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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화진 외국인 묘원, 아펜셀러, 언더우드, 헐버트, 배설, 테일러, 소다 가이치

이장춘 2013. 11. 27. 04:10

 

 

 

조선이 개화되기 시작하던 1880년대부터

관리로, 군인으로, 선교사로, 교육자로 조선을 찾아

이 땅에 들어온 사람들 가운데는 본인이 테어난 나라보다도

조선을 더 사랑하면서, 때로는 조선사람보다도 더 조선을 사랑하면서

조선을 위해서 일을 한 사람들이 있었다. 이분들 가운데는 조선땅에

 뭍히기를 원한 사람들이 있었고 또 일제 강점기에 추방 당했거나

어쩌다가 조선땅에서 숨을 거두지 못했던 분들도

생전에 그 분의 뜻에 따라 대한민국 땅에

뭍히신 분들이 있다. 

 

 

외국인 묘원 양화진 아펜셀러, 언더우드, 헐버트, 배설, 테일러

 

 

언더우드나  아펜셀러 가족들, 배설,

헐버트, 테일러, 소다 가이치, 셔우드 홀 가족,

더글러스 B. 에비슨, 류제한, 에케르트, 배어 배의례,

켄뮤어가족,  채핀부부, 옥기흥 사관,  두영서 사관,

라일리 사관,  푸릭사관,  링콘 등등 수많은

 사람들의 혼이 대한민국에 뭍혔다.

 

 

 

 

필자가 그 분들이 잠들고 있는

서울 양화진 외국인 묘지를 찾은것은

2013년 8월 12일이다. 필자가 알아서 간것이

아니라 그곳을 갔더니 그런 곳이었다. 대한민국을

위해서 살다가 대한민국 땅에 와서 세상을 뜬 헐버트

박사  탄신 150주년과 64주기 추모행사가 있다고

해서 가 본  곳이다. 어린 시절부터 익히

들어왔던 분들도 여기에 잠들고

 있는것은 몰랐다.

 

바쁜시간에 틈을 내어 부지런히

사진을 촬영했지만 3개월 여가 흐른 오늘에야

글을 올린다. A묘역부터 F묘역까지 수많은 외국인들의

 영령들이 잠들고 있지만 몇분만 올리게 된  아쉬움이 있다.

간단한 내용을 기술했지만 한글로 읽기 쉽게  쓰여진 묘비나

기념비가  있는 경우에는 그 기념비로 대신했다. 순서없이

사진 촬영 순서대로 올렸다.  이분들의 혼이 대한민국

땅에서 잠들게 된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하면서

영령들의 명복을 빈다.

 

  

 

 

 

아펜셀러 가족들 APPENZELLER

 

 

우리는 부활절 아침에 이곳에

 왔습니다. 그날 사망의 권세를 이기신

주께서 이 백성을 얽어맨 결박을 끊으사

하나민의 자녀로서의 자유와

빛을 주시옵소서

 

 

1885년 4월 5일 조선에서 첫 기도

 

 

우리나라 근대교육의 효시라고

일컬어지는 배제학당을 비롯해서 이화

여자전문학교 등 현대적인 학교가 아펜셀러

 영향하에 세워졌고 오랜 세월 맥을 이어오는 정동

교회가 아펜셀러에 의해서 세워졌다. 일반적으로 

아펜셀러가고 불리지만   이곳 기념비 등에는

 아펜젤러와 아펜셀러가 혼용되고 있다.

 

 

 

 

 

 

  

배설 裴說:Bethell, Ernest Thomas

 

 

외국인으로 민족지 대한매일신보를

창설 조선인들의 눈을 뜨게했던 배설! 국, 한문

혼용 신문을 비롯해서 순 한글판, 영문판의 신문을 발랭

하면서국민들의 절대적이 지지속에서 치외법권을 방패막

으로 삼아 대한민국을 대변했다. 우리에게는

영원이 잊지못할 대한 매일신보다.

 

 

 

 

 

 

 

더글러스 B. 에비슨(Avison, Douglas Bray)

 

 

1893년 부산에서 외국인 선교사 2세로

테어나 세브란스 병원장을 지내는 등 한국을

 위해서 일했다. 1952년 8월 4일 캐나다 벤쿠버에서

별세 임시 안장했지만 한국에 묻히기를 소원했던 그분의

뜻에 따라 1954년 이곳에 안장했다 제자들이

쓴  다음 비문이 새겨져 있다.

 

"더글러스 B. 에비슨 선생은 우리 나라에

 나시고 일하시고 여기에 무치셨다. 20년 동안 우리 학교

에서 몸바쳐 일하심으로 사람과 하나님을 섬기셨다. 알고 행할 수

있도록 후학을 가르치시고 사랑과 정성으로 환자를 대하셨다. 높은

덕 넓은 은혜를 마음에 색이면서 그 유언을 따라 유해를 모신

 이 자리에 이 비를 세워 선생을 추모한다.

