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우회·독립운동

방송인 고흥복님 사진으로 본 1960년대 그때 그 시절

이장춘 2015. 1. 12. 15:52

 

 

 

위의 사진이 무슨사진일까?

지금은 상상 할 수도 없고 설명이 없이는

알 수 없는 사진이다.   시골 한 마을에 라디오가

한, 두대 있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한대의 라디오도 없던

시절에 잠시나마 라디오를 들을 수 있도 마을에 작은 안테나를

세우고 주민들에게는 라디오를 빌려주어 중앙방송국을 중계방송하거나

현지에서 프로그램을   제작 방송해서 방송의 혜택을 누릴 수 있도록 하는

 국지 이동방송이 실시되었다. 위 사진은 1962년  봄 충청북도와 전라북도지역

 국지이동방송팀의 활동상을 촬영한 사진으로그때 그 팀원으로 활동했던

 고훙복님이 보내주셨다.      그때 함께 활동했던  팀원으로는

엔지니어 고흥복님과 프로듀서 이상익, 그리고

 홍기욱 아나운서가 참여했다

 

 

방송인 고흥복님 사진으로 본 1960년대 그때 그 시절

 

 

6.25로 온 나라가 잿더미가 되어

어려움을 겪던시절 오지나 섬지역의 방송문화

 혜택을 주기위한 국지이동방송을 종종 실시된 적이 있었고 

이때의 1962년 봄 충청북도와 전라북도지역의 국지이동방송 실시는

100W송신기, 콘솔, 녹음기, 기타 방송장비와 조립식 중파ANT(이동용)

끌고 다니며 산간벽지 난청지역에 방하나 빌리고 동내 집에 트랜지스타

라디오 100여대를 나누어 주어 방송을 들 을 수 있도록 했다.  그때

 동내에 라디오를 갖은 사람은 큰 부자로 불리기도 했다. 해방될 때

남한에 있는 라디오는 모두 21만 여대였는 그로부터

15년의 세월이 흐른 1959년 말에도 라디오

대수로 보면 거기서 거기 갈만했다.

 

전쟁으로 잿더미가 된 땅에서 

라디오라고는 생산도 못하고 부품이 없어

있던 라디오도 고쳐 쓰지도 못하고 버려야만 했다.

수입이라는 것도 없었고 외국인들이 들어오면서 가지고 온

라디오나 어쩌다가  외국에 다녀 오다가 사가지고 들어온

라디오가 고작이어서 라디오를 가지고 산다는 것 자체가

어려웠다. 지금으로 부터 50년을 거슬러 올라간

우리나라의  생활모습이었다.

 

우리나라에서 라디오를 처음 만든

것은 1957년이다. 그때 삼양전기에서 처음으로

라디오를 생산했고 이어서 1958년 금성사에서 라디오를

생산했다. 이 무렵부터 농어촌에 앰프 촌을 만들어 스피카를

보급하기 시작하고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무상으로 보급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1959년에 들어 라디오가 몇 대나 되는지

조사해 보았더니 31만대가 겨우 넘었다는 것이었다. 

그중에서도 서울 경기도에만 집중적으로 보급되어

 70%에 달하는 농어촌에는 라디오 한 대도

 없는 마을이 많았다.

 

 KBS와 정부가 나서서 라디오

 생산 공장을 지원하고 농어촌에 라디오나

스피카를 보내고 농어촌을 돌아다니며 라디오가

무엇인지를 계몽하면서 라디오를 나누어 주었던

 것이  60년대 까지의  우리나라 현실이었다.

 더 자세한 얘기는 아래 글을 올렸다.

 

 

 

 

 

아래는 1960년대 그때 그 시절

인기프로그램 재치문답을 위해 간 방송팀이

진해청주등지에서 촬영한 사진이다. 그 시절 인기

프로그램이었던 재치문답은  서울  남산방송국  스튜디오

에서 녹음을 해서 방송을 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지역에서도

 중요한 행사가 있을때는 현장으로 마이크를 옮겨 방송하는 경우가

있었다.    아래 사진들은 청주, 진해등지에서 녹음을 하고 촬영한

 사으로 사진을 제공 해 주신 고흥복님을 비롯해서 명 사외자이자

  당시의 방송과장 장기범님 비롯해서  안희섭(당시 한국일보 

만화만평주간) 한국남, 오혜령, 이연숙박사와 진해 유지

주민과 진해기지사령관이 함께 한 사진이다. 

