 세상을

시던날 까지 음악을 하셨던 것이다.

 

 

 

 

김천애 수제자 민동옥 여사는

1995년 9월 김천애 기념음반을 내면서

선생님의 삶의 마지막을 다음과 같이 썼다. 

 

「돌아기시기 전날인 3월 29일 교회에서

 성가를 부르고 돌아와 이듣날 아침 고요히 느님

 품에 안겼으니 그는 진정한 음악가의 삶을 산 샘이 됐다. 말년의

 인생을 주로 LA에서 보냈으니 그가 돌아 가신곳도 LA였다. 4월 8일

 오후 3시 LA에서 범 기독교 협회 , 남가주 음악가협회, 남가주 교포협회

연합장으로 환송예배를 갖고 그는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4월

 12일 아침 8시 서울대 병원서 그의 형제와 제자들을 위시해

평소 그를 사랑했던 모든 이들이 모여 금란교회 배창규

목사님의 집레로 영결예배를 보았다.」

 

 

 

 

오늘 글은 김천애 선생님 생전에

가장 가까우셨던 분 중의 한분 조민구

선생님의 말씀과 민동옥 여사님의 자료, 그리고

또 조민구 선생님과 함께 하신 이혜자 선생님의 동영상과

자료를 바탕으로 썼습니다. 김천애 선생님에 관한  글은 민동옥

여사와 춘하추동방송 이장춘이 자료가 모아지는대로 계속 써 나갈

것입니다. 중복된 부분 누락된 부분은 마지막 정리단계에서

수정 될 것입니다. 김천애 선생님을 사랑하고 존경하시는

 분들, 가까이 지내셨던 분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소장 자료 제공을 부탁 올립니다.

 

 

김천애 레코드를 들으시며 추억을 더듬는 조민구회장님

 

미국에서 취재한 동영상과 사진자료 등을 보내주신 이혜자 회장님

  

 

유경환 (유카리나)여사님 글

 

 

국가와 민족의 아픔을 노래로

달래며 함께한, 오직 노래가 인생의

전부였던 분이 살아서는 고국에 오지못하였다는

가슴아픈 이야기...........역사, 시대의 희생자라고

해야할까요? 이러한, 모르고있던 사실들을 모으고

 정리하여 자료를 보내주시는 이혜자 선생님, 그리고

그   자료들을  열정으로  편집하여  올리시는

 이장춘 국장님덕분에 공부  많이

 합니다.   고맙습니다.

 

 

윤후현(팔방미남) 선생님 글

 

 

님(김천애),이 가신지 벌써 20년

(1995년)의 세월이 흘렀군요. 부산 피난민

시절 서울교향악 협회를 창설 하였고, 해군정훈

음악대와 한국교회음악협회에서도 눈부신 활동을

하셨습니다.조민구 선생님의 생생한 증언으

김천애,의 생을 더듬어 볼 수 있어서

 감회가 깊습니다.


소식 감사합니다. 이장춘 사장님!...

 

 

김영우 (미국) 선생님 글

 

 

  이 국장 님 수고많이 하셨습니다.
김천애여사와 조민구 단장의 관한 이야기를
너무도 상새하게 설명하여 이 두분들의 응악 활동을

 모르는 독자들에게 많이 전달됐을것입니다. 물론  이 가인

선생이 제공한 자료 의 도음도 많았을 것입니다. 한국과

미국, 한인음익인들의 활동상을 서술한 역사의

페이지가 되기도합니다.


수고 많이하세요 ...

김영우 드림 ..

 

 

박서림 (원로방송작가) 선생님 글

 

이장춘 선생,   

오래간만입니다.

 광법위한 활약, 응원을

보냅니다. 기록 해야죠. 진실을,

 거짓이 법람하는 세상이니 더욱.

 수고하세요.  건강하시구요.

 

 박서림   

 

 

송영희 선생님 글

 

 

음악의 원천사를 

보는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은지선생님 글

 

김천애여사가 미국에 거주한다는 것

 이외에는 일체 알려진 것이 없어서 어떻게

사시는지 매우 궁금했는데 인터넷에 나오는 노래도

너무 낡아서 듣기가 그랬는데 돌아가신지 20년이 되어

 갑자기 이렇게 자세하게 알려지니 매우 황당합니다.

많은 주위 친구들도 진작 이렇게 특히 살아

생전에 소식이라도 들었다면 하면서
안타까와 합니다.



최파도선생님 글



돌아가신 어머니가 슬플때

 부르시던 노래.. 인생의 한만 품고

가신 어머니를 이 노래들으며 하염없이

 그립니다.     어머니 담 생은 행복한

인생으로 환생키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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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천애 1, 민족의 성악가 / 봉선화, 그리운 강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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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선화 소프라노 김천애 (봉숭아 꽃) 1972년 LA초청 그때 그 모습 조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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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민구, LA 코리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LAKPO 반세기 이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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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난파 현대음악의 선구자 불후의 명곡 노래 봉선화 봉숭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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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방송국과 현대음악의 선구자 홍난파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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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난파작곡 민족의 노래, 봉선화인가. 봉숭아 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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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방송국 양악을 이끌었던 사람들/ 홍난파, 박경호, 김생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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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DK오케스트라(교향악단)에서 KBS교향악단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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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원 작사(김석송), 안기영 작곡 그리운 강남, 노래 왕수복, 김용환, 윤건영 (원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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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코리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LAKPO 창설자 조민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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