 

1953년 8월 4일 세브란스의과대학 동창회

 

 

 

 

 

 

류제한 박사 FOUNDER

 

 

삼육 간호보건학교설립자 류제한  

묘비가 한글로 쉽게 쓰여있어서 묘비를

올리는 것으로 대신함

 

George Henry Rue. M. D.

고 류제한 박사(1899-1993).

 

“나는 한국에 구경삼아 나온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한국에 나의 뼈를 묻을 각오로

온 사람이었습니다. 이리가 한국 백성을 해치러

온다면 도망가는 목자로서가 아니라 그 양을 위해

 희생할 각오를 하고 온 선교사였습니다”

 

"I did not come to Korea as a tourist.

 I came to this land to give my whole body. and

even my bones, to be buried in Korea. If a wolf attacks

 Koreans, will not run away. as hired shepherds would do Rather.

I am a missionary who would give his life for the sheep."

 

“나는 어느 누구도 소홀히 치료하지

 않았습니다. 이승만 박사를 치료할 때나

 시골의 아낙네를 치료할 때나 똑같이 나의

 최선의 노력을 바쳤습니다.”

 

"I have never treated any

 patient lightly. I have done my best to

 treat each patient. whether it was President

Syngman Rhee or poor farmer's wife."

 

 

 

 

 

 

 

 언더우드 일가 UNDER WOOD

 

 

한국 개화기에 큰 영양을 준

언더우드 일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의

근거지 경신학교를 세우고 세브란스, 연희

 전문학교를 세워 교육에 힘을 기울인 그 일가는

모두 한국이름을 갖고 한국을 위해서 일하신 분들

이다. 연세대학교, 세문안교회, 경신학교 등

 발자취는 넓고 깊다. 그 일가의 묘와

기념비를  볼 수 있다.

 

 

 

 

 

 

 

셔우드 홀 가족 Sherwood Hall

 

 

2대에 걸쳐 한국에 헌신한

가족이다. 홀 선생의 공적비에 내용이 있다.

사업가가 되려던 Sherwood Hall 우연한 기회에

들은 설교 인연으로 폐결핵 전문의사가 되어 1928년 결핵

요양소를 세우고 ‘결핵환자의 위생학교’라고 이름 붙였다. 요양소의

 운영비 마련과 계몽을 위해 1932년 12월 3일에 발행한 크리스마스실이

크리스마스 실의 시작이다. 캐나다의 밴쿠버에서 사망한후  1992년

 4월 10일 아버지의 혼이 잠든 이곳에 안장되어 공적비가

세워졌다. 아래 자세한 내용이 적혀있다.

 

 

   

 

 

 

 

에케르트 Franz Eckert 

 

 

송방송(유경환 여사님 부군) 선생님의 저서

 한겨레 음악사전에서 글을 인용한다.

 

1883년부터 3년간 음악취조소(音樂取調所)

 곧 동경음악학교 전신의 음악교사를 겸임했으며, 그 후

 궁내성(宮內省) 아악과(雅樂科)의 전임교사가 되었다. 22년 만에

귀국해  독일황제로부터 프러시아의 왕실악장이란 칭호를 받았고

우리 정부의 초청을 받아 우리나라에 오게 되었다. 1896년 러시아 황제의

 대관식에 참석하고 돌아온 민영환(閔泳煥)이 서양식 군악대를 창설하도록

상주한 이후, 주한독일영사를 통해 일본에서 서양음악과 군악대를 지도하다

귀국해 우리나라의 양악대를 지도하기 위하여 초빙되어 1901년(광무 4)

2월 27일 우리나라에 도착하여 양악대를 창설하였다.

 

일본에서 9개월 걸쳐서 이룬 성과를

한국에서 3개월 만에 달성할 수 있었다. 착수한 지

 6개월 만에 60여 명의 대취주악단의 양악대를 길렀다.

1904년(광무 8) 명성황후의 장례식 때 장송곡(葬送曲)을 지휘했고,

 1902년 "대한제국 애국가"를 작곡하였으며, 1915년 양악대가 해산되었으나

귀국하지 않았다. 대한제국의 국가(國歌)인 "대한제국애국가"(大韓帝國愛國歌)를

작곡했을 뿐만이 아니라 백우용(白禹鏞)을 비롯한 양악의 선구자들을 길러냈다.

 1910년 한일합방 이후에도 귀국하지 않고 우리나라에 머물다가 1916년

 8월 6일 65세를 일기로 회현동(會賢洞) 자택에서 숨졌다.