자세한 사항은 아래 관련글을 올렸다.

 

 

 

 

 

위는 1965년(좌), 1966년

(우) 남산 KBS중앙방송국 정원

에서 촬영한 사진이다.

 

방송인들이 촬영한 사진은 개인적으로는

추억이고 그 시절을 살아온 표상이지만 방송사적으로

보면 이 분들의 발자취가 오늘의 방송을 있게 한 주인공들이다.

그렇기에 필자는 방송인들의 사진 한장이라도 소흘히 하지 않는다.

그 사진 에는 소중한 맷세이지가 전해져 온다.    필자는 방송인

들로 부터 흔히 듣는다. "춘하추동방송에 올라 있는 사진을 보니

모두 소중하게 보이고 본인에게도 저런 유의 사진이 있었는데

 지금와서 찾아보니 없다."  것이다. 참으로 소중한 

기록들을 무심코 흘려보내는 경우가 많다.

 

춘하추동방송에서 방송사의 지난

발자취를 더듬다. 보니 그런 말들을 수 없이

 듣는다.    우리주변에는 흩어져 있는 기록들이 수

없이 많다. 사적인 일로만 생각 할 것이 아니라 공인으로

있을때의 기록임을 생각하고 소중하게 간직하고 활용했으면

한다.  춘하추동방송은 보내주신 사진, 한장이라도 또 어느 

기록이던지 소중하게 간직하며 블로그에 올린다. 그리고

제공 해 주신 분에게 고마운 마음을 갖는다.

 

  

 

 

위는 남산방송국 RADIO공개홀 조정실이고

아래 왼쪽은 주조정실에서 박경환님과 얘기를

 나누는 고흥복님, 오른쪽은 발전실 앞있는

방송국 웨곤 차 앞에 선 고흥복님

 

 

 

 

 

고흥복님의 근황사진 모음

 

 

고흥복선생님은 올해 81세로

방우회 (한국방송인 동우회 -회장

한영섭) 이사로 활동하시면서 오랜세월

서화에도 힘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2014년 80주년(산수) 생일의 해에 방우회 한영섭 회장님으로 부터 기념품을 받는 고흥복님

 

 

 

제 51회 방송의 날 (2014, 9, 2)에 함께 한 고흥복님

 왼족부터 이장춘, 권영원, 계원준, 정항구, 박경환, 정근춘,

고흥복, 노익중, 한이수, 이재, 최인열 님

 

 

윤후현 (팔방미남) 선생님 글

 

 

라듸오 이야기를 들으니 60년초

제가 중학교 1학년때,    시골 저희집에

마을에서 유일하게 딱 라듸오가 한대 있었는데,
마을 사람들이 시도 때도 없이 몰려와서 라듸오를

듣는 관계로 밥도 못 먹고 밤에 잠도 제대로 잘 수가

없었습니다. 그 다음 해에 제 아버지가 마을 리장이

되어서 집집마다 스피커를 달아주어 청취하게  

하므로써, 시골 마을에 대 경사가 났던

 기억이 떠 오릅니다.


50, 60년대, 그때 그 시절 사진을

고히 소장 하셨다가 공개 해 주신 고흥복님!

감사합니다. 선생님은 우리나라 라듸오 방송의 선구자

 이셨구만요, 제 51회 방송의 날! (2014, 9. 2)에 고흥복님,

노익중 이사님,과 함께 늠름한 모습을 보여 주신 춘하

추동방송 이장춘 사장님! 너무 반가웠습니다. 소식

 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 소식이

벌써부터 기대 됩니다...

