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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 한용운, 심우장, 시 님(임)의 침묵 낭송 해설 김 둘

이장춘 2013. 9. 9. 16:32

 

 

 

 

3.1운동 민족대표로 건국훈장 최고 

훈격의 대한민국장을 받은 국민 30인중 한 분,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 선생님은 시인이요 

 독립지사이며 승려 대선사로 불교계의 큰 별이시다.

그 한용운선생님을 한양도성 역사탐방을

 하던 중 성북동 길에서 만났다.

 

 

 

 

노란 금빛 좌상과 둥그런 석비에

선생님의 시 님의 침묵이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생애가 새겨져 있다. 비탈진 언덕에 잔잔한 풀로 덮힌

 언덕이 있고 그 위에 쉼터가 마련되어 있다. 가까운 거리에

 선생님이 1933년부터 세상을 뜨시던 1944년 6월 29일

까지 살던 심우장이 있다고 했다. 한양도성

길을 잠시 멈추고 심우장을 찾았다.

 

 

만해 한용운, 살던 집 심우장, 시 님(임)의 침묵 낭송 새설 김 둘

 

 

한사람이 다닐정도의 작은 오솔길 따라

 올라가니 심우장이 있다. 이른 아침 8시가 채 안되어

문이 닫혀있고 9시 이후에 관람 할 수 있다고 되어 있어서

발길을 옮기려다가 문을 열어보니 문이 열려 안으로

 들어가 아무도 없는 조용한 심우장에서 선생님을

 생각하며 한 시간 여를  관람했다.

 

 

 

 

 

선생님이 살았던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7호

한옥 심우장 있고  붉은 벽돌로 된 사람이 거주하는

집이 있지만 집에는 사람이 없는듯했다. 90년 된 소나무와

80년 된 향나무가 서울시의 아름다운 나무로 지정되어 있음을

알리는 표지판이 있다. 벽에는 선생님의 초상화며 약력, 친필

한시가 걸려있고 책장위에는 작은 동상도 진열되어 있다. 

유리상자 진열장에는 님의 침묵을 비롯해서 선생님의

저서와 친필원고가 진열되어 있다.  

 

 

 

님의 침묵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적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서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어 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指針)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 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약     력

 

1879년 8월 29일 충청남도 홍성(洪城)에서 출생한

 선생님은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다가 동학농민운동을 만났고

어려움에 처해 1896년 설악산 오세암(五歲庵)을 거쳐 1905년 백담사

(百潭寺)에서 연곡(連谷)을 스승으로 승려가 되고 만화(萬化)에게

법을 받아 승려로 활동하기 활동했고 불교개혁에 앞장서는

이 나라 불교계에 큰 공을 쌓았다.

 

 

 

 

1919년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3년형을 선고받아 복역했고 갖가지

 고난과 회유에도 끝까지 독립의지를 펴 나갔다. 1926년 시집

 님의 침묵(沈默)을 출판해서 일제에 저행했으며 1927년 신간회

(新幹會) 창립회원이 되어 1928년 경성지회장(京城支會長)의

중앙 집행위원으로 활동했다. 저서로는 장편소설 박명(薄命),

 시집 님의 침묵, 불교서적 조선불교유신론(朝鮮佛敎維

新論), 십현담주해(十玄談註解), 불교대전, 불교와

고려제왕(高麗諸王) 등이 있다. 1973년

 한용운전집 6권이 간행되었다.

 

 

 

 

 

당신을 보았습니다.

 

 

당신이 가신 뒤로 나는 당신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까닭은 당신을 위하느니보다 나를 위함이 많습니다.

나는 갈고 심을 땅이 없으므로 추수(秋收)가 없습니다.

저녁거리가 없어서 조나 감자를 꾸러 이웃집에 갔더니

주인(主人)은 '거지는 인격이 없다.

인격이 없는 사람은 생명이 없다.

 너를 도와주는 것은 죄악이다'고 말하였습니다.

 

그 말을 듣고 돌아 나올 때에 쏟아지는

 눈물 속에서 당신을 보았습니다.

나는 집도 없고 다른 까닭을 겸하여

 민적(民籍)이 없습니다.

'민적 없는 자(者)는 인권이 없다.

인권이 없는 너에게 무슨 정조냐'하고

능욕(凌辱)하려는 장군(將軍)이 있었습니다.

 

남에게 대한 격분이 스스로의 슬픔으로

 화(化)하는 찰나에 당신을 보았습니다.

아아, 온갖 윤리, 도덕, 법률은 칼과 황금을

 제사지내는 연기(烟氣)인 줄을 알았습니다.

영원의 사랑을 받을까, 인간역사(人間歷史)의

첫 페이지에 잉크 칠을 할까, 술을 마실까

 망설일 때에 당신을 보았습니다.

 

 

관련글 보기

 

 

한양도성 역사탐방 (8) 혜화문 (동소문) - 숙정문(북대문) 구간 view 발행

http://blog.daum.net/jc21th/17781856

 

 

 

 

 

 

 

 이 오솔길로 올라가면 심우장이 있다.

 

 

 

 

 

 

 

 

남국의 국화꽃 채 피지 않고

강호에 노던꿈이 누대에 머물렀네

기;러기 그림자가 산하에 인간의

형상처럼 멈추고

가이 없는 가을나무 사이로 달이뜨네

 

 

 

 

 

 

 

 

 

   

당대 최고의 작사가 조명암은 한용운의 도움으로 그의 재능이 발휘되었다.

 

 

 

 

 

 

 

유경환(유카리나) 여사님 촬영사진 홍성 만해생가와 사당 

 

 

유경환 여사님이 2012년 가울 
홍성 만해 생가에 가셨다가 촬영산 사진을

찾아 보내주셨습니다.  고맙습니다. 왼편 위에 사진은

만해 사당 앞에서 찍은 유경환 여사님의 남편 송방송 선생님과

섬시인 이생진  선생님입니다. 이생진 선생님은 8순을 훌쩍 넘으신 연세

에도 정정하신 모습입니다. 유경환 여사님 남편 송방송 박사님은 1960년대

 70년대 미국, 케나다 에서 공부하고 교수로 재직하시다가 1970년대 30대 중반,

대한민국 국립국악원 원장을 지내시고, 영남대학교 음악대학장을 지내시면서

개인이 하기 힘든 '한국음악통사'와 '한겨래 음악사전" 등 50여권의 저서를

 출판했고 200여편의 연구논문을 내셨습니다. KBS국악대상을 수상

하기도 하셨습니다. 국립국악원에서 출판한 구술총서 7집은

 송방송선생님에 관한 얘기로 엮어졌습니다.

 

 

유경환여사님의 댓글 한편 옯깁니다.

 

도봉산에 있는 도봉사를 지나다가

담벼락에 그려져있는 제게는 생소한 그림을

보게 되는데 그림이 심우도인듯 합니다. 그리고

님의 침묵을 가사로하여 작곡한(변규백 곡) 곡이

있는데 시가 기니까 곡도 자연히 긴곡이고,

음률이 마치 불교의 염불과 흡사한

곡이지요.어느 스님이 노래로

 부르기도 했구요.

 

 

 

 

방우회 이사 이장춘 춘하추동방송

 

 

 

 

한용운 님의 침묵 김둘.wma

 

  

한용운 님의 침묵 김둘.w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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