 

에케르트의 우리이름이 양화진 안내판에는

여거다(汝巨多)라고 되어 있었는데 송방송 선생님에

 따르면 예계로 (譽啓爐)였다고 하셨습니다. 여러 이름으로

불렸나 봅니다. 독일 대사관에 있는 에케르트 사진 한장을

올립니다. 이 사진에는 에케르트가 1901년 2월 19일

우리나라에 와서 황실 군악대를 창설, 중화전에서

 양곡을 연주, 고종황제로부터 태극훈장을

 받았다" 고 쓰여 있습니다.

 

 

 

 

 

옥기흥 사관

 

 

 

 

 

링콘

 

 

 

 

 

두영서 사관

 

 

 

 

 

라일리 사관

 

 

 

 

푸릭 사관

 

 

 

 

소다 가이치 曾田 曾田嘉伊智

 

 

한국 고아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소다 가이치다. 대한민국의 문화훈장을 받은

 세사람 가운데 한사람이기도 하다. 술에 취해 길에

 쓸어져 빈사(瀕死) 상태에 있을 때 한국인의 도움으로

죽음을 면한것이 인연이 되어 한국을 위해 일한 일본으로.

3.1운동때는 감옥에 간 한국인의 석방을 위해 힘을 기울

였다. 보육원을 경영하던 가이치는  거리에 버려진

갓난아기를보호하는데 정성을 기울였다.

 

 

 

 

채핀부부 채피득, 채부인

 

  

 

 

켄뮤어 가족

 

 

 

 

배어 배의례

 

 

 

 

테일러 TAYLOR

 

 

 UPA(UPI전신) 특파원으로 한국에 와

 1919년 삼일운동때 화성 제암리 학살사건을

최초로 세상에 알렸으며 삼일독립선언문을 입수해서

딸의 침대밑에 숨겨 놓았다가 세상에 알리는 등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서 힘을 기울였다. 고종황제의 국장 사진도 남겼으며

2차대전때 추방당한후 1948년 사망해서 이곳에 안장되었다. 종로

홍난파 집 부근에 가면 달쿠샤라는 테일러 기자가 살던

집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헐버트박사 (Hulbert,H.B.)

 

 

그토록 한국을 사랑하고, 한국의 독립을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한글 보급을 위해 한국인보다

더 힘을 기울였던 헐버트박사! 그의 이름 앞에는 최초라는

 여러 수식어들이 있다. 최초의 한글교과서 사회지리 총서를 출간한

사람, 최초로 아리랑을 외국에 알린 사람. 대한민국 황제의 밀서를

 최초로 미국 대통령에게 전하려고 한 외국인,

 

사회장으로 장례가 치러진 최초의 외국인,

최초로 건국훈장을 받은 외국인 독립운동가,

대한민국의 대통령으로부터 묘비명을 받은 최초의

외국인,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된 최초의 외국인, 

한국 이름으로 흘법(訖法), 할보(轄甫라고도 불린다.

  

아래 영문자 주소를 클릭하면 자세한 글을 볼 수있다.

http://blog.daum.net/jc21th/17781837

 

 

 

  

 

유경환(유카리나) 여사님 글

 

 

어찌 보면 종묘만큼 잘 보살펴져야

 할 묘역이군요. 역대의 왕들도 주어진 운명에 따라

 이 나라의 왕이, 왕가, 왕손이 되어 살다가 갔지만 오직 한국을 위해

자진해서 이 나라에 와서 뼈조차 한국 땅에 뭍이기를 원하신 분들을 모신

보은의 묘역이 있어 다행입니다. 한국 땅에 하나님의 뜻을 위해 왔지만, 그들

 가슴 속에 '사랑'이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너와 내가 따로

 없다는 정신,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이 한마디를 위해 살다가 가신 분들이군요.

이런 곳이 있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었고, 더욱이 양화진이 어디인지도 모르고

 있는 자신이 부끄럽기까지 합니다.조수미씨가 부른 아베 마리아가

이 기사와 너무도 잘 어울립니다.

 

 

답 글

 

 

송방송선생님의 저서 한겨레 음악사전에

에케르트에 관해 자세히 써 놓으셨기에 그 일부를 인용

했습니다. 이런곳이 있다는 것을 아는 대한민국 국민들이 많지

 않은 줄 압니다. 저도 모르고 갔다가 알았습니다. 송방송선생님은

 에케르트에 관해 자세히 써 놓으셨더군요. 물론 유여사님과

함께 하신 일이어서 유여사님의 노고게 감사

드리며 글을 인용 했습니다.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조수미 아배마리아 슈배르트-1.wma

 

조수미 아배마리아 슈배르트-1.w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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