 

 

답       글   

 

 

고맙습니다. 저희들이

젊었던 시절, 그때 그 시절 반세기전

우리들의 삶의 모습이었습니다. 윤선생님 댁에

 라디오가 있었으니 그 동내분들이 자주 많이 모여

라디오들으시고 얘기도 나누셨겠군요. 벽에 스피커가

걸리기 시작한 것은 1959년 부터 였습니다.  이장님이셨던 

아버님께서 보람있게 추진 하셨을 줄 압니다.

머리속에 그 모습이 그려집니다.

  

 

양방수 (미국) 선생님 글

 

 

나라 사랑이 어디에도 있지만

우리시대의 문화를 모든 국민들이 잠에서

 깨어 날수있도록 한 시대를 풍미한 언론 방송의

근간을 파 혜쳐서 소리없이 잊혀져 가는 우리시대의

 발자취를 더듬어 가시는 일은 타의던 자의던 타국에서

조국의 정서를 잃어버리고 사는 재외 동포들에게는 우리의

과거사를 되 돌아 보고 자아를 발견하는 계기를 심어 주는

일이라고 생각되어 감회가 깊습니다. 앞으로 더 많은

기록을 남기시길 기원합니다. 주신 소식

 정말 감사 합니다.

 

 

박서림 선생님 글

 

 

이장춘선생, 장기범 ann도

보이고, 이선생도 보이고... 6.70년을 

오르내리다 보니 여러가지 추억에 잠기게

되네요. 흥복 선생의 생애가 자랑스럽

습니다.  잘 보았습니다.

 

 건강하세요

 

박서림 

 

 

 

2014년 문공회 서화전에서 스스로의 작품 앞에 선 고흥복님

 

 

 

2014년 문공회에서

아! 이 얼마만인가? 남산방송국

시절에 해어져 이제야 만나다니....

프로듀서 전영효님과 엔지니어

 고흥복님이.......

 

 

 

2014 문공회 송년회에서 고흥복, 김기호, 김선초님과 함께

 

 

 

2013년 문공회 서화전 출품 

 고흥복님의 작품 앞에서 왼쪽부터

김영효, 강창우, 강정도, 고흥복, 한영섭

(방우회 회장) 박경환님, 우제탁님

 

 

  2013년 문공회 송년회에서 

왼쪽부터 고흥복, 권영원, 한영섭, 우제탁님 

 

 

2014년 9월 항일단파방송연락운동 기념식에 참여 해주신

 분들과 함께 한 고흥복님 앞줄 왼쪽부터 (존칭생략)  오승룡, 박종세,

전영우, 정근춘, 이철호, 한영섭, 김성오, 서종환, 성달현, 이휘웅, 김기호,

뒷줄 왼쪽부터김광일, 노익중, 이장춘, 우제탁, 이용실, 이정오, 고흥복, 송현식,

한이수, 김선초, 조동근, 강창우, 권영원, 정항구, 장도형, 김성배, 박문양, 이재영,

박경환, 강정도, 김영효, 정관영, 계원준, 이혜옥, 김회종님입니다,

 

 

 

 

 

 

 

아래 글은 오래전에 올렸던 고흥복님의

관련 글을 원문대로 다시 올렸음

 

 

 

 

라디오 보급 30만대였던 시절 1950년대 말

 

 

 먼 세월도 아닌 50년을 거슬러

올라가면  그때가 라디오 30만대시절입니다. 

 오늘날 라디오라야 전자제품 같이도 생각지 않지만

그때는 라디오를 갖은 사람들이 큰 부자였습니다.

해방될 때 남한에 있는 라디오는 모두

21만 여대였습니다.

 

그때부터 라디오라고는

 생산도 못하고 부품이 없어 있던 라디오도

 고쳐 쓰지도 못하고 버려야만 했습니다. 수입이라는 것도

없었고 외국인들이 들어오면서 가지고 온 라디오나

어쩌다가 외국에 갔다 오다가 사가지고 들어온

라디오가 고작이었습니다.

 

6.25가 나고 모든 것이 어려워지면서

 라디오 한 대라도 가지고 사는 사람은 더 적어졌습니다.

 이때부터 1959년까지는 통계도 없습니다. 아예 통계 자체가

 무시된 것입니다. 이래서는 나라의 발전을 기대하기 어려웠는지라

 국민들에게 라디오방송이라도 듣게 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

 정부나 뜻있는 사람들의 생각이었습니다.

 

1957년과 58년에 삼양전기와

금성사에서 처음으로 라디오를 생산하고

농어촌에 앰프 촌을 만들어 스피카를 보급하고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무상으로 보급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1959년에 들어 라디오가 몇 대난 되는지 조사해 보았

더니 31만대가 겨우 넘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서울 경기도에만 

집중적으로 보급되어 70%에 달하는 농어촌에는 라디오 한 대도

없는 마을이 많았습니다. KBS와 정부가 나서서 라디오 생산

공장을 지원하고 농어촌에 라디오나 스피카를 보내고

 농어촌을 돌아다니며 라디오가 무엇인지를 계몽

하면서 라디오를 나누어 주었던 것이 60년대

까지의 우리나라 현실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라디오 100만대가

넘은 것은 1962년 무렵이었고 라디오 없는

마을이 사라진 것은 1960년대 말이었습니다.

국민간의 문화적 격차를 없애야 한다고 온갖 노력을

기울인지 10여년 만이었습니다. 그때 공보부에서 그 일을

담당하셨던 방우회(한국방송인 동우회) 고흥복 이사님이

이상익 프로듀서,   홍기욱 아나운서와 함께   충청도와

 전라북도 일원의 농촌에서 이동식 송신기와 안테나를

 설치하고 현지방송을 하면서 라디오를 직접 나누어

주던 모습이 담긴 사진을 보내 오셔서 그때를 

 회상하면서 이 사진을 올립니다.

 

 

 

 

1962년 봄 충청도와 전북지역

국지이동방송을 실시하던 모습이라고 했습

니다. 10W송신기, 콘솔, 녹음기, 기타방송장비와

조립식중파 ANT(이동용)끌고 다니며 산간벽지 난청

지역에 방하나 빌리고 동내 집에 트랜지스터 라디오

100여대를 나누어주고 국가정책PR방송을

했다고 사연을 전해 오셨습니다.

 

 

 

 

PD, 엔지니어, 아나운서,

운전기사가 한 팀이 되어 활동을

했는데 이때는 이 상익,고 흥복 홍 기욱님이

한 팀이 되어 활동했는데 당시 홍기욱ANN (KBS

홍기봉 ENG의 동생)는 체격도 좋고 호남 형으로

임택근 아나운서가 왔다고 가는 곳마다 동내

처녀들이 몰려나와 인기가 좋았

다고 했습니다.

 

 

 

 

우리 세대에 그런 세상이 있었던가.

 할 정도로 세상이 너무 변해버렸습니다. 사실

저도 라디오 없이 살다가 1959년부터 우리 집에

스피카가 설치되어 벽에 걸린 스피카 들으며 살았고

제가 방송국에 들어와 동료 기술직원이 라디오를

조립해서 판다기에 두 달분 봉급 12,000원을

주고 그 라디오 석대를 사서 고향에

보낸 적이 있었습니다.

  

 

  

 

 

 

 

방우회 고흥복 1960년대 추억사진모음

 

 

방우회 고흥복님이

KBS에서 방송과 함께하던 시절

촬영한 귀중한 사진을 모아 보내주셨습

니다. 이 사진은 앞으로 지난날의 방송 얘기를

 쓰면서 귀중한 자료로 활용 될 것입니다.   

 

 

1962년9월 남양송신소 준공식 기념촬영 앞줄좌측부터

호재경씨, 본인(고흥복) 뒷줄에 노인식, 홍우모씨도 보인다

 

 

 

 

1962년 국지 이동방송  

 

1962년 봄 충북,전북지역

국지이동방송 실시.100W송신기,콘솔,

녹음기,기타방송장비와 조립식중파ANT(이동

용)끌고 다니며 산간벽지난청지역에 방하나 빌리고

동내집에 트랜지스타 라디오100여대를 나누어

주고 국가정책 PR방송을 했다..

 

 

 

 

 

 

 

 

 

 

 

 

재 치 문 답

 

 

 

좌측에서부터 본인(고흥복), 장기범 방송과장

그리고 안희섭씨(당시 한국일보 만화만평주간)

 

 

 

 

1966년4월 라디오 인기프로 “재치문답”

공개방송에서...(진해군항제 현장) 앞줄 좌측부터

 한국남씨, 안의섭씨, 본인(고흥복),엄익체씨, 장기범

방송과장, 뒷줄왼쪽부터 진해유지주민과 진해기지사령관

그리고그옆이 오혜령씨, 이연숙씨.......

 

 

 

1967년6월 “재치문답”공개방송(청주대학에서..... )

 

 

 

 

부산 KBS 기술과장(김재억?)함께....

 

 

1964년도 제45회전국체육대회(인천) 민박기념사진

뒷줄 좌측부터 기자, 중계차운전기사, 본인(고흥복), 중계차

기사(문창남씨), 최계환ANN, 조찬수ENG, 중앙좌측 안용민 ANN,

이명환PD, 이광제ANN, ENG?, 김성배 단장, 앞줄좌측부터

박상수씨 그리고 민박집 가족들......................

 

 

 

1966년도경 김포공항에서 박정희 대통령 외국순방

 귀국실황 중계방송 광경(이광재 -이광제- 아나운서와 같이)

 

 

 

 

1960년대 스포츠중계방송(장충체육관)

좌측에 이규황ANN, 손학준씨, 본인(고흥복)

 

 

 

 1965년경 KBS-R 기술과직원

 가운데줄 중앙에 유병은과장, 앞줄중앙에

임시현씨그오른쪽에 본인(고흥복)

그리고 보면 알만한 사람들....

 

 

 

1966년 KBS-R 청사 뒷줄 좌측에서

세 번째가 본인(고흥복) 임시현, 박상수,

박상원, 김경욱, 김성기씨도 보인다.

 

 

1960년대 라디오중계차 앞에서.....

뒤건물은 발전실

 

1960년대 RADIO 주조정실에서

박경환 계장과 함께....

 

1960년대 라디오공개홀 조정실에서....

 

1960년대 라디오공개홀 조정실에서 편집작업.....

  

1960년대초 KBS-R 본관 앞에서.....

 

1960년대 서해해수욕장에서 공개방송 출장

박상수씨와 함께.....

  

1960년대중 김일수씨 해외출장 환송.....

 

1962년5월 제주KBS 출장시 최용순씨와

 

 

1962년도 제주KBS 출장시

제주KBS기술과 직원과 함께 앞줄

좌측이  본인(고흥복) 우측이 기술과장

뒷줄 두번째가 최용순씨

 

1962년4월 강능KBS 출장.....

 좌측이 최돈민씨 다음이 본인(고흥복),

운전기사, 그리고 우측이 최용순씨

 

 

1962년도 식목일에 호재경씨와 같이

 

1962년도 공보부방송관리국시설과 야유회뒷줄 중앙이 본인(고흥복)

 

1960년대중 기술과야유회, 앉아서 손학준씨와 얘기

하는 성기석과장, 그옆 술잔을 드리키는 본인(고흥복)

그리고 뒤에 서있는 박한준씨와 김태호씨도 보인다.

 

1960년대 기술과 야유회

 

1960년대초 야유회에서.... 본인(고흥복)과 박상수씨

 

 

 

 

 

1960년대 만리포해수욕장 공개방송....

오용한PD와 함께.....

 

1960년대 만리포해수욕장 공개방송 녹음출장.....

박상수씨와 함께......

 

1966년7월 체신공무원교육을 수료하면서....... (당시 KBS에서 5~6명이 참가했음)

앞에서 세 번째줄 좌측에서 일곱 번째가 본인(고흥복)

 

 

 서울 종로 5가 출판 문화 회관에서 전국의 기술 간부가

함께 한 사진으로박수환, 김종순, 임동익, 유준희, 최순용,

구연도, 박희양(방송관리과장)님의 모습이 보입니다.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나성려 쌍굴뚝 이별70.mp3

 

나성려 쌍굴뚝 이별70.mp3
2.